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7화 〉 927. 아카데미의 구원자
반대항전이 시작됐다.
나를 포함해 1학년 1반 학생들은 모두 반대항전의 배경이 되는 인공 던전에 들어섰다.
푸른 하늘. 태양. 숲. 산. 호수. 초원.
있을 건 전부 구현되어있는 인공 던전에 학생들은 모두 감탄사를 흘렸다. 물론 나 또한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어차피 여긴 창작물 속. 뭐가 불가능하겠는가.
“촌놈처럼 굴지 말고 정신 차려.”
내가 말했다. 1반 학생들의 시선이 내게 향한다. 그들의 얼굴도 진지하게 변했다. 여긴 전쟁터였다.
나는 주위를 한차례 둘러봤다. 내 말을 무시하는 놈은 없었다. 가장 걱정한 건 최다연의 반항이다. 원작 게임을 몇 번 플레이하다 보면 최다연은 돌발 행동을 할 때가 많았다. 다행히 지금은 내게 집중하고 있다. 돌발 행동을 할 것 같진 않았다.
“모카.”
정령, 천둥부엉이 모카를 소환했다.
“꾸우욱!”
허공에서 모카가 나타났다. 하얀 날개를 퍼덕이던 모카는 내 의지에 따라 하늘 높이 치솟았다. 동시에 정령안(S)을 사용한다.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변하고 모카와 시야가 공유된다.
‘여기서 천안(天眼)까지 발동하면 정령안과 연계가 가능하지.’
이미 인공 던전에 들어오기 전에 확인은 끝났다. 모카의 시야가 더 선명해지고 멀리 있는 곳도 내다볼 수 있으며 투시가 가능 했다.
“4반을 찾았어. 호수 끝 부분에 있어.”
주위 여기저기에서 감탄사가 흘려 나왔다.
“오오… 역시 반장이야.”
“알고는 있었는데 정찰 능력 하나는 끝내주네.”
“따지고 보면 인공위성을 하늘에 띄운 거나 다름없잖아. 반대항전은 우리의 승리야.”
인공위성. 그 말이 틀린 건 아니다. 모카를 더 높이 날게 하면 정말로 인공위성의 일을 수행할 수 있다. 투시가 가능한 천안까지 생각하면 인공위성 이상의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몬스터의 위치는 파악했어. 산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지만, 숲 쪽으로 가. 바로 옆에 있는 숲도 놓칠 수 없으니까. 그리고 4반은 산으로 향하고 있으니까.”
4반을 방해하는 건 내 일이다. 다른 학생들은 부딪치지 않고 사냥에 집중하는 편이 낫다.
“최다연. 네가 반을 이끌어. 잘할 수 있지?”
“날 뭐로 보는 거야?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난 차라리 너와 같이 4반을 방해하고 싶은데. 그게 더 재밌을 테니까.”
“사냥은 네 전문이잖아. 부탁할게.”
“…뭐, 좋아. 네 말대로 사냥은 내 전문이니까.”
최다연이 활을 들고 전통의 화살을 점검했다. 넓은 공간과 몬스터 사냥. 그녀가 활약하기 딱 좋은 환경이 갖춰져 있었다.
나는 김천우에게 눈짓했다. 김천우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4반을 방해하는 건 나와 김천우 두 명이다. 원래는 나 혼자서 하려고 했는데, 같은 반 여학생들의 반발에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말했던 대로만 해. 그럼 우리가 이길 거야.”
작전을 시작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담당 선생은 밖에서 지켜보고 있을 것이며, 아카데미 직원은 만일을 대비해 인공 던전 내에 들어와 숨어 있다. 정확히 몇 명인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확실한 건 그들 사이에 암살자가 끼어 있다는 것이다.
“유진아. 우리 둘이서 4반을 방해할 수 있을까? 4반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
“내 눈에는 호락호락해 보이니까 할 수 있어.”
“…….”
김천우는 어이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면서 다리는 꾸준히 움직였다.
4반을 발견했다. 모카의 시야 공유가 아닌 육안으로 확인했다. 4반은 산으로 향했다. 류하나는 미리 말을 나눴던 대로 행동했다.
“저기 있군. 우선 간단히 인사 차원으로 방해부터 해볼까.”
“잠깐만 유진아!”
늦었다.
나는 이미 하늘에서 벼락을 떨어뜨렸다.
쿠르르릉콰쾅!
화끈한 천둥 소리와 함께 푸른 번개가 지상으로 떨어졌다. 나와 모카의 합작이었다. 벼락은 연달아 3개가 내려꽂혔고, 운이 좋게도 4반의 4명이 리타이어 되었다. 그들은 바닥에 쓰러져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시선을 내려 내 옷에 걸쳐진 검은색 옷을 봤다.
결계옷.
인공 던전에서만 통용되는 결계가 걸린 옷이다. 이 옷을 입고 있으면 치명상은 입지 않는다. 단, 옷에 걸린 결계를 무력화하거나, 벗어버리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유진아. 이건 안 좋아. 4명이 쓰러지긴 했지만, 우리의 존재를 눈치챘어. 마법 방어까지 사용했으니 이제 벼락은 통하지 않아. 4반은 똘똘 뭉쳐서 우리에게 대항할 거야.”
목적은 그거였다.
적을 두려워해 똘똘 뭉치게 하는 것. 그래야 암살자에게 비교적 안전해질 수 있을 테니까. 이건 류하나의 작전이었다.
“4반을 움츠러들게 했으니 됐어. 다시 시작될 습격이 신경 쓰여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겠지.”
“…아! 그런가. 처음부터 4반 전체를 상대할 생각이 없었구나! 하긴. 방해라고 해서 꼭 정면에서 싸우는 것만이 방법인 건 아니지.”
김천우가 감탄하듯 말했다. 모처럼이니 생색이나 내볼까 하며 입을 열려던 순간, 4반 쪽에서 무언가가 날아왔다.
나는 뒤로 물러나 커다란 나무에 몸을 숨겼다. 한 발짝 늦은 김천우는 날아오는 물포탄에 검을 휘둘렀다. 물이 터지며 충격파가 발생했다. 김천우가 흙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주위 나무 몇 개가 박살 나 있었다.
“크으…. 물이라고 해서 너무 얕봤어.”
“또 온다.”
내가 담담하게 말했다. 깜짝 놀란 김천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물포탄을 피했다.
퍼엉! 펑! 펑! 펑!
물포탄이 터진다. 나무가 부서져 흙바닥에 쓰러지고, 그 여파에 땅이 떨린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나는 냉정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모카는 여전히 하늘에 떠 있었으니까.
“김천우! 4반이 오고 있어! 사냥에 앞서 우리부터 탈락시키기로 결정한 모양이야.”
“4반 전체가 오고 있다는 거야?”
“어.”
“……어떡하지?”
김천우가 곤란하다는 듯이 물었다. 김천우는 일이 꼬였다고 느끼고 있겠지. 따지고 보면 내가 상의도 없이 공격했기 때문인데 내 탓을 하지 않는다. 역시 김천우는 머저리 호구였다.
“흩어지자. 넌 왼쪽으로. 난 오른쪽으로. 합류하는 건 좋지 않으니… 알아서 4반을 방해하기로 하고.”
“그래. 그편이 더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아.”
김천우가 왼쪽으로 내달렸다. 여기까지 전부 계획대로였다.
4반의 움직임도 변했다. 류하나가 떨어져 나와 내 뒤를 쫓았고, 나머지는 전부 김천우를 노린다.
적당히 뛰다가 멈춰 섰다. 살벌한 기운을 흘리며 나를 쫓아오던 류하나도 마찬가지다.
“여기까지야.”
류하나가 쌍검을 들었다.
연기였다.
바깥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대로 우리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 들킨다면 반에서 배신자라는 꼬리표가 붙어 아카데미 생활이 귀찮아질 것이다.
‘그리고 암살자 놈을 움직이게 하려면 지치는 편이 좋지.’
나는 검이 아닌 투창을 들었다.
“여기까지는 무슨.”
류하나에게 던졌다. 류하나는 침착하게 쌍검으로 투창을 받아 쳐내고 내게 접근한다. 류하나는 지금 진심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진심으로 날 이기려 하고 있다.
나는 거리를 벌리고 냅다 달렸다.
“…도망? 왜?”
원래는 여기서 적당히 싸우기로 했다.
그러나 내 예상과 달리 암살자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지금 싸웠다간 류하나의 힘이 너무 빠지고 만다.
류하나의 힘 없이 내 실력만으로 암살자를 쉽게 처리할 수 있긴 하나…. 내게도 계획이 있었다.
‘아카데미 곳곳에 힘이 도사리고 있는 만큼 적들에겐 전력을 숨기는 편이 낫지.’
도망치면서 류하나를 공격했다.
벼락을 떨어뜨리거나, 투창했다. 류하나는 피하고 받아치면서 내 뒤를 쫓는다.
“거기 서…!”
류하나의 목소리에 짜증이 서렸다. 처음 보는 모습이지만 놀라울 건 없었다. 감정을 잘 내비치지 않더라도, 그게 곧 감정이 없다는 뜻은 아니니까.
쌔애애애액!
그녀의 쌍검 중 하나가 날아왔다. 내 등을 노린다.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피하지 않았다. 몸을 아슬아슬하게 비틀어 검이 어깨를 맞추게 했다. 결계옷을 입고 있어 검이 어깨에 박히는 일은 없었으나 충격은 그대로 느껴졌다.
“크으윽!”
“……!”
신음을 흘리자 류하나가 깜짝 놀랐다. 그녀의 기세가 흐트러졌다. 나는 등에 메고 있던 투창 중 하나를 그녀에게 날려 상황을 일깨웠다.
류하나는 투창을 피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복잡했다. 방금처럼 살벌한 기세로 덤벼오지 않았다.
추격전이 이어가다가 호수 앞의 공터에서 멈춰 섰다. 투창도 전부 소모했겠다, 나는 검을 빼 들었다.
“지쳤네?”
“…조금 지쳤을 뿐이야.”
우리는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린다. 형식적으로 검을 나누면서 전음을 보냈다.
-암살자가 접근하고 있어.
류하나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암살자가 누군지 알았다면… 이제 도움을 청하는 게 맞아.
류하나의 전음이다. 숨소리가 섞여 있다. 멀쩡한 나와는 달리 정말로 지친 것이다. 그녀의 의견은 합리적이었다. 명예를 원하면서도 탐하지 않는다. 류하나 다웠다.
-아직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는 게 문제지. 그리고… 암살자가 괜히 인공 던전을 암살장소로 선택했을까? 아마 바깥에서는 당분간 간섭하지 못할 거야.
-그 정도가 가능한 암살자는….
류하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나는 말없이 검을 휘둘렀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검. 내 힘을 알고 있는 류하나는 쌍검을 교차해서 내 검을 막아내려 했다. 그러나 이건 페이크다. 검은 손쉽게 막히고, 진짜 공격인 옆차기를 날렸다. 팔뚝에 맞은 류하나가 뒤로 날아가 호수에 풍덩 빠졌다.
직후, 숲 속에서 창이 날아왔다. 내가 사용했었던 투창은 정확히 몸을 일으키는 류하나를 노린다.
‘안 되지.’
류하나의 앞을 가로막으며 창을 쳐냈다. 손이 저릿했다. 류하나가 예측했던 대로 상대는 보통 암살자가 아니었다.
“누구냐!”
정면을 향해 소리쳤다. 아카데미 직원복을 입은 암살자는 천천히 접근하고 있다. 은신을 통해 몸을 투명화시켰으나, 정령안과 천안을 사용 중인 내겐 훤히 보였다.
암살자는 주머니에서 꺼낸 스위치를 꾹 눌렀다.
지직, 지지직!
결계옷이 무력화된다.
“이, 이게 갑자기 왜…?!”
나는 당황하는 척했다. 허둥거리며 한 손으로 결계옷을 연신 살폈다. 암살자가 접근한다. 암살자의 시선은 물 밖으로 나오는 류하나에게 박혀 있었다. 류하나는 암살자의 존재는 알아도 어디에 있는지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
류하나의 특성인 검의 무녀(SS)가 빛을 발했다. 접근한 암살자를 감지한 것이다. 류하나가 기세를 확 바꿨다. 조급해진 암살자가 단검을 들고 뛰었다.
“어딜.”
암살자의 앞에 끼어들어 검기가 맺힌 검을 휘둘렀다. 암살자의 단검에도 회색 검기가 치솟는다.
콰앙!
암살자가 뒤로 물러났다. 신체 능력 자체는 류하나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다.
“네놈들, 처음부터 알고 있었나?”
암살자가 입을 열었다. 낮은 목소리는 감정을 읽기 힘들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 침착함과 네 위치다. 류하나를 지키기에 최적의 위치. 처음에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만…. 이렇게 되면 우연이 아니지.”
“머리 참 좋으시네.”
홀딱 젖은 류하나가 내 옆에서 전투 자세를 취했다.
“어떻게 알았지?”
암살자가 본론을 꺼냈다. 정보의 출처가 무척 궁금한지 기습하지도 않았다.
“누군가 쫓아오는데 당연히 알지.”
내 황금색 눈동자를 빤히 쳐다본 암살자가 혀를 찼다.
“…정령안이 뛰어난 눈인 건 맞으나, 아카데미 학생 따위에게 들킬 정도로 내 은신은 어설프지 않다.”
“뭔 자신감인지 모르겠는데, 넌 좆밥이야. 내가 마음만 먹으면 10초 내로 쳐죽일 수 있는 좆밥이라고.”
“……알겠다. 말할 생각이 없다면… 그대로 죽어라.”
암살자의 몸이 흐릿해지더니 2명으로 분열했다. 하나는 분신이고, 하나는 본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럴 경우 본체 쪽이 더 강하다.
‘그래도 내 눈은 못 속이지. 오른쪽이 본체군.’
오른쪽 본체로 뛰었다. 자연스레 왼쪽 분신은 류하나가 상대하게 됐다.
‘대충 시간 끌다가 죽이면 되겠지.’
암살자의 단검이 내 목을 노린다. 찰나를 쓸 필요도 없다. 고개를 옆으로 젖히며 검을 휘둘렀다. 암살자의 허벅지가 베인다. 피가 튀었다. 깊은 상처는 아니다.
“……쯧.”
혀를 찬 암살자는 더욱 신중해졌다. 자세를 낮추고 정면에서 오는가 싶더니 돌연 보법을 밟아 오른쪽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성유진!!”
류하나가 소리쳤다.
나는 뒤쪽에서 날아온, 정확하게는 암살자 분신이 던진 단검을 검으로 쳐냈다. 내게 접근한 암살자가 희미하게 웃으며 내 심장을 노리고 단검을 내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