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4화 〉 904. 신의 아틀란티스
“……해라.”
엘레나가 말했다. 각오를 굳힌 눈이다. 이전과 눈빛부터가 달랐다. 정말로 살고 싶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내가 뭔가 해야 할 게 있나?”
엘레나가 상체를 일으키며 물었다. 내가 사용할 방법에 그녀의 도움은 필요 없다.
엘레나는 수명을 일종의 선천지기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엘릭서를 그녀에게 먹이면 손쉽게 수명을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엘릭서는 안 돼. 엘레나는 수명을 회복하더라도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자신의 수명을 걸고 환술을 쓸 거야. 뻔하지.’
신의 아틀란티스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혹독해진다. 원작 후반에서 그녀가 강명진에게 죽는 건, 강명진과 상성이 좋지 않았다는 것도 있었겠지만, 수명 문제가 심각했으리라.
“없어. 잠깐 기다려.”
나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유희 생활 어플을 켰다. 신좌나 시스템이 보고 있어도 상관없다. 어차피 나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유희 생활 어플은 보이지 않으니까.
[엘레나 발데르트의 인연 레벨은 1입니다.]
[인연 레벨 9 달성 보너스 포인트 26을 획득합니다.]
8이었던 인연 레벨이 올라 9가 되었다. 예상했었다. 나와 그녀에겐 섹스는 특별한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섹스하면서 일부러 진솔한 대화를 한 게 의미가 있었겠지.’
[인연 레벨 상승권
한 캐릭터의 인연 레벨을 강제로 상승시킬 수 있습니다. 단, 인연 10레벨 미만이어야 합니다.
가격: 1,000 포인트
※주의
한 캐릭터 당 한 번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인연 레벨 상승권.
꽤 오래전에 얻었던 거로 기억한다. 그때는 랜덤 뽑기 상점이 열리지 않아 주의 사항을 확인하지 못했었다.
‘한 캐릭터 당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다라…. 효과에 비해 가격이 싸서 제한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었는데. 이런 제한이었나.’
중복 사용으로 인연 레벨 10을 양산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래도 내겐 더 이득이지. 지금처럼 인연 레벨 9만 달성하면 바로 10이 될 수 있으니까.’
[인연 레벨 상승권을 엘레나 발데르트에게 사용하시겠습니까?]
‘사용한다.’
[엘레나 발데르트에게 인연 레벨 상승권을 사용합니다.]
[엘레나 발데르트의 인연 레벨 10을 달성했습니다.]
나는 유희 생활 어플을 보는 동시에 곁눈질로 엘레나를 살폈다. 벌거벗은 상태로 상체만 일으킨 그녀의 눈동자가 갑자기 멍해졌다. 그러나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고작해야 2~3초 정도. 평소의 차분한 눈동자로 다가온 엘레나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봤다.
[엘레나 발데르트는 계약을 받아들였습니다.]
유리아 때와 같다. 아마도 유희 생활 어플과 계약을 했으리라. 그리고 그녀는 진실을 알았다. 이곳이 소설 속 세계란 것과 내가 다른 사람이고, 내 능력이 유희 생활이란 것도.
“재밌군.”
그게 끝이었다.
다른 어떤 반응도 없었다. 아마도 일부러 언급하지 않는 것이리라. 지금 이 상황을 신좌와 시스템이 보고 있을 테니까.
[앞으로 엘레나 발데르트의 존재는 유희 생활 어플에 귀속됩니다. 엘레나 발데르트가 죽더라도 다시 소환할 수 있습니다.]
[엘레나 발데르트를 다른 세계에 소환할 수 있습니다. 엘레나 발데르트가 소환되면 출신 세계인 ‘신의 아틀란티스’는 비활성화됩니다.]
[캐릭터 소환은 캐릭터의 세계에서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현재 캐릭터 소환 레벨은 1입니다. 포인트를 이용해 캐릭터 소환 레벨을 올릴 수 있습니다. 레벨을 올릴 때마다 동시에 소환할 수 있는 캐릭터가 늘어납니다.]
[캐릭터 소환 레벨을 올리기 위해선 2,000의 포인트가 필요합니다.]
[캐릭터의 스킬과 특성 중 하나를 랜덤으로 공유 받을 수 있습니다.]
[당신의 스킬과 특성 중 하나를 캐릭터와 공유할 수 있습니다.]
[소환된 캐릭터의 능력치는 어플 주인의 능력치와 동일합니다.]
[캐릭터는 한계 초월을 사용해 원래 세계의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단, 한계 초월 이후 소환이 강제로 해제됩니다.]
[포인트를 소모해 엘레나 발데르트의 소환 유지 시간을 늘릴 수 있습니다.]
[소환 대기 시간은 소환 해제 시점부터 시작됩니다.]
[포인트를 소모해 엘레나 발데르트의 소환 대기 시간을 줄일 수 있습니다.]
[포인트를 소모해 한계 초월의 시간을 늘릴 수 있습니다.]
[포인트를 소모해 캐릭터의 외형을 바꿀 수 있습니다.]
‘크크. 됐다.’
내가 생각한 방법은 인연 레벨 10을 달성하며 설정할 수 있는 공유 스킬이다.
‘엘릭서와 똑같은 효과를 가지고 있는 완전 회복을 공유하면…. 엘레나는 12시간 마다 전력으로 환술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거지.’
[엘레나 발데르트
출신 세계: 신의 아틀란티스
인연: Lv. 10
소환 유지 시간: 30일.
소환 대기 시간: 현실 90일.
공유 스킬: 심안(心眼)
한계 초월: 1분
소환자 공유 스킬 : 완전 회복 Lv. Master]
‘크크. 완벽하다.’
엘레나는 예전보다 훨씬 강해졌다. 수명의 제약이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녀는 이제 제국오공 중에서도 최강일지도 모른다.
‘엘레나의 공유 스킬은 심안? 혹시 그건가. 엘레나가 내 기만(SS)을 꿰뚫어 본 그 감각.’
[심안(心眼) (캐릭터 공유 스킬: 엘레나 발데르트)
마나를 소모해 심안을 개안합니다.
개안한 심안을 유지할 때 마나와 정신력이 소모됩니다.
심안을 개안한 시간 동안 모든 감각이 활성화됩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볼 수 있습니다.]
[천심(天心) Lv.1이 심안(心眼)에 반응합니다.]
[조건을 만족합니다.]
[천심(天心)과 심안(心眼)을 합성하시겠습니까?]
뜻밖의 알림창이 떴다.
‘합성이라. 이런 것도 있었나. 도리어 나빠지는 건 아니겠지. 합성한다.’
[천심(天心)과 심안(心眼)을 합성합니다.]
[천심(天心) Lv.1
?천심(天心)
1분 동안 신체 능력이 상승하며, 상태 이상 면역 상태가 됩니다.
쿨타임: 24 시간
?천안(天眼)
감각이 날카로워진다.
마나와 정신력을 소모해 천안을 발동하고 유지한다.
천안 개안 시 효과 상승.]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과연. 말 그대로 감각이 날카로워지는군.’
천재의 시간을 발동했을 때보다는 못하지만 내 감각이 두 단계 정도 올라갔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이건 천안을 발동하지 않은, 상시 효과 적용이다. 게임으로 치자면 패시브 스킬 효과.
‘천안을 발동하면 어떻게 되지? 궁금하네.’
딱히 쿨타임도 없으니 잠깐 사용해보는 건 아무 문제 없을 것이다.
[천안(天眼)을 개안합니다.]
“흡!”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천안을 개안하는 순간 세상이 넓어지고 더 선명해진 느낌을 받았다. 동시에 눈을 통해 알 수 있는 정보량이 늘어났다. 딱히 정신적으로 피곤해지지는 않았다. 다만 익숙하지 않아 성가셨다.
‘…천안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는 없겠어. 소모되는 마나가 생각보다 많아. 그래도 그 이상으로 효과가 좋아. 감각은 보통 때보다 몇 배나 더 예민해졌고… 3인칭으로 나 자신을 볼 수도 있고.’
그 외에도 다른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참고로 투시하는 것도 가능했다. 엘레나의 몸을 봤다가 몸속에 있는 내장과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내가 원하면 마나도 볼 수 있었다. 마나는 파란색 연기 같은 형태였다.
“그 눈. 갑자기 기분 나쁘군. 치워라.”
엘레나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나는 천안을 해제했다. 천안을 해제하기 전에 그녀의 몸 상태가 원래대로 돌아온 것을 확인했다. 내가 공유해준 스킬인 [완전 회복]을 사용한 것이다.
“엘레나. 컨디션이 좋아 보이네.”
“네 덕분에 말이다.”
엘레나가 빙긋 웃었다.
그녀의 주위로 파란색 나비가 나타났다. 그녀의 상징과도 같은 환접술(幻蝶術)이다.
30마리가 넘는 파란색 나비는 팔랑팔랑 어두운 쉼터 내부를 돌아다닌다.
딱.
엘레나가 손가락을 튕겼다.
파란색 나비가 빛으로 변해 사라지고 주위 풍경이 변했다. 천장에 조명이 달리고, 벽이 하얗게 변하며 책상, 의자, 침대, 옷장 등의 가구가 생겨나 귀족의 방처럼 꾸며진다.
알몸이었던 나와 엘레나는 어느새 옷을 입고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 엘레나가 부린 환상이었으나, 환상이 아니었다. 거침없이 환상을 사용하는 엘레나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엘레나는 몇 달, 어쩌면 몇 년의 수명을 겨우 공간을 꾸미는 데 사용했다.
“훗. 마음에 드는군.”
엘레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그녀의 앞에 테이블과 홍차가 생겼다.
“그래…. 이 홍차다…. 이 홍차가 먹고 싶었다.”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수준이 아니라, 용에게 여의주를 물어준 수준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테이블로 다가가 엘레나의 맞은편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홍차가 사라지고 포도주와 와인잔이 놓여 있었다. 엘레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포도주로 잔을 채웠다. 콸콸콸. 포도주가 끊임없이 나왔다. 이것도 환술을 이용한 실체임을 알아차렸다.
「디오니소스의 포도주
신이 만든 포도주.
최초 한 모금 시음 시 마나가 2 상승한다.
랭크: A」
심지어 디오니소스의 포도주였다. 내 와인잔에도 포도주를 따르고 있는 그녀에게 물었다.
“몇 년짜리야?”
“모르겠군. 60년? 이건 신주라 숙성은 큰 의미가 없다. 그냥 마셔라.”
“그걸 묻는 게 아니란 걸 알잖아.”
엘레나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6년? 대충 그 정도 되겠군.”
단지 포도주를 마시기 위해 3년의 수명을 소모했다. 사치스럽기 그지없는 포도주였다. 뭐, 신의 포도주이니 그 가치는 의미 있을 것이다.
“앞으로 12시간을 주기로 포도주를 만들 거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지 않나?”
포도주를 마셨다.
처음 먹어보는 것도 아닌데도 눈물 나게 맛있었다.
「최초 시음이 아닙니다. 마나는 상승하지 않습니다.」
엘레나는 연거푸 3잔을 마셨다. 한잔에 수명이 1년 정도라고 한다. 술이 그리 강한 편이 아닌 그녀는 얼굴이 금세 빨개졌다.
“좀 더 건설적인 대화를 하자.”
“건설적인 대화? 좋다. 사랑하는 님이 원하니 해야지.”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지금도 죽겠다는 생각이야?”
엘레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전의 내가 뭘 했는지 떠올라서 부끄럽군. 죽을 생각은 없다. 이 지옥에서 유스티아 제국으로 돌아가야지. 내게는 발데르트와 네가 있으니까. 아, 명심해둬라. 발데르트를 네게 넘길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난 발데르트가 아니라 널 원한다니까.”
피식.
엘레나가 웃었다. 그녀는 와인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상체를 일으켜 내 멱살을 잡아당겼다.
입술이 포개지고 열린다. 선홍색의 붉은 혀가 내 입안으로 들어와 난폭하게 날뛴다. 달콤하고도 황홀한 포도주의 맛이 느껴졌다.
“후아…. 이걸로 대답이 됐겠지? 아니지. 넌 조금 멍청한 것 같으니 똑똑히 말해주마. 넌 내 남자다. 네가 내게서 벗어나려고 해도, 쉽게 풀어줄 생각은 없다.”
“난 다른 여자도 많은데.”
“흐음…. 뭐, 내게 막을 방법도 없고… 제국에서 일부다처도 흔하니 아무렇지도 않다. 네 능력이면 여자가 적은게 오히려 이상하지. …다만 격이 낮은 여자는 놀잇감 이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세이라는?”
“괜찮다. 어떤 의미로 세이라는 나보다 더 좋은 여자다.”
엘레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와인잔을 들었다. 나도 축배를 들 듯이 와인잔을 들었다.
짠.
와인잔이 부딪히며 청명한 소리가 쉼터 내부를 울렸다.
꿀꺽꿀꺽.
포도주가 계속해서 들어갔다.
5잔을 마신 엘레나가 취기가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
“덥다! 더워서… 못 참겠다.”
엘레나가 벌떡 일어났다. 취하지 않은 나는 엘레나를 빤히 쳐다봤다. 엘레나는 마나로 취기를 몰아내지 않고 진짜로 취했다.
“덥다고? 오히려 서늘하지 않아?”
“너 때문이다. 너를 보고 있으니 더워졌다. …차라리 몰랐다면 괴롭지도 않았겠지.”
엘레나가 옷을 벗었다. 순식간에 알몸이 된 그녀의 보지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덥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뒤늦게 눈치챘다.
“엘레나. 진정해. 한시라도 빨리 이 지옥에서 벗어나려면 오후에는 사과 씨앗을 모아야 한다고.”
“앞으로 내가 도와줄 테니, 오늘 하루 정도는 쉬어도 된다. 너는 나만 믿어라.”
“……!”
팔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팔다리를 확인해보니 어느새 사슬로 묶여 있었다. 거기다 옷이 벗겨진 상태였다.
“하아… 하아….”
엘레나가 술 냄새를 풍기며 내게 다가왔다. 내 허벅지 위에 올라탄 그녀는 내 목을 양팔로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탐닉하듯 내 혀를 빨며 엉덩이를 움직여 내 자지를 보지로 삼켰다.
“하아아앙! 안에서 점점 커지는 게 느껴진다…. 유진. 사랑한다. 너도 당연히 날 사랑하겠지?”
“당연히 사랑하지, 엘레나.”
“흐으응…. 사랑해. 사랑해, 유진.”
취한 엘레나는 내 몸을 끌어안고 발정 난 암컷처럼 다급하게 엉덩이를 움직였다.
나는 그녀에게 범해지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며, 일은 내일부터 하기로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