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8화 〉 908. 신의 아틀란티스
“꼬마야, 불경한 생각을 하는구나?”
헬이 나를 보며 서늘한 웃음을 흘렸다.
바닥의 한기가 다리를 타고 등골을 오르며 머리를 차갑게 만든다. 나는 서둘러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나를 본 인간은 크게 두 부류다. 나를 두려워하거나, 나를 경멸하거나. 너는 후자 쪽이구나.”
“절대로 아닙니다!”
“됐다. 변명하지 말거라. 나는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으니.”
“…….”
변명하지 말라고 하니 변명하지 않았다.
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윽고 그녀의 웃음소리가 궁전 내에 퍼졌다.
“재미있는 인간이구나. 너는 정말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구나.”
“아뇨. 두렵습니다. 싸우면 질 테니까요.”
“싸울 생각은 없어 보이는구나? 너희는 무슨 일로 날 찾아왔느냐.”
“지옥 구역을 나가고 싶습니다.”
“니플헤임의 문을 이용하고 싶으냐. 다행히도 너는 자격을 갖추고 있구나.”
그 자격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하나는 죽은 자가 아닌 살아 있는 자.
다른 하나는 지옥의 귀족일 것.
나는 지옥의 귀족으로서 그녀에게 정당히 요청할 수 있었다. 내가 엘레나의 앞에서 헬과 대화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 알고 찾아온 것 같으니 긴말 하지 않으마. 대가로 무엇을 내겠느냐.”
“AP를 지불 하겠습니다.”
아틀란티스 포인트.
신좌에게 있어선 영향력이자, 힘이라 할 수 있는 것.
“필요 없느니라. 나는 이미 AP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저희는 대가로 AP만을 생각하고 왔습니다. 필요 없다고 하시니 당혹스럽군요. 어떤 대가를 원하시는 겁니까?”
“본래 나는 니플헤임 전체를 통치하는 게 아니다.”
“예. 니플헤임에 속해 있는 헬헤임을 지배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아틀란티스에는 니플헤임 전체를 맡게 되었지. 니플헤임은 넓구나. 너무 넓어서 골치가 아파 올 정도로.”
“…….”
“그러니 너희가 관리자 일을 해주었으면 하는구나.”
“저희는 지옥 구역 밖으로 나가기를 원합니다.”
“관리자의 일을 끝내면 바로 밖으로 내보내 주마.”
“……어떤 일입니까?”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헬이 원하는 걸 해줄 수밖에 없었다. 지금 갑의 입장에 서 있는 건 헬이다.
“니플헤임은 너무 넓어서 내 힘이 닿지 않는 곳이 있단다. 영리한 망자와 죽은 서리 거인들은 그곳에서 나를 피하지. 그곳에 가서 망자들을 정리하고 손톱과 발톱을 뽑아, 내게 가져오거라. 일만 개. 거인의 손톱과 발톱은 최소 삼천 개는 되어야 하느니라.”
숨이 턱 막히는 퀘스트였다.
이곳은 니플헤임. 이곳에 오래 머물수록 바깥의 시간을 빠르게 흐른다.
“일만 개는…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조금만 줄여주십시오.”
“안 된다. 싫다면 관두거라. 나는 너희가 이곳에서 천년만년을 머물러도 상관없으니. 아, 니플헤임의 한기는 시간마저 얼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
“…알고 있습니다.”
“알면 다행이구나. 자, 일하러 가보거라. 너무 늦지 않게 주의하거라.”
축객령이 떨어졌다.
나와 엘레나가 움직이기도 전에 우리는 헬의 궁전 밖으로 나와 있었다. 헬이 권능을 사용해 우리를 밖으로 내보낸 것이다.
“노예가 된 기분이군. 차라리 저 여신과 싸워보는 것도 할만하지 않겠나?”
엘레나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그저 한탄하듯이 내뱉는 말이었다.
“아무리 네게 완전 회복이 있다고 해도 못 이겨. 적어도 다른 곳에서 싸워야 해.”
“그 여신의 힘이 닿지 않는 곳이 어딘지는 아나?”
“뻔하지 뭐. 여기에 오면서 너도 봤잖아.”
“나도 봤다…? 아, 과연. 거기인가.”
우리는 헬의 궁전을 찾아오면서 여기저기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어느 곳에는 폭설이 내리고, 어느 곳에는 한기는 느껴지지만, 폭설이 내리지 않는 곳.
“여신의 영역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 거군.”
“맞아. 그리고 우리가 여기까지 오면서 망자와 눈이 마주쳐도 습격받은 적은 없잖아? 눈이 내리지 않는 곳은 헬이 완벽히 지배하고 있어.”
“목적이 정해졌으니 행동해야겠군. 시간이 없으니 공간 이동을 하겠다.”
“가능해?”
“환술 외의 마법에는 자신 없다만, 내 환술은 대부분 만능이다.”
엘레나가 손가락을 튕겼다.
파란색 나비 10마리가 나타났다. 나비들은 나와 엘레나의 주위를 팔랑팔랑 날아다녔다. 나비의 주위로 공간이 일그러진다.
잠깐 눈을 깜빡인 순간 공간이 변했다. 강풍과 폭설이 불어 닥친다. 땅바닥은 쌓인 눈으로 가득하다.
“괜찮나? 원한다면 헤카테 케이프를 주겠다만.”
“됐어. 그건 너한테 이미 준 거야. 그리고 다른 것도 있어.”
인벤토리에서 붉은 망토를 소환했다.
「에르미타의 망토
철나무의 성질을 섬유로 변화시켜 만든 망토.
뛰어난 내구도를 갖추고 있으며 쉽게 더러워지지 않는다.
높은 추위 내성을 가지고 있다.
랭크: A」
과거에 철뿌리 드워프들에게 부탁해 만든 망토다.
망토를 뒤집어쓰자 피부를 베는 듯한 추위가 사라졌다. 몸을 덜덜 떨지도 않았다.
“망자를 찾아 없앨 일만 남았군. 손톱과 발톱 일만 개. 흠. 유진, 며칠 걸리거라 생각하나?”
“글쎄. 운이 좋으면 한 달 내로 끝낼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의 손톱과 발톱은 20개잖아.”
망자 100명에 손발톱 2,000개를 얻을 수 있다. 망자 500명이면 1만 개는 우습게 모은다.
“귀찮은 건 죽은 서리 거인의 손발톱 3,000개를 모으는 거겠지.”
“망자다.”
엘레나가 정면을 가리켰다. 지체할 필요는 없다. 장검 형태의 스톰브레이커를 소환해 손에 쥐고 망자에게 달려들었다.
망자는 걸어 다니는 시체였다. 피부 가죽이 벗겨져 몸의 일부는 뼈로 되어 있다. 그런데도 움직인다. 내게 손톱을 치켜들며 덤벼든다.
‘뇌전.’
파지지직.
검날에 뇌전과 검기를 일으켜 망자의 몸통을 베어냈다.
“키에에에에에에에에!”
망자가 듣기 싫은 비명을 지른다. 송곳으로 뇌를 쿡쿡 찌르는 것 같다.
「망자가 당신을 저주합니다.」
「당신의 높은 정신력이 망자의 저주를 떨쳐냅니다.」
“키에에에에! 키에에에엑! 키에에에!”
“하급 망자 주제에 너무 시끄럽다. 그만 죽어라.”
목을 잘라냈다. 그래도 망자의 비명은 끊이지 않았다. 두개골을 박살 내고, 몸을 토막 낸 끝에 망자는 조용해졌다.
“유진. 손발톱을 회수해야 한다.”
“알아. 내 손으로 시체를 만지긴 싫지만… 어쩔 수 없지. …이런 젠장.”
“왜 그러지?”
“이 새끼 손발톱이 3개뿐이야.”
“시체 꼴이 엉망이니 멀쩡한 손발톱도 없다는 건가. 생각보다 일이 더 길어지겠군.”
혀를 차며 손발톱을 회수했다.
우리는 망자를 찾아 돌아다녔다. 그 과정에서 죽은 서리 거인도 마주했다. 서리 거인의 크기는 평균 10M가 넘었다. 몸집이 큰 만큼 일반 망자들이랑은 비교도 되지 않게 강했다. 죽은 서리 거인을 쓰러뜨리기 위해선 1대1로 3분은 싸워야 했다. 물론 엘레나가 도와주면 더 빠르게 쓰러뜨릴 수 있지만, 엘레나는 망자를 찾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안 되겠어.”
“포기했나? 투덜거릴 시간에 계속 움직여라.”
“이대로는 안 돼.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효율이 별로잖아.”
“그 말에는 동의한다만, 방법이 이것밖에 없잖나. 이 니플헤임이란 곳. 보통이 아니라 그런지 내 환술도 잘 먹히지 않는다.”
“하루에 손톱 50개라니. 이게 말이 돼? 이러다가 밖에 나갔을 땐 최소 3년은 지나게 될 거야.”
“……역시 떠오르는 방법이 없다. 성실하게 움직이는 수밖에.”
“잠시만 기다려 봐.”
이럴 땐 내가 가진 물건을 한 번 둘러보는 게 최고다. 이 상황에 도움이 되는 효과를 지닌 아이템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유혹의 낚싯바늘… 이건 망자에게 안 통하니 의미 없고…. 찾았다! 이거라면…!’
「투탕카멘의 황금 가면
황금 가면을 쓰고 있을 땐 어떤 저주도 통하지 않는다.
죽은 자가 된다.
마나가 50 상승한다.
마나 수치에 따라 언데드를 조종할 수 있다. 단, 미라는 관계없이 조종할 수 있다.
착용자의 정신을 파괴한다. 정신이 멀쩡하면 온전한 주인이 될 수 있다. 허나 정신이 파괴되면 미라로 전락한다.
랭크: SSS」
황금 가면을 들었다.
망자는 언데드다. 움직이는 시체이니 좀비나 구울이나 다름없다. 니플헤임의 영향인지 좀비 주제에 좀 지나치게 강한 감이 있긴 하지만.
“또 신기한 물건을 꺼냈군.”
“이제 망자는 아무것도 아니지!”
위엄 넘치는 투탕카멘의 황금 가면을 머리에 썼다. 마나가 50 상승하며 온몸에 힘이 넘쳐났다.
동시에 내 기파가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눈에 파묻힌 망자, 의미 없이 어슬렁어슬렁 걷고 있는 망자, 조용히 숨을 죽이며 무기를 갈고 있는 서리 거인 망자.
망자들의 기척이 느껴진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나는 이 망자들을 지배할 수 있다.
‘부족해. 조금 더 기척을 넓힐 필요가…. 아, 그렇지!’
[천안(天眼)을 개안합니다.]
천안을 발동한다.
기감이 닿는 범위가 두 배 이상 커진다. 강한 바람에 흩날리는 눈보라도 내 시선을 가로막지 못한다.
“망자들아! 이리로 와라!”
내가 파악한 망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일반 망자들은 군말 없이 내 지배를 받아들였다. 죽은 서리 거인은 저항했으나, 결국 내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총 34마리. 이 중에서 서리 거인만 4마리였다.
“호오. 이러면 효율이 높아지겠군.”
“크크. 멍청한 망자놈들아. 어서 손발톱을 뽑아 내게 바쳐라!”
우워어어어….
망자들은 내 명령을 거부하지 못했다. 저들의 손발톱을 뽑아 내게 공손히 바쳤다.
“총 337개다. 그중에서 서리 거인의 손발톱은 50개도 되지 않는군. 유진, 이제 망자들을 처리해라.”
“아니야. 이 쓸만한 놈들을 이대로 없애기엔 너무 아까워.”
“솔직히 말해라. 지금 즐기고 있는 거지?”
“그것도 있고.”
척!
손가락으로 정면을 가리켰다. 망자들이 정면을 향해 걸어갔다.
“느려 터진 것들, 빨리빨리 움직여라! 거기 너, 앞니 없는 놈! 네놈은 너무 느려. 뭐하냐, 망자들아. 저 앞니 없는 망자를 먹어 치워라!”
“키에에에에!”
“우어어어어어….”
망자들이 내가 가리킨 망자에게 달려들었다. 망자의 팔을, 목을, 어깨를 뜯어 먹는다. 동족포식! 무섭다기보다는 싸구려 B등급 영화같은 비주얼이었다.
‘역시. 망자가 망자를 먹으니 강해졌군. 이거 재밌네. 크크.’
키우기 게임이 떠오른다. 단순하지만 엄청난 중독성을 가진 키우기 게임.
“저기 돌아다니는 망자 무리가 보이는군. 죽여라. 손발톱은 내게 바치고, 저 망자의 몸은 먹어 치워라.”
내가 지배하는 망자와 떠돌이 망자 무리가 한데 뒤엉켜 전투를 벌였다. 나와 엘레나는 한발 떨어져서 보기만 했다. 망자들의 전투는 꽤 볼만했다.
승리한 건 내가 지배하는 망자들이었다. 처음부터 이쪽의 숫자가 더 많았다.
「검은 파라오가 당신을 쳐다봅니다.」
투탕카멘의 황금 가면을 써서 그런지 웬 신좌가 나를 주시했다. 그 외의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무시했다. 검은 파라오를 제외하고도 나를 보는 신좌는 많았다.
엘레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가를 좁히며 나를 쳐다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의미 없는 짓이다. 빨리 손발톱을 모을 생각을…… 음!”
불평을 말하던 엘레나가 갑자기 두 눈을 부릅떴다.
“네 의도를 알겠다. 강한 서리 거인 망자를 만났을 때 대처하기 위해서군. 서리 거인 망자는 개체 수가 적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강한 놈이 나오겠지.”
망자가 망자를 먹으면 강해진다.
그건 내가 지배하는 망자에게만 통용되는 말이 아니었다.
“…어. 네 말대로야. 서리 거인 망자는 개체 수가 적으니 강한 놈들이 많을 거야. 그것들을 상대하려면 우리도 전력을 높여야 해. 너랑 나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니까.”
“너한테 다 생각이 있었군. 제법이다.”
엘레나가 웃으며 내 팔뚝을 쓰다듬으며 자랑스럽다는 듯이 날 바라본다. 내 대단함을 깨달은 모양이다. 나는 엘레나의 한 팔로 엘레나의 휘감았다.
“엘레나. 네 환술로 따뜻한 마차를 만들자. 망자놈들이 마차를 끌게 하고… 우리는 떡이나 치… 먹으면 돼.”
“나쁘지 않군. 알겠다. 그런데 그 가면을 꼭 써야 하나? 보고 있으면 불쾌해진다.”
“망자를 조종하려면 이걸 계속 쓰고 있어야 해. 이걸 벗는 순간 망자들은 우릴 죽이려고 할걸.”
“어쩔 수 없다는 거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