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5화 〉 925. 아카데미의 구원자
오늘 방과 후에는 간만에 훈련실로 향했다.
아카데미 재학생 중에서 훈련실을 이용하지 않는 학생은 없다. 아카데미 학생과 만나고 인연을 맺기 좋은 장소가 훈련실이다.
특히나 훈련실에는 플레이어블 캐릭터이자, 아카데미 1학년 수석인 류하나가 거의 매일 이용한다. 다른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플레이 할 때 훈련실을 찾아가면 높은 확률로 류하나를 만날 수 있다.
훈련실 로비에 들어서자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향했다. 본능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내 존재감이라도 느낀 모양이다.
몇몇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나를 보고, 몇몇은 저들끼리 조용히 수군거렸다. 귀에 집중하자 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쟤가 1반의 성유진이라고?”
“희귀한 정령사라던데?”
“들리는 말에 의하면 1학년 수석보다 더 강하다더라.”
“집안도 보통이 아니야. 진령성가 알지?”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나에 대한 평가를 나누고 있다. 그중에는 2~3학년들도 있다. 몇몇은 내게 다가와 질문을 던졌다. 질문은 귀찮음을 무릅쓰고 대답해줬다. 내 성질대로 하기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입학 순위 5위인 성유진이지? 2반의 66위인 이민주야. 혹시 괜찮으면 같이 훈련하지 않을래?”
단발머리의 귀여운 인상의 여자였다. 옷소매에 있는 파란색 줄을 보니 나와 같은 1학년이다.
“미안. 오늘 일정은 정해져 있어서…. 대신 다음에 같이 하자. 폰번 좀 가르쳐 주지 않을래?”
내게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전부 친절히 대했다.
‘평판은 좋게 유지하는 편이 좋으니까.’
훈련실 복도를 걸었다. 비어있는 훈련실을 무시하고 계속 복도를 걸었다. 류하나가 주로 이용하는 훈련실은 3개로 정해져 있었다. 그 훈련실이 전부 꽉 차지 않은 이상 다른 훈련실은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훈련실 안을 확인할 수 없다는 건데… 내겐 그 불편함도 통용되지 않지.’
해킹!
훈련실을 이용하기 위해선 학생증이 있어야 한다. 즉, 누가 어떤 훈련실을 사용하는지 전산처리 되어 기록된다는 것이다.
‘현대 쪽 세상에선 역시 이 해킹만큼 쏠쏠한 능력은 없다니까. …찾았다.’
나는 류하나가 사용 중인 훈련실 주위 복도를 계속 반복해서 걸었다. 지나가던 몇몇이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떠났다. 개의치 않았다.
15분 정도 그러고 있자 훈련실의 문이 열렸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연보라색 머리카락과 다크 블루 눈동자. 류하나였다.
운동복을 입은 그녀는 멀끔했다. 훈련실 내에 있는 샤워실을 이용했는지 샴푸향이 났다.
“안녕.”
내 인사에 류하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안녕.”
류하나는 무뚝뚝한 편이지만, 최다연처럼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무시하지 않는다.
“오늘은 바로 지나가지 않네?”
그동안 나는 류하나와 마주치면 간단한 인사만 나누고 지나쳤다. 이유는 별거 없었다. 나와의 대련을 원하는 류하나를 달아오르게 할 생각이었다. 원하는 걸 쉽게 손에 넣을 수 없어야 가치가 더 올라가는 법이니까.
효과는 탁월했다. 그 증거로 류하나의 두 눈은 이글거리듯이 타오르고 있었으니까.
“나와 대련해줄 수 있어?”
“오늘은 가능하긴 한데… 괜찮겠어? 방금 훈련했잖아. 지쳤을 테니 다음에 해도 돼.”
“문제없어. 안으로 들어와.”
류하나를 따라 훈련실 안으로 들어갔다. 저번처럼 누군가가 훈련실 문을 열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잠갔다.
양손에 각각 훈련용 검을 든 류하나가 내게 물었다.
“네 무기는?”
“검.”
나도 훈련용 검을 들었다. 그녀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스러워 보인다. 내가 본래는 검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전력으로 갈 거야. 그러니 너도 전력을 다해.”
“그건 어렵겠는데.”
류하나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왜? 나로는 부족해?”
“부족하지. 내 실력 알잖아. 솔직히 말해서 이 대련을 통해 내가 얻는 것도 별로 없어. 나보다 약한 자를 상대로 실력이 일취월장하는 것도 아니고.”
“…….”
그녀는 반박하지 못했다. 왜냐, 사실이니까. 지금 그녀와 나 사이에는 최소 3개 이상의 벽이 있었다. 류하나 또한 어렴풋이 느낄 거다. 지금 상태에서 아무리 싸워도 나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네 말대로야. 이 대련은 일방적으로 내게 도움만 되는 대련이야. 네가 얻을 건 없지. …혹시 원하는 거라도 있어?”
류하나는 빚을 지는 건 싫어한다. 그리고 노스다이아는 대기업에 버금가는 클랜이다. 내가 1억을 요구하면 내 계좌에 1억이 들어오겠지.
“돈은 됐어. 대신 대련에서 내가 이기면 부탁 하나 하자.”
“…무리한 부탁은 들어줄 수 없어.”
“무리하지 않은 부탁이야. 반대항전이 코앞까지 다가온 거 알지?”
“……부정한 부탁이라면 거절이야.”
그녀는 4반이고 나는 1반. 좋든 싫든 반대항전에서 우리는 마주하게 된다.
“일단 들어봐. 반대항전에서 나는 직접 움직여서 너희 반을 방해할 거야. 말해서 너희 반 전원을 전부 쓰러뜨릴 수 있어.”
“그건….”
“불가능하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지?”
“…….”
지금 시점에서 신입생은 햇병아리다. 입학 순위 상위권은 그럭저럭 현직 히어로와 비빌 수준은 되지만, 그 이하는 말할 가치도 없다.
“너는 성적을 챙기고 싶잖아. 근데 1반의 승리는 확정이야. 왜? 내가 있으니까.”
오만하게 말해도 그녀는 부정하지 못했다. 사실이니까.
“…그래도 부정한 행위는 용납할 수 없어.”
선도부장인 남궁화연이 들었다면 아주 좋아할 말이었다. 실제로 게임에서 류하나는 남궁화연과 잘 지냈고.
“내 조건은 반대항전이 시작하면 너와 내가 빠지는 거야.”
그래도 승률은 1반이 지나치게 높다. 1반에는 2위인 김천우와 3위인 최다연이 있다. 류하나가 아니면 상대하기 힘들다. 그러나 내가 나서는 것보다 승률은 더 높다.
“…모르겠어. 대체 무슨 의도야?”
“너와 나를 위한 의도지. 확실하지 않은 정보지만… 아카데미에 암살자가 스며들어 왔어.”
류하나는 놀라지 않았다. 당황하지도 않고 냉정함을 유지하며 내 말을 들었다. 암살자의 존재가 익숙한 것이다.
“직원이나 교사에게 말해야 하는 게 맞지 않아?”
“그 교사나 직원이 암살자일지도 몰라. 확실한 정보가 아니라고도 말했잖아. 암살자의 정체가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고.”
“나랑 둘이서 암살자를 잡자는 거야?”
“암살자의 표적에 가장 가까운 건 너랑 나야.”
“너희 반에는 최다연도 있잖아.”
“최다연 옆에는 호위가 붙어 있어.”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내 생각대로 대답했다.
“……알았어. 네 부탁대로 할게. 네게도 생각이 있겠지. 아, 이건 대련과는 별개야. 다른 걸 부탁해. 아마 암살자는 날 노릴 확률이 높으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옛날부터 그랬어.”
“흐음. 그럼 뭐…. 끝나고 저녁이나 얻어먹을까.”
“……겨우 그 정도로 되겠어?”
의외라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 이것도 전부 내 계획대로다. 나는 앞으로 일주일에 한 번 이상 그녀와 대련을 할 것이고, 대련에서 이기면 보상을 요구할 것이다. 섹스를 요구하는 미친 짓은 안 한다. 통하지 않을 테니까. 목적은 친분을 쌓는 것과 내 부탁을 들어주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
“싫음 말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돌렸다. 다급해지는 건 류하나였다.
“아, 알았어. 저녁은 내가 대접할게. 그러니 나와 대련해줘!”
“어떤 저녁일지… 기대되네.”
몸을 돌렸다. 싸우기 전에 그녀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이름: 류하나
근력: D+ 체력: D+ 민첩: C+ 내구: E 마나: B-
특성: 검의 무녀(SS)
스킬: 신검합일(A), 검의 노래(A), 영검(C).
호감도: 16』
저번에 봤을 때와 비교해서 그녀의 체력과 내구 능력치가 올랐다. 그 외는 똑같다.
“시작하자.”
그녀가 말했다. 나와 그녀는 동시에 검을 들어 올렸다. 류하나에게서 마나가 요동친다. 마나로 전신을 강화하고 신검합일(A)을 통해 집중력을 올린다. 영검(C)까지 발동했는지 검이 달빛처럼 은은하게 빛난다.
검기와는 다르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검기보다 더 위험하다. 영검(C)이라면 이 훈련실에 걸려 있는 결계를 무시하고 내게 직접적인 치명타를 입힐 수 있으니까.
‘작정했군.’
예상했던 일이었다. 놀랍지도 않다.
손에 쥔 검에 푸르스름한 검기가 일어난다. 검기라면 영검에 대항할 수 있다.
“…….”
검기를 본 류하나가 신중해졌다. 내가 피식 웃자 그녀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움직임 자체는 깔끔했다. 단지 능력치 차이로 인해 그 움직임이 내게 전부 보인다는 게 문제지.
‘능력치 차이뿐만이 아니라, 경험치 차이도 있지만 말이야.’
카앙!
검과 쌍검이 부딪혔다. 나는 팔에 힘을 주었다. 이 세계에 오기 전에 현실에서 배운 ‘완벽한 육체의 힘’을 사용한다. 류하나는 내 힘을 버티지 못하고 뒤로 날아갔다. 허공에서 허리를 튕기며 바닥에 착지한 그녀가 다시 달린다.
‘이번엔 오른쪽이군.’
쳐냈다. 충격에 대비했는지 아까처럼 멀리 날아가지 않았다.
‘상단. 후방. 왼쪽 하단.’
전부 보였기에 전부 쳐냈다. 나는 그렇게 3분 동안 움직이지 않고 그녀의 검을 쳐내기만 했다.
“하악, 하아… 하아.”
류하나의 거친 숨소리는 섹시했다. 투명한 땀방울이 그녀의 잘난 콧대를 타고 아래로 흘러내린다.
‘오랜만에 그거 써볼까.’
앞으로 걸음을 나선다. 류하나는 갑작스러운 걸음에 깜짝 놀란 듯 경계했다.
영천류(影天流) 벽계(碧溪).
류하나의 눈동자가 내게 향했지만, 곧 흔들리더니 멀어졌다. 벽계가 제대로 통했다는 뜻이다.
쌍검이 치켜 올라가더니 휘둘러졌다. 너무 빨랐다. 쌍검은 내 옷깃 한번 스치지 못했다. 당황한 류하나가 다음 대처를 하기 전에 그녀의 옆을 지나치며 검을 휘둘렀다.
“으으윽…?!”
운동복과 훈련실의 결계에 의해 보호받아 다치는 일은 없더라도 고통은 그대로다. 그녀는 한 차례 바닥에 주저앉았다가 일어났다.
“…졌어. 설마 이 정도의 차이가 있을 줄은 예상도 못 했어. 입학 시험 때보다… 더 강해졌구나.”
복잡한 눈으로 날 쳐다본다. 천재를 바라보는 눈이다. 뭐라 말하기 좀 그랬다. 내가 더 강하게 느껴진 건 아마 ‘천안(天眼)’ 스킬 때문이다. 천안은 발동하지 않더라도 내 감각을 끌어올려 주니까.
“……어떻게 하면 그렇게 빨리 강해질 수 있어?”
류하나가 물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훈련이 답이라는 거야. 그보다 약속했던 대로 저녁은 대접해줄 거지?”
“나는 약속을 어기지 않아.”
나와 그녀는 샤워실에서 몸을 씻고 훈련실을 나왔다. 씻었다곤 하나 므훗한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 그 정도의 관계는 아니다.
나는 류하나의 뒤를 따라갔다. 저녁 대접. 외출을 하기엔 너무 늦었으니 식당에서 음식을 사주려는 걸로 대충 생각했다. 그게 상식이었으니까.
‘……내가 류하나를 너무 얕봤군.’
류하나는 자기 기숙사로 날 초대했다. 물론 절차는 확실하게 밟았다. 내가 기숙사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2시간뿐이었다.
‘보통 이렇게 쉽게 들여보내 주지 않는데… 류하나라서 그런가.’
거실에 앉아 부엌에서 들리는 요리 소리를 들었다. 소리만 들으면 막힘이 없었다. 평균 이상의 요리 실력은 갖췄다는 말이다.
“다 됐어.”
식탁 앞에 앉았다. 식탁 위에는 제법 그럴싸한 요리들이 널려 있었다. 미역국과 김치를 포함한 반찬 5종. 우선 미역국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
“어때? 맛없지는 않지?”
“어. 맛있어. 네가 요리를 이렇게 잘할 줄은 몰랐어.”
살짝 립서비스를 해줬다. 사실 고급스러운 내 혀에는 평범하게 느껴지는 맛이었다. 맛없지도, 그렇다고 특출나게 맛있지도 않다.
“요리를 하는 건 오랜만이라 조금 걱정했는데… 맛있었다면 다행이네.”
저녁 식사를 끝낸 뒤에 돌아가려는 걸 류하나가 막아섰다.
“잠깐. 다음 대련은 언제 해줄 거야?”
“글쎄. 다음 대련까지는 너도 시간이 필요하잖아.”
“…못해도 다음 주에는 대련해줬으면 좋겠어.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확인하고 싶어.”
“다음 주 수요일이라면 괜찮아. 대신, 그때 내가 이기면… 같이 게임이나 하자. 괜찮지?”
“게임…? 알겠어.”
류하나는 의문을 느낀 듯 잠깐 눈을 찌푸렸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와 인사를 나누고 밖으로 나갔다. 언젠간 이 여자 기숙사에 당당히 찾아와서 모조리 따먹어 버릴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