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4화 〉 924. 아카데미의 구원자
“……미안하지만 좀 도와주지 않겠나? 몸이 끼여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죠. 당기면 됩니까?”
“그, 그래….”
남궁화연의 목소리에는 부끄러움이 섞여 있었다. 내가 뒤에서 치마 속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다.
남궁화연의 양 발목을 잡고 당겼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힘을 더 주었다.
“크으윽! 아, 아프다!”
“아, 죄송합니다. 그런데 꿈쩍도 하지 않는데요. 차라리 땅을 파서 공간을 더 넓히는 게 낫지 않을까요?”
“…혹시나 했는데 역시인가. 아마 그 방법도 소용없을 거다. 공간족제비가 장난을 쳤다.”
공간족제비.
이 세계에 있는 D급 몬스터다.
길쭉한 하얀 몸에 붉은색 동그란 문양이 그려진 족제비다. 공간과 다루는 힘을 가졌다. 장난기가 많고, 싸우면 의외로 위험한 몬스터다.
‘…공간족제비가 벌써 나타나는 건 원작 대로가 아닌데….’
원작 내용은 남궁화연이 몬스터의 흔적을 찾아 이리저리 고생한 끝에 공간족제비와 마주하게 된다.
‘내가 끼어들면서 변했군.’
나는 남궁화연의 발을 내리고 그녀의 치마 속을 빤히 바라봤다. 팬티의 중심을 꾹 눌러보고 싶다.
“……시선이 느껴지는군. ……내 치마 속을 보고 있나?”
“그럴 리가요. 전 다른 사람이 오지 않는지 망을 보고 있습니다. 아, 다른 사람을 불러오는 편이 더 좋을까요?”
“아니. 됐다. 공간족제비의 장난이니 10분 정도면 괜찮을 거다. …사람이 오면 내가 이 꼴이란 걸 숨겨다오.”
“네. 맡겨만 주십시오.”
그렇게 10분이 지나고 남궁화연은 개구멍을 통해 담벼락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공간족제비는 오른쪽으로 갔다. 다행히 본관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본관에 들어가면 위험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거겠죠.”
남궁화연은 자연스레 왼쪽으로 걸었다.
“이쪽이 공간족제비가 도망친 방향이다. 그러나 나는 놓쳤다. 정확히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 모른다. 혹시 네 눈으로 알 수 있나?”
“불가능합니다. 제 정령안은 추적에 특화된 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공간족제비가 어디로 갔는지는 보이네요.”
“보인다고?”
“전 마나를 볼 수 있습니다. 공간족제비가 지나 간 곳은 마나가 불안정하게 흐트러져있습니다. 1시간 정도 지났다면 모를까. 지금이라면 추적할 수 있습니다.”
공간족제비는 공간을 비틀거나 고정하는 등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 엄청난 힘이지만 자유자재로 사용하지 못한다. 마나에 흔적이 남긴 것은 그 때문이겠지.
‘굳이 이렇게 추적하지 않아도 어디에 있는지 짐작이 가긴 한다만….’
남궁화연의 호감도를 높이려면 귀찮아도 함께 추적하는 편이 낫다. 참고로 지금 그녀의 호감도는 30이다.
“미안한데, 끝까지 도와줬으면 한다. 공간족제비를 내버려 두면 학생들이 피해를 볼 것이다. 오늘 이 일을 끝내고 싶다.”
“누구 부탁인데 거부할까요. 도와드릴게요.”
“고맙다. 오늘의 도움은 잊지 않고 나중에 꼭 갚도록 하지.”
나는 앞장서서 움직였다. 남궁화연이 내 뒤를 따라왔다. 걸어가면서 남궁화연과 대화를 나눴다. 아카데미에 관한 시답잖은 이야기였다.
“네가 말했던 수상한 인물, 너는 그게 누구라고 생각하지?”
“음. 왠지 느낌 적으로 학생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나는 처음에 그 말을 들었을 땐, 몬스터를 데려온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몬스터가 공간족제비인 이상 그 가능성은 작아졌다.”
“왜죠?”
“공간족제비는 몬스터 중에서도 특히나 인간을 따르지 않는다. 무언가 목적이 있었다면 고분고분한 몬스터를 데려왔겠지. 즉, 네가 봤다는 수상한 인물과 공간족제비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것이 내 추측이다.”
맞다. 아무 관계 없다.
“…외부인은 아닌 것 같은데…. 제가 잘못 본 걸까요?”
“직원일 수도 있다. 다만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다. 예전에 아카데미 직원으로 변장한 범죄자가 침입한 경우도 있으니.”
“그러고 보니 그 수상한 인물이 아카데미 뒤쪽으로 걸어가던 것 같던데요….”
“아카데미 뒤쪽? 거기엔… 인공 던전이 있는 곳이군. 반대항전이 다음 주 일 텐데…. 이건 따로 선생님들에게 보고하겠다.”
“확실하지 않습니다만….”
“확실하지 않더라도 확인할 필요는 있다.”
나는 멈췄다. 도착한 곳은 아카데미 본관과 조금 떨어져 있는 창고였다. 책상이나 의자, 청소 도구 등을 보관하는 창고.
창고문은 열려 있었고, 그 안에서 공간족제비의 기척이 느껴졌다.
“도와줘서 고맙다. 네가 아니었다면 꽤 고생했을 거다. 공간족제비는… 내가 처리하지.”
허리춤에서 환도를 뽑은 남궁화연이 창고로 뛰었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이름: 남궁화연
근력: B 체력: C+ 민첩: C+ 내구: B- 마나: C-
특성: 싸울아비(S)
스킬: 귀도(A), 축지(A+), 바람칼(B-)
호감도: 31』
그새 호감도가 1 올랐다.
‘이 정도 능력치면 내가 끼어들 필요는 없겠군.’
남궁화연의 성격을 잘 안다. 억지로 전투에 끼어들었다간 오히려 호감도만 깎아 먹는다.
그녀는 스킬인 축지(A+)를 사용했다. 발로 땅을 박차고 순간적으로 대시한다. 공간 이동을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의 빠르기다. 실제로 축지가 S랭크에 달하면 짧은 공간 이동이 가능하다.
‘원작 게임에서 축지(S)를 쓰는 맛이 제법 있었지.’
찌익! 찌찌익?!
놀란 공간족제비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직후, 창고 벽이 부서지고 남궁화연의 몸이 하늘을 붕 떴다. 팔락이는 치마 안쪽으로 하얀 팬티가 보였다.
“남궁화연 선배?!”
몸을 한바퀴 돌리며 지상에 착지한 남궁화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꼴사나운 꼴을 보였군. 창고 안쪽이 좁아서 조금 방심했다. 딱히 다친 곳은 없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남궁화연은 다시 공간족제비를 향해 달려들었다. 공간족제비는 깜짝 놀라더니 도망치기 시작했다. 공간족제비 주위의 공간이 일그러진다. 남궁화연은 일그러지는 공간을 피하며 칼을 휘둘렀다. 바람의 칼날이 공간족제비를 노렸다.
키이이이잉.
공간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도망치던 공간족제비가 남궁화연에게 몸을 틀었다.
“일격 승부인가. 좋다. 상대해주마.”
양손에 칼을 쥔 남궁화연이 축지를 사용했다. 일순간 그녀의 몸이 사라지더니 공간족제비 뒤편에 나타났다. 공간족제비의 몸이 갈라지고 피와 함께 땅바닥에 떨어졌다.
남궁화연은 칼을 검집에 넣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갔다. 공간족제비는 확실하게 죽었다.
“고맙다. 네 덕분에 인명피해가 발생하기 전에 몬스터를 처리할 수 있었다. 네 능력은 확실히 도움이 됐다. 선도부에 들어올 생각은 없나?”
“없습니다. 그래도 제 능력이 필요하시면 가끔 도와드리죠.”
“그 말, 무르기 없기다. 나중에 정말 네 도움이 필요하게 될지도 모른다.”
“저도 공짜로는 안 해줍니다.”
“그만 돌아가도 된다. 공간족제비의 시체와 부서진 창고는 내가 정리하도록 하지.”
그녀는 스마트폰을 들어 누군가와 통화했다. 아마 선도부를 담당한 선생일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인사하고 기숙사로 돌아갔다. 귀찮은 뒷정리는 사양이다. 호감도 1 올린 것으로 만족한다.
???
반대항전을 앞두고 방과 후에 1학년 1반 학생들이 강의실에 모두 모였다. 반대항전까지 앞으로 남은 시간은 사흘. 손을 맞추거나 전략을 짤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까 너희 끼리 짠 전략이 이거라고?”
“맞아. 반장과 부반장이 없어서 우리끼리 짰어.”
덥수룩한 검은색 머리의 남자가 말했다. 이름은 강지온. 26위로 상위권에 드는 성적을 가졌다.
“나야 일이 바쁘니 그렇다 쳐도… 부반장, 최다연이 없었다고?”
“부반장도 바쁘다던데.”
나는 최다연을 쳐다봤다. 그녀는 뒤쪽 자리에 앉아 팔짱을 끼고 도도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전혀 바빠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안 바쁜 모양이네.”
강지온이 입가를 삐죽이며 말했다. 나와 최다연에 대한 불만이 쌓인 모양이다. 반행사에 반장과 부반장이 나 몰라라 하고 빠졌으니 화가 나는 것도 당연했다. 이해한다.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짜증이 났다. 남자 새끼가 감히 반장인 내 앞에서 띠꺼운 태도를 보이다니…. 그래도 일단 참았다.
“절반은 사냥에 집중하고, 절반은 방해에 집중한다? 사냥에 집중하는 인원인 전부 상위권 성적으로 몰려 있잖아. 이딴 게 무슨 작전이야.”
강지온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반장. 이제 와서 왜 그래? 지금까지 반장은 아예 우리랑 작전을 짜지도 않았잖아!”
“야, 그래도 이건 아니야. 작전 바꾼다. 4반을 방해하는 건 나 혼자. 나머지는 전부 사냥에 집중. 오케이?”
강의실 안이 술렁거렸다. 그들에게서 불만의 기색이 느껴진다.
“후우.”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일부 학생들이 흠칫 떨었다. 나와 같은 반인 그들은 내 성격이 얼마나 더러운지 대략적이나마 알고 있다.
나는 같은 반 여자들에겐 젠틀 했으나, 남자 놈들에겐 아니었다.
“내 말대로 해. 그래야 승률이 가장 높으니까.”
“…웃기지 마. 반장이 좀 강하다고 해서 4반 전체를 혼자 상대할 순 없어. 4반에는 수석이 있는 걸 잊었어?”
강지온의 눈동자가 불온했다. 그의 뒤로 5명이 넘는 남자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날 쳐다본다. 나에게 쌓였던 불만이 알게 모르게 터지려 하고 있었다.
참자.
말로 하면 설득할 수 있다.
……그런데 굳이 말로 설득할 필요가 있나?
그 의문이 드는 순간 손이 멋대로 나갔다. 강지온의 오른뺨에 싸대기를 날린 것이다.
콰앙!
싸대기 치고는 소리가 좀 많이 격렬했다. 강지온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코와 입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씨발. 좆밥 새끼가 아까부터 존나 개기네. 난 반장이야. 이 반의 장이라고. 나보다 약하면 아가리 닥치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알겠냐, 좆밥 새끼야!”
“이 씨발!!”
강지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마나가 다리 쪽으로 움직인다. 콱! 내가 먼저 강지온의 오른발등을 밟았다. 다시 손바닥이 휘둘러진다.
콰아앙!
강지온이 바닥에 쓰러졌다.
“주제 좀 알아라. 여기가 아카데미만 아니었으면, 넌 내 손에 찢어 죽었어. 좆밥아.”
강지온의 몸을 발로 찼다. 강지온이 일어나려고 했으나, 그때마다 내 다리가 그를 저지했다.
“커헉, 컥! 크컥!”
강지온은 결국 몸을 웅크리고 밟히기만 했다.
“그만! 유진아, 그만해!”
김천우가 나타나 내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아 씨, 놔 봐 이 새낀 더 맞아야 해.”
“진정해! 그리고 솔직히 네가 잘못한 거 맞잖아. 진정하라고!”
김천우는 진지했다. 이 이상 하면 김천우랑 싸우게 될 것 같았다. 김천우한테 질 생각은 없었지만, 김천우와 관계가 완전히 틀어지는 건 피해야 한다.
나는 혀를 차며 강지온을 패는 걸 멈췄다.
주위를 둘러봤다. 분위기가 싸해져 있었다. 내게 반항적인 눈빛을 보내던 남자들은 내 시선을 피했다.
“오늘 일은 함구해라. 괜히 알려져서 귀찮게 되면… 가만히 안 넘어간다.”
반 전체에 살기를 담아 경고했다. 몇몇은 아예 관심 없다는 표정이었고, 몇몇은 겁에 질렸다.
“그리고 반대항전 작전은 내가 하라는 대로 하고.”
“유진아. 아무리 그래도 그 작전은 무리인 것 같아.”
“김천우. 너 나보다 강해? 나랑 싸우면 이길 수 있어?”
“……아니.”
“그럼 내가 하라는 대로 해. 난 나보다 약한 놈 말은 안 들으니까.”
“…….”
김천우가 입을 다물었다. 복잡한 얼굴이었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강지온을 부축해서 일으켰다.
“…반장.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웬 여학생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럼 작전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볼까.”
일순 주위에 어색한 공기가 돌았다. 김천우가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
“…아가씨. 제가 이런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저놈… 또라이 중의 또라이가 확실합니다. 연관되지 않는 게 최선입니다.”
최다연의 똘마니이자, 입학 첫날에 성유진에게 호되게 당한 적 있는 이강후가 목소리를 낮추며 최다연에게 말했다.
최다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함부로 말을 걸어도 좋다고 했지?”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 전 그저 걱정돼서….”
“하아…. 넌 아무것도 몰라. 저건 카리스마라고 하는 거야. 반을 장악하려고 일부러 과하게 손을 쓴 거지.”
“……아무리 봐도 분노 조절 장애 같았습니다만.”
최다연이 이강후를 찌릿 노려봤다. 이강후는 입을 다물었다.
“성유진은 저래 보여도 생각이 깊어. 아무것도 모르면 닥치고 있어.”
“…….”
이강후는 입 밖으로 나오려는 한숨을 꾹 참았다.
종잡을 수 없는 성유진과 성유진에게 묘하게 호의적인 아가씨. 이강후는 막대한 스트레스에 탈모가 올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