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0화 〉 930. 아카데미의 구원자
‘이 광대 가면을 스톰브레이커에 합체시키면 어떨까.’
주저할 이유는 없었기에 바로 시도해봤다.
광대 가면이 스톰브레이커에 스며들었다. 스톰브레이커의 형태가 변하기 시작했다. 최종적으로 된 것은 갑옷 위에 가시가 삐죽삐죽 올랐고, 투구는 광대 가면처럼 변했다.
‘…마음에 안 드는데.’
차라리 광대 가면만 쓰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다른 방법은… 있네. 이 세계에서만 가능한 방법.’
정령 소환.
나와 계약한 정령을 내 앞에 소환한다.
몸속의 마나가 어딘가로 빠져나가고, 눈앞이 번쩍이더니 검푸른 머리카락에 하얀 원피스를 입은 60cm의 여자가 나타났다. 겉모습만 보면 동화 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요정이다.
마키나.
나와 계약한 기계 정령.
마키나는 눈가를 비비며 볼멘소리를 냈다.
“이 늦은 시간에 뭐야…. 미녀는 수면 시간을 지켜줘야 한다구…. 빨리 용건 끝내고 돌려 보내줘.”
“이게 건방지게.”
손을 뻗어 마키나의 머리를 붙잡고 아래위로 흔들었다.
“아아아아악! 아줌마! 성유진이 또 나 괴롭혀!! 구해줘!!”
“엄마는 여기 없어, 멍청아.”
“아, 쫌!!”
성질을 낸 마키나의 몸이 작은 구체로 변하더니 내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구체는 다시 원래의 형태로 돌아왔다.
“자꾸 이럴 거야? 아무리 내가 너랑 계약했다고 해서 함부로 막대하면 곤란해.”
“한동안 자유를 즐기게 해줬더니… 주인님에게 못하는 말이 없군. 통조림이 되고 싶나?”
흠칫.
마키나가 몸을 떨었다.
그녀와 나의 계약은 일방적으로 내가 유리하다. 내가 명령을 내리면 따를 수밖에 없는 구조다.
“노, 농담 좀 해본 거로 통조림은 너무 하잖아. 날 부른 건 내가 필요하다는 거지? 뭐든지 도와줄게! 내가 뭘 하면 돼?”
“마키나. 지금 내 모습을 봐라. 어떻지?”
“어… 코스프레야?”
예상대로의 반응이었다.
“마키나. 이 갑옷에 빙의해라.”
“뭐? 싫어. 그딴 요상한 갑옷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팔짱을 낀 마키나가 고개를 획 돌렸다.
“하라고.”
목소리를 낮추고 위협하듯 말했다. 마키나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고개를 떨궜다.
“…알았어. 하면 되잖아. 아, 진짜. 내가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됐는지….”
마키나가 투덜거리며 갑옷에 빙의했다.
마키나의 능력 중 하나. 물건에 빙의하는 것으로 물건을 기계화할 수 있다.
-어, 어어? 이거 겉보기보다 훨씬 괜찮은 물건이잖아! 엄청난 힘이 느껴져! 근데 왜 겉모습은 이따위야?!
“겉모습 바꿀 수 있냐?”
-가능해. 원래 이 갑옷의 기능 중 하나가 모습을 바꾸는 거니까. 그 정도는 쉽지. 애초에 내 도움 없이도 바꿀 수 있는 거 아니야?
바꿀 수 있었다.
다만 디자인을 생각하기 귀찮아서 마키나를 불렸다. 그리고 기계 슈트를 입어 보고 싶은 욕망도 있었고.
촤르르르륵.
전신을 감싼 갑옷이 빠르게 움직이더니 모습을 바꿨다. 몸체는 매끈해지고 투구는 붉은 악마의 형상으로 변했다. 광대의 모습보다는 새끈하게 빠졌다. 뭔가 특촬물에 나오는 주인공의 변신 폼같았다.
“나쁘지 않군.”
-…이거 뭔가 이상해. 난 파워레인저로 하려고 했는데 왜 가면라이더가 된 거야. 투구도 악마 형상에서 안 바뀌어.
투구가 붉은 악마의 형상을 하는 이유는 짐작 갔다. 스톰브레이커와 합체한 악마의 광대 가면 때문일 것이다.
‘광대 가면을 해체할 수 없어. 정체를 숨기려면 필수야.’
악마의 광대 가면.
광명승천도로 강화한 악마의 광대 가면은 정체를 숨기는데 특화되어 있다. 광대 가면을 쓴 상태로 유전자 검사를 하면 그 결과가 이상하게 나오는 것은 기본이고, 특수한 능력으로도 파악할 수 없다. 그건 이미 [신의 아틀란티스] 세계에서 확인했다.
“난 마음에 들었으니 됐어. 근데 다른 기능같은 건 없냐?”
-다른 기능…? 이런 거 말이야?
내 시야 앞에 지도가 떠올랐다. 그 외에도 전화를 연결하거나, 인터넷을 서핑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야말로 컴퓨터와 갑옷이 결합된 슈퍼 슈트다.
“좋군.”
나는 공간 이동 주문서를 사용해 아카데미 밖으로 나갔다.
???
빌런 집단, 오피드의 보스인 지성오는 미간을 좁히며 스마트폰의 메시지를 읽었다.
컴플레인이다.
노스다이아의 휴계자인 류하나의 암살을 의뢰한 고용주께서 모욕적인 언어로 자신을 욕하고 있다. 지성오는 짜증이 치솟았으나 꾹 참았다. 상대는 돈 많은 고객이다. 기분이 좆같아도 돈을 가진 상대가 갑이다.
“보스. 이번에도 또 입니까?”
“그래. 빨리 류하나를 죽이라는군.”
“차라리 의뢰를 포기하시죠. 한 번 실패했으니 가망 없습니다. 마루한 아카데미의 경비도 이전보다 2배 이상 삼엄해졌습니다.”
류하나를 노리려면 다시 준비해야 한다. 그 기간은 대충 어림잡아도 최소 반년은 걸린다.
“안 돼. 이놈이 가진 돈을 포기할 순 없다. 그리고 이놈도 류하나의 암살이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냥 나한테 성질을 부리는 것뿐이다.”
“그게 마음에 안 듭니다. 대체 뭐하는 놈인지 우리한테 지랄하는 건지….”
“나도 이놈이 뭐하는 놈인지는 모른다. 짐작 가는 놈이 몇 있긴 한데…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아. 최대한 엮이지 말고 시키는 대로 돈만 뜯어내면 돼.”
부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다물었다.
지성오는 스마트폰을 조작해 스케줄을 확인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스케줄이 꽉 차 있었다. 이 중에서 가장 급한 건 납치와 관련된 일이다. 빠르게 처리하지 않으면 꼬리가 밝힐 수도 있다.
“보스.”
지성오는 부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부하는 손가락을 뻗어 정면을 가리켰다. 정면에는 CCTV 모니터가 있었다.
“침입자입니다.”
“침입자? 저건 또 뭐하는 웃긴 놈이야.”
화면을 폰 지성오가 피식 웃었다.
어린애들이나 볼법한 특촬물에서 나오는 옷을 입었고, 머리에는 붉은 악마 형상의 투구를 썼다.
옛날 히어로들은 저마다 코스튬을 했다는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히어로야?”
“아닙니다. 신입들을 전부 죽이고 있습니다. 히어로라 하기엔 손 속이 지나치게 잔인합니다. 그리고 저런 히어로는 들어본 적 없습니다.”
“빌런인가보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히어로와 달리 빌런끼리는 서로 싸우는 일이 잦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돈, 자존심, 구역 전쟁 등등. 서로 뭉치는 히어로와 달리 빌런은 서로가 경쟁자다.
“실력은 대충 C급 이상인가. 좀 치네. 강헌. 손해가 더 발생하기 전에 네가 가서 처리해. 되도록 죽이지는 마라. 놈이 어떻게 이 아지트를 찾아냈는지는 알아내야 하니까.”
“네. 보스.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
“죽여!!”
나를 본 오피드의 잡졸들은 다짜고짜 공격부터 했다.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고, 칼을 쑤시기 위해 내게 달려들었다.
전부 하찮았다.
총알은 슈트를 뚫지 못하고 튕겼으며, 칼은 도리어 부러지거나 날이 나갔다.
‘기껏해야 F~E 등급의 빌런. 죽었다 깨어나도 날 어떻게 하지 못하는 놈들이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손을 감싼 갑옷의 형태가 변하더니 기관소총으로 변했다. 하찮은 적들을 향해 총알을 갈겼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적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나는 적들을 살려두지 않았다.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상황에서도 쳐죽였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행패를…!”
얍삽하게 생긴 놈이 나타났다. 놈은 나를 보며 이를 뿌득뿌득 갈더니 허리춤에서 레이피어를 꺼내 들었다. 그의 근육이 꿈틀거리고, 마나의 기척이 느껴진다. 지금껏 상대했던 어중이떠중이는 아니다.
-D급 빌런이야.
마키나가 시야 한구석에 적의 프로필을 띄웠다.
이름 오만도. D급 빌런. 현상금은 1억 3천만 원. 사용무기는 레이피어이며, 특기는 단거리 이동.
‘D급이라. 좆밥이군. 상태창을 열어볼 필요도 없어.’
오만도에게 총을 겨눴다. 오만도의 몸이 사라지더니 내 앞으로 순식간에 이동했다.
“그 같잖은 갑옷을 믿고 있는 모양인데… 내 검까진 막을 순 없을 거다. 네놈의 목을 꿰뚫고 장기를 뜯어내 팔아주마!”
오만도의 레이피어는 정확히 내 목을 노렸다. 보통 갑옷은 목이나 관절 부분이 약하다. 허나 내가 입고 있는 옷은 보통이 아니다. 스톰브레이커에 마키나까지 빙의한 상태. 기껏해야 흠집이 나는 것이 전부다.
깡!
레이피어가 튕겨 나간다.
“뭔 놈의 갑옷이… 커억!”
오만도가 도망치기 전에, 왼손으로 놈의 머리를 붙잡고 오른손의 총구를 놈의 입 안에 넣었다.
“커어억?!”
망설일 이유는 없다. 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탕탕탕. 놈의 머리에 구멍이 뚫리고 피가 튀었다. 시체는 아무렇게나 바닥에 버리고 전진했다.
-여기 빌딩 구조 파악 끝났어. CCTV도 해킹 완료!
‘우선 지도부터 띄워. CCTV는… 적당히 조작해.’
시야 한 편에 지도가 나타났다. 나는 멈칫했다. 지도는 입체적이어서 보기 힘들었다.
‘…마키나. 지금 내가 어디에 있지?’
-빨간색 점 부분에 있어. 파란색 점이 보이지? 그건 내가 파악한 적들이아. 후우. 어때? 내가 다시 보여? 이렇게 친절히 도와주는 나같은 정령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고마우면 일 끝나고 정령옥 3개 정도 주면 돼.
‘뭐가 뭔지 모르겠어. 좀 더 쉽게 보여줘.’
-이렇게 쉽게 보여줬는데 모르겠다고? 이 빡대가리야!
‘맞을래?’
-미, 미안해. 내가 내비게이터가 되어 도와줄게. 네가 여기서 하려는 목적이 뭐야.
‘몰살.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죽이는 거.’
-으음. 그럼 가까운 곳에 있는 놈부터 차례대로 죽이면 되겠네.
‘도망치는 놈을 놓치고 싶지 않아.’
-어쩔 수 없어. 나도 만능은 아니야. 적을 놓치지 않으려면 네가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녀에게도 한계는 있다.
‘그래서 어디로 가야 해?’
-오른쪽. 저기 끝에 있는 방 보이지? 저 안에 몰래 숨어 있어. 키킥. 내 레이더는 속일 수 없지! 멍청한 인간 놈! 가서 죽여버려!
‘나도 인간이다.’
-…….
마키나가 가리키는 곳으로 움직였다. 문을 열고 숨어 있는 빌런을 찾았다.
“사, 살려줘…!”
“싫어.”
퍽!
주먹 한 방에 머리가 터져 죽었다. 나는 다시 문을 닫아 복도로 나왔다. 기계적으로 적을 찾아다니며 죽였다.
-이렇게 막 죽여도 돼? 저번에 카르마인가 뭔가 때문에 사람을 막 죽이면 안 된다며.
‘막 죽이는 거 아니니 괜찮아.’
상대는 빌런.
지금까지 대충 10명 정도 죽였는데 카르마 선(善)이 떨어졌다는 알림창은 한 번도 뜨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적들이 빌런이기 때문이다.
-2층은 이걸로 끝이야. 3층으로 올라가자.
3층 복도에 들어섰다.
“그만.”
저 멀리서 누군가가 내려왔다. 2.2M에 달하는 큰 키와 근육질의 거구를 가진 남자였다. 얼굴 왼쪽에 의미모를 문신을 한 남자였다. 딱딱한 사각 턱에 각 잡힌 옷. 강철같은 남자다.
“나는 오피드의 강헌이다. 넌 누구지. 이름과 소속을 밝혀라.”
마키나는 즉각 놈의 프로필을 시야에 띄웠다.
이름 강헌.
C급 빌런. 현상금은 16억.
사용 무기는 너클, 특기는 육체 강화.
“나는 적광. 소속은 없다.”
“목적이 뭐지?”
“오피드의 몰살.”
“…의뢰를 받았나?”
“아니. 쌓인 스트레스 좀 풀려고.”
“알겠다. 미친놈이었군. 미친 짓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걸 가르쳐 주마.”
가시 박힌 너클을 손에 낀 보법을 밟으며 거리를 좁혔다. 그 움직임만 봐도 알 수 있다. 제대로 배운놈이었다.
‘찰나.’
시야가 느려졌다. 놈의 주먹이 천천히 내 얼굴로 향한다. 움직임은 가벼운 잽이다. 허나 너클에 맺힌 붉은색 권기(拳氣) 하나로 잽의 수준을 아득히 상회한 살인 주먹이 되었다.
천마신공(天魔神功) 천마수라(天魔修羅)
고개를 젖혀 강헌의 잽을 피한 뒤, 오른 주먹에 마기를 담아 어퍼를 날렸다. 주먹은 놈의 턱을 정확히 맞췄다. 강헌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는 듯하더니 다시 지상으로 쿵 떨어졌다.
-강헌의 무게가 갑자기 6배로 늘어났어! 육체 강화가 아니라 무게 조작이야!
마키나가 호들갑을 떨었다. 강헌이 다시 내게 잽을 날린다. 무게와 권기. 잽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겠지.
왼손을 들어 잽을 잡았다. 슈트를 입고 있음에도 그 충격이 왼손에 전해져 욱씬거린다.
천마신공(天魔神功) 용권(竜拳).
강헌의 가슴에 용권을 내질렀다. 검은 기운이 그의 가슴을 꿰뚫고 천장에 구멍을 냈다.
털썩.
강헌이 바닥에 무릎 꿇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주먹을 치켜든다.
‘찰나.’
그의 느릿한 주먹을 피하고 발끝으로 머리를 올려 찼다. 강헌의 턱이 박살 나고 절명했다.
『카르마: 선(善)이 1 상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