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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95 - 895. 신의 아틀란티스 (675/2,000)

〈 895화 〉 895. 신의 아틀란티스

바닥으로 끊임없이 추락하는 엘레나는 멍하니 허공을 쳐다봤다.

「제 9,371 구역, 가뭄 지옥에 입장합니다.」

제 9,371 구역. 가뭄 지옥.

처음 들어보는 구역이었다. 허나 지옥 구역에 대한 정보는 조금이나마 알고 있다.

미공략 구역 지대. 그중에서도 최후방부에 위치한다는 지옥계열 구역. 공략 난이도가 이름 그대로 지옥에 가까울 정도라고 알려진 곳이다.

‘…살아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겠군.’

엘레나는 추락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늘은 우중충하고 지상은 붉은 사막이었다. 피를 머금은 듯한 모래를 보는 것만으로도 오싹했다.

‘괴물들이 모여들고 있군.’

처음 보는 생김새의 몬스터들이었다. 하나같이 흉악하게 생겼는데 유독 뿔이 달린 놈들이 많았다.

‘마수의 특징이지.’

마수.

마의 힘을 가진 몬스터.

몬스터 보다 더 흉포하고 강한 놈들이었다.

‘대충 봐도 200마리가 넘는군.’

죄다 고개를 위로 들어 올리며 엘레나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마수들에겐 하늘에서 먹이가 떨어지는 꼴이니 무척 반가울 것이다.

‘내게 남은 수명은 1년… 아니지. 이제 반년도 남지 않았군.’

성유진을 구하고 대신 떨어질 때 환술을 사용했다. 월드 리프인가, 뭔가 하는 검은 말의 권능이 보통이 아니었던지라 멀리서 성유진을 구하는 게 불가능했다.

‘잘된 일이다. 지치기도 했고… 발데르트 가문의 명예도 지켰다. 내가 세운 공적을 시민들이 두 눈으로 확인했으니, 황제는 발데르트 가문을 건들지 못하겠지.’

엘레나는 제국의 영웅이 되었다. 그녀의 업적은 전설이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다. 평판을 신경 쓰는 황제는 발데르트 가문을 건들지 못하리라.

‘발데르트 가문은 쇠락하겠지.’

방계가 가주직을 이어가겠으나, 그 한계는 명확하다. 방계에는 제국오공급의 인재가 없다. 10년 내로 후작위로 강등되지 않으면 다행이다.

‘…됐다. 난 할 만큼 했다. 실패했으니 죽어야지. 발데르트 가문을 위해 살아온 삶이었고, 발데르트 가문을 위해 죽는 삶이었다. 후회는 없다.’

엘레나는 눈을 감았다. 갑자기 성유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끔 한 대 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답답하거나, 어처구니없을 때가 있긴 했으나 나름대로 유능한 놈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배신하지 않았다.

배신할 기회는 많았다.

그는 모르겠지만, 일부러 배신의 기회를 만들어 그를 시험했던 적이 30번이 넘었다. 돈을 걸거나, 미녀를 시켜 배신을 부추기기도 했다. 그러나 성유진은 끝까지 배신하지 않았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났다면, 내가 그를 믿게 되었을지도 모르겠군. …아니지. 이미 절반 이상은 믿고 있었나?’

어찌 됐든 지금 와선 모두 의미 없다. 엘레나는 머릿속에서 성유진을 지웠다.

‘지옥에 떨어져 죽는 건가. 평소에 나는 지옥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만, 설마 정말로 지옥에 떨어지게 될 줄이야. …음. 나쁘지 않군.’

자신은 이대로 떨어져 죽을 것이다. 머리가 터져 즉사하겠지. 마수에게 산채로 뜯어 먹힐 일은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죽음을 받아들이자 온몸의 고통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나, 그녀의 내부는 엉망진창이었다. 몸을 구성하는 세포 하나, 하나가 죽음을 앞두고 비명을 지리는 것 같았다.

‘…….’

감은 눈꺼풀 너머로 빛이 번쩍였다. 처음에는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태양 빛이 얼굴을 훑고 지나가는 건 흔하니까.

콰앙!

굉음이 울렸다. 마치 천둥 같은 소리다.

‘…천둥?’

엘레나는 저도 모르게 눈을 떴다.

그녀의 주위로 수많은 푸른 번개가 지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세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마치 번개처럼 떨어져 사막 위에 모인 마수들을 학살했다.

약간 늦게. 고막이 터질 정도로 시끄러운 뇌성이 울렸다.

그리고 저 하늘 위.

한 명의 남자가 번개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그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엘레나는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왜 네가 여기에 있는 거냐, 유진!”

“왜긴 왜야. 널 구하러 뛰어들었지.”

“미친놈! 여기가 어딘지 알고?!”

“지옥이지.”

성유진이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마치 공주님을 안듯이 그녀의 몸을 조심스럽게 안았다. 엘레나는 성유진의 마나가 주위 공간을 감싸는 걸 느꼈다. 지상으로 추락하는 속도가 점점 느려진다. 뛰어난 마나 제어 능력이다. 「달의 축복」의 받은 성유진은 엘레나가 놀랄 정도로 강했다.

“…잘도 내 희생을 헛되게 만들었군.”

“희생? 누가 그러래?”

“한 대 때려도 되나?”

“난 잘못한 거 없어. 네가 멋대로 날 구했듯이, 나도 널 멋대로 구하는 거니까.”

“골 때리는군. 나랑 함께 죽을 생각이냐?”

“너랑 함께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너랑 함께 살아가는 쪽이 더 나은 것 같다.”

“…….”

평소였다면 아무렇지 않게 웃어넘겼을 것이다. 눈앞의 남자가 그 말 그대로 자신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하아.”

한숨을 내쉰 엘레나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이 손을 얼굴 위로 올렸다. 실상은 열기가 오른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였다.

“대체 어쩌려는 거냐….”

무심코 내뱉은 말은 성유진에게 한 말일까. 아니면 스스로에게 한 말일까. 엘레나는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

툭.

엘레나를 안고 지상으로 내려선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붉은 모래 위에는 마수들의 시체로 가득했다. 기운을 한 번 퍼뜨려봤다. 살아 있는 마수는 없다.

‘돌겠네.’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상황은 최악이었다.

지금 내가 마수들을 학살할 수 있는 건 「달의 축복」 덕분이다. 달의 축복의 버프 효과가 끝나면, 나는 지옥 구역에서 피식자가 될 것이다. 마수 한 마리를 상대하려면 전력을 다해야 하겠지.

‘9,000 번대 지옥 구역에는 공간 이동 주문서가 통하지 않아.’

그리고 9,000번대 지옥 구역에는 지랄 맞은 특징이 있다. 구역에 입장한 자에게 디버프를 거는 것이다.

「수분이 마릅니다. 탈수화가 진행됩니다.」

「한 시간에 100ml의 물만 섭취할 수 있습니다.」

「24시간마다 무작위로 능력치 하락 상태가 됩니다. 현재 하락한 능력치 행운 11」

‘시작됐군.’

알림창을 읽은 나는 불만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엘레나에게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이건 기회다. 폼을 잡았으면 끝까지 폼을 잡아야지.

내 품에 안긴 엘레나를 쳐다봤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살짝 붉어진 얼굴이 보였다. 그녀의 현재 상태를 떠올린 나는 망토를 벗어 그녀의 몸을 감쌌다.

“갑자기 뭐냐…. 포대기처럼 내 몸을 감싸서 갓난아기 취급할 생각이냐?”

엘레나가 날 노려보며 투덜거렸다. 그게 아님을 그녀 본인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니 멋쩍어서 하는 말에 불과했다. 그녀는 내 품에서 내려 사막에 섰다.

“헤카테 케이프야. 네게 도움이 될 거야.”

「헤카테 케이프

모든 능력치 1 상승.

A랭크 이하의 마법 저항력 획득.

극지 환경에 적응한다.

B랭크 자연 치료 효과.

S랭크 은신 사용 가능.

랭크: SS」

극지 환경 적응, 자연 치료(B), 은신(S)이 붙어 있는 망토다. 약해진 상태인 엘레나에겐 필수인 물건이다.

붉은 망토를 쓴 그녀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날 구하기 위해 지옥에 떨어진 네게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나는 곧 죽는다. 힘을 너무 많이 썼다. 지금 내 몸 상태는 일반인 이하다. 좀 더 직관적으로 말해주지. 나는 짐덩이다. 날 버리는 게 네 생존에 더 도움이 될 거다.”

“그럴 거면 지옥에 내려오지도 않았어.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 설령 내가 죽더라도, 내가 널 버리는 일은 없을 테니까.”

“…….”

“남은 수명은 어느 정도야?”

“대충 반년이군. 유감스럽게도 여긴 지옥. 모래밖에 없다. 수명을 늘릴 방법은 없어 보이는군.”

“조금 이해가 안 가는 게 있어. 수명을 정확히 어떻게 알아? 몸이 안 좋아지는 거라면 포션을 사용해 회복하면 되지 않아?”

“수명에 관해선 나도 여러 가지로 조사해봤다. 네가 알기 쉽도록 말해주지. 내가 말하는 수명이란 선천지기(先天之氣)다. 선천지기는 생물이 태어날 때부터 타고나는 기운이지.”

엘레나가 설명했다.

일반 사람의 경우, 황혼기가 올수록 이 선천지기의 그릇이 조금씩 줄어든다. 선천지기가 약하면 잔병치레가 많아지며, 선천지기가 전부 사라지면 죽는다.

“선천지기는 생명력이 아닌, 생명력을 담는 그릇이라 볼 수 있다. 지금 내 생명력의 그릇은 작아졌을 뿐만이 아니라 당장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금이 가 있다.”

“영약으로 늘릴 수 있는 거 아니야?”

“평범한 영약으로는 한계가 있다. 늘어나는 수명은 기껏해야 몇 주다. 그마저도 중복으로 복용하면 효과가 점점 줄어들 테고.”

“……옛날에 영약을 복용한 모양이네?”

“안 그러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하긴. 엘레나에겐 영약을 구할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가진 엘릭서면 회복시킬 수 있으려나?’

가능성은 컸다. 엘릭서는 선천적인 질병이나 장애까지 회복하니까.

‘엘릭서는…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두자.’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엘레나는 약해진 상태. 나를 의존할 수밖에 없다. 엘레나를 꼬실 절호의 기회였다.

비록 본인은 삶의 의지 따윈 전혀 없어 보이지만.

“엘레나. 일단은 걷자. 이대로 가만히 있어 봤자 결국은 죽을 뿐이야.”

“나는 생존 가능성이 1% 이하라고 본다. 차라리 편하게 자결로 편하게 죽는 게 낫지 않나? 내 몸에 관심이 있다면 범해도 상관없다. 나는 네게 저항할 생각이 없다. 어차피 의미 없으니까. 같이 죽어주는 대가로 몸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넌 가끔 받아치긴 힘든 농담을 던지더라.”

“진심이다만?”

“헛소리하지 말고 움직이기나 하자.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 해.”

강간으로 따먹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지금껏 엘레나 따먹을 기회가 전혀 없던 건 아니었다. 내게는 미약 같은 끝내주는 아이템이 몇 개 있으니까. 시시한 수단으로 따먹을 거였다면 이미 옛날에 따먹었을 것이다.

‘엘레나에게 공을 들인 시간이 얼마인데 미쳤다고 그러겠어.’

“하….”

힐끗. 엘레나를 봤다. 그녀는 어딘가 허탈해 보였다.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마. 식량이나 식수 문제는 내 아공간이 있으니 괜찮아. 그 외의 잡다한 것도 전부 있으니까. 우린 지옥 구역에서 벗어날 방법과 네 수명을 늘릴 방법을 찾기만 하면 돼.”

“…생존률이 5% 정도 올라가는 소식이군.”

엘레나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나와 그녀는 사막을 걸었다. 2시간 넘게 걸었으나, 붉은 모래와 마수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수는 보자마자 죽였다.

털썩.

내 뒤를 따르던 엘레나가 쓰러졌다. 깜짝 놀라 그녀에게 뛰어갔다.

“엘레나! 죽으면 안 돼!”

“…죽은 거 아니다. 다리가 한계에 달했다. 못 걷겠다.”

“마나를 사용하면….”

“마나는 진즉에 몸을 회복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회복 마법은 내 전문이 아니고, 효과도 없을 게 뻔하니 최악이군.”

“위험한 거야? 안 위험한 거야?”

“…위험하지는 않다. 다리가 지쳤을 뿐이다. 다만 앞으로 몇 시간은 못 걷는다. 버리고 가는 걸 추천하지.”

“안 버린다니까.”

엘레나를 어부바했다.

공주님 안듯이 안으려고 했으나, 마수가 나타났을 때 어부바를 하는 편이 더 대응하기 편했다. 그리고 엘레나의 가슴이 내 등에 닿는 감촉도 포기할 수 없었다.

“순순히 업히네?”

“네 고집을 꺾을 자신이 없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업혀가는 게 편한 것도 사실이다.”

“처음부터 말했으면 업어 줬을 텐데.”

“내가 그럴 거라 생각하나?”

“뭐, 네 성격으로는 절대 안 그러겠지.”

“…그 생각은 바꿔라. 네 등은 생각보다 편한 것 같으니 애용하겠다. 알겠나? 날 버리지 않고 책임질 거라면, 끝까지 책임지도록.”

“물론. 끝까지 책임질게.”

꽈악.

엘레나가 내 목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그녀의 머리카락과 숨결이 목덜미를 간지럽힌다. 꾸욱 눌리는 가슴 감촉에 자지가 화날 뻔했다.

“뭐야?”

“…탑승감이 안 좋다. 좀 더 부드럽게 움직여라.”

“누가 귀족 아니랄까 봐. 바라시는 것도 많군.”

“음. 이제 제법 편해졌군.”

얼마 지나지 않아 엘레나의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단잠에 빠지신 모양이다. 나는 그녀를 들고 묵묵히 걸었다. 달의 축복이 끝나기 전에 안전한 곳을 찾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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