〈 865화 〉 865. 신의 아틀란티스
십년제.
이름만 들으면 어딘가 욕같은 이 축제는 유스티아 제국 수도에서 10년마다 열리는 대축제다. 지난 10년에 감사하고, 앞으로 보낼 10년의 평화를 기원하는 축제다.
공식적인 십년제는 제국 수도에서만 열리지만, 그 여파는 수도 하나에만 끝나지 않는다. 제국의 다른 도시나 마을도 십년제를 따라 축제를 여는 곳이 많다. 여러 가지 이유로 수도에 가지 못하는 백성들이 축제 분위기라도 즐기고자 하기 때문이었다.
‘들떠 있군.’
내가 속한 에이플랜 레기온이 자리 잡은 제 601 구역, 붉은 안개 성은 제국과 떨어져 있는데도 축제의 여파를 느꼈다.
제 601 구역을 지나가는 여행자나, 상인, 추방자 등등 모두 들떠 있는게 느껴졌다. 당장 여관이나 술집 등에 들어가면 십년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자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모두가 십년제를 기대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축제지.’
이곳은 신의 아틀란티스. 신의 유희를 만들어진 일종의 도박판. 다음 십년제가 오기 전에 아틀란티스가 끝날 수 있었다.
“유진.”
창문 밖을 보며 마을의 분위기를 살피고 있는데, 강명진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미안한데, 잠깐 네가 에이플랜의 마스터로서 이끌어줬으면 한다.”
“자리라도 비우게?”
강명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따로 들릴 곳이 있다. 제국 수도에선 합류할 예정이다만, 조금 늦어질지도 모른다.”
“의뢰야?”
“급하게 들어온 의뢰다.”
레기온은 여러 가지 일을 한다. 구역을 지배하면 정기적으로 AP와 페니를 벌 수 있으나, 그것만으로 레기온이 발전하긴 어렵다. 레기온은 새로운 구역을 공략하거나, 의뢰를 받아 돈과 AP를 얻는다.
“축제와 관련된 의뢰야? 내가 해도 상관없는데?”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 떠보기 위함이었다. 강명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동안 네가 레기온을 위해 애써준 걸 안다. 이 의뢰는 내가 하지. 너는 내가 없는 동안 일행을 끌어줬으면 한다.”
대충 감이 왔다.
강명진은 원작의 기연 중 하나를 가질 속셈이겠지. 안타깝게도 난 그 기연이 뭔지 모른다. 원작 소설에서는 ‘강명진은 레기온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 성실히 움직여 기연을 얻었다.’ 등으로 설명되는 것들이 제법 있었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좋은 기연은 아니라는 뜻이지.’
나는 강명진에게 씨익 웃어줬다.
“서브 마스터의 일이 레기온 마스터가 자리를 비웠을 때 레기온을 이끄는 거잖아. 걱정 말고 다녀와.”
“너라면 믿을 수 있다. 몇가지 주의해야 할 걸 가르쳐주마.”
강명진이 쫑알거리며 수도로 이동할 때의 주의점과 십년제에 관한 고급 정보를 쏟아냈다. 절반 정도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강명진은 한발 앞서 601 구역을 떠났다.
???
우리가 향할 곳은 유스티아 제국의 수도인 제 2,255구역. 유스티아 제도다.
특이한 점은 2,255 구역을 포함한 주변 구역은 공간 이동 주문서로 이동할 수 없다는 점이다. 특히 십년제 기간에는 보안을 이유로 그 반경이 더 넓어진다.
즉, 제도로 향하기 위해서는 직접 움직여 이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명진이 내게 레기온을 부탁한 것도 이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따라서 일정은 이렇다.
일단 공간 이동 주문서로 제도 근처로 이동한 뒤, 마차를 고용해 제도로 이동한다.
인원은 나를 비롯해 총 7명이었다. 이민정, 지영빈, 릴스네, 유서희, 유인하, 주서현.
레기온 내에서 행정 일을 전문으로 하는 김만기를 참가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이 북적이는 곳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거기에 만일을 대비해 구역에 남았다. 아무도 없으면 구역을 빼앗기거나, 반란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으니 필요한 일이었다.
“이런….”
나는 낭패감을 담아 중얼거렸다. 나를 지켜보는 레기온 일원들의 시선이 따갑다.
“정말 남는 마차가 단 한 대도 없습니까?”
“예…. 죄송합니다. 현재 저희 마구간은 텅텅 비어있습니다. 마차는커녕 탈 수 있는 말도 없습니다.”
마차를 빌리기 위해 마구간에 왔으나, 마차는커녕 말 한 마리도 없었다. 이미 다른 사람들이 말과 마차를 빌린 것이다.
“…다른 마구간의 상황은 어떤지 아십니까?”
“다른 마구간이라 해서 상황이 다르진 않습니다. 요즘은 축제 기간이라 말과 마차를 빌리는 사람이 무척 많습니다. 아마… 근처 도시의 마구간들도 다 비슷한 상황일 겁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차를 타고 편안히 제도로 향하는 건 불가능할 듯싶었다.
나와 일행들은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마구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도 봤다.
“말이랑 마차가 하나도 없다니!”
“죄송합니다, 손님. 요즘 십년제 기간인지라….”
마구간에서 비명같은 목소리가 울리고 마구간 주인은 땀을 뻘뻘 흘리며 상황을 설명했다. 우리 같은 경우가 한 둘이 아닌 거다.
“…들었지?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걸어가야겠어. 시간은 넉넉하니 걱정하지 마. 일주일이면 도착할 거야.”
“네. 괜찮아요! 걸어가는 것도 운치 있고 좋은 걸요.!”
유서희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란 걸 이해한 것이다.
“…….”
다만 주서현은 불만 어린 시선으로 날 쳐다봤다. 그 시선이 마음에 안 들어서 주머니 속의 리모컨 버튼을 눌렀다.
“흐으읍?!”
그녀가 착용한 정조대, 질내에 들어간 딜도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주서현의 허리가 살짝 꺾였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며 떨리는 다리로 애써 균형을 잡았다.
“주, 주서현 씨?! 괜찮으십니까?!”
지영빈이 호들갑을 떨고 다른 이들이 놀란 눈으로 주서현을 쳐다봤다. 오직 유서희만이 무슨 일인지 깨닫고는 알 듯 모르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주서현은 나를 찌릿 노려보며 꺾인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태연한 척 허세를 부리고 있으나, 보지 속은 딜도로 휘저어지고 있을 것이다.
나는 주서현을 보다가 이민정을 힐끗 봤다.
작년까지만 해도 고등학생이었던 그녀는 이제는 어엿한 성인이다. 그러나 성인이라 하기엔 여러 가지로 불안해 보였다.
‘원작에서는 강명진 의존증은 많이 나아지고 성격도 밝아지는데….’
원작과의 차이점을 생각해봤다. 가장 큰 차이점은 나다. 나로 인해 원작의 강명진 하렘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민정은 다른 히로인들로부터 케어 받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강명진은 이민정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어. 이민정은 해야 할 일을 잘 해내고 있으니까.’
이민정은 강명진의 사랑을 바라고 있으나, 강명진은 연애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지금 그에게 달라붙는 가까운 여자는 이민정뿐이고, 이민정은 강명진이 제어할 수 있다.
“걷게 될 텐데 괜찮겠어? 마차가 아니라 우차를 빌리는 것도 한 방법이야. 느리고 볼품없긴 해도 우차도 꽤 쓸만해.”
“…아니에요. 괜찮아요.”
이민정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이민정은 여전히 날 경계했다.
???
제도로 향하는 도중에 폭우가 내렸다.
비가 좀 온다고 해서 추방자들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그게 천둥 번개와 작은 나무가 부러질 정도로 강력한 바람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환경이 무서운 게 아니라, 환경을 이용해 날뛰는 몬스터가 무섭다. 이런 최악의 날씨에서만 나타나는 특수한 몬스터도 존재하니 함부로 움직이는 것보다 날씨가 맑아질 때를 기다리는 게 상책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비바람을 피하고자 근처에 있던 낡은 교회 건물로 향했다.
콰르릉! 쾅쾅!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일행 중 이민정만이 천둥에 놀라 몸을 덜덜 떨었다. 그런 그녀를 유서희가 옆에서 다독였다.
쿵쿵쿵!
나는 교회의 낡은 나무문을 두들겼다. 바닥에는 우리 말고도 다른 사람의 발자국이 보였기에 안에 누군가가 있다는 걸 알았다. 건물 안쪽에서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지기도 했고.
“계십니까?!”
끼이이이이익.
나무문이 열렸다. 검은색 목사 가운을 걸친 중년 남자였다. 얼굴에 주름이 자자한 그는 우리를 보며 인자하게 웃었다.
“홀딱 젖으셨군요. 비를 피하러 오셨다면 환영입니다.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실례하겠습니다. 저희도 염치가 있으니 이 교회에 헌금하겠습니다.”
“하하.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보시다시피 저희 교회는 많이 낡은 지라… 보수를 위한 돈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 교회의 관리자이자, 목사인 도메니코입니다.”
“에이플랜 레기온의 서브 마스터인 성유진입니다.”
“에이플랜 레기온…. 아아. 요즘 유명한 신생 레기온이군요.”
“저희를 아십니까?”
“교회의 위치가 위치다 보니 여행객들이 자주 머무릅니다. 그들에게 들었습니다.”
예배당에 도착했다. 넓은 곳이었다. 정면 벽에는 커다란 십자가가 걸려 있고, 구석진 곳에는 여러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모닥불을 앞에 두고 젖은 옷을 말리고 있었다.
‘우리까지 합해서 대략 30명인가. 생각보다 사람이 많군.’
그들은 경계 어린 시선으로 우리를 쳐다봤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로 그들을 경계했다.
“죄송합니다만, 이곳에 머물러 주십시오. 따로 방을 내드리고 싶습니다만…, 현재 방은 수리 중이고 멀쩡한 곳은 예배당뿐입니다.”
“아뇨. 비를 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모닥불을 피워도 됩니까?”
“괜찮습니다. 이곳이 예배당이라곤 하나, 여러분들의 건강만큼 중요하겠습니까. 다만 소란은 피우지 말아 주십시오.”
“예. 목사님.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그러면서 그에게 돈주머니를 건넸다. 그는 웃으며 헌금을 받았다. 돈이 어느 정도 들어있는지 확인도 하지 않았다.
“여러분. 제가 간단하게나마 요깃거리를 준비해오겠습니다.”
목사는 사람들에게 말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우리는 최대한 깨끗한 벽쪽에 자리 잡았다. 부서진 의자 잔해를 중앙에 모았다. 파직, 내 손에서 번쩍인 뇌전이 불꽃이 되어 모닥불을 만들었다.
우리는 젖은 겉옷을 모닥불에 말리기 시작했다.
“유진 씨.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저희를 궁금해하는 것 같은데. 잠깐 대화 좀 나누고 와도 되겠습니까?”
“네. 상관없습니다.”
지영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친화력이 좋은 그는 처음 보는 사람과 거리낌 없이 대화를 나눴다. 대부분의 사람은 지영빈을 싫어하지 않았다.
나는 유서희를 힐끔거렸다. 아까부터 유서희가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게 보였다. 이곳에 있는 다른 남자들의 시선 때문은 아니다. 서큐버스가 된 그녀는 남자의 시선을 즐길 정도로 대담해졌다.
“서희야. 왜 그래?”
내가 그녀를 불렀다. 유서희가 흠칫 놀랐다.
“그, 그게…. 이상하게 아까부터 불안해서요. 뭔가… 뭔가 이 교회는 기분 나빠요.”
“서큐버스가 교회에 와서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걸까요…?”
유서희는 긴가민가한 얼굴이었다.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아틀란티스에는 신이 존재하는 만큼 신성한 힘은 존재하니까. 악마가 교회를 꺼리는 건 당연했다. 그녀는 모닥불을 보며 마음은 안정시키려고 했다.
유인하는 두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고, 이민정은 구석에서 주위를 경계했다.
엘프인 릴스네는 모닥불을 보는 척하면서 나를 힐끗 힐끗거렸다.
주서현은 묵묵히 젖은 코트를 말리고 있다. 상의와 하의가 흠뻑 젖어서 몸에 착 달라붙었다. 커다란 유방의 굴곡진 선이 잘 보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있는데 검은 머리카락을 통해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섹시하게 보였다.
“주서현.”
“……왜?”
주서현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날 경계했다. 동료를 보는 눈이 아니다.
“둘이서 대화 좀 하자.”
“…굳이 둘이서 대화할 필요는 없을 텐데? 여기서 말해.”
“조금 민감한 대화야. 네가 좋다면 난 여기서 해도 상관없어. 네가 좋다면.”
내가 히죽 웃자 주서현의 얼굴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알았어. 둘이서 대화하자. 대체 무슨 대화를 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를 데리고 예배당 뒷문으로 나갔다. 정문으로 갔다간 다른 사람과 마주칠 가능성이 컸다.
뒷문으로 나가자 본관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창고가 보였다. 비를 맞으며 창고로 뛰어갔다. 창고는 천장에 구멍이 나 있어서 비가 창고 안으로 뚝뚝 떨어졌다.
“둘이서 할 대화라는 게 뭐야?”
주서현이 쏘아붙이듯 말한다.
“짐작하고 있잖아. 당연히 육체의 대화지.”
나는 옷을 벗어 알몸이 되었고, 주서현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