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7화 〉 937. 아카데미의 구원자
“성하리. 네가 나설 필요 없어.”
최정화는 상황을 살펴보면서 여유롭게 말했다. 성하리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최정화는 도도하게 다리를 꼬았다.
“우린 손님이야. 여기서 일어나는 문제는 기본적으로 경매장 측의 문제지. 사고를 수습해야 하는 것도 경매장이야. 오랫동안 유지해온 백령 경매장이 이 정도도 감당 못 할 것 같아?”
다른 경매 참가자들의 생각도 최정화와 비슷한 듯 경매장에서 도망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재밌는 구경거리가 생긴 것처럼 느긋하게 상황을 주시했다.
어디선가 골렘과 인형이 나타나 언데드와 마수와 싸우기 시작했다. 언데드와 마수의 수는 수 백이었고 인형들의 수도 그에 못지않았다.
“전쟁 영화를 보는 기분이야. 나름 재밌지 않아?”
“…위험해.”
“무슨 소리야. 지금 인형들이 몰아붙이고 있잖아. 다시 봐도 백오 그룹 회장의 능력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 특히 저 인형… B급 수준으로 보이는데 1,000억 정도면 구입 할 수 있으려나?”
“아니. 경매장은 감당 못 해.”
“뭐?”
“다른 마인들도 움직이기 시작했어. 처음부터 한 패였던 거겠지. 20명 정도인가…. 저 해골 가면에 비하면 어중이떠중이에 불과하지만, 완전히 무시할 수준은 아니야. 저들이 노리는 건… 217번 방의 광대 가면?”
성하리는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느긋하게 굴던 최정화는 다급하게 상황을 살펴 봤다. 인형과 골렘이 부서지고 있고, 경매장 측에선 경비 인원을 투입했다.
“상황이 점점 더 개판이 되어가고 있잖아!”
이미 심각성을 인지한 고객들은 재빨리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방에 있던 골렘 또한 문을 활짝 열고서 말했다.
“비상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신속하게 밖으로 대피하여 주십시오.”
골렘이 반복해서 중얼거린다.
“성하리! 뭐해! 도망가자!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가 나설 필요는 없어! 너도 여기서 정체를 들키고 싶지 않잖아.”
최정화는 당장 도망갈 준비를 끝냈다.
“늦었어. 도망가려면 아까 도망갔어야 해.”
직후, 유리 벽이 산산조각이 나며 등이 굽고 파란색의 입 없는 가면을 쓴 남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성하리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마인이 아니다. 마인 특유의 분위기와 마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넌 뭐야?”
성하리가 성가시듯이 말했다.
“날 모르나? 아, 이 가면 때문이군.”
그가 가면을 벗었다. 재가 묻은 듯한 회색 얼굴의 중년 남성이었다.
성하리는 그의 정체를 바로 알아차렸다. 현역으로 히어로 활동 중인 그녀는 대다수의 빌런 정보를 숙지하고 있다.
“A급 빌런 그레이 포드.”
“그래. 내가 바로 그레이 포드다. 이 경매장에서 크게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다. 황금 사과를 내놔라, 계집. 그럼 살려는 주마.”
성하리의 입가가 비틀어 올라가며 미소를 그렸다. 물론 늑대 가면에 가려져서 다른 사람에겐 보이지 않았다.
“그레이 포드. 본명은 돌테. 현상금은 230억. 방금 돈을 엄청써서 좀 그랬는데… 이거 완전 땡 잡았잖아.”
“……땡 잡아?”
그레이 포드는 위화감을 느꼈다. 자신의 이름을 들으면 A급 히어로도 두려워하거나 긴장한다. 현상금이 200억이 넘으면 A급 빌런 중에서도 거물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허나 상대방은 자신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직감이 말하고 있다. 저건 허세가 아니다.
“…….”
그레이 포드는 짧은 순간 후퇴와 기습 사이를 고민하다가 기습을 선택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성하리가 왼손에 들고 있는 황금 사과다.
‘적어도 황금 사과는 가져간다.’
그레이 포드의 몸에서 짙은 회색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시야를 가리는 유독성 물질이다. 이 회색 안개는 몸에 닿는 것만으로 상대방의 체력과 마나를 소모 시키며, 서서히 몸을 썩게 한다.
파지지직.
푸른 뇌전이 성하리의 발끝에서 치솟았다. 성하리가 발을 휘둘렀다. 뇌전에 안개가 찢겨 나가고, 발은 정확히 그레이 포드의 관자놀이에 꽂혔다.
그레이 포드의 몸이 한껏 휘청였다.
“…제법 하는군.”
그는 당황하지 않고 성하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톱이 쑤욱 길어지더니 성하리의 목을 노린다. 성하리가 목을 옆으로 꺾어 손톱을 피했다. 이어서 그녀의 몸에 푸른 전류가 흐르더니 그레이 포드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속도가 빨라졌다.
성하리의 발이 연신 그레이 포드를 타격했다. 무릎이 박살 나고, 어깨가 탈골된다. 성하리의 다리가 멈췄을 때, 그레이 포드는 바닥에 쓰러진 상태였다.
“너는 설마….”
그레이 포드는 경악했다. 뇌전을 사용한 일시적인 신체 가속. 섬뢰(閃雷)를 사용하는 히어로는 그가 알기로 단 한 명뿐이다.
“관천의….”
그는 말을 끝까지 잊지 못했다. 성하리가 다리로 휘두른 검기가 그의 목을 깔끔하게 잘랐기 때문이다.
성하리는 스마트폰을 들어 그레이 포드의 시체를 찍었다. 본래는 협회에 머리를 가져가야 하지만, 그녀는 성하리다. 시체를 찍는 것만으로도 현상금을 얻을 수 있다. 거기에 증인인 최정화도 있다.
“그거 알아? 협회에서 현상금을 받으려면 경매에 참가했다는 사실도 협회에 알리게 될 텐데.”
“상관없어.”
“…하긴. 대한민국에서 누가 너한테 뭐라고 할까.”
이어서 경매장의 빌런들이 소란을 틈타 황금 사과를 노리고 성하리에게 달려들었다.
성하리는 몸이 욱씬거리는 걸 느꼈다. 그레이 포드를 죽이기 위해 약간 무리했었던 반동이다.
‘이 정도는 괜찮아. 나중에 황금 사과를 먹으면 반동도 해결 가능해. 모처럼 이렇게 돈 벌 기회가 생겼는데 쉽게 물러설 수는 없지.’
자신에겐 사랑스러운 아들이 있다. 그 아들을 위해서 돈은 최대한 많이 모아두는 편이 좋다.
성하리의 몸에서 번개가 꿈틀거렸다.
???
악마 사냥꾼(S) 특성을 각성하고 난 뒤, 쌍인검은 그대로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직후 해골 가면 마인이 언데드와 마수를 소환했다.
“유진아. 나서야 겠어. 마인이 날뛰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천우에겐 블랙 로자리오가 있으니 간단히 죽지는 않을 것이다. 인벤토리에서 적당한 대검을 소환해 김천우에게 던져줬다.
“너는 어쩔 거야? 저것들은 널 노리고 있는 게 확실해. 도망가는 것도 한 방법으로 보여.”
김천우의 말대로 마인의 목표는 바로 나다.
저들은 내가 악마 사냥꾼이 된 것을 알고 있다. 천적이 더 성장하기 전에 무리해서라도 그 싹을 지우려 한다.
나는 김천우를 힐끗 봤다. 김천우는 원작에서도 입이 무거운 놈이다. 타인의 비밀을 아무렇지 않게 발설하지 않는 놈이니 믿을만 하다.
“김천우. 여기서 본 건 비밀이다.”
“그건 이미 여기 오기 전에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기로 말했잖아.”
“경매에 관한 것 말고.”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여주는 편이 낫다.
나는 스톰브레이커와 마키나를 동시에 소환했다. 스톰브레이커는 갑옷이 되어 내 몸에 들러붙고, 마키나는 소환되자마자 갑옷에 빙의했다. 정령을 보는 눈이 없는 김천우는 마키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 그 모습은…! 네가 적광이었어?!”
“그래. 악마 새끼와 빌런을 쳐 죽이기 위해 적광으로 활동했지.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하고….”
콰콰콰쾅!
악어를 닮은 마수 한 마리가 날아왔다. 나는 손을 뻗어 마수의 머리를 잡아 바닥에 메다꽂았다.
“저 해골 가면은 내가 맡을 테니, 나머지는 알아서 해. 죽지는 마라.”
“…어. 너도.”
김천우가 굳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성전(S)을 발동하고 마인들을 향해 뛰쳐나갔다.
-우아아…. 갑자기 이게 웬 개판이야?!
‘마키나. 조금 떨어진 곳에 엄마가 있다. 네가 들킬 일은 없겠지?’
-어, 정말이네? 이렇게 된 거 아줌마랑 같이 싸우지 그래? 아줌마 엄청 강하잖아. 아줌마 버스 타자.
‘안 돼. 내가 적광이란 걸 알면 위험한 짓은 당장 그만두라고 할걸. 그리고 내 질문에 대답해.’
-으음. 아줌마는 정령 포식자(S)라는 특성이 있어서 영체화 상태의 정령을 포착할 수 있긴 하지만…. 지금의 나는 빙의된 상태니 모를 거야. 뛰어난 실력의 정령사라면 또 모를까. 아줌마는 정령사가 아니잖아?
‘안 들킨다는 거군. 그럼 됐어.’
나는 해골 가면을 쓴 마인을 향해 제트 엔진을 사용해 뛰어나갔다.
심장이 쿵쿵 뛰고 몸이 흥분된다.
방금 각성한 악마 사냥꾼(S) 특성이 마인의 죽음을 원하고 있었다. 해골 가면 앞에 나타났다. 사방에서 언데드가 달려들었다. 나는 검으로 변환한 팔을 사방에 휘둘렀다. 반으로 잘린 언데드들의 몸체가 철푸덕 바닥에 떨어진다.
“네놈이 방금 무슨 짓을 한 줄 아느냐? 네놈은 그 빌어먹을 힘을 손에 넣는 것으로 우리 크라이즌…. 아니, 전세계 모든 마인의 적이 되었다.”
크라이즌.
한국 마인들의 연합이다. 그러나 그리 무섭지 않았다. 그들은 다른 나라의 마인 연합처럼 강력하지 않으니까.
“모든 마인들이 네놈의 목숨을 노릴 것이다. 쯧, 조용히 히어로 놀이나 할 것이지…. 알겠느냐, 이 땅에서 비탄이 쏟아지면 모두 너희 탓이리라.”
“전세계 모든 마인이 날 노린다라…. 아주 잘 된 일이야. 나는 이 세상 모든 마인이랑 악마 새끼들을 모두 쳐 죽이기로 맹세했거든.”
“어리석은 놈. 이 세상도 결국 군단장에 의해 멸망하듯이, 너 또한 여기서 죽을 것이다.”
해골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바닥이 늪으로 변하더니 거대한 악어 마수가 입을 쩍 벌리며 나타났다.
‘찰나.’
하늘로 솟구쳐 악어의 기습을 피하고 해골 가면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천마신공(天魔神功) 용권(竜拳).
해골 가면의 가슴이 뚫리고 몸체가 부서진다.
너무 쉬웠다. 그래서 의심스러웠다. 손바닥을 펼쳤다. 손바닥 중심의 작은 구멍에서 화염이 방사되어 해골 가면의 시체를 태운다.
-전부 타버려!
화르르르르륵.
치솟는 불길 속에서 해골 가면의 몸이 일어선다.
-뭐, 뭐야. 왜 멀쩡한 거야?!
‘보나마나 악마와 계약한 힘이겠지. 악마 사냥꾼(S)이 제대로 발휘하고 있어서 그런지 회복이 더디군.’
해골 가면은 최소 A급이 확실하다. 나보다 강하지만 악마 사냥꾼(S) 특성이 있으니 상대해볼 만 했다.
-또 악어야! 발밑을 조심해!
화염 방사를 멈추고 하늘로 뛰었다.
“놓칠 것 같으냐.”
해골 가면이 내 뒤를 쫓아 뛰어오른다. 아니, 해골 가면은 불타서 사라졌다. 그의 맨얼굴이 보였다. 해골 가면이랑 큰 차이가 없었다. 비쩍 마르고 늙어서 해골처럼 보였다.
천마신공(天魔神功) 천마신장(天魔神掌).
놈을 향해 손바닥을 휘둘렀다. 놈이 땅바닥에 처박혔다.
“모여라! 전부 모여서 나와 하나가 되어라!”
음울한 목소리가 울렸다. 마구잡이로 날뛰던 언데드와 악어 마수가 놈에게 모여 뭉치기 시작했다. 살덩어리가 하나가 되는 꼴은 빈말로도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시간이 더 끌리면 불리하다는 걸 알고 빨리 끝내기로 정했나.’
10M가 넘는 거대 괴물이 되었다. 살덩이 표면은 악어가죽으로 뒤덮여 있고, 수십 개의 팔과 꼬리가 돋아나 있으며, 주둥이가 튀어나온 입만 10개가 넘는다.
쾅! 콰쾅쾅!
움직임 자체가 폭력이었다.
“이리로 와라. 네놈이 더 성장하기 전에 싹을 잘라주마…!”
놈이 내게 다가온다. 물론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여기서 놈을 죽인다.
‘가속. 찰나. 천심. 천안.’
천마신공을 운용했다. 내 주위로 검은 기운, 천마기가 불꽃처럼 화르륵 일어났다. 검은 불꽃은 이윽고 뭉쳐지더니 용의 형세를 취하며 내 몸 주위를 돌아다닌다.
천마신공(天魔神功) 흑염마룡(黑炎魔龍).
나는 온몸에 흑염을 휘감아 용이 지상에 강림하듯 놈을 향해 돌진했다. 놈의 살덩이가 내게 달라붙는다. 콰드득, 콰득, 콱! 날카로운 이빨이 갑옷을 뚫으려고 한다.
‘마키나. 최대 출력!’
-오래는 못 버텨! 30초가 한계야! 아, 기분 나빠!
‘악마 사냥꾼(S) 특성을 각성하지 못했다면 10초도 견디지 못했겠지.’
손발을 이용해 놈의 살덩어리를 찢으며 안쪽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내 눈에는 보였다. 안쪽에 숨겨져 있는 놈의 중심이.
‘잡았다.’
흑염을 휘감은 손을 뻗어 숨겨져 있는 놈의 심장을 잡았다. 팔딱팔딱 뛰는 심장을 손아귀에 힘을 주어 파괴한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악!”
커다란 비명과 함께 뭉쳐 있던 살덩어리들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