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873 - 873. 신의 아틀란티스 (653/2,000)

〈 873화 〉 873. 신의 아틀란티스

“몬스터 사냥대회 알지? 거기서 3황자를 죽이기 위한 테러가 일어날 거야.”

엘레나의 얼굴이 굳어졌다.

테러.

그 단어를 받아들이는 무게가 나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세계에서 추방되어 아틀란티스에 온 추방자다. 그러나 엘레나는 아틀란티스를 살아가는 대륙인이었고, 유스티아 제국은 그녀의 나라였다.

제국오공.

괜히 그들이 제국을 떠받치는 다섯 개의 기둥이라 부르는 게 아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제국을 위해 움직인다.

“…좀 더 자세히 말해봐라. 몬스터 사냥대회는 내가 알기로 제도 근처에서 벌어질 터. 감히 제국의 근처에서 제국의 황자를 노리는 미친놈은 누구지?”

엘레나와 달리 나는 태연했다. 이 일은 내가 개입하지 않더라도 사냥대회에 참가하는 강명진이 해결하기 때문이다. 아니, 설령 강명진이 사냥대회에 참가하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그 미친놈? 3황자.”

“뭐?”

눈살을 찌푸리던 엘레나는 곧 얼굴을 폈다. 흥분했던 그녀는 순식간에 냉정함을 되찾았다.

“……3황자의 자작극이란 뜻인가? 과연. 3황자라면 그럴만 하지.”

3황자의 목적은 십년제에서 이목을 이끄는 것이다. 그리고 은근슬쩍 암살의 범인을 황태자로 끌고 간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황태자가 현 상황에서 가장 황제로 유력하기 때문이다. 이미 태자의 지위를 얻었으니 아무일 없이 시간만 흐른다면, 황제의 자리는 황태자의 것이 되겠지.

“후우.”

엘레나는 등받이에 몸을 묻으며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그녀의 입장에서 3황자의 돌발행동은 그리 달갑지 않을 것이다. 변수가 되기에 충분하니까.

“그런 중요한 일은 웬만하면 일찍 말해줄 수 없나?”

“내 미래 지식에 대해 관심 없다고 한 게 누구였더라.”

“…….”

엘레나는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처음에는 미래에 대한 정보가 필요 없다고 당당하게 말하던 그녀였지만, 나를 통해 미래 정보의 달콤함을 맛보고 때때로 미래에 대한 정보를 물어왔다. 그 경우는 매우 적긴 했지만.

‘미래 정보를 알고 있으면 작은 노력으로 편하게 이득을 취할 수 있지.’

물론 엘레나는 그 대가를 확실히 치렀다. 내가 빠르게 강해질 수 있었던 건 엘레나 덕분이기도 했다.

“3황자의 자작극이면 피해 없이 끝나겠군.”

“그래. 그러니 걱정할 필요는 없어.”

엘레나는 조용히 생각에 빠졌다. 그녀의 검지가 집무실 책상을 뚝뚝 건드린다.

“유진. 네가 알고 있는 미래가 바뀌지 않는다고 100% 확신할 수 있나?”

“웬만한 일은 바뀌지 않아. 바꿀 생각 없이 내버려두면 일어날 일은 일어나지. …100% 확신은 못 하겠지만.”

“질문을 달리하지. 네가 회귀하기 전의 미래에서 나는 지금 시점에 어떻게 행동했지?”

원작 신의 아틀란티스를 떠올렸다. 엘레나가 나오는 건 훨씬 이후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 엘레나는 지금 시점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십년제도 참가하지 않았을걸?”

“네가 알고 있는 미래와 현재는 달라졌다. 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손을 썼다. 그 여파가 원래 미래를 바꿀 가능성이 크다. 성공적으로 끝나는 3황자의 자작극에 사고가 발생해서 3황자가 정말로 죽게 된다면? …후.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군.”

황태자의 견제를 위해선 2황자와 3황자가 필요했다. 2황자 혼자서 황태자를 상대하기엔, 황태자가 너무 크다.

“손을 쓸 생각인 모양이네. 사람이라도 심어 놓게?”

“현재 일손이 없다. 무엇보다 미덥지 못한 녀석들 투성이다. 어중간한 일이라면 모를까. 이건 황자와 관련된 일이다. 유리아같은 능력 있는 녀석이 내 밑에 있다면 좋겠다만….”

“…….”

나는 말없이 어색하게 웃었다.

엘레나는 지속적으로 유리아를 언급했다. 그 뜻은 뻔했다. 유리아를 부려 먹고 싶은 것이다. 물론 나는 유리아를 그녀에게 보낼 생각도, 빌려줄 생각도 없다. 유리아를 소환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그리고 나는 엘레나가 내뱉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발데르트 공작가는 크다. 유리아만큼은 아니어도 이번 일에 적합한 인재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엘레나는 그들을 믿지 않는다. 인간 자체를 기본적으로 불신하는 그녀는 특히나 발데르트 가문의 일원을 더욱 믿지 않는다.

‘겉보기에는 나를 신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마 아니겠지.’

엘레나와 함께 일하면서 그녀의 방식을 알았다. 엘레나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시킬 때, 이중, 삼중으로 대비해둔다.

“몬스터 사냥대회는 내일부터 이틀 동안 진행되는 일정이다. 시간이 촉박하다. 적절한 녀석을 골라내 투입하기도 애매하지.”

엘레나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내일 일정이 있어.”

유서희와 함께 이민정을 케어 할 계획이었다. 이민정은 현재 유서희를 잘 따르고 있으니, 강명진이 없는 기회를 틈타 친밀감을 올릴 생각이다.

“취소해라. 어차피 여자와 관련된 일이겠지. 이 일이 더 중요하다.”

“후우. 엘레나. 이러면 곤란해. 나도 양보할 수 없는 일이란 게 있어.”

“그 해야 하는 게 저택 내의 메이드를 희롱하는 일도 포함인가? 지금 메이드들의 불만이 엄청나다. 웬 손님이 자신들을 음탕하게 쳐다본다고 말이지.”

뜨끔한 나는 바로 부정했다.

“이야기 좀 나눴을 뿐이야.”

엘레나의 메이드이기도 하니 신사적으로 대화를 나누며 꼬시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성희롱을 약간 했을 뿐이다. 강간하기에는 엘레나의 눈치가 보였고, 주서현과 릴스네, 유서희가 있는데 굳이 강간할 필요도 없었다.

“생각보다 완고하군. 너는 나와 데이트를 하고 싶어 했지. 이번에 기회를 주마. 어떻지?”

“데이트가 걸린 보상인가. 나쁘지 않은데.”

진지하게 검토했다. 우선 데이트 장소는 유스티아 제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 좋겠다. 예를 들면 조명의 도시, 에틴. 유스티아 제국의 영향력이 거의 없는 구역이며, 근대적인 배경을 가진 곳이니 일탈의 느낌이 강하게 날 것이다.

그 엘레나라도 일탈에 빠져 분위기가 풀어질 테고, 나는 그녀를 살살 꼬셔 호텔에 들어가 자빠뜨린다.

완벽하진 않지만, 만족스러운 계획이었다.

“3황자가 죽지 않게 하기만 하면 되는 거지? 데이트는 언제가 좋을까. 십년제가 끝나고 한 달 뒤?”

“뭔가 착각하고 있군. 데이트는 내일이다.”

몸이 멈칫했다.

내일은 몬스터 사냥대회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엘레나, 네가 직접 움직인다고?”

“할 일이라면 모두 끝내서 당분간은 여유롭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신경 쓰이는 게 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엘레나가 나를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란 걸 눈치챘다. 이제와서 이 점이 서운한 건 아니었다.

“네가 사냥대회에 참가하면 일이 커질 거야. 제 3황자는 그것만으로 계획을 수정할 텐데. …아. 그걸 노리는 건가.”

“3황자를 방해할 생각은 없다. 몬스터 사냥대회는 종자를 데리고 가는 게 가능하다. 나는 네 종자로서 참가할 거다.”

종자.

잡일꾼이었다. 몬스터 시체를 옮기는 등의 일을 한다. 귀족들의 경우 만일을 대비한 호위병으로 데려갔다. 다만 사냥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본래 몬스터 사냥대회는 기사들을 위한 유서깊은 전통대회였기 때문에 그렇다. 종자가 사냥을 하는 부정행위는 어떡하냐고? 시스템은 폼이 아니다. 다만 그 종자가 조언을 하는 등의 일은 막지 않는다.

“내 종자로 참가한다고? 꽤 신박한 농담이었어.”

“내 모습과 신분이 문제인가? 괜찮다. 신분은 감추고 모습은 바꾸면 그만이다. 이렇게.”

딱.

엘레나가 손가락을 튕겼다. 푸른색 나비가 팔랑거렸다가 사라졌다. 엘레나의 고유 환술인 환접술이다.

동시에 그녀의 모습이 변한다.

파란색 머리카락은 흑갈색으로 변하며 길어지고, 키가 줄어들었다. 얼굴도 변했다. 깨끗하고 조각같던 얼굴은 도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소녀처럼 수수해졌다.

나는 입을 벌리고 두 눈을 비비며 그녀의 변화를 다시 확인했다.

“어떻게 한 거야. 모습을 바꾸는 특수한 물건?”

“내게 그런 물건은 없다. 이건 환술이다.”

“환술? 환술이라면 내가 걸릴 리가….”

내게는 절대정신이 있다. 내게 환술을 비롯한 정신계열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

“환술이라 해서 정신에 영향을 끼치는 환술만 있는 게 아니다. 고등 환술의 경우 상대방의 정신을 뭉개고 뜻대로 조종하는 게 기본이긴 하다만, 이렇게 눈을 속이는 것도 가능하다. 간단히 말하자면 신기루 같은 거지.”

나는 일종의 잘 만들어진 홀로그램같은 거라고 이해했다.

“…대단하군.”

엘레나를 보며 감탄사를 흘렸다. 엘레나의 생김새는 물론이고 분위기와 기척까지 전부 변했다. 눈앞에 있는 그녀가 대놓고 환술을 쓰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그녀가 엘레나인 것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사냥 대회의 심판까지 속일 수 있겠어? 내가 알기로 사냥 대회의 심판은 보통이 아닐 텐데.”

“제국오공 수준의 강자가 아닌 이상 내 환술을 꿰뚫어 볼 리가 없다. 설령 제국오공이라 하더라도 내가 진심으로 환술을 사용한다면, 속이는 건 일도 아니지.”

“근데 딱 한 명.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어. 아니, 꿰뚫어 볼 가능성이 있지.”

“에이플랜 레기온의 마스터인 강명진 말인가. 괜찮다. 그에게는 따로 협력을 구하면 되니.”

강명진의 용안(S)이라면 엘레나의 환술을 꿰뚫어볼 가능성이 있다. 엘레나가 진심으로 사용한 환술이라면 모르겠지만.

‘랭크가 낮으니 환술을 꿰뚫어 보지 못할 수도 있겠네. 원작에서 강명진이 엘레나를 죽일 때는 용안이 EX 랭크였으니까.’

나는 자신만만한 엘레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내가 생각한 데이트가 아닌데.”

“투덜거리지 말고 나와 하는 데이트에 감사해라.”

???

제국오공 중 한 사람, 우검공(愚劍公) 노이트 아르피스의 딸인 세이라는 십년제 시작에 맞춰 제도에 있는 별장에 도착했다.

그녀는 수련광답게 제도에서도 훈련실에 틀어박혀 검만 휘둘렀다. 그러나 수련에 깊이 집중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 자꾸만 한 남자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성유진.

발데르트 가문의 기사이자, 추방자인 그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동시에 그를 떠오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몸이 달아오른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그렇게 막연히 생각했으나, 괜찮아지기는커녕 오히려 상태는 심각해지고 있었다.

물론 세이라는 이 몸의 반응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다.’

제도에 있는 발데르트 공작가의 별장에 성유진이 머물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허나 세이라는 그와 접촉하지 못했다. 그가 머무는 곳이 발데르트 공작가의 별장이란 것도 걸렸지만, 그를 만나는 것에 괜히 겁이 나고 부끄러웠다.

똑똑똑.

훈련실의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평소라면 일갈을 터트렸을 것이다. 수련을 방해받으면 짜증부터 치솟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수련에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들어와라.”

문이 열리고 다부진 체격에 여기사가 딱딱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웬만하면 수련을 방해하지 말라 했을 텐데….”

“공녀님. 유진 경에 대한 정보를 얻었습니다.”

“음. 보고하도록.”

성유진의 이름에 짜증이 담겨있던 세이라의 목소리가 변했다.

“내일 시작할 몬스터 사냥대회에 참가서를 작성했습니다.”

“…….”

세이라는 침묵했다. 그녀의 머릿속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성유진을 만나기 위해 발데르트 가문으로 찾아가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녀는 아르피스 공작가의 공녀였다. 정치적 입지를 생각하면 행보 하나, 하나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그녀는 엘레나 발데르트와 사이가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몬스터 사냥대회에 우연히 만나게 된다면? 발데르트 공작가를 신경 쓸 필요도 없어진다.

“몬스터 사냥 대회에 참가해야겠다. 사냥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가문의 명성을 드높이겠다.”

“모두가 공녀님을 우러러볼 것입니다. 사냥대회 참가서를 작성하고 오겠습니다.”

여기사가 물러났다. 여기사는 세이라의 목적이 사냥대회가 아닌 성유진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부끄러움이 많은 공녀를 위해 입을 다물었다.

세이라는 여기사가 떠나자마자 대검을 휘두르며 수련에 임했다. 아까보다 더 집중이 안 되었다.

‘내일 옷은 뭐 입고 가지? 사냥대회니 드레스는 입을 수 없고…. 남자 같은 옷은 되도록 피하는 게 좋겠지. 땀 냄새가 나면 죽고 싶어질 테니 최대한 땀을 흘리지 않도록 하고….’

사냥대회는 안중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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