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8화 〉 938. 아카데미의 구원자
‘잡았다.’
흑염을 휘감은 손을 뻗어 숨겨져 있는 놈의 심장을 잡았다. 팔딱팔딱 뛰는 심장을 손아귀에 힘을 주어 파괴한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악!”
커다란 비명과 함께 뭉쳐 있던 살덩어리들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후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상성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상대가 급하게 행동했다고 해야 할까. 쉽게 해치울 수 있어 운이 좋았다.
‘이제 나머지 마인을 처리하고… 여기서 벗어나면 돼.’
김천우를 찾았다. 마인 하나를 붙잡고 싸우고 있었다. 다른 마인들은 경매장 측의 경비인력과 싸우고 있다.
-아줌마도 싸우고 있는데? 안 도와줘도 돼? 상대하는 적만 4명이야.
고개를 들어 올려 성하리를 봤다. 성하리는 빌런으로 보이는 놈들과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빌런들은 성하리의 옷 끝 하나 스치지 못한다.
‘누가 누굴 걱정해. 마인부터 쓸어버리고 여기서 탈출하자.’
아까부터 은근히 성하리 쪽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정체를 들킨 것 같진 않지만, 적광 상태에서 성하리와 연관되어 좋을 것 없었다.
“이대로! 이대로 끝나지 않겠다!”
내가 죽인 마인의 음울한 목소리가 울러 퍼졌다. 흠칫 놀란 나는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몸을 뒤로 돌렸다.
검은 화염에 불타던 살덩어리들이 꾸물거리며 바닥을 기며 다시 합쳐지기 시작한다.
‘흑염에 저항하는 건가. 심장이 약점이 아니었나? …젠장. 어쩐지 쉽게 가는가 했더니.’
-지금 또 싸우게? 아까 무리해서 슈트도 엉망이야. 너 지금 남은 마나도 별로 없잖아.
‘3할 정도는 남았어. 거기에 완전 회복도 있고. 내 정체가 들키지 않게 주의하면서 싸우면 돼.’
나는 왼팔에 흑염룡을 휘감았다.
“우드레스트시여! 계약대로 내 남은 목숨을 바치겠나이다! 강림하여 증오스러운 악마 사냥꾼을 제거하여주시옵소서!”
“악마 소환이냐? 내가 그걸 지켜만 보고 있을 것 같냐?”
천마신공(天魔神功) 용권(竜拳).
흑염룡의 불꽃을 담아 용권을 사용했다. 압축된 검은 불꽃이 살덩어리를 향해 뻗어나갔다. 살덩어리 앞에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용권이 휘말려 무력화되었다.
-기, 기분 나쁜 게 있어!
마키나가 치를 떨었다. 동시에 나도 굳어졌다. 이 세계에 없는 존재, 악마가 강림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육체를 만들어라.”
육중한 목소리가 일그러진 공간으로부터 들려왔다. 그에 살덩어리가 반응했다. 마치 염력에라도 이끌리는 것처럼 일그러진 공간으로 달라붙더니 한 육체를 형성했다.
2M에 달하는 근육질의 거구.
피부에 나 있는 검은색 비늘.
붉은 돌가시가 박혀있는 굵고 긴 도마뱀 꼬리.
악어처럼 튀어나온 주둥이.
박쥐와 같은 피막의 날개.
붉은색 눈동자.
날개를 제외하곤 리자드맨과 흡사한 외모의 악마였다. 놈은 마인의 희생을 통해 세계에 강림했다.
“오랜만의 나들이다…. 기분 좋군. 네놈이 악마사냥꾼인가? 꺼림칙한 기운이 느껴진다만… 거기서 거기다. 계약대로 네놈을 죽이고 이 현세를 즐기도록 하지.”
악마는 나를 향해 한 발을 내디뎠다. 쿵. 힘이 실린 육중한 발걸음이다.
『악마 사냥꾼(S)이 악마의 존재를 감지했습니다.』
『일시적으로 모든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일시적으로 악마에 대한 공격력이 상승합니다.』
『악마 사냥꾼(S)이 악마를 간파합니다.』
『우드레스트. 악마 남작. 4군단 소속.』
『우드레스트의 권능은 괴력. 한순간 엄청난 힘을 발휘합니다.』
악마 사냥꾼(S)의 효과로 전신에 힘이 넘쳐났다. 체력도 팔팔해진 걸 느꼈다.
“우드레스트인가.”
“오? 나를 알고 있나?”
모른다. 악마 사냥꾼(S)이 알려주는 대로 이름을 중얼거렸을 뿐이다.
“4군단 소속의 악마 남작이지.”
“안목이 뛰어나구나. 네가 제법 마음에 드는군. 날 기쁘게 한 대가로 자비를 내려주지. 넌 고통 없이 단번에 죽여주마.”
우드레스트가 나를 향해 바닥을 박찼다. 한손간에 내 앞에 도달해 커다란 손을 휘두른다. 손가락 끝에 걸린 날카로운 손톱이 허공을 베어 가른다.
‘찰나.’
찰나로 공격을 피한 나는 그대로 반격했다. 주먹으로 놈의 머리를 때렸다. 놈의 머리가 조금 옆으로 돌아갔다.
“주먹에 힘이 없군. 실망스럽도다.”
“정말로?”
“음?”
천마신공(天魔神功) 침정(浸精).
쾅!
놈의 머리에 흘러들어 간 천마기가 폭발한다. 머릿속에서 직접 터진 충격파다. 거기에 악마 사냥꾼(S)의 힘까지 섞였으니, 아무리 악마라고 하더라도 버티지 못하리라.
우드레스트가 머리에서 피를 뿜으며 옆으로 쓰러진다.
‘아직 안 죽었다. 마무리를…!’
천마신공을 준비하려는 찰나, 놈의 굵은 꼬리가 내 허리를 휘감았다.
“커억!”
엄청난 힘으로 내 허리를 끊을 것처럼 조여왔다. 돌가시는 이미 슈트를 꿰뚫고 살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무슨 힘이 이래! 빨리 벗어나야 해! 이대로면 죽어!
‘그걸 내가 몰라서 그러는 줄 알아?!’
벗어나기 위해 꼬리를 주먹으로 내려치고, 잡아당겨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머리가 얼얼했다. 내게 잡힌 이상 이미 전투는 끝났다. 그대로 죽어라.”
이대로 손쉽게 죽어 줄 수는 없었다. 무리를 해서라도 벗어나야 한다.
철컥!
슈트 손등에서 검날이 나타났다. 검은 검강이 검날을 감싼다. 악마 사냥꾼(S) 덕분인지 예전보다 훨씬 안정적인 검강이었다.
천마신공(天魔神功) 천마검(天魔劍).
서걱!
우드레스트의 꼬리가 베여 땅으로 떨어졌다. 나는 찰나를 사용해 그대로 우드레스트의 목을 노렸다.
“내 꼬리는 빨리 자라지.”
어느새 재생한 놈의 꼬리가 내 왼발을 휘감아 으스러뜨렸다.
‘제기랄. 그냥 튈까?’
우드레스트는 지나칠 정도로 여유가 넘쳤다. 솔직히 완전 회복을 사용하더라도 이길 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더 절망스러운 건 놈은 아직 권능을 쓰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전략적 후퇴라는 말이 있잖아! 지금은 튀는 게 좋을 것 같아! 저놈은 나중에 강해져서 죽이면 되잖아! 그러니 튀자!
‘…난 사실 도망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마키나, 네 생각이 그렇다면야, 뭐….’
그때였다.
번개를 휘감은 두 개의 창이 위에서 떨어졌다. 하나는 어깨에 박히고, 다른 하나는 꼬리를 끊었다.
그리고 내 옆에 나타난 성하리가 우드레스트에게 돌려차기를 날렸다. 우드레스트는 팔을 들어 막았으나, 그 충격파에 벽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너, 괜찮아?”
-아줌마다! 역시 아줌마는 강하구나!
“괘, 괜찮소.”
평범하게 말하려다가 말투가 신경쓰였다. 평범한 말투를 했다간 내 정체를 들킬 수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 것이다.
“…….”
성하리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설마 들킨 건가? 다행히 그건 아닌 듯 곧바로 고개를 돌려 몸을 일으키는 우드레스트를 주시했다.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네가 보조해주는 편이 더 빠르겠지. 할 수 있지?”
“알겠소.”
성하리가 땅에 박힌 창을 들었다. 파지직. 그녀의 몸을 타고 뇌전 줄기가 흐른다고 느낀 순간, 그녀는 이미 저 멀리 떨어진 우드레스트에게 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우드레스트는 진지하게 성하리와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을 쫓으면서 생각했다.
‘성하리의 섬뢰. 찰나의 상위호환이야. 찰나는 한 번 움직이면 끝이지만, 섬뢰는 일정 시간 동안 계속 움직일 수도 있고.’
과거에 성하리는 섬뢰를 내게 가르쳐주려고 했다. 허나 내 재능 부족으로 인해 배우지 못했다. 성하리는 전투의 천재지만, 가르치는 데는 재능이 별로였다. 내가 그녀에 비해 엄청나게 약한 것도 이유 중 하나여서 섬뢰의 전수는 나중으로 미뤄졌다.
-아줌마가 압도하고 있는데? 그냥 지켜보기만 해도 아줌마가 저놈을 해치울 거야. 우린 이대로 팝콘이나 뜯자!
‘안 돼. 협력해야지. 그래야 성하리의 말대로 더 쉽게 죽일 수 있어. 그리고… 막타는 내가 쳐야 해.’
-에잇, 더러운 막타충! 근데 저 전투에서 네가 도움이 되기나 해?
마키나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이 있다. 괜히 끼어들었다가 나만 피 볼 수 있다. 반대로 성하리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도 있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성하리는 괜찮아.’
나는 어렸을 때부터 성하리와 단련해왔다. 그녀의 움직임에 대해 안다. 최소한 방해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
성하리와 함께 우드레스트를 상대했다. 성하리가 오른쪽을 노리면 나는 왼쪽을 노렸고, 성하리가 동작을 크게 하려면 그대로 뒤로 빠져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녀가 역장을 펼쳐 발판으로 사용할 때 방해하지 않는 거다. 덤으로 나도 그녀가 펼친 역장을 사용하며 높은 기동력을 펼쳤다. 마키나의 보조가 있었기에 한층 수월했다.
“이 빌어먹을 것들이 날파리처럼 움직이는구나! 어디 이번 공격도 피해 봐라!”
우드레스트가 바닥에 양손을 박았다. 그가 권능인 괴력을 발동한다. 땅바닥이 들썩이더니 위로 솟구쳤다. 마치 바닥을 이용해 밥상 뒤집기를 하듯이.
“일단 피해.”
성하리가 뒤로 물러나며 역장을 주위에 펼쳤다. 우선 방어하고 공격을 이어나갈 생각인 모양이다.
‘그래서는 내가 막타치기 힘들어.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막타 시간!’
-오, 막타충의 감각!
‘완전 회복.’
완전 회복으로 체력과 마나를 전부 회복한다.
[10초 동안 천재의 시간을 발동합니다.]
천마신공(天魔神功)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
전력으로 펼친 천마군림보로 짧은 공간을 뛰어넘어 우드레스트의 앞에 나타났다.
천마신공(天魔神功) 천마검(天魔劍) 구중오살(九中五殺).
머리. 양어깨와 옆구리 양쪽을 동시에 찌른다.
“이 놈…!”
검강으로도 완전히 끝장내지 못할 정도로 놈의 두개골이 지나치게 단단했다. 놈의 손바닥이 다시 내 머리를 노린다.
나는 숨을 흘리며 다시 천마군림보를 밟았다. 이번에는 우드레스트의 뒤를 잡았다.
천마신공(天魔神功) 천마검(天魔劍) 마풍(魔風).
검은 바람이 놈의 몸을 휘감았다. 검은 바람은 그의 살갗 하나, 하나를 찢어발겼다.
그리고 놈의 머리에 왼 주먹을 내질렀다. 검은 바람이 내 왼팔을 휘감았지만,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천마신공(天魔神功) 용권(竜拳).
압축된 천마강기가 놈의 골통을 부수고 허공에 검은 선을 그리며 쭉쭉 뻗어 나갔다.
『카르마: 선(善)이 4 상승합니다.』
『성공적으로 악마를 사냥했습니다. 악마 사냥꾼(S)의 효과가 강화됩니다.』
『악마 사냥꾼(S)이 죽인 악마의 권능 일부를 흡수합니다.』
『현재 흡수한 권능: 괴력의 권능(A-).』
『괴력의 권능
랭크: A-
마나를 소모해 일시적으로 괴력을 얻는다.
괴력의 힘은 소모하는 마나에 비례한다.』
‘얻었다!’
악마 사냥꾼의 특징! 사냥한 악마의 권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악마가 가진 권능과 비교하면 열화판에 불과하다.
나는 제트 엔진을 가동해 성하리가 나를 쫓기 전에 바로 튀었다. 마침 마인과의 싸움을 끝내고 기진맥진한 김천우의 뒷덜미를 잡고 천장을 부수고 하늘로 솟구쳤다. 그리고 전력으로 도망친다.
-유진아! 아줌마한테서 전화 왔는데?
‘…뭐? 대, 대충 네가 받아. 음성변조 가능하잖아.’
-화상 전화야.
‘젠장. 성하리가 알아차렸나? 아니야. 화상 전화를 했다는 건, 확인하기 위함일지도!’
나는 아래로 떨어지며 지상에 착지했다.
“유, 유진아. 좀 천천히 가자. 아까 옆구리 부분을 맞았는데 상처가 번질 것 같아.”
“제기랄. 그럴 여유 없어. 야, 이거 찢어. 그럼 바로 아카데미 시내로 이동할 테니까.”
비틀거리는 김천우의 품에 공간 이동 주문서 하나 안겨주고, 그대로 다른 공간 이동 주문서를 찢어 기숙사로 이동했다.
갑옷을 전부 벗고 소파에 앉아 성하리의 연락을 받았다.
“응. 엄마. 웬일로 화상 통화야? 그 이상한 늑대 가면은 또 뭐야?”
???
“…….”
성하리는 적광과 합을 맞추면서 기시감을 느꼈다. 적광의 움직임은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그리고 가끔씩 아들인 성유진 움직임이 그에게 오버랩 되었다.
의심이 들었다.
적광의 정체는 성유진이 아닐까? 한편으로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 의심을 완벽히 떨쳐낼 수 없다.
그래서 강제로라도 적광의 투구를 벗기고 얼굴을 확인하려고 했는데, 한순간에 도망쳤다. 따라가려고 했으나, 마침 전투의 반동이 그녀의 몸을 덮쳤다. 그녀는 추적을 포기하고 성유진에게 연락을 돌렸다.
적광이 아무리 빠르더라도 한순간에 백령도에서 벗어나진 못할 것이다. 그러니 전화를 받지 못한다면….
“응. 엄마. 웬일로 화상 통화야? 그 이상한 늑대 가면은 또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