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3화 〉 913. 하와이
장고준은 불편함을 느꼈다.
자신이 오고 나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부터 그런지 모르겠지만. 테이블의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테이블은 조용했다.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성유진은 고기가 부족하다며 다시 바비큐 그릴 앞으로 다가갔고, 한하린은 물만 마시고 있고, 한아영은 조용히 식사에 집중했다. 도중에 몸을 흠칫 떠는 게 뭔가 이상했다. 하와이에 와서 시차 때문에 컨디션이 안 좋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영아. 몸이 안 좋아?”
“어? 아니. 시차 때문인지 조금 졸려서 그래. 괜찮아.”
한아영이 웃으며 말했다.
장고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헌터라고 해도 그들도 인간. 일반인 보다는 편해도 시차는 느낀다. 장고준은 다운된 분위기를 올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말솜씨는 나름대로 자신 있었다.
“그거 알아? 우리가 내일 들어갈 던전인 영웅의 회오를 통해 S급 헌터가 된 인물은 무려 4명이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영이 너도 이번 기회에 S급으로 올라갈 수 있을지도 몰라. 영웅의 회오는….”
장고준이 쉬지 않고 말을 이었으나 분위기가 올라가는 일은 없었다. 한하린과 한아영은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식사에 집중했다.
식사가 끝난 뒤에는 로비에 모였다. 잠자리에 들기엔 이른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소파에 앉은 장고준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한아영과 한하린이 샤워를 하고 나왔기 때문이다. 물론 옷은 입고 있었다. 셔츠와 반바지. 특이할 것도 없는 평상복이다. 허나 젖은 머리카락과 촉촉한 피부가 장고준을 자극한다.
장고준은 한아영과 알고 지낸지 꽤 오래되었지만, 이토록 무방비해 보이는 한아영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형. 저도 샤워하고 올게요.”
성유진이 장고준의 어깨를 툭 건들며 말했다.
“어? 어. 그래. 나는 네 다음에 할게.”
성유진이 샤워실로 들어가고 로비에는 3명만 남게 되었다. TV에선 타국의 언어로 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
대화가 오가지 않는다. 어색했다. 장고준은 옛날 기억을 떠올렸다. 그날 이후로 멀어져서 그렇지, 한아영과 자신은 그래도 소소한 대화 정도는 나누는 사이가 아니었던가?
“아영아. 하린아. 내일 아침은 밖에서 먹자. 모처럼 하와이에 왔으니 현지 음식은 먹어야지. 근처를 산책하는 것도 재밌을 거야.”
“…으음. 글쎄. 내가 아침에 잘 일어나지 못해서 힘들 것 같아.”
“저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건 부담스럽네요.”
한아영은 미안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고, 한하린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 그래도 하와이잖아.”
장고준이 포기하지 않고 질척거렸다. 허나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몇 분 뒤에 성유진이 돌아왔다.
“형. 샤워 끝냈어요.”
“…어. 그래.”
장고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샤워실로 향하면서 그녀들을 힐끗거렸다. 한아영과 성유진. 단둘이 있다면 모를까. 한하린과 셋이 함께 있으니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10분 만에 샤워를 하고 나온 장고준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기류가 묘하게 바뀐 기분이었다. 한아영은 물을 꿀꺽꿀꺽 삼키고 있고, 한하린은 팔짱을 끼고,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생각에 깊게 빠져 있었다.
‘…뭐지?’
소파에 퍼지듯이 앉아있던 성유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심심한데 카드 게임이나 하죠. 카드 가져올게요. 아, 고준 형 맥주 한 잔 하실래요?”
“어. 씻고 와서 그런지 목이 타네. 부탁해.”
성유진이 카드와 맥주를 가져왔다. 시원한 맥주를 꿀꺽꿀꺽 마신 장고준은 감탄사를 흘리며, 한아영 자매들과 함께 카드 게임을 시작했다.
나름 재미있기에 카드 게임을 하고 있던 장고준은 졸음이 몰려오는 걸 느꼈다. 아직 오후 10시도 되지 않은 시간. 평소 때라면 생생하게 돌아다녀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견디기 힘들 정도로 졸음이 몰려온다.
꾸벅. 머리가 떨어지기 일보 직전에 성유진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형. 졸리신 모양이네요. 내일 일정도 있고 하니 슬슬 방으로 들어가서 자죠.”
“유진이. 네 말대로 하는게 좋겠어.”
자리는 순식간에 파투 났다. 로비의 불을 끄고 모두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장고준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침대에 향했다. 졸음이 지나칠 정도로 몰려온다. 이토록 졸려오는 경우는 A급 헌터가 되고 난 후 처음이었다.
털썩.
침대에 쓰러지듯 누운 그는 몰려오는 수마에 저항하지 못하고 잠들었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아침 9시가 되어 있었다.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난 그는 늦잠 잔 스스로를 타박하며 방 밖으로 나갔다. 로비는 조용했다. 아무도 없었다. 밖으로 나간 흔적도 없으니 모두 아직까지 잠자고 있는 모양이다.
‘모두 지금까지 자고 있다니… 다들 나처럼 피곤했나?’
오전 10시가 되었을 때 방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나왔다. 한아영이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의 그녀는 하품하며 계단을 내려온다.
“아영아. 잘 잤어?”
“어? 응. 잘 잤지. 침대가 너무 편해서 지금도 졸릴 정도야.”
말과는 다르게 한아영은 밤을 새운 사람처럼 피곤해 보였다.
“아영아. 머리카락에 뭐가 묻어 있는 것 같은데?”
“…정말이네? 화장품이 묻은 것 같아.”
“너 손등에.”
“아, 모기 물린 자국이야. 모기가 많더라고.”
“…….”
장고준은 한아영의 목과 쇄골에 있는 자국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저게 정말 모기 자국인지 순간적으로 의심이 들었으나, 확인할 용기가 없었다.
그들은 가볍게 점심을 챙겨 먹고 던전으로 떠났다.
???
A급 던전 영웅의 회오.
하와이주 정부가 직접 관리하는 그곳에는 큰 건물이 지어져 있었다. 관리하기 편하도록 던전 입구에 건물을 지은 곳이다.
건물 주위에는 무기를 무장한 헌터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최소 B급 헌터이고 일부는 A급 헌터다. 하와이주 정부가, 미국이 이곳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전 세계 헌터들이 이 던전을 이용하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고 알려져있으니 당연하지. 사냥이 아닌 오직 수련을 위한 던전은 이게 유일하니까. 하루 이용 값이 최소 100억 이상이라지.’
우리는 이틀 동안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았다. 이틀 그 이상을 이용하면 계약에 의해 막대한 돈을 지불해야 한다. 배 째라고 나온다? 미국을 상대로 그럴 수 있는 국가는 없다.
“이 특수 시계를 빌려드리겠습니다. 40시간 후에 알람이 울립니다. 그때 밖으로 나와 주십시오. 여러분 다음으로 러시아 헌터 분들이 이용하기로 계획되어 있으니 시간은 꼭 지켜주십시오.”
던전 관리원은 시간을 꼭 지켜달라고 몇 번이나 당부한 끝에 우리를 던전 앞으로 안내했다.
오후 1시.
던전 공간이 일렁이더니 4명의 헌터가 튀어나왔다. 까무잡잡한 피부와 진한 얼굴을 보니 중동 쪽 인물들로 보였다. 그들은 내가 모르는 언어를 중얼거렸다.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묻어나왔다. 성취가 있었던 모양이다.
“한국 헌터 분들. 입장하십시오.”
던전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몸이 어딘가로 쑤욱 빨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운동장처럼 넓은 공간에 나 혼자 있었다.
반사적으로 천안을 개안하고 주위를 둘러봤다. 몇백 km 떨어진 곳에 여기같은 수련장이 있었다. 그 수련장에 누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딜 보는 거냐. 널 이끄는 건 나다.”
“……!!”
뒤쪽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나는 몸을 획 돌렸다. 짧은 금발 머리에 다부진 체격의 여인이 있었다. 근육질의 팔과 다리. 몸에 착 달라붙은 옷 너머로 보이는 선명한 복근. 일자로 꽉 다문 붉은 입매와 가라앉은 갈색 눈동자.
“반갑다. 나는 벨리스다. 네게 맞는 훈련을 가르칠 거다.”
영웅의 회오에 들어오기 전에 접한 정보를 통해 그녀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녀는 영웅의 회오에 나타나는 교관 중 한 사람이다.
영웅의 회오는 입장자 4명 각자에게 그에 걸맞은 교관을 붙여 준다. 일종의 퍼스널 트레이닝 방식이었다.
벨리스는 교관 중에서도 기초 훈련 교관이라 불린다. 다시 말해 앞으로 40시간 동안 기초 훈련만 주야장천 하게 생겼다는 것이다.
“네가 이곳에 찾아왔다는 것은 강해 지고 싶은 의지가 있다는 거겠지.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라. 그럼 너는 이전보다 훨씬 강해질 것이다. 우선 달리기부터 시작하지.”
“벨리스 교관. 전 이미 어느 정도 강합니다. 달리기 따위를 하려고 여기에 온 게 아닙니다.”
“네가 강하다고? 내 눈에는 제힘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는 애송이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만. 강해지고 싶다면 내 말에 토 달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라. 나는 너 같은 놈을 훈련 시키는 전문가다.”
나는 짝다리를 짚었다. 영웅의 회오는 평생에 한 번밖에 입장하지 못한다. 즉, 나는 이후에도 다시 이곳에 입장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달리기로 시간을 보내라고? 웃기는 소리.
‘이 여자를 다시 못 만난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벨리스를 따먹어야 해. 그래야 후회를 안 하지.’
벨리스가 시키는 대로 해서는 그냥 훈련만 하게 될 뿐이었다.
“전 그딴 훈련 따윈 안 해도 됩니다. 그것보다 기술이나 좋은 거 가르쳐 주시죠.”
“건방지군. 내가 왜 네 앞에 나타났는지 모르겠나?”
“왜 모르겠습니까. 보나 마나 나랑 섹스하려고 나타난 거겠죠. 전투 섹스가 취향이신 것 같은데… 제가 아주 천국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내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상대는 어차피 던전에 속해 있는 인물. 내가 눈치 볼 필요는 없었다.
벨리스는 섹드립에 당황하지 않았다.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는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너 같은 놈은 정말 오랜만이다. 주제도 모르는 놈. 감히 내게 개소리를 지껄이는 놈. 나는 너 같은 놈을 싫어하지 않는다.”
벨리스의 하체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벨리스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주먹을 쥐고 팔꿈치를 뒤로 당긴다. 천안을 개안한 상태라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의 움직임을 볼 수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녀의 움직임이 보인다고 몸이 반응하는 건 아니었다.
‘찰나.’
느려진 시야에서 그녀의 주먹을 고개를 돌려 옆으로 피하고, 내 주먹을 그녀의 턱에 꽂아 넣었다.
시원한 타격음과 함께 벨리스의 몸이 하늘 위로 부웅 떠오른다.
‘공격은 제대로 들어갔지만, 끝을 내기엔 한참 모자라. 뇌전!’
공중에 뜬 벨리스에게 벼락이 연달아 3번 떨어졌다. 정통으로 맞았으니 못해도 감전에 의한 기절이다.
‘이제 따먹어 볼까.’
바닥에 쓰러져서 꼼짝도 하지 않는 벨리스에게 다가갔다. 근육질의 몸과 달리 가슴은 풍만하게 솟아 있었다.
텁! 하고. 벨리스의 손이 내 오른발목을 잡았다.
“기절하지 않았다고?”
“죽은 척도 전략 중 하나다.”
파지지직. 손에 뇌전을 일으키고 그녀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퍼억! 퍽! 퍽! 내 주먹을 맞은 벨리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약하다. 날 기절시키고 싶으면 좀 더 힘을 줘서 쳐라.”
“젠장. 뭔 놈의 여자가 이렇게 단단… 크억!”
발목이 붙잡힌 채로 바닥에 처박혔다. 본능적으로 마나를 사용해 몸을 강화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뼈 한두 개는 부서졌을 것이다.
내가 균형을 잡기도 전에 벨리스가 내 몸을 반대 방향으로 처박았다. 그녀는 쉬지 않고 내 몸을 휘두른다. 나는 벗어나기 위해 붙잡히지 않은 왼발을 사용했다. 머리와 얼굴 차도 꿈쩍하지 않는다. 가슴과 사타구니를 쳤는데도 멀쩡했다. 강철 그 자체인 여자였다.
“소용없다. 내 몸은 이미 완벽히 단련되어 있다.”
“보지까지 단련하다니… 이 미친년!”
“인체에서 단련하지 못하는 곳은 없다.”
“아니. 보통 눈이랑 성기는 단련 못 하잖아. 똥구멍도.”
“할 수 있다. 단련하지 못한 건 네 의지가 부족한 것뿐이다.”
“아아악! 씨발!!”
쾅! 쾅쾅쾅! 쾅쾅!
내 몸을 사정없이 바닥에 내려친다. 이대로는 슬슬 나도 위험해진다.
‘천심!’
벨리스의 손이 떨어졌다. 벨리스가 두 눈을 크게 치떴다.
“방금은 뭐지? 신기하게 풀리는군.”
“스톰브레이커!!”
스톰브레이커 갑옷을 입고 검을 들어 올렸다. 내 몸에서 붉은 뇌전이 번뜩였다.
‘찰나!’
벨리스의 앞으로 접근해 검기를 일으켰다. 노리는 것은 그녀의 왼팔이다.
영천류(影天流) 뇌광(雷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