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1화 〉 921. 하와이
장고준은 협회 직원과 함께 하와이 공항으로 왔다.
그의 얼굴은 밝지 못했다.
하와이의 A등급 던전인 ‘영웅의 회오’에서 얻은 게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신체의 내구도를 높여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것이 전부다. 내상으로 인해 제대로 된 훈련은 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 내상도 완치하지 못했다. 집중 치료는 받았지만, 중간에 내상이 다시 커졌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다시 집중 치료를 받거나, 며칠 요양할 필요가 있었다.
내상이 커진 이유.
그건 정신적인 부분이었다. 기껏 하와이에 왔는데 놀지도 못했다. 한아영이 병문안을 오지 않은 것도 서운했고, 그저께 밤부터 자신이 보낸 메시지도 잘 보지 않는 한아영때문에 온갖 상상이 다 들었다.
한아영이 성유진과 연인들처럼 시간을 보내는 게 아닐까. 하는 불길한 망상이다.
‘…그 망상은 말이 안 되지. 펜션에는 아영이와 성유진만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한하린이 그들과 함께 있었다. 그러니 자신의 불길한 망상이 현실에서 일어날 리 없었다. 공항으로 들어선 그는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는 셋이 보였다. 그들을 향해 걸어가던 장고준의 다리가 돌연 멈췄다.
“장고준 헌터?”
“…….”
한아영과 한하린 자매와 성유진은 편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한아영이 웃으며 성유진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치고, 한하린은 피식하고 은은하게 웃는다. 자매들의 눈동자는 오직 성유진에게 향해 있었다.
성유진은 자매에게 손장난을 쳤다. 어깨나 팔을 터치하는 등의 가벼운 장난이다. 자매는 그 장난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들은 가족처럼 혹은 연인처럼도 보였다.
한 폭의 그림처럼 잘 어울린다고 장고준은 한순간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장고준 헌터! 걷기 힘들 정도입니까?! 그럼 차라리 귀국은 잠시 미뤄두고 하와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장고준 헌터의 건강입니다.”
“…그렇게 호들갑 떠실 필요 없습니다.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저도 모르게 멈춰 섰을 뿐입니다.”
장고준은 그들에게 다가갔다.
“고준아! 내상은 괜찮아?”
한아영을 시작으로 형식적인 안부를 물어왔다. 장고준은 애써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그들의 분위기는 다시 풀어졌다. 그들은 스쿠버 다이빙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고 있었다.
“바닷속은 정말 신비로웠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오고 싶어. 아, 유진이 너 수영 정말 잘하더라.”
“아영이 누나도 수영 잘하던데요. 인어인 줄 알았어요. 그거 기억나세요? 커다란 물고기 때문에 깜짝 놀랐잖아요. 제가 그때 이렇게….”
성유진이 다시 손장난을 쳤다. 한아영의 팔뚝을 잡으려 했던 모양인데, 그의 손이 미끄러지더니 한아영의 가슴 하나를 움켜쥐었다. 옷을 입고 있음에도 알 수 있는 볼륨감 넘치는 커다란 가슴이 손가락 사이사이로 삐져나왔다.
“아아앙….”
한아영이 무심코 교태로운 신음을 흘리고는 깜짝 놀랐다.
장고준은 이를 악물었다. 성유진은 가슴에서 바로 손을 떼지 않고 3번 주무르고 손을 뗐기 때문이다.
“아…. 미안해요, 누나. 팔을 만지려고 했는데 실수로….”
“괘, 괜찮아. 실수인데 뭘. 다음에는 조심해.”
경악한 장고준은 자신이 나서려는 것도 멈추고 멍하니 그녀와 성유진을 쳐다봤다.
한아영은 상냥하고 다정해 보여도 선을 넘으면 불같이 화를 내기로 유명했다. 일례로 길드 내에서 한아영에게 성희롱적인 말을 내뱉었던 B급 헌터는 한아영에게 싸대기를 맞고 퇴출당했다. 그 남자는 이빨 5개가 부러지고 한국을 떠나야 했다.
그런 지금 한아영은 대충 웃으며 넘어갔다. 이해가 되지 않는 광경이었다.
‘……만약 내가 그랬다면.’
일단 얻어터지는 것은 기본이고 재수 없으면 팔다리 한 짝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수월 길드에서 퇴출당할 테고… 한국에 발을 붙이는 것도 어려워질 것이다. 한아영은 맺고 끊는 게 확실하니 두 번 다시 만날 일은 없어지겠지.
꿀꺽.
장고준은 새삼스럽게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깨달았다.
“너 미쳤어?”
짜악!
한하린의 손바닥이 성유진의 등에 작렬했다. 성유진의 몸이 휘청거렸다.
“실수였는데 너무 세게 때리잖아요.”
“그래. 하린아. 실수였다잖아. 그렇게 유진이를 때리는 건 너무했어.”
“하…. 맞을 건 맞아야지. 그리고….”
한하린은 주위의 시선을 의식해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성유진이 실수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실수를 빙자해서 한아영의 가슴을 만진 거다. 물론 한아영도 말을 안 했을 뿐이지 알고 있었다.
“아…. 등이 지금도 화끈거려요. 억울해 죽겠네.”
“억울? 너 진짜 또 맞을… 히익!?”
짝!
성유진의 손이 한하린의 엉덩이를 때렸다. 성유진은 자기가 저지른 일에 아차 했다. 너무 세게 때린 것 같았다. 놀란 한아영은 입을 벌렸고, 한하린의 얼굴은 도리어 차가워졌다. 그녀에게서 마나의 유동을 느낀 성유진은 도망가려고 했으나, 중력에 붙잡혀 움직이지도 못했다.
한하린이 성큼성큼 다가와 성유진의 뺨을 있는 힘껏 후려쳤다.
짜아악!
뺨을 맞은 성유진은 한하린에게 사과하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 지었다.
‘……뭐지.’
장고준은 당혹스러웠다.
이 해프닝은 TV 시트콤 같았다. 자신만 이 광경에 어울리지 못하고 떨어져 시청하고 있다. 자신이 느끼는 소외감은 둘째 치더라도 방금의 성유진은 선을 넘었다. 이 일이 인터넷에 알려지면 사회적으로 반쯤 끝장나게 된다. 그러나 한하린도 한아영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이어간다.
장고준은 뒷목을 쓰다듬었다. 불길함이 등골을 타고 흐른다.
???
비행기는 일등석에 탔다. 이것도 한국 정부의 지원이었다.
일등석은 편했다. 좌석을 조절하면 누울 수도 있었고, 칸막이도 있어서 기본적인 사생활이 보호되어 다른 사람의 눈을 신경 쓸 필요 없이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장고준은 편안한 좌석에 금방 수면에 빠져들었다.
장고준이 일어난 건 몇 시간 후의 밤이 되어서다. 그는 화장실을 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잠든 이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기에 자연스레 기척을 숨겼다.
‘……아영이가 깨어있나?’
한아영의 좌석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깨어있다면… 잠깐 대화를 나누자. 영웅의 회오 던전에서 아영이가 얻은 성과도 궁금하고….’
좌석에 다가가던 장고준은 멈칫했다. 한아영의 좌석에서 무언가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칸막이는 위쪽 부분이 열려 있어서 내부가 완벽히 가려지지 않았다. 장고준은 천천히 좌석으로 이동했다.
“으응, 응….”
“하읍….”
무언가를 빠는 소리와 교태가 담긴 여자의 신음.
장고준은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을 느끼면서 기척을 최대한 죽이고 좌석에 접근해 그 내부를 살폈다.
“……!!”
장고준이 본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한하린의 좌석인데 그 중심에는 성유진이 앉아 있고, 옆에는 한하린이 앉아 성유진과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리고 성유진의 다리 사이에 한아영이 무릎 꿇고 앉아 있다. 바지 지퍼를 내려 꺼낸 성유진의 자지를 입에 물고 고개를 흔들며 빨고 있다. 그녀는 장고준이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음란한 얼굴을 짓고 있었다.
“누나. 내 자지 맛있어요?”
“응. 맛있어…. 입안에 싸줘.”
장고준은 좌석에서 물러났다. 그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머리가 아파오고 손발이 덜덜 떨렸다.
자매가 한 남자랑 육체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니. 그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리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이건 꿈이야. 꿈에서 깨면 돼. 그 아영이가 그럴 리 없잖아.’
꿈이 아니란 걸 알고 있다.
꿈과 현실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힘든 것도 아니다.
그저 믿고 싶지 않을 뿐.
‘……빌어먹을. 아영이와 하린이는 왜 그딴 놈을 좋아하는 거야? 내가 그놈보다 못하는 건 없을 텐데…!’
장고준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그는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잠들지 못했다.
“아앙. 유진아. 박아줘. 어제는 하린이 한테 먼저 했으니… 오늘은 나부터야. 알았지?”
“여기서요? 들키면 어쩌려고요?”
“괜찮아. 고준이는 자고 있고, 승무원도 여기 없으니까. 신음 정도는 참을 수 있어.”
“언니는 자지 빨았잖아. 비켜.”
“얘 좀 봐. 넌 유진이랑 아까부터 키스했잖아. 나도 유진이랑 키스하고 싶었는데 양보해준 거 모르니?”
“…알았어. 빨리하고 비켜.”
옷을 벗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의 옷인지는 안 봐도 뻔했다. 이윽고 한아영의 낮은 신음 소리가 들렸다.
장고준은 이를 악물었다. 발기한 자신의 그곳을 있는 힘을 다해 무시했다.
???
어제 집으로 돌아온 나는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예상했던 대로네.’
뉴스가 이어지고 있다. 협회가 한아영을 S급으로 인정했다는 소식이 계속 나오고 있었다.
한국의 최연소 S급 헌터. 그 타이틀을 단 한아영은 당분간 바쁜 일상을 보낼 것이다.
‘장고준도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네.’
장고준은 비행기에서 나와 한아영, 한하린의 관계를 알았다. 알았다고 해서 그가 뭘 할 수 있는 건 없다.
한아영에게 협박한다? 한아영이 고작 그 정도로 흔들 리가 있나.
대중에 폭로한다? 현재 한국 정부와 협회, 그리고 대중은 한국의 최연소 S급 헌터 탄생에 기뻐하고 있다. 장고준의 증거 없는 폭로를 믿지도 않을뿐더러, 도리어 매장당하는 건 장고준이 될 것이다.
‘그냥 주제를 알고 꺼졌으면 좋겠군.’
거슬린다.
내 여자의 옆에서 호시탐탐 없을 기회를 노리는 꼴이 무척 거슬린다.
‘생각이 있으면 포기하겠지.’
나는 한아영에 대한 정보를 보다가 스마트폰을 들었다.
[아카데미의 구원자를 선택했습니다.]
[유희를 시작합니다.]
???
[아카데미의 구원자] 세계에 들어온 나는 기숙사 베란다로 나갔다. 강원도라 그런지 밤하늘에 별 몇 개가 보였다. 바람이 불어왔다. 밤바람 특유의 서늘함이 기분 좋았다.
‘정령안.’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변한다.
‘천안.’
동시에 천안 스킬까지 사용했다. 시야가 탁 트였다. 투시가 가능한 내 눈은 아카데미 건물을 훑었다. 결계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정령안과 천안으로 꿰뚫어 보는 건 일도 아니다.
‘역시 있군.’
몰래 움직이고 있는 아카데미 직원이 보였다. 철저하게도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며 CCTV가 없는 곳을 피해 은밀하게 움직인다. 전문 암살자의 실력이었다.
‘암살자…. 즉, 그 사건은 일어난다는 거군.’
원작 게임은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선택해 스토리를 진행한다. 그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선택했을 때만 즐길 수 있는 개인 이벤트 스토리가 있다.
‘여긴 현실이니 시간적으로나, 장소적으로나 개인 이벤트 스토리가 전부 진행되는 건 불가능하지. 어떤 스토리가 진행될지 찾고 있었는데… 눈 덕분에 쉽게 발견했어.’
아카데미 초반, 암살자와 관련된 개인 이벤트 스토리는 류하나의 것이다.
암살자는 수석인 류하나를 노린다.
그 이유는 복잡하지 않았다.
류하나는 한국 최고의 클랜 중 하나인 노스다이아 클랜장의 딸이자, 정식 후계자다. 천재라 불리는 그녀를 미래의 성가신 경쟁자가 되기 전에 미리 없애려는 것이다.
‘지금 암살자를 공격해서 죽이면 암살자 이벤트는 그걸로 끝나겠지.’
머리가 굴려 갔다.
암살자 이벤트가 발생하며 얻을 것들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류하나와 거리를 좁힐 좋은 기회지. 그리고 이걸 빌미로….’
이 이벤트를 발생시키는 것으로 얻을 것들이 많았다.
나는 암살자를 계속 지켜봤다. 암살자는 아카데미의 서류를 조작하고, 직원 전용 기숙사가 있는 곳은 아니었다. 어디로 가는지, 뭐 하는지 알기에 시선을 거두었다.
‘류하나는 집중 공략하면 3개월 내로 따먹을 각이 보이는데… 아카데미에는 따먹을 년들이 많단 말이지.’
아카데미의 섹스 마스터가 될 그 날을 고대하며 방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아래쪽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내리자 아카데미 교복을 입은 검은 머리의 여학생이 보였다.
입학 순위 3위의 최다연이다.
나는 최다연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최다연은 날 잠시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획 돌리고 기숙사로 걸어갔다.
‘도도하네, 최다연. 인사 정도는 받아주지.’
나는 입맛을 다시며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들었다.
“선생 나야. 지금 갈 테니 보지 씻고 기다려.”
나는 즐거운 아카데미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