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2화 〉 892. 신의 아틀란티스
“멸망했소. 물론 본래의 세계로 돌아간 추방자들은 존재하오. 그러나 우리는 추방자가 아니오. 우리는 대륙인이오. 이 세계가 우리의 고향이고, 우리의 세계요. 그리고 이 세계의 멸망은 정해져 있소. 우리가 멸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천사의 도움을 받는 것이오.”
끝났다.
상대의 명분은 세계. 엘레나는 뒤덮을 수 없다.
이건 엘레나의 패배다. 엘레나의 계획은 끝났다. 오히려 황태자에게 확고한 명분만 주고 말았다. 이제 황태자가 황제가 되는 건 누구도 못 막겠지.
“…황태자 전하의 말이 옳습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던 것 같습니다.”
엘레나는 물러나려고 했다.
아틀란티스의 모든 구역을 공략하고, 그 대가로 신좌들과 거래하여 제국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등의 말은 하지 않았다. 해봤자 천사의 구원에 비하면 구체적이지도 않은 희망적인 계획에 불과했다.
나는 엘레나가 실패한 원인을 생각했다.
황제는 처음부터 황태자의 편이었다는 것,
제국오공은 이 일에 흥미 없다는 것. 우검공(愚劍公), 노이트 아르피스는 엘레나가 포섭했지만, 그가 나설 기회가 없었다. 엘레나가 상정한 노이트의 역할은 확실한 쐐기다.
황태자와 엔젤러스 레기온은 엘레나의 행동을 이미 예상하고 대비하고 있었다는 것.
마지막으로 2황자와 3황자가 침묵했다는 것. 엘레나를 도와 정적인 황태자를 전혀 공격하지 않았다.
‘…2황자와 3황자가 배신했다.’
2황자와 3황자와 거래를 했을 것이다. 엘레나는 그들이 황제 자리를 노린다고 확신하며 움직였다. 3황자인 기딘은 자작극을 벌일 정도이니까.
‘원작과 달라졌어. 2황자와 3황자는 대체 왜 황제 자리를 포기한 거지?’
어쨌든 엘레나는 실패했고, 이것으로 그녀는 한동안 조용히 지내야 할 것이다.
“즐거운 십년제에 제가 초를 친 것 같군요. 저는 이대로 본가로 돌아가 자숙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환상공.”
황태자가 엘레나를 불러세웠다. 그의 입가에 일그러진 미소가 그려진다.
“환상공. 나는 얼마 전에 그대와 관련된 놀라운 정보를 접했소.”
“…어떤 정보입니까?”
“그대의 어미와 관련된 정보였지.”
엘레나의 얼굴이 단숨에 일그러졌다. 표정 관리도 하지 못할 정도로 그녀가 흔들리고 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황태자가 엘레나의 역린을 건드린게 컸다.
“듣자 하니 그대는 그대의 어미를 죽이는 패륜을 저질렀다지?”
“그건….”
“아, 변명은 됐소. 사실인지 아닌지만 말하시오. 구차하게 변명을 하겠다면 상관없소만.”
“……예. 맞습니다. 제가 죽였습니다.”
엘레나가 말했다. 오랫동안 말을 해서인지, 황태자의 공격에 당황해서인지 그녀의 목소리는 거칠었다.
주위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이로 인해 발데르트 가문의 명예는 땅에 처박힐 것이다.
“그대는 내가 어떻게 이 정보를 접했는지 궁금할 것이오. 앞으로 나오시오.”
귀족들 속에서 한 사람이 나왔다.
늙은 귀족이었다. 머리카락과 수염은 하얗고 주름은 자글자글했다. 단단한 눈매와 각진 입매를 보면 그가 꼰대 중의 꼰대임을 짐작하게 한다.
‘저 늙은이는….’
기억에 있는 늙은이였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린 결과 발데르트 가문의 가신임을 알았다. 오다가다 몇 번 마주친적은 있으나, 대화를 나눠본 기억은 없다.
“…골드렉스 자작. 그대도 무도회에 참가했었나.”
“뒤늦게 황태자 전하의 초대를 받아 무도회에 참가했습니다. 춤을 즐기기에는 늙었던지라 구석에서 조용히 상황만 보고 있었습니다.”
“……황태자 전하와 대체 뭘 한 거지?”
“있었던 일을, 알려야 할 일을, 사라져선 안 되는 진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대는 발데르트의 가신이 아니었나.”
“제가 역으로 묻고 싶군요. 가주님. 저는 발데르트의 가신입니까?”
“…….”
엘레나가 뒷걸음질 쳤다. 아까까지만 해도 당당했던 그녀라고 볼 수 없는 태도였다. 엘레나는 식은땀을 잔뜩 흘렸다. 반대로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다. 지금 그녀는 궁지에 몰린 인간처럼 보였다.
“골드렉스 자작. 자네를 모르는 자들도 있을 테니 자기소개부터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황태자가 웃으며 말했다. 즐거운 연극을 보는 것처럼 두 눈을 반짝인다.
“저는 발데르트 공작가를 70년 동안 섬겨온 하이먼 골드렉스 자작입니다. 가주께서 태어나기 이전부터 발데르트 공작가의 역사를 지켜봐 왔습니다.”
“자네는 발데르트 공작가에서 무슨 일을 담당했나?”
“더러운 일을 담당했습니다.”
“더러운 일이라? 구체적으로는 어떤 일인가?”
“가문에 반하는 자들을 처리하고, 상단의 약점을 잡아 이득을 취하는 등의 일입니다. 발데르트의 적이 된 자를 처리하기도 했지요. 예. 대충 100명 정도가 제 손에 명을 달리했습니다.”
“말 그대로 더러운 일이군. 다만, 지금 그건 나중에 따지기로 하고…. 환상공이 제 어미를 죽인 것에 대해 말해 보지.”
“가주님께서 발데르트 공작 부인을 살해하셨습니다. 청명한 하늘에, 매미 소리가 지겹도록 들리던 날이었습니다. 그 날, 정원에선 두 개의 언성이 저택 내에 쩌렁쩌렁 울렸습니다. 가주님과 공작 부인께서 싸우시던 날이었습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저택 내의 다른 이들도 모두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환상공은 공작 부인을 어떻게 죽였나?”
“검이었습니다. 피가 정원에 흩뿌려지고, 공작 부인의 비명이 매미 소리를 덮었습니다.”
“왜? 왜 환상공은 공작 부인을 죽였나?”
골드렉스는 잠시 엘레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말할 수 없습니다.”
“…허. 이제 와서 그러는 건가. 조금 맥이 빠지는군. 다른 건 묻지. 발데르트 공작 부인이 죽은 건 언제인가?”
“그때가 막 가주님이 가문의 주인이 되었을 때이니… 12년 전이군요.”
“12년 전. 나는 그때 공작 부인이 사고로 죽었다는 말을 들었네. 헌데 왜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가? 입을 단속하더라도 목격자가 많다면 약간의 소문이 나야 정상이 아닌가?”
“저는 3주 전까지 그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호오. 왜 그러지?”
“가주님의 환술에 걸려 있었습니다. 기억이 조작당했습니다. 가브리엘 님의 세례가 아니었다면, 영원히 기억을 조작당한 채 살았을 것입니다.”
귀족들이 웅성거리며 두려움이 담긴 눈으로 엘레나를 쳐다봤다. 엘레나는 반론도 하지 못한 채 굳어 있었다.
“제 가신에게 환술을 걸어 입단속을 시켰는가…. 무섭구나, 무서워. 그대는 언제부터 괴물이 되었는가.”
황제가 탄식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폐하.”
황태자의 수는 끝나지 않았다. 그는 기세를 타고 엘레나의 비리를 까발렸다. 발데르트의 다른 가신들을 불렀다. 그들은 엘레나가 저지른 범죄를 실토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엘레나가 범죄조직인 헬텐의 간부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엘레나의 사주로 죽은 귀족과 그로 인하여 얻게 된 발데르트 가문의 이득. 황태자는 폭로를 멈추지 않는다.
“폐하.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환상공은 사람을 고용해 3황자, 제 동생인 기딘을 죽이려 했습니다.”
“…쉽게 흘러 들을 수 없는 말이군.”
“황제 폐하! 아닙니다! 다른 건 모두 인정하겠으나, 3황자의 암살과는 무관합니다!”
엘레나가 다급히 나섰다. 다른 건 그러려니 넘어갈 수 있다. 살아있는 자에게 보상하거나, 후에 권력을 이용해 덮으면 된다. 하지만 황족과 관련된 일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조용히 있던 3황자가 앞으로 나섰다.
“황태자 전하의 말이 옳습니다. 저는 사냥 대회에서 습격당했습니다. 습격자를 잡아 심문한 결과, 그 배후에 환상공이 있음을 알아냈습니다. 사냥 대회에는 환상공의 기사, 저자 또한 참가한 상태였습니다.”
그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했다. 설마 나까지 한 번에 묶어 버릴 줄이야. 아주 작정을 한 모양이다.
“어처구니없는… 모함입니다, 폐하! 습격 당한 황자를 구한 것은 제가 후원하는 에이플랜 레기온의 마스터였습니다!”
“기딘. 사실이느냐?”
“네. 폐하. 저 말은 사실입니다만, 저는 그 이후에도 습격을 받았습니다. 에이플랜 레기온이 저를 도운 것은 기만을 위한 것이었겠지요. 폐하. 습격자는 이미 범인을 실토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폐하! 모함입니다!”
엘레나가 소리쳤다. 그녀가 옥좌를 향해 앞으로 다가가려고 했으나, 황제가 손을 들어 그녀를 막았다.
“좀 더 자세히 검증할 필요가 있어 보이는군. 발데르트 공작은… 결과가 나올 때까지 지하 감옥에서 근신하라.”
“폐하.”
2M가 넘는 큰 키에 다부진 체격의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우검공, 노이트 아르피스다.
“아무리 그러해도 환상공은 제국오공입니다. 지하 감옥에 가두는 건 그 처사가 너무합니다. 아직 확신한 결과가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그녀를 감시할 테니 최소한의 자유는 보장해주십시오.”
“……우검공. 이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다. 황족이 습격당한 사건이다.”
황제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모두의 시선이 우검공과 황제에게 쏠려 있는 걸 본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천년공과 가브리엘이 날 주시했으나, 무시하고 철한공 홀라인드 론마시드에게 전음을 보냈다.
-카리세 델 펠스먼. 잠든 공주는 발데르트 공작가에 있습니다.
홀라인드가 두 눈을 치떴다. 그는 이내 입술을 꾹 깨물고는 황제에게 직언했다.
“황제 폐하. 환상공이 황실에 바친 충성을 무시해선 안 되옵니다. 최소한의 자유를 보장해주시옵소서.”
“철한공. 그대까지 그리 말하는 건가….”
황제의 말이 깊어졌다. 제국오공 중 2명이 나섰으니 엘레나가 지하 감옥에 갇힐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가브리엘에게 전음을 보냈다.
-아리엘.
딱 한 마디.
가브리엘을 움직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황제 폐하. 섣부른 판단은 좋지 않습니다.”
“…가브리엘. 알겠소. 다시 돌이켜보니 내가 너무했던 것 같소. 허나, 발데르트 공작에 관한 조사는 멈추지 않을 것이오.”
“보고 있자니 가관이로군.”
위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3층에서 한 남자가 뛰어 1층 바닥에 착지했다. 감색 코트를 입은 남자였다. 그의 손에는 검 한 자루가 손에 들려 있었다. 반삭한 머리에 인상이 더러운 남자였다.
“…반레이로군.”
황제가 남자의 이름을 말했다.
반레이.
바클레이 레기온 연합의 마스터다.
“황제. 내가 분명 경고했을 텐데. 엔젤러스 레기온과 손잡을 생각은 말라고. 저 여자의 말대로, 엔젤러스 레기온의 목적은 인간의 구원이 아니라, 인간의 관리에 있다.”
“…반레이. 그대와 우리의 입장은 다르다. 그대는 추방자이고, 우리는 대륙인이니. 다를 수밖에 없노라. 짐은 제국의 미래를 얻기 위해 엔젤러스 레기온과 손을 잡았다. 그대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그러셔? 그런데 어쩌나. 나는 내가 한번 내뱉은 말은 지키는 주의라서.”
검을 든 반레이가 황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우검공이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움직여 황제의 앞을 막아섰다. 반레이의 검과 우검공의 검이 부딪히며 강력한 충격파가 발생한다. 힘이 없는 일반인들은 그 충격파를 이기지 못해 뒤로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엘레나!”
엘레나의 몸도 뒤로 날아간다. 나는 기겁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엘레나는 안색이 무척 좋지 않았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안색은 새파랗다. 시체라 해도 믿을 안색이다.
쾅! 콰콰쾅! 쾅!
무도회 여기저기서 폭발음이 열렸다. 무기를 든 자 수 십 명이 나타나 황족과 귀족들을 노렸다. 가만히 보고 있던 철한공, 수의공이 움직여 습격자들을 상대했다. 바깥에서 폭음이 들려온다. 제도가 습격받고 있었다. 그 범인은 아마도 바클레이 레기온 일 것이다.
‘엔젤러스 레기온과 바클레이 레기온이 원수 사이인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바클레이 레기온이 이따위로 움직일 줄이야. 황제의 반응도 그렇고… 원작과는 이미 틀어질 대로 틀어졌군.’
우선은 여기서 벗어나는 게 급선무다.
다행히도 바클레이 레기온 인원은 나와 엘레나를 노리지 않았다. 그들의 움직임을 보니 따로 타겟이 정해져 있는 모양이다.
“너는….”
엘레나가 입을 뗐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너는 왜 배신하지 않았지? 지금이 적기가 아니었나?”
2황자와 3황자의 배신과 가신들의 배신이 연달아 터지면서 멘탈이 나간 모양이다.
“정신 차려. 난 배신 안 해.”
“하…. 차라리 지금 배신해라. 너는 제법 중요한 걸 알고 있으니, 지금 배신하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 거다.”
……그럴까?
진지하게 배신각을 세우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땐 어떻게 하더라. 잠시 머리를 굴리던 나는 손바닥으로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짜악!
“헛소리하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려, 엘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