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1화 〉 891. 신의 아틀란티스
“다른 누군가가 짐에게 그따위 말을 직언했다면, 당장 그 목부터 잘랐을 것이다. 허나 그대는 제국을 받치는 다섯 기둥 중 하나. 짐은 그 충심을 의심하지 않는다. 태자의 폐위를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늙은 황제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러나 이상하지 않았다. 유스티아 제국을 오랫동안 통치해온 황제다. 평범한 제국도 아니고, 온갖 초인과 괴물이 넘쳐나는 세계의 황제. 고작 이깟 일로 감정을 내비치면 도리어 이상하다.
나는 시선을 살짝 돌려 황태자를 쳐다봤다. 여유롭다. 안색 하나 바뀌지 않았다. 약간의 동요도 보이지 않는다.
‘…엘레나가 이렇게 나올 거라는 걸 미리 예측했나?’
연기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황태자가 보통이 아니란 건 분명하다.
“황태자 전하는 제국 외의 세력과 손을 잡았습니다.”
“엔젤러스 레기온 말이더냐? 그대 또한 어느 레기온을 후원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만.”
엔젤러스 레기온에 대해 까놓고 말했다. 뭐,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공식적으로 말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황태자와 엔젤러스 레기온의 관계는 모두 알고 있었으니까.
“황태자 전하와 엔젤러스 레기온의 관계는 후원 이상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문제 될 것은 없다. 태자가 동맹자를 구하는 것도 그 능력이라 인정한다. 격에 맞지 않는 동맹자라면 모를까. 엔젤러스 레기온 정도면 황실의 격도 떨어뜨리지 않는다.”
하긴 그렇다.
엔젤러스 레기온의 위상은 아틀란티스에서 손꼽히는 최고의 레기온이다. 누군가는 바클레이 레기온과 더불어 양대 산맥이라고도 한다. 엔젤러스 레기온은 봉사 및 후원과 조력 등의 이유로 바클레이 레기온과 다르게 대외적인 이미지도 좋다.
“그 말씀대로입니다, 폐하. 엔젤러스 레기온이 황실의 격에 맞다면 저도 이러한 말을 올리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대는 엔젤러스 레기온의 격이 황실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그들은 천사다. 신의 사도들이지. 짐은 그들의 고귀함과 고결함은 황실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판단하노라.”
엔젤러스 레기온의 최대 장점은 천사라는 이미지다.
성경속에서나 나오는 실제 천사들이 운영하는 레기온. 천사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사람들의 호감을 사기엔 충분했다.
“위대하신 황제 폐하. 저는 그들의 민낯을 파헤치고, 추악한 진실을 찾아냈습니다.”
“추악한 진실? …흥미롭구나. 허나 증거가 없는 말은 그저 모함에 지나지 않는다.”
엘레나는 움츠러들지 않았다.
“물론입니다, 폐하. 증거도 전부 확보했고, 가지고 있습니다. 공개하기에 앞서, 폐하의 앞에서 마법을 사용해도 괜찮겠습니까?”
황제의 눈동자가 잠시 뒤쪽으로 움직였다가 돌아왔다. 황제의 뒤에 있는 건 천년공이다. 천년공의 눈치를 살폈다기보다는 천년공이 제자리에 있는지 확인했다는 느낌이 강하다.
“윤허하지.”
직후, 엘레나가 마법을 사용했다. 그녀의 우아한 손짓에 따라 허공에 마법진이 나타났다. 마법진에서 서류를 비롯한 도구들이 바닥에 천천히 떨어졌다. 눈처럼 쌓이고 쌓인 증거품은 어느새 엘레나의 키와 비슷할 정도로 쌓였다.
“…발데르트 공작. 그것들 전부가 증거인가? 지나치게 많은 것 같다만….”
“황실과 제국의 미래가 걸린 일이라 생각하여 사소한 것들 하나까지 전부 조사하여 가져왔습니다.”
“……증거가 너무 많다. 대표적인 몇 개만 설명하도록. 검증은 따로 사람을 시켜 확인하겠다.”
“예. 폐하.”
딱.
엘레나가 손가락 튕겼다. 파란색 나비가 그녀의 주위를 팔랑팔랑 날았다.
엘레나의 앞에 화면이 나타났다. 충격적인 영상이었다. 날개 달린 천사가 인간을 학살하고 있다. 이건 나도 처음 보는 영상이었다. 역시 그녀는 나 모르게 활동하고 있었다.
귀족들이 숨을 한껏 삼키며 술렁거렸다. 더 소란스러워지기 전에 황제가 손을 들었다.
“조용.”
일순간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발데르트 공작, 설명하라.”
“약 3개월 전, 제 901 구역인 회오리 마을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엔젤러스 레기온의 천사들이 마을 사람을 학살했습니다.”
제 901 구역. 유스티아 제국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산골 구역이다.
“이 영상은 어떻게 찍었지?”
“제 마법으로 생존자의 기억을 환술로 재현하여 기록했습니다. 생존자는 본가에서 보호하고 있습니다.”
“……생존자와 저 영상의 검증은 둘째치고. 엔젤러스 레기온이 저 작은 마을은 습격한 이유는 뭐지?”
“마을 아래에 금광이 있었습니다.”
“과연. 허나 의문은 여전하다. 엔젤러스 레기온은 마을 주민들과 타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구태여 학살을 실행했다고 보는가?”
“폐하. 타협의 이유가 없습니다. 첫째로, 이 구역은 제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제국과 교류하지도 않는 곳입니다. 그들을 지켜주는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둘째로, 독식해야 가장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엔젤러스 레기온이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학살을 실행했다는 건가…. 짐은 공작의 말에만 귀를 기울여 판단을 내리지 않겠다. 마침, 이곳에 엔젤러스 레기온의 대표가 있으니, 그녀에게 묻도록 하지. 가브리엘이시여, 환상공의 주장을 어떻게 보시오?”
황제는 가브리엘에게 하대하지 못했다. 가브리엘의 육체는 위신이나, 그 정신은 본신의 것이다. 간단히 말해 가브리엘은 신이었다.
가브리엘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들은 사교도였습니다. 그들의 사상과 정신은 사교의 교리로 오염되어 있었으므로 정화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다. 주위에 있던 귀족들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수한 능력이나 스킬같은 건 아니고 선천적인 신성함이다.
엘레나는 어이없는 숨을 토했다.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901 구역 주위에 있는 마을로부터 증언을 입수했습니다. 그들은 사교도도, 도적집단도 아닌 평범한 마을 주민들이었습니다. 엔젤러스 레기온은 오직 이익만을 위해 한 마을을 학살했습니다.”
“평범한 사람은 상대가 사교도인지 구분하지 못합니다. 저희는 천사. 수천 년, 수만 년 동안 사교도와 싸워왔습니다. 저희만이 사교도를 완벽히 구분 가능합니다.”
가브리엘이 말했다. 억지 같은 말이었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절반 이상의 사람들은 그녀의 말에 긍정했다. 그들이 멍청해서? 아니다. 저 말을 내뱉은 자가 천사이기 때문이다. 천사이기 때문에 신뢰성이 있다.
“그렇다고 하는군.”
황제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나는 이 시점에서 깨달았다. 황제는 공정하지 않다. 엘레나의 편이 아니다.
이건 좀 이해하기 힘들었다. 오랫동안 유스티아 제국을 통치해온 황제라면, 황태자에게 접촉한 외부 세력인 엔젤러스 레기온을 누구보다 경계해야 하지 않나.
“…엔젤러스 레기온이 저지른 일들은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어린아리를 세뇌하고, 노예로 부리며, 인신매매로 자금을 벌어들이고 있었습니다. 그 증거를 공개합니다.”
이건 나도 안다. 모를 수가 없다. 내가 엘레나의 부탁을 받고 일을 처리했으니까.
제 1,220 구역, 백색의 땅. 엔젤러스 레기온이 지배하는 구역. 나는 이 구역의 지배자이자, 위선자인 주교 헤르포를 잡아 엘레나에게 넘겼다. 천사인 아리엘을 생포했다. 그리고 아리엘은 현재 스스로를 봉인했다. 언제 깨어날지는 모른다.
엘레나는 아리엘에 대한 것을 모두 제외하고 1,220 구역에서 벌어진 일을 설명했다. 이곳에서 자라 팔려나간 아이가 어떻게 되었는지까지 영상으로 보여주었다. 몇몇은 구역질이 났는지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가브리엘이시여. 이에 대해 설명해주실 수 있소?”
“물론입니다, 황제여. 이 일은 타락한 인간이 벌였습니다. 저희는 타락한 인간을 심판하며 추후에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하겠습니다.”
꼬리 자르기였다.
“…타락한 인간? 제가 알기로 그 인간에게 명령을 내린 건 천사입니다.”
“그 천사 또한 타락한 모양이군요. 아쉽게도, 저희 천사는 완전무결한 존재가 아닙니다. 타락한 인간과 함께 그 천사 또한 벌하겠습니다.”
그 단호한 결정에 여기저기 감탄사가 튀어나온다.
그러나 일부 귀족들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인간과 천사의 차이.
인간은 죽으면 끝이다. 허나 천사는 위신, 죽더라도 분신이 죽을 뿐이다. 진정한 의미의 숙청은 아니다.
“폐하. 엔젤러스 레기온이 저지른 것들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엘레나는 그동안 모은 증거를 내밀며 엔젤러스의 비리와 만행을 고했다. 그것도 무려 1시간이 넘도록. 가브리엘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죽인 인간을 사교도로 몰아가거나, 타락한 천사를 처벌하겠다는 말을 되풀이한다.
여기까지 오니 주변의 분위기도 바뀌었다. 엔젤러스 레기온을 옹호하던 분위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이렇게 되면 황제도 그 책임을 황태자와 엔젤러스 레기온에 물을 수밖에 없다. 엔젤러스 레기온이 저지른 비리 중에는 제국과 관련된 것들도 있으니까.
“그만.”
황제가 엘레나의 입을 멈추도록 했다.
“그만하면 됐다. 그대가 말하는 바를 알아들었다.”
“…그러하다면 폐하.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엔젤러스 레기온의 오욕이 황실을 더럽히기 전에 연결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미래를 헤아리시고, 황태자 전하를 벌하시어 황실의 위엄을 바로 세우소서.”
엘레나의 목적은 엔젤러스 레기온이 아니라 황태자의 폐위다. 엔젤러스 레기온을 처리할 땐 처리하더라도 황태자는 반드시 폐위되어야 한다.
“발데트르 공작이여. 그대의 충심은 잘 알았다. 그러나 태자의 지위는 견고할 것이다. 짐의 뒤를 이을 자는 오직 태자밖에 없다.”
엘레나가 당황했다. 아니, 그녀뿐만이 아니다. 주위의 귀족들이 웅성거린다. 황제는 지금 황태자를 차기 황제로 인정했다. 2황자와 3황자를 지지하던 귀족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지는 일이었다.
“…제가 미흡하여 폐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겠습니다.”
“그대는 황실과 제국을 위해 엔젤러스 레기온을 추방과 태자의 폐위를 주장했지.”
“예. 폐하. 그러합니다.”
“그러나 제국을 위해 엔젤러스 레기온의 힘이 필요하다. 아니, 제국뿐만이 아니지. 이 세계의 모든 이들을 위해 필요하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대뿐만이 아니라 다른 자들 또한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군. 태자여, 직접 설명하거라.”
“예. 폐하.”
황제의 명을 받은 황태자가 앞으로 나왔다. 그는 엘레나를 보며 히죽 웃었다. 엘레나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제국의 귀족들이여, 제국의 미래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
귀족들은 입을 다물었다. 제국오공 중 한 명인 엘레나와 황태자의 이야기다. 평범한 귀족이 함부로 나설 자리가 아니다.
“백 년이 지나고, 천 년이 지나도 평안하리라 예상하시오? 제국의 역사가 영원하리라 믿으시오? 황태자로서 말하지. 그딴 믿음은 갖다 버리시오.”
“…황태자 전하. 지금 제국을… 무시하시는 겁니까?”
“환상공이여, 그대도 알고 있지 않소. 우리의 세계는 이미 한 차례 멸망했고, 아틀란티스에도 끝은 있소. 어쩌면 다음 십년제가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소. 당장 3년 뒤에 아틀란티스가 끝날지도 모르오. 우리는 이미 끝을 경험했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황태자 전하. 엔젤러스 레기온과 어떤 계약을 했습니까?”
“엔젤러스 레기온은 아틀란티스의 존속과 제국의 번영을 약속했소. 아틀란티스가 끝나더라도 우리는 생존할 것이오. 여러분. 멀리 보시오. 우리는 멀리 봐야 하오. 엔젤러스 레기온은, 천사들은 우리를 구원할 것이오.”
귀족들의 분위기가 황태자에게 기울었다. 엘레나의 뺨을 타고 식은땀 한 방울이 흐른다.
“폐하. 엔젤러스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의 구원이 아니라 사육입니다. 제국 신민들을 가축으로 만들 생각이십니까?”
“그건 너무 과장된 생각이오. 천사들이 바라는 건 우리들의 신앙이오. 즉, 신앙을 바치는 것으로 우리는 천사의 비호를 받을 수 있소. 환상공. 이번 아틀란티스가 8회째라는 것을 알고 있소?”
“…예.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난 일곱 개의 아틀란티스의 끝을 알고 있소?”
“…….”
“멸망했소. 물론 본래의 세계로 돌아간 추방자들은 존재하오. 그러나 우리는 추방자가 아니오. 우리는 대륙인이오. 이 세계가 우리의 고향이고, 우리의 세계요. 그리고 이 세계의 멸망은 정해져 있소. 우리가 멸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천사의 도움을 받는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