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5화 〉 935. 아카데미의 구원자
성하리와 최정화에게 거구의 사내가 다가왔다. 검은 정장을 입고 머리에는 검은 중절모를 푹 눌러 썼다. 키는 2M가 넘었고 체구는 성하리의 3배에 달했다.
“백령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길 안내를 맡은 351호입니다. 초대장을 보여주시겠습니까?”
거구의 사내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말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사내가 아니다. 그 정체는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닌 바위와 강철로 만든 골렘이었다.
“과연 백영직의 작품이야. 꽤 괜찮은 골렘이잖아. 하나 정도는 사고 싶네.”
최정화가 말했다.
백영직.
대한민국 재계 순위 31위의 백오 그룹의 회장이며, 대한민국 암시장의 주인.
뛰어난 인형 술사인 그가 바로 백령 경매의 주최자이다.
“이딴 걸 사고 싶다고? 너 좀 이상하다?”
심드렁한 성하리의 말에 최정화는 발끈했다.
“네가 물건 보는 눈이 없어서 그래! 이 정도 수준이면 C급 히어로 정도는 상대할 수 있어. 골렘이니 따로 인권이니 뭐니 챙길 필요도 없지. 이제 이 골렘의 가치가 대충 어느 정도인지 감이 와?”
“글쎄. 내가 볼 땐 한주먹거리도 안 될 것 같은데?”
“…그건 네가 특이한 거고.”
A급 히어로를 상대로 C급 히어로 수준의 골렘이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하물며 성하리가 상대면 일격도 버티지 못하리라.
“초대장을 보여주십시오.”
골렘이 재촉했다. 중절모 아래의 센서가 붉은빛으로 물든다. 이대로 무시하면 전투를 치르겠다는 의지가 확 느껴졌다.
최정화와 성하리는 품에서 카드를 꺼냈다.
아무 장식 없는 백색 카드. 백령 경매의 초대장이자, 경매에서 사용할 돈이 들어있는 지갑이다.
골렘은 카드를 스캔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빛을 띠던 센서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확인되었습니다. 경매장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절 따라와 주십시오.”
성하리와 최정화는 골렘을 따라갔다. 창고처럼 보이는 건물로 들어갔는데, 창고 안에는 지하 통로가 있었다. 이 지하 통로 끝에 지하 경매장이 나올 것이다.
최정화는 골렘이 듣지 못하게 기막을 치며 성하리에게 물었다.
“오늘을 아주 벼르고 있었던 모양이던데. 총알은 어느 정도 가져왔어?”
“3개.”
“…30?”
“아니, 3,000.”
단위는 당연히 억이다.
최정화는 작게 입을 벌렸다. 하마터면 감탄사를 흘릴 뻔했다. 3,000 억이면 자신도 쉽게 쓰지 못하는 돈이다.
“최근에 협회랑 성실히 일한다더니… 재산을 제법 많이 모았어. 그 돈으로 기업이나 차리지 그래?”
“글쎄. 기업 같은 거 운영할 줄은 몰라서.”
“너희 가문이 기업 몇 개 운영하잖아. 가문에 투자하는 것도 한 방법이야.”
“…….”
“뭐야. 여전히 본가랑 사이가 안 좋아? 그럼 우리 금화 그룹에 투자하든가. 마침 이번에 새로운 기업 하나 세우려고 하는데… 야. 안 들어?”
“관심 없어.”
골렘이 문을 열었다. 방안으로 들어선 그녀들은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았다. 정면과 양쪽이 유리 벽으로 되어 있는 방이었다. 정면에는 경매가 진행되는 무대가 있었고, 그 주위에는 그녀들이 있는 유리방이 있었다. 이미 손님은 절반 이상 채워져 있다.
골렘은 떠나지 않고 문 앞에서 가만히 대기했다.
“왜 굳이 쓸데없이 격리하는 거야?”
성하리가 투덜거렸다. 아예 벽을 차단해서 경매를 치르면 가면을 쓸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뭐, 주최 측도 이런저런 사정이 있는 거지. 벽을 막아두고 원격으로 경매를 진행하면 물건을 믿지 못하거나, 배달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나올 테고. 그렇다고 격리하지 않고 모습을 드러내면 고객들 간에 다툼이 일어날 수도 있고…. 백령 경매장은 나름의 최적의 방법을 고안한 거야.”
“…카탈로그 같은 건 없어? 경매장이라면 출품할 물건에 관한 정보는 당연히 제공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없어. 평범한 경매가 아니니까. 그래도 여기에 참가할 정도면 대략적이나마 물건에 대한 정보는 알고 있을걸? 너도 노리는 물건이 있어서 참가한 거잖아. 그렇지?”
“…….”
성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이 경매장에 참가한 가장 큰 이유는 해주 능력을 가진 물건이 필요해서다.
정령왕의 주박(SS)이 그녀의 몸을 좀먹고 있었다. 아직은 A급 히어로의 신체 능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언제 B급 수준으로 신체 능력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은퇴할 수는 없어. 내가 멀쩡해야 유진이에게 큰 힘이 될 테니까.’
성유진이 아카데미에 있다고 해서 안심할 수 없다. 당장 며칠 전에 성유진은 직원으로 위장한 암살자에게 공격당하지 않았던가.
‘이 험한 세상. 내가 엄마로서 버텨줘야 해.’
정령왕의 주박(SS)을 완벽히 해주 하지 못하더라도 조금이라도 완화할 필요가 있다. 영약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
경매 시작 10분 전. 장내에는 묘한 분위기가 흘렸다.
“몇몇 거슬리는 놈들이 꽤 많아.”
성하리가 짜증스레 중얼거렸다. 이쪽을 노골적으로 탐색하는 놈들. 딱 봐도 빌런으로 보이는 놈들. 수상할 정도로 모습을 감추는 놈들. 거슬리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인상 풀어, 성하리. 나랑 약속했지. 여기서 난리 치지 않겠다고.”
“…가면을 쓰고 있는데 내 인상을 어떻게 알아?”
“내가 네 성질을 모르겠니? 아무것도 하지 말고 경매에만 집중해.”
“그럴 생각이야….”
최정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하리가 아까부터 구석을 주시하고 있다. 성하리의 시선을 따라 구석을 쳐다본다.
자신들처럼 2명의 참가자 소파 위에 앉아 있었다.
한 명은 웬 유치한 파워레인저 레드 가면을 쓰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우스꽝스러운 광대 가면을 쓰고 있었다.
‘217번 방. ……분위기는 평범한걸? 구석에 있는 걸 보면 돈이 많은 것도 아닌 것 같고. 성하리가 관심 가지는 이유를 모르겠네. 혹시 아는 사람인가?’
가면이 평범하다 못해 유치해 보여서 그런 것일까. 217번 방의 분위기는 무척 가벼워 보였다.
“성하리. 왜 그래? 저쪽에 문제 있어?”
“…아니. 뭔가… 익숙한 것 같아서. 기분 탓이겠지.”
곧 경매가 시작되었다.
???
217번 방을 안내받았다.
유치한 광대 가면을 쓴 나는 문앞에 선 골렘을 힐끗 보고는 소파에 편하게 앉았다. 파워레인저 레드 가면을 쓴 김천우는 쭈뼛거리며 소파에 앉았다.
“야, 가면이 그게 뭐냐. 주위를 한 번 둘러봐. 너 같은 가면을 쓴 사람은 아무도 없어.”
“아, 아니. 네가 대충 준비하면 된다고 해서 준비한 거야. 그리고 뭐랄까. 좀 더 가벼운 느낌의 경매장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무거운 분위기잖아. 그리고 엄청 위험한 것 같고….”
김천우는 긴장한 듯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뭐해.”
“…여기 어딘가에 마인이 있다는 거지? 언제 어디서 마인이 본색을 드러낼지 모르니 방심할 수 없어.”
“적어도 경매가 진행되는 동안은 그러지 못해. 놈들도 병신이 아니니까. 그러니 몸에 힘 좀 풀어.”
“그래….”
김천우가 편하게 앉았다. 그래도 긴장한 기색은 사라지지 않는다.
조용히 경매를 기다리고 있는 데 시선이 느껴졌다.
351번방.
여자 두 명이 앉아 있는 방이었다.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늑대 가면과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나비 가면.
몸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둘 다 끝내주는 미인일 것이다. 특히 늑대 가면의 몸매가 아주 내 취향이다. 가슴도 크고 허리는 잘록하며 골반도 발달했다. 그래. 마치 성하리처럼.
‘……성하리잖아.’
다른 여자라면 모를까. 성하리의 몸을 얼마나 많이 안았던가. 가면을 쓰고 옷을 입고 있어도 몸의 윤곽만 보이면 충분히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저 허벅지 부분이 하얀 청바지. 저거 성하리가 자주 입던 청바지야.’
천안(天眼)을 발동해 가면을 투시한다. 성하리가 확실했다. 그 옆에 앉은 나비 가면도 상당한 미녀다. 나비 가면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일단 얼굴은 기억해두자.’
곧 경매가 시작되었다.
턱시도를 입고 가면을 쓴 사회자가 무대 중앙에서 경매를 벌였다.
“첫 번째 경매품은 블루 드레이크의 알입니다. 블루 드레이크는 길들이기 쉬운 몬스터로 성장하면 B급 몬스터가 됩니다. 먹이는 간단합니다. 적당한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주면 됩니다. 경매 시작가는 10억부터 입니다!”
무대 중앙에 있는 화면에 금액이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유진아. 저게 경매 금액이지? 다른 사람들 모두 가만히 앉아 있는데 어떻게 하는 거야?”
“소파 팔걸이에 카드 결제기 있잖아. 거기에 카드 꽂고 경매 금액을 입력하는 거지. 팔걸이는 마개로 가려져서 누가 경매에 입찰하는지 안 보여.”
“아….”
김천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빈털터리였다. 1억은커녕 500만 원도 없었다. 서민에 불과한 그는 1분도 지나지 않아 20억을 넘긴 입찰 금액이 부담스러운 듯했다.
블루 드레이크의 알을 시작으로 경매는 계속 이어졌다.
‘다행히 원작과 같아. 경매 물건의 변화는 없어.’
원작에선 류하나와 같은 돈 많은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이용하면 백령 경매를 이용할 수 있다. 여러 단점이 있긴 한데 경매를 이용해 초반부터 강력한 아이템을 가지고 시작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 게임의 난이도가 확 내려가기도 한다.
거기에 이 경매의 물건중엔 특수한 이스터에그나, 나중에 빛을 발하는 아이템도 있다. 여기서 내가 노리는 물건은 총 세 개다.
“다음 경매 물건은 블랙 로자리오입니다!”
내가 노리던 첫 번째 물건이다. 사회자는 경매에 대한 정보는 방 안에 있는 화면에 띄웠다. 감정서와 블랙 로자리오의 칙칙한 외형이 보인다.
“겉으로 보기에는 저주받은 것 같은 로자리오입니다만, 감정서의 결과는 보시면 아시다시피 무려 S 랭크의 성력 증폭 아이템입니다! 이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신의 보호를 받을 수 있지요. 신의 보호가 무엇이냐! 소유주에게 치명적인 것을 막아주는 능력입니다! 이미 효과 증명은 끝냈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저주나 강력한 일격, 심지어 극독까지 막아주죠! 이게 있으면 무척 든든할 것입니다!”
사회자가 침을 튀기며 말했다. 그만큼 블랙 로자리오는 대단한 물건이었다. 원작에서는 성력 사용자 캐릭터에게 최고의 보조 아이템 중 하나로 손꼽힌다.
“경매 시작가는 70억 입니다!”
그러나 경매의 열기는 저조했다.
『블랙 로자리오
랭크: S
성력(聖力)을 증폭한다.
하루에 1번 신의 보호를 받는다.
성력을 사용하는 자만이 블랙 로자리오의 효과를 받을 수 있다.』
블랙 로자리오의 단점.
성력을 사용하는 자만이 이 블랙 로자리오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제한 조건만 아니었어도 최소 천억 이상은 호가할 물건이다.
“120억! 120억 나왔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화면 속의 숫자가 올라갔다.
125억.
나는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5억 추가 버튼을 눌렀다.
130억.
금액은 계속해서 올라간다. 옆에서 보고 있던 김천우가 숨을 삼키며 내 어깨를 잡는다.
“유, 유진아. 너 그 정도로 돈이 많아? 아무리 그래도 100억이 넘었어! 여기서 멈춰야 해!”
“괜찮아. 130억이면 싼 거야. 그것보다 그렇게 눈에 띄게 행동하면 입찰하고 있다는 게 들키잖아.”
“헉!”
김천우는 사방에서 몰려드는 시선을 느끼며 굳어졌다. 아닌 척해도 어설픈 고딩이었다. 뭐, 상관없었다.
“김천우. 우리를 가장 죽일 듯이 노려보는 놈이 있을 거야. 그놈을 찾아.”
“…그 사람이면 찾았어. 60번 방. 해골 가면을 쓰고 이쪽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어. 혹시….”
“저놈들이 마인이니까 주시해.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난리를 피울 확률도 아예 없진 않으니까.”
“…….”
김천우가 진지해졌다. 마인과 관련된 일에는 한없이 진지해지는 놈이었다.
입찰 금액은 어느새 330억을 넘어가고 있었다. 나와 해골가면의 독주라고 볼 수 있었다.
“유진아. 정말 괜찮아? 경매장 측에서 330억을 바로 달라고 하면 어떡하지?”
“그럴 일은 없어. 애초에 초대장을 카드로 주는 이유가 낙찰과 동시에 결제하기 위해서야. 즉, 카드 안에 돈이 없으면 입찰도 못 해.”
“…그렇구나.”
김천우는 약간 초탈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왜 마인이 블랙 로자리오를 노리는 거야? 블랙 로자리오의 효과라면 마인은 사용하지도 못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