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2화 〉 912. 하와이
하승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상쾌한 기분으로 강의실로 들어갔다. 오준혁이 미리 와 있었는데 나와는 달리 침울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준혁아, 왜 그렇게 처져 있어?”
뻔했다. 신입생들에게 껄떡대다가 안 된다는 걸 깨달은 것이리라.
“요즘 신입생들은 당돌하더라…. 뼈 때리는 말을 서슴지 않아….”
“헌터과니까.”
평범한 대학교 신입생이라면 선배의 눈치를 본다. 그러나 헌터과는 달랐다. 선배를 존중해도 과하게 눈치 보는 일은 없다.
“근데 넌 기분 좋아 보인다? 뭐하다 왔어?”
“좀 놀다 왔지.”
자리에 앉으려고 할 때였다.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누구, 여자?”
“박 교수 호출이야. 갔다 올게.”
강의실을 나가 박교수의 연구실에 들어갔다.
박교수는 혼자가 아니었다. 정장을 입은 남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남자는 나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30대 초반. 가르마를 탄 깔끔한 헤어스타일에 반듯한 얼굴을 가진 남자였다. 회사원 같은 이미지지만, 나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를 느꼈다. 일반인은 절대 아니다. 헌터다.
“반갑습니다, 성유진 헌터. 세이컬 길드의 박오종이라 합니다.”
“네. 성유진입니다.”
그와 악수를 했다.
세이컬 길드.
한국 10대 길드 중 하나로 4위에 속하는 길드다. 물론 순위 붙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매긴 비공식 순위다.
“박 교수님을 뵙기 위해 들렸는데…. 성유진 헌터와 만나게 될 줄이야. 운이 좋군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다른 사람의 제보를 받고 찾아왔을 것이다.
“박 교수님. 저를 부른 건….”
“너도 이제 4학년이고 내년이면 졸업이잖냐. 미래를 준비해야지. 마침 박오종 헌터가 세이컬 길드의 간부고, 네게도 관심이 있으니 이야기 좀 해보라고 불렸다.”
조금 짜증 났으나 내색하진 않았다. 박 교수가 날 위해 말한 걸 알기 때문이다. 한국 10대 길드를 기업으로 치자면 한국 내에 손꼽히는 대기업이다. 아직 졸업도 하지 않은 나를 대기업에 주선해주는 것이다.
‘평범한 헌터였다면 고마워하다 못해 절까지 했겠지만, 난 아니지.’
박 교수가 이끄는 대로 그의 앞에 앉았다.
“성유진 헌터. 혹시 속해 있거나, 입사하기로 한 길드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아아…. 다행입니다. 그렇다면 저희 세이컬 길드로 오시지 않겠습니까? 성유진 헌터 정도면 굳이 졸업하지 않더라도 바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공격대 2군에서 시작하겠지만, 경험이 쌓이면 1군으로 올려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박오종은 아주 청산유수였다. 말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미리 준비해놓은 게 확실했다.
연봉 300억. 길드 전용 훈련시설 무료 사용. 훈련 지원. 전용 장비 보장. 그 외의 소모품, 주택 제공 등등.
신입에게 제공해주는 것치고는 굉장히 많았다. 알아주는 글로벌 대기업 임원들도 이 정도는 못 받는다.
‘길드에 들어갈 생각은 없는데… 듣고 있으니 기분이 좋아지는군.’
세이컬 길드가 이 정도로 내게 지원을 보장해주는 이유는 뻔했다. 헌터가 된 지 고작 2년 만에 B등급 헌터가 된 나는 대한민국 최고의 유망주로 손꼽힌다. 그 너무도 빠른 성장세에 미래에 S등급 헌터가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즉, 세이컬 길드는 내가 미래에 S등급 헌터가 될 거라고 판단 내린 것이다.
“죄송합니다.”
“…거절하시는 이유에 대해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박오종의 얼굴이 굳었다. 어마어마하게 제안했지만, 내가 망설임 없이 차버렸으니 당연했다.
귀찮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말해도 상대는 납득하지 않고 질척거릴 테지.
“사실 확정된 건 아닌데 다른 길드와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다른 길드라 하신다면?”
“수월 길드와 자운 길드입니다.”
둘 다 대한민국 10대 길드에 속한 거대 길드다.
수월은 한아영이 속한 2위 길드, 자운은 영천검관의 진세영과 진우성이 속한 6위 길드다.
“어떤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지는….”
“죄송합니다.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후우. 알겠습니다. 저희가 너무 늦었군요. 하지만 성유진 헌터. 저희 세이컬의 문은 성유진 헌터에게 항상 열려 있습니다. 마음이 변하시면 언제든지 저희를 찾아오십시오. 아, 이건 제 명함입니다.”
박오종은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내게 명함을 건넸다. 일단은 받아뒀다. 내가 이 남자에게 먼저 연락할 일은 없겠지만.
박오종이 떠나고 박교수가 맞은 편에 앉았다.
“수월과 자운과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으나? 내가 괜한 짓을 한 것 같군.”
“아니요. 괜찮습니다. 이번에 세이컬 길드와 작은 인연을 만든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그럴싸하게 말했다. 유희 세계에서 이런저런 것들을 경험하다 보니 있어 보이게 말하는 게 늘었다.
“좋은 마음가짐이다. 헌터계도 결국은 인맥이다. 아는 사람이 많을수록 도움이 되지.”
“예. 인맥을 많이 쌓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나는 씨익 웃음을 지었다. 인맥은 이미 많이 쌓았다고 자부한다.
S급 헌터 후보 한아영.
A급 헌터이자 협회의 간부인 백지은.
세진 그룹의 재벌 3세 하승희.
영천검관의 관장 진우성.
내 인맥은 이미 빵빵했다.
???
한아영과 한하린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하와이에 내렸다. 공항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는 차를 타고 숙소로 이동했다. 하와이 날씨는 쨍쨍했다.
어쩌다 하와이에 오게 되었는가.
그 발단은 한아영이었다.
S급 후보이지만, 아직 S급의 실력을 갖추지 못한 한아영은 길드를 넘어서 정부의 지원을 받았다. S급 헌터의 존재는 국가의 전력을 크게 끌어올리니 정부가 한아영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그게 하와이랑 무슨 상관이냐고?
하와이에는 ‘영웅의 회오’라는 A등급의 유명한 던전이 있다. 이 던전은 수련용 던전으로 이름 높다. 이곳에 들어간 헌터들은 크고 작은 성장을 이루고 밖으로 나온다. 이곳에 들어가기 위해선 미국의 허락과 막대한 비용을 내야 한다.
한아영은 한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무료로 이 영웅의 회오라는 던전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나와 한하린까지 함께.
‘보통은 동반 입장을 허락 안 해주길 마련인데…. 한국 정부가 그만큼 한하영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
한하린은 친 여동생이니 둘째치고 나까지 허락해준 것도 꽤 의외였다.
‘이참에 내게도 투자할 생각인가?’
나는 힐끗거렸다.
한아영과 한하린, 그리고 나. 이렇게 셋만 하와이로 온 건 아니었다. 한국 협회 직원과 정부 소속 요원이 붙었다. 덤으로 한아영과 같은 길드 소속의 동료인 A급 헌터 장고준도 있었다. 어쩌다 보니 장고준도 함께 던전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숙소는 펜션이었다. 하와이의 바다가 멘션 앞에 있었다. 마당에 서 있으면 바다의 짠내가 느껴졌다.
“내일 오후부터 영웅의 회오 던전에 들어갈 수 있으니 오늘은 푹 쉬어 주십시오.”
우리의 안내를 위해 따라온 협회 직원이 말하고 떠났다.
펜션에 들어선 우리는 방안을 둘러봤다. 냉장고 안에는 신선한 고기와 채소가 가득했다.
“일단 모두 모여봐. 방부터 나누자.”
장고준이 우리를 불렀다.
“방도 많으니 각자 마음에 드는 방을 선택하면 될 것 같은데요.”
내가 말했다.
“맞아. 고준아. 유진이의 말대로 각자 원하는 방을 선택하면 되겠네.”
한아영이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내 어깨를 잡았다. 장고준의 심기가 불편해 보였으나, 그 누구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 나는 나중에 골라도 되니 너희부터 방을 골라봐.”
가장 먼저 나선 건 한하린이었다. 그녀는 거침없이 2층 끝에 있는 방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전 저 방이요.”
“어, 하린아. 나는 괜찮아. 아영이랑 유진이는?”
“괜찮아. 난 하린이의 옆방으로 할게.”
“저는….”
나는 말끝을 흐렸다. 2층에는 방 4개가 있었다. 장고준은 분명 내가 2층 방을 고른다고 생각하겠지.
“1층의 저 방으로 선택할게요. 고준 형은요?”
눈앞에 있는 방을 선택했다. 여기서 장고준이 2층 방을 선택한다? 너무 노골적이라 눈살만 찌푸려진다. 제대로 된 상식이 박힌 놈이라면 1층에 있는 방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난 저 방을 선택할게.”
장고준도 1층 방을 선택했다. 방 분배가 끝났으니 각자 선택한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고 편안한 옷차림으로 갈아입고 방 밖으로 나왔다.
“얘들아. 저녁은 밖으로 나가서 해결하지 않을래? 모처럼 온 하와이잖아. 로코모코가 그렇게 맛있다는데 한 번 먹어보자. 모처럼 온 하와이니 산책도 하고. 분명 기분 좋을 거야.”
“으음. 그럴까.”
한아영이 동조했다. 한하린도 말은 안 하지만 하와이 음식에 관심 있는 모양이다.
“형. 전 비행기 타고 오느라 피곤해서… 그냥 펜션에서 고기나 구워 먹을게요. 형은 로코모코 드시고 오세요.”
“……나도 피곤해. 안에 있을게.”
한하린이 말했다.
장고준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한아영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접지 못한 티가 났다.
“하린이가 저렇게 말하면 나도 집에 있을래. 아, 고준아. 넌 맛집 가고 산책하는 거 좋아하잖아. 우리 눈치 보지 말고 갔다 와.”
“아, 아니야. 너희를 놔두고 어떻게 나만 가겠어. 나도 그냥 여기에 남을게.”
“에이. 아니야. 우리 눈치 볼 것 없어. 갔다 와.”
“괜찮은데….”
한아영이 밀어붙이듯이 말하자 장고준은 어쩔 수 없이 갔다 오겠다고 말하며 밖으로 나갔다. 장고준이 떠나기 전에 불안한 눈으로 날 쳐다봤다. 꼴을 보아하니 1시간 안으로 돌아올 것이 분명했다. 넓은 펜션 안에는 나와 자매만이 남았다.
“누나들. 마당에 나가서 바비큐나 해먹죠. 수영장도 있던데… 수영복 챙겨오셨어요?”
“챙겨왔어. 수영복 보여줄까?”
“됐어. 수영은 무슨. 밥이나 먹자.”
“하린 선배…. 아니지. 이제 대학교 졸업했으니 하린 누나. 나중에 수영복 기대해도 되죠?”
한하린에게 친근히 달라붙었다. 어깨에 팔을 두르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너 잠깐…. 으응….”
한하린을 짜증 내기 전에 입을 맞췄다.
“뭐야뭐야. 나 빼고 둘이서만 노는 거니?”
한아영이 뒤에서 날 끌어안았다. 자매의 거대한 가슴이 앞뒤로 날 짓누른다. 벌써부터 자지가 발기되어 존재를 주장하고 있다.
???
장고준은 스마트폰으로 지도를 보며 근처 가까운 식당을 찾아갔다. 하와이 맛집까지 조사해왔으나, 펜션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빨리 돌아가자.’
장고준은 펜션에 남아 있는 성유진과 한한린, 한아영을 떠올렸다. 성유진은 한아영과 사귀는 사이가 아니다. 한아영에게 물어서 확인했다.
‘저번에 모텔에 간 걸 봤지만…. 꼭 그런 목적으로 모텔에 간게 아닐 수도 있어. 아영이가 사귀는 사이는 아니라고 말했고.’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면 자신에게도 기회는 있었다. 펜션 안에는 한아영 뿐만이 아니라 한하린도 같이 있으니 별일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거지.’
좋아하는 맛집도, 산책도 전부 포기하고 40분 만에 펜션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마당에서 바비큐를 하는 중이었다. 한아영과 한하린은 테이블 앞에 가만히 앉아 있었고, 성유진이 집게를 들고 요리 중이었다.
“고준 형. 빨리 돌아왔네?”
“…어쩌다 보니 빨리 돌아왔어. 별일 없었지?”
“고기 굽는데 별일은 무슨. 형도 고기 먹자. 자리에 앉아.”
“내가 도와줄게.”
“거의 다 했어.”
딱딱. 성유진이 집게를 만지며 환하게 웃었다.
장고준은 성유진의 말에 못 이겨 테이블 앞에 앉았다. 한아영의 맞은 편이었다. 한아영은 팔짱을 끼고 있었다. 뜨거운 날씨 때문일까. 아니면 테이블 위에 놓인 맥주잔 때문일까. 그녀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고준아. 로코모코는 맛있었어?”
“어. 맛있었어. 아영아. 왠지 안절부절못해 보이네.”
뚝뚝.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장고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아영의 아래쪽에서 들렸기 때문이다.
“수, 술을 먹다가 좀 흘렸거든. 신경 쓰지 마.”
한아영이 테이블 위에 놓인 냅킨으로 빠르게 아래쪽을 닦기 시작했다.
“하린이는…. 왜 입을 막고 있어? 기분 안 좋아?”
“…….”
한하린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한 손으로 입을 막고 있었다. 가른 한 손으로는 가슴을 가리듯 꾸욱 누르고 있다.
꿀꺽꿀꺽.
그녀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입안에 있는 무언가를 삼킨 모양이다. 그녀는 손으로 입술을 스윽 닦고 손을 내렸다.
“술을 입에 넣고 있었어요.”
“술을 입에? 굳이?”
“벌칙이었어요. 10분간 입에 머금고 있는 벌칙.”
“요즘은 그런 벌칙도 있는 거야?”
성유진이 고기를 담은 접시를 들고 다가왔다.
“자, 자, 형. 고기부터 먹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