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9화 〉 909. 신의 아틀란티스
우어어어어어어!
서리 거인 망자가 땅을 울리며 다가온다. 체급이 깡패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평범한 망자는 서리 거인 망자의 발길질 한 번에 곤죽이 되어 사라진다.
“그래도 다구리 앞엔 장사 없지! 서리 거인 망자 놈들! 너희가 앞장서서 한 번에 덮쳐!”
고래고래 소리쳤다.
투탕카멘의 황금 가면에 의해 지배당하는 망자들은 내 말에 따라서 움직였다. 아니, 굳이 말로 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머릿속으로 명령을 내리면, 이것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그대로 이행한다. 내가 이놈들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선 저 새로운 서리 거인도 지배하고 싶지만… 마나가 부족해.’
망자들을 계속 지배하는 것에도 마나가 소모된다. 그러니 무턱대고 지배하는 망자를 늘릴 수 없다. 게다가 망자가 강해질수록 마나 소모가 더 심해진다.
‘그렇다고 약한 놈들로 무리를 꾸렸다간 도움이 아예 안 되고.’
처음에는 되는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망자를 키우는 것에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해지고 있었다.
“네놈은… 뭐냐…. 왜 갑자기 쳐들어와서는 우리를 공격하는 거지?”
우리에게 공격받은 떠돌이 서리 거인 망자가 바닥에 쓰러져 내게 물었다. 망자 중에서 일정 수준 이상 강한 놈들은 이렇게 말을 할 정도로 자아가 뚜렷했다.
“목숨 구걸할 생각하지 마라. 그럴 생각이었다면 처음 만났을 때부터 무릎 꿇었어야지.”
“그럴 생각 없다…. 우리는 이미 죽은 몸… 그저 조용히 떠돌 뿐이다.”
“손발톱이나 내놓고 소멸해라.”
“손발톱… 과연…. 헬의 짓거리인가…. 흐흐.”
서리 거인 망자가 웃는다. 그 웃음이 기분 나빠서 망자들에게 시켜 놈을 먹도록 했다.
“손톱 2개. 그게 전부군.”
엘레나가 혀를 찼다. 검지 손톱 2개밖에 없었다. 저 정도 강자인데 일반 망자들보다 손발톱의 수가 적다. 굳이 검지 손톱 2개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일부러 손발톱을 뜯어낸 흔적이 있다. 손톱 2개는 만일을 위해 남겨뒀겠지. 지금 와서 의문이다만, 헬이란 여신은 왜 망자의 손발톱 같은 걸 모으는 거지?”
“최후의 전쟁을 위해서겠지.”
비장하게 말했다.
“…최후의 전쟁?”
엘레나의 얼굴이 덩달아 심각해졌다.
“손발톱을 엮어 지상으로 향하는 배를 만드는 거야. 그 배에 망자들을 채우고… 뭐, 그건 원래 신화의 이야기지, 아틀란티스에선 큰 의미 없을걸?”
「서리 거인 망자의 손톱
사악한 힘이 깃들어 있다.
죽음의 기운이 깃들어 있다.
랭크: C」
굳이 이걸 모으는 이유를 꼽는다면 이게 힘이 되기 때문이겠지. 고작 손발톱에 불과한데 최소 랭크가 D랭크니까. 이번에 얻은 손톱이 C랭크 인 이유는 다른 서리 거인 망자보다 더 강해서 그렇다.
“유진. 헬이란 여신 말이다. 조금 꺼림칙하지 않나?”
“아니. 별로.”
“기분 탓이란 말인가.”
“기분 탓이야.”
단호하게 말했다. 원작에서 헬은 누군가를 적대하지도, 옹호하지도 않았다. 완전한 중립적인 여신이었다.
서리 거인의 손톱을 회수한 나와 엘레나는 마차 위에 올라탔다. 마차 내부는 귀족의 방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크고 넓었다.
이어서 망자들이 마차를 끌며 설원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엘레나. 우리 할 것도 없는데… 한판 어때?”
은근히 물으며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엘레나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내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어냈다.
“너무 짐승처럼 굴지 마라. 지금은… 생각할 게 있다.”
“생각할 거?”
“유스티아 제국으로 돌아갔을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행동방침을 미리 정할 필요가 있다.”
“이전처럼 하면 되지 않아?”
“이전처럼? 나는 이미 유스티아 황실을 적대했다. 이전처럼 행동하는 건 불가능하다. 유스티아 황실은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나를 본격적으로 견제할 테지. 엔젤러스 레기온 쪽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상황은 그리 좋지 않군.”
툭툭툭. 엘레나는 마차 창문을 두들기며 생각에 잠겼다.
경험으로 안다. 이럴 때의 엘레나는 건드리지 않는 편이 낫다. 괜히 그녀의 생각을 끊었다간 한소리 듣게 되겠지.
심심해진 나는 천안을 발동해 떠돌이 망자를 탐색했다.
???
‘저 망자는…!’
거대 바위에 기대어 서 있는 망자가 내 시선을 끌었다. 낡아 빠진 갑옷과 양손에 쥔 두 개의 검. 흔히 말하는 기사다.
물론 평범한 기사 망자였다면 내 시선을 끌지 못한다. 이 망자가 내 시선을 끈 건 하나였다.
여자.
어깨나, 가슴 살점이 뜯겨 나가고, 허벅지와 목, 눈알 부분이 썩어들어갔다. 그러나 얼굴의 형태, 몸의 윤곽 등을 보면 살아생전 그녀가 좀처럼 보기 힘든 미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 취향은 아니지만….’
내가 지배한 망자들을 살펴봤다. 하나같이 투성이였다.
‘효율만 따지면 서리 거인이 낫긴 한데…. 저런 거 보면 못 참지. 한 번 키워볼까.’
그러기 위해선 내가 지배하고 있는 놈 중 하나를 없앨 필요가 있었다. 가장 쓸모없는 망자를 없애고 야생의 여자 망자를 받아들였다.
“키에에에에….”
내게 지배 당한 여자 망자가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니 별로였다. 코는 박살 난 상태고, 입 부분이 길게 찢어져 뼈가 보였다. 입고 있는 갑옷도 자세히 보면 군데군데 부서진 틈이 보였다. 그 틈으로 썩은 내장이 보인다.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은 창백한 백색이다.
‘약하군.’
내가 지배한 망자 중 가장 약했다.
힐끗.
엘레나는 아직도 생각에 깊이 잠겨 있었다.
‘좋다. 먹이를 주마, 저놈과 저놈을 먹어라.’
이참에 활약이 거의 없는 망자들을 가리켰다. 여자 망자가 망자들을 향해 달려갔다. 본능인지 손에 쥔 낡은 검을 휘두르며 망자를 토막 내고 먹기 시작했다.
여자 망자가 다른 망자를 잡아먹을수록 그 힘이 실시간으로 강해졌다.
‘먹히는 놈은 내가 어느 정도 키워놓은 놈이지. 한 마리만 먹어도 강해질 텐데, 세 마리를 먹였으니 쓸 만 해지는 수준으로 강해졌겠지.’
“키아, 키이이….”
여자 망자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강해지면서 약간의 지성이나마 생긴 것이다. 벌레에서 야생 동물 짐승 수준으로.
그리고 여자 망자의 몸도 어느 정도 재생되었다.
뜯겨 나갔던 가슴이 재생된 것이다! 가슴 크기는 E컵!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라 그런지 선홍색 유두가 유독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등허리와 허벅지 등에 붉은 문신이 있었다. 생소한 문신이라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다.
‘이거 안 되겠군. 엘레나가 저 녀석을 보면 뭐라 할지도 몰라.’
「에르미타
철뿌리 부족 드워프들이 전력을 다해 만든 갑옷. 단단하면서도 가볍다.
속성에 대한 내성이 있다.
인체 친화적으로 설계되어 행동에 대한 제약이 없다.
건틀릿 부분에 숨겨진 칼날이 있다.
랭크: S」
과거, 철뿌리 부족에게 부탁해 만든 은색 풀 플레이트 아머를 꺼내 여자 망자에게 입혔다. 그 과정에서 여자 망자의 보지를 보게 되었지만, 말은 하지 않겠다. 다만 상반신보다 하반신의 상태가 더 심각했다.
‘내겐 스톰 브레이커가 있어 필요 없는 물건이지.’
인체 친화적으로 설계되어 있어서 그런지 여자 망자의 몸에 딱 맞았다.
투구를 쓰고 페이스 가드를 올리자 겉으로 볼 땐 여자인지, 남자인지 잘 구별이 되지 않았다.
「에르미타의 검
철나무로 만든 검.
가볍고 단단하다. 쉽게 부러지지 않는다.
랭크: B」
내친김에 검까지 줬다. 롱소드가 아닌 바스타드 소드였는데 근력이 뛰어난 듯 한 손으로 쉽게 들었다.
에르미타의 검은 갑옷에 비해 양산품이긴 했으나, 낡은 검을 들고 다니는 것보단 훨씬 나으리라.
「밴시퀸의 팔찌
여성만 사용할 수 있다.
마나에 따라 일정시간 동안 하늘을 마음대로 날 수 있다.
마나+5
랭크:A」
에르미타의 검을 찾다가 발견한 물건이다. 여성만 사용할 수 있다는 조건이 붙어 있어서 나는 사용하지 못한다.
‘얘는 언데드인데 사용할 수 있나?’
시험 삼아 줘봤다.
사용할 수 있었다. 하늘을 날아다니며 공격할 수 있다는 건 큰 이점이다. 특히 거인을 상대할 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앞으로 잘해라.”
“키이이….”
여자 망자가 대답했다. 뭐라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잘 대해주는 걸 아는 모양이다.
시선이 느껴졌다. 다른 망자들이 이쪽을 빤히 보고 있다. 새로 들어온 신입을 편애하는 게 아니꼬운 모양이다. 내가 주먹을 치켜들자 다른 망자들이 시선을 돌렸다.
“봐주는 건 한 번뿐이다. 기어 오르지 마라.”
잠시 멈췄던 마차는 다시 눈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
우연히 주운 야생 여자 망자를 키우는 재미가 쏠쏠했다. 시간이 지나며 망자를 먹고 강해질수록 여자 망자는 더 강해지고,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아갔다.
나는 잡은 망자의 절반 이상을 여자 망자에게 투자했고, 남는 망자의 손발톱도 그녀에게 주었다.
「망자의 손발톱
사악한 힘이 깃들어 있다.
죽음의 기운이 깃들어 있다.
랭크: E」
“꼭꼭 씹어 먹어라.”
“키이이….”
콰득콰득.
여자 망자는 잘 먹었다. 나는 그녀의 가슴을 주물렀다. 큰 가슴이지만 언데드라 그런지 차갑고 딱딱했다. 그래도 만지는 맛은 있었다.
‘얼굴도 재생됐는데… 상당한 미인이군.’
눈매가 날카로워서 그런지, 무표정해서 그런지 차갑고 무뚝뚝한 인상의 미녀였다.
게다가 몸이 재생되면서 몸에 그려진 붉은 문신 또한 재생되었다. 다소 이상하긴 했지만, 이게 또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쿠웅. 쿵.
서리 거인 망자가 나타났다. 멍청하게 생긴 얼굴을 보니 강한 놈은 아니었다.
“마침 잘 됐군. 네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실험해보자. 가서 싸워.”
여자 망자가 검을 들고 서리 거인을 향해 망설임 없이 달려들었다. 서리 거인이 거대한 주먹을 휘두른다. 여자 망자는 밴시 퀸의 팔찌를 사용해 하늘을 날아 주먹을 피했다. 지성이 생기고 나서부터 그녀의 행동은 마치 뛰어난 기사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녀가 검을 던졌다. 검은 서리 거인의 머리에 박힌다. 그러나 대상은 망자. 고작 그 공격만으로 행동 불능이 되지 않는다.
철컥!
그녀의 건틀릿에서 검날이 튀어나왔다. 에르미타 갑옷의 기믹 이었다. 두 개의 검날이 화려하게 움직이며 거인을 요리조리 상대한다.
“뛰어난 기사로군. 왜 저 망자에게 그리 잘 대해주는 지 의아했었는데, 저 정도 잠재력을 갖추고 있었나. 미안하다, 유진. 나는 네가 저 망자에게 성욕을 품어서 거뒀다고 지레짐작했다.”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엘레나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하, 하하. 내가 아무리 그래도 망자에게 성욕을 품을 리 없잖아.”
식은 땀을 흘렸다.
엘레나는 여자 망자가 미녀라는 것을 훨씬 예전에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심안(心眼). 엘레나가 타고난 능력 중에 심안이 있었지. 내 기만(SS)도 꿰뚫어 보는데 갑옷을 입혔다고 못 알아볼 리가….’
생각해보니 내가 멍청했던 것 같았다.
“키에에에에에에엑!”
그녀는 5분 만에 서리 거인을 사냥했다. 승리를 만끽하듯이 거인의 시체 위에서 팔을 세웠다. 검날에 붉은 검기가 일렁인다. 그녀는 서리 거인의 시체를 토막 내기 시작했다. 서리 거인을 잡아먹기 위해서다.
이어서 그녀는 투구를 벗어 던지고 서리 거인을 먹기 시작했다. 이어서 나는 그녀에게 명령해 옷을 벗기고 씻을 것을 명령했다. 어차피 언데드라 부끄러움이나, 차가움도 모른다.
“…과연. 스카디르 출신이었나. 저 전투력도 말이 되는군.”
“스카디르? 그게 뭔데?”
“모르면서 받은 건가? 스카디르는 용병 부족이다. 명성이 높은 만큼 비싸고 강력하지. 저 붉은색 문신이 전신을 뒤덮고 있다는 건… 스카디르 부족 내에서도 손꼽히는 대전사라는 뜻이다. 스카디르 부족은 대전사가 족장을 맡으니… 몇백 년 전에 죽은 스카디르 족장일지도 모르겠군.”
나는 찬물에 몸을 씻는 여자 망자를 쳐다봤다. 몸은 살아있는 사람처럼 완벽히 재생했다. 대충 보면 언데드라고 생각하지도 못할 정도다. 가슴은 풍만하고 허리는 잘록했으며 음부에는 하얀 보지털이 수북하다. 특히 몸에 새겨진 문신이 내 시선을 끌었다.
“하아. 설마 내 남자가 언데드를 보며 발정할 줄이야.”
엘레나가 내 상태를 정확히 꿰뚫어 봤다.
“아, 아니… 이건…. 어쩔 수 없이….”
“따라와라. 언데드 따위보다 내가 더 뛰어나다는 걸 증명해주지.”
살짝 화가 난 듯한 엘레나에게 목덜미를 잡히고 마차로 끌려갔다. 마차에 들어가기 직전, 여자 망자와 시선이 마주친 것 같았지만, 기분 탓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