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0화 〉 900. 신의 아틀란티스
녹색 액체가 든 병을 소환했다. 헤빌의 촉진제다.
식물을 순식간에 자라게 하여 열매를 맺게 하는 끝내주는 효과가 있다. 물론 가성비도 좋다. 한 방울에 10제곱미터 정도 영향을 끼치니까. 나는 이 헤빌의 촉진제를 약 2,000개 넘게 가지고 있었다.
‘헤빌의 촉진제 100개 정도면 숲을 만들고도 남겠지.’
가뭄 지옥은 이젠 아무것도 아니다.
헤빌의 촉진제 한 방울을 나무 아래에 떨어뜨렸다. 효과가 발휘됐다. 묘목이 무럭무럭 커졌다. 나뭇가지가 늘어나고 나뭇잎이 풍성해졌다.
그러나 내 얼굴을 밝지 못했다.
원래 헤빌의 축진제 한 방울을 뿌리면 식물은 열매까지 맺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이 사과나무는 중간에 성장이 멈췄다.
‘뭐가 문제지?’
나무가 마르기 시작했다.
문제가 뭔지 바로 알아차렸다.
물이다. 물이 부족했다. 나는 계속해서 나무에 물을 부었다. 결과적으로 열매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사과의 숫자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적었다.
“…20개. 너무 적은데.”
말라비틀어지기 전에 사과를 수확했다. 먹기 위함이 아니다. 사과 씨를 발아시켜 새로운 나무를 만들기 위함이다.
‘중간중간에 물을 가져오느라 빈틈이 생겼는데… 그 때문에 열매가 20개밖에 자라지 않은 건가?’
다른 세계에서 물을 가져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소량의 물이면 모를까. 그 양이 1톤에 달하면 보통 일이 아니게 된다.
‘사과나무 하나 키우는데 물을 30톤 정도 썼나? 그것도 부족해.’
제대로 키우려면 그 이상인 50톤은 필요할 것 같다.
‘어쩌면 한 장소에만 물을 부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나는 사과나무를 쳐다봤다. 물을 주지 않은 지 5분. 사과나무는 죽어가고 있었다. 나뭇잎이 비쩍 말라 떨어져 붉은 모래에 흡수된다.
‘비라도 오면 대량으로 키울 수 있으려나?’
가뭄 지옥.
그 이름을 생각하면 자연적으로 비가 내리기를 기다리는 건 미련한 짓이다.
“방법이 있긴 하지.”
「폭우의 피리
일회용
폭우를 부를 수 있다.
폭우는 세 시간 동안 유지된다.
랭크: S」
폭우를 부를 수 있는 피리.
이 피리를 이용해 폭우를 3시간 동안 부른 뒤에 나무 씨앗과 헤빌의 촉진제를 뿌려 숲으로 만들면 된다.
‘헤빌의 촉진제를 이용하면… 가능해.’
계획을 세웠으나 부족한 게 있었다. 사과 씨앗. 폭우의 피리는 한 번, 세시간 동안만 사용할 수 있으니 사과 씨앗을 최대한 많이 모아야 한다.
‘젠장. 노가다의 시작이군.’
???
나는 홀로 지옥의 상점에 찾아갔다. 마몬은 전에 봤었던 것처럼 카운터에 서 있었다. 그의 인사를 무시하고 본론부터 말했다.
“마몬. 물통이 필요하다.”
“크크. 물이 필요하신가 보군요. 혹시 새로운 사과나무 묘목은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묘목은 됐다.”
“오. 사과나무를 키우는 데 성공 하신 모양이군요. 대단하십니다. 혹시 식물을 키우는 스킬을 가지고 계셨습니까?”
“헛소리는 말고. 내가 필요한 건 물통이다.”
“물통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비슷한 건 있지요.”
「대용량 물뿌리개
총 300톤의 물을 담을 수 있는 물뿌리개다.
랭크: C」
“이런 게 있었으면 미리 말하지.”
“크크. 저도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
거짓말이다. 내가 다시 찾아올 거라는 걸 알고 말하지 않았겠지.
“물은?”
“물론 안 들어있습니다. 물은 지옥에서 아주 값비쌉니다. 깨끗한 물은 1L에 10 AP로 팔고 있지요. 구매하시겠습니까?”
“경악스러울 정도의 바가지군….”
“너무하군요. 물의 가치는 환경에 따라 다른 법입니다.”
나는 대충 넘어갔다. 이놈과 싸워봤자 얻을 이득은 아무것도 없다.
“혹시 매입도 하나?”
“당연하죠. 혹시 좋은 물건을 가지고 계십니까? 아, 마수 시체는 싸게 삽니다. 지옥에서 가장 흔한 게 마수 시체거든요.”
“사과다.”
붉은 사과 하나를 내밀었다.
“호오. 역시 벌써 열매를 수확하셨군요. 좋습니다. 개당 20 AP에 구매하죠.”
“……20 AP? 난 사과나무 묘목을 2만 AP에 구매했다만.”
“환경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듯, 사람에 따라 가치도 달라지는 법입니다. 제겐 그 사과는 크게 필요 없습니다. 그나마 이곳이라서 20 AP에 구매하는 것이지, 다른 곳이었다면 10 AP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혀를 차며 사과를 주머니에 넣었다.
“안 팔아.”
“그러십시오.”
“…수명과 관련된 물건 있나?”
“수명을 얻는 쪽을 말씀하시는 거겠죠. 있습니다. 보여드리죠.”
「수명의 저울
대상과 수명을 거래할 수 있게 된다.
수수료로 수명의 60%를 시스템에 지급한다.
수수료로 수명의 35%를 마몬에게 지급한다.
랭크: A」
“80만 AP입니다.”
나는 그가 내민 저울을 보고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대상에게서 수명을 구입하는 건 둘째 치자. 돈은 충분히 있으니 가능하다. 하지만 수수료로 수명의 95%를 뜯긴다. 100일을 구입해도 실제로 손에 넣을 수 있는 수명은 5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효율이 폭망이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아. 내겐 완전 회복이 있으니 내 수명을 엘레나에게 주면….’
엘레나는 당연히 감동할 것이고, 엘레나를 꼬실 수 있게 된다.
“……좀 깎아 줄 수 없나? 40만 AP 정도로….”
“하하. 안 됩니다.”
마몬은 저울읍 잡아 뒤로 숨겼다. 나는 혀를 찼다. 사실 40만 AP도 안 됐지만.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마몬이 단호하게 말했다. 어떻게든 재산을 뜯어내려는 마몬이 저렇게 단호하게 말하면 정말 없는 것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상점 밖으로 나갔다.
“또 오십시오.”
가뭄 지옥을 공략 성공하면 대량의 AP가 들어올 것이다. 달마다 들어오는 AP까지 계산하면 그럭저럭 80만 AP를 모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정 안 되면 엘릭서를 써야겠지.’
???
아삭!
나와 엘레나는 사과를 씹었다.
내가 기른 사과이다보니 애착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내가 키웠다기보다는 헤빌의 촉진제가 다 했다.
“맛있군. 내가 지금껏 먹어본 사과 중에 가장 맛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그건… 나도 동의해.”
“물론 나는 사과보다 포도를 더 좋아한다만.”
그 사족을 붙일 필요가 있나 싶었다.
사과로 배를 채운 나와 엘레나는 나란히 벽을 기대고 앉았다. 지금은 저녁. 잠을 자기에는 이른 시간이었고, 밖에 나가서 사과나무를 키우기엔 온도가 지나치게 높았다. 자연히 휴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저번에 말이야. 네가 패륜을 저질렀다고 했잖아. 그게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돼?”
조심스럽게 물었다.
신뢰도를 확인하는 방법은 대상의 중요한 걸 물어보는 것이다. 숨김없이 말해준다면 신뢰도는 높은 것이 될 테지. 특히나 인간불신이 깊은 엘레나에겐 특별한 물음이다.
“…그게 궁금하나?”
“네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궁금해. 말하기 싫다면 됐어.”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너라면…. 말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어차피 내 삶은 얼마 남지 않았고….”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말할 것은 발데르트 가문의 치부다. 다른 사람에겐 발설하지 않고 오직 너만 알고 있겠다고 맹세할 수 있나?”
“맹세할게.”
“그래. 믿겠다.”
엘레나가 말했다. 그녀는 천장에 걸어 놓은 램프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죽고, 내가 가주위를 막 물려받았을 때의 일이다. 아직 내가 환상공이라 불리기 전이었지. 삼극공(三極公)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 있나?”
“전대 발데르트 가주의 별칭이잖아.”
“그렇다. 아버지를 부르는 이름이지. 불, 얼음, 바람의 원소 마법이 극에 달했기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내가 말하기 뭐하지만, 나의 아버지는 대단하신 인물이었다. 우연히 운석을 떨어뜨리는 마법을 본 적 있는데…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대단했지. 그런 아버지가 돌연 사망했다.”
“왜 갑자기?”
“독이었다. 인간 중에 가장 강하다고 칭해져도, 운석을 떨어뜨릴 수 있어도 인간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극독에 중독되어 사망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이 잡혔다.
“그 독은 설마.”
“맞다. 어머니의 짓이었다. 사치와 향락에 젖은 내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리고 굉장히 문란했다. 아마 거리에 창녀보다 내 어머니 쪽이 더 문란했을 것이다. 어머니와 관련된 남자만 해도 100명이 넘었으니까. 조용히 처리하느라 꽤 애를 먹었었지.”
“그래서 죽인 거야?”
“그것도 있지만, 어머니는 나를 꼭두각시로 삼으려고 했다. 가주위에 오른 나를 멋대로 부리려고 했지. 어머니에겐 돈과 권력이 필요했으니까. 나는 어머니를 거부했고, 어머니와 나는 마주칠 때마다 마찰을 일으켰다. 언성이 높아지는 건 기본이었지. 어머니에게 맞는 일도 흔했다.”
“…….”
“그래도 참았다. 어머니니까. 허나 어머니는 선을 넘었다. 가문 내로 내연남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그걸 사용인들이 모두 보았다. 발데르트 가문의 명성이 땅에 떨어지게 된다. 어머니가 문란하게 지낼수록 나의 정통성도 떨어진다. 가문이 점점 쇠락해진다.”
엘레나는 가문을 위해 살아왔다. 황태자를 적대시한 것도 황태자가 황제가 되면 발데르트 가문의 쇠락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어머니와 대화를 나눴고, 어머니에겐 이미 가망이 없다는 걸 알았다. 나는 어머니를 죽였다.”
“…환술을 걸지 않고?”
“유감스럽게도 어머니도 특별한 인간이었다. 어렸을 적에 요정의 축복을 받았지. 내 환술에 걸리긴 해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풀린다. 그렇기에 어머니를 죽였다. 그래야 확실하게 숨길 수 있으니까. 나머지 가신들과 사용인들에게 수명 10년을 사용해 환술을 걸었다. 기억을 조작했지.”
“치부를 숨기기 위해 치부를 저지른 건가.”
“맞다. 하지만 나는 그날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골드렉스 자작에겐 감사하고 있다. 그 자리에서 어머니의 치부를 밝히지 않았으니까. 그에게는 정말로 감사하고 있다.”
“생각보다 별거 아니네.”
“…별거 아닌가? 가문을 위해 패륜을 저질렀다만?”
“내 입장에선 별거 아니야.”
“…그렇지. 네 입장에선 별거 아니겠지. 으음. 지금 어머니를 생각해보면, 조금쯤은 이해가 간다.”
“이해가 간다고?”
문란하게 생활했던 여자가? 의외라서 엘레나를 쳐다봤다.
“조금. 아주 조금이다.”
엘레나는 살짝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그래서 네 얘기는 언제 해줄 거지?”
“내 얘기? 갑자기?”
“날 무시하지 마라. 네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예전에 눈치챘다. 나와는 관계없는 것 같긴 하지만… 나만 말하니 억울하군. 말해다오.”
“나중에. 나중에 말해줄게.”
“마뜩잖은 대답이로군…. 뭐, 됐다. 나중을 기대하지. 지금은 슬슬 잘 때가 되지 않았나?”
엘레나가 불쑥 다가왔다. 나는 당황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자자고? 좀 더 있다가 자도 되잖아.”
“지금부터 자도 숙면을 취할 수 있다. 피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내가 재워주지.”
“아, 그렇긴 한데. 오늘은 환술을 안 걸어도 되잖아.”
“왜지? 환술로 깊게 잠드는 건 네게도 도움이 될 텐데? 깊이 자고 일어나면 개운하다고 하지 않았나.”
“계속 환술에 의지하는 것도 그렇잖아. 그리고 말이야. 자꾸 나한테 환술을 걸려고 하는데… 뭔가 있지?”
엘레나는 도리어 내 의심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인상을 찡그렸다.
“나를 의심하는 건가?”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나는 손을 저어 부정했다. 기껏 쌓은 신뢰도가 무너질 위기였다.
엘레나는 코웃음 치며 내게 손을 뻗었다.
“그럼 나를 믿고 자라. 이건 내가 해주는 너에 대한 배려다.”
졸음이 몰려왔다.
졸음에 저항하지 않으니 두 눈이 감겼고, 다시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엘레나는 옆에 앉아 있었다. 잠도 자지 않은 그녀는 어딘가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일어났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봤다. 변한 건 없었다.
하지만 어제를 생각하니 계속 의심이 되었다.
‘…다 방법이 있지. 유희 종료.’
[유희를 종료합니다.]
현실로 돌아온 나는 스마트폰을 들어 자동 진행으로 들어갔다.
자동 진행은 나를 중심으로 한 3인칭 시점으로 변한다. 여기서 진행 속도를 설정해 자동으로 진행할 수도 있고, 반대로 되감기를 해서 과거에 있었던 일은 다시 살펴볼 수 있다.
이 기능을 이용하면 내가 잠들어 있을 때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볼 수 있다.
‘헉! 이럴 수가!’
과거를 본 나는 깜짝 놀랐다.
‘서, 설마 잠든 사이에 내가 성추행을 당하다니! 그 엘레나가 이런 짓을…!’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에 뒤통수가 얼얼했다. 충격의 쇼크다.
그렇다고 기분 나쁘다는 건 아니었다.
‘완전 색다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