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3화 〉 943. 아카데미의 구원자
“지영아!”
나는 도로 쪽으로 걷고 있는 강지영의 팔을 잡아 내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스포츠카는 저 멀리 순식간에 지나갔다. 이것 또한 내 계획대로다. 품 안에서 그녀의 풍만한 몸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게 무슨 짓이냐.”
강지영이 정색하며 물었다.
나는 서둘러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위험하잖아. 차에 치이면 어쩔 뻔했어.”
강지영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스포츠카를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위험한 건 내가 아니라 스포츠카다.”
“…어. 그렇긴 하네.”
한 박자 늦게 강지영이 S급 히어로라는 걸 떠올렸다. 거기에 강지영의 내구 능력치는 S+. 그 정도면 스포츠카가 아니라 덤프트럭이 들이받아도 멀쩡한 수준이다.
내가 머리를 긁적이고 있자, 강지영이 표정을 풀고 피식 웃었다.
“딱히 널 꾸짖을 생각은 없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도 약간 놀랐을 뿐이다. 네가 한 행동이 옳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카페 다음은 어디로 갈 거지?”
“방 탈출 카페라고 알아?”
“들어보긴 했다. 방 안에 있는 문제를 풀고 탈출하는 게 목적인 놀이.”
“잘 알고 있네. 그런데 기대는 별로 안 되나 봐?”
“내가 학장이 되기 전에 주로 한 일이 던전 탈출이다. 방 탈출이 그것만큼 긴장감 넘친다고는 생각되지는 않는군.”
“방 탈출이랑 던전 탈출은 다르지. 이건 그냥 즐기는 거야.”
“……그래.”
강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방 탈출 카페에 대한 기대는 하나도 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내가 방 탈출 카페를 선택한 건 3가지 이유였다.
하나는 강지영이 드라마나 영화를 잘 즐기지 않는다는 걸 사전에 알고 있었다. 두 번째는 강지영의 신체 능력이 지나칠 정도로 높아서 활동적인 놀이나 게임은 그녀에게 시시할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방 탈출 카페는 내 뜻대로 조정하기 쉽다. 나는 일주일 전에 이미 기존의 방 탈출 카페 사장과 만나 계획을 짰다. 돈이 좀 깨지긴 했지만 내 입장에선 용돈 수준이라 상관없었다.
“…러브 커넥트?”
강지영은 방 탈출 카페 정면에 있는 표지를 읽으며 미간을 좁혔다.
나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응? 원래는 아포칼립스 블랙 기업 탈출인가, 뭔가였는데 얼마 전에 바뀐 것 같네. 뭐, 방 탈출 카페가 거기서 거기이니 크게 다르지 않겠지. 들어가자.”
“…여기 커플 전용이라고 적혀 있다만.”
“우리 지금 데이트 중이잖아. 커플이야.”
“…으음.”
뭔가 석연찮은 듯 눈살을 찌푸리던 그녀였으나, 곧 나와 함께 방 탈출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카페 주인이 우리에게 인사했다. 30대 여성이었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러브 커넥트 이용하러 오셨죠? 커플 할인 적용됩니다. 그리고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세트를 정리할 필요가 있어서요. 10분 정도면 된답니다.”
카페 주인이 건네는 오렌지 주스를 마시면서 차분히 기다렸다. 지금쯤 카페 주인은 방 탈출 세트장을 살짝 바꿀 것이다.
카페 주인은 우리에게 무전기를 건네주고는 말했다.
“포기나 힌트는 무전기를 이용하시면 돼요. 사용할 수 있는 힌트는 두 개예요. 탈출 제한 시간은 1시간이에요. 들어가시면 시작합니다!”
나와 강지영이 본격적으로 방 탈출 게임을 시작했다.
첫 번째 방은 공주방을 테마로 만든 듯한 화사한 방이었다. 화려한 침대와 옷장. 그리고 화사한 분홍색 벽지. 다만 벽 한쪽에 어울리지 않는 강철 문이 있었다. 도어락이다.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문이 열린다.
“이런 식인가….”
“지영아. 단서를 찾아야 해.”
나는 침대 근처를 살폈고, 강지영은 책상을 뒤적였다. 나는 책 한 권을 발견했고, 강지영은 책상 위에 놓인 노트북과 카메라를 빤히 쳐다봤다.
“지영아. 찾았어?”
“…책상 위에 있는 노트북이 신경 쓰이는군. 그리고 책상 서랍에 알파벳 표가 있었다.”
알파벳 표에 적힌 알파벳은 알록달록한 색으로 각각 색깔이 달랐다. 알파벳은 200개가 넘었고 색깔은 6가지다.
“그 책은 뭐지?”
“아, 이거? 책상 아래에서 발견했어.”
100장 가까이 되는 페이지의 책이었다. 그 내용은 그림이었다. 사람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람의 생김새는 색깔로 구분된다.
“……과연.”
강지영은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했다.
“왜 그래?”
“곳곳에 있는 숫자와 알파벳 표. 그리고 사람의 포즈가 그려진 책. 노트북과 카메라를 보면 뻔하지.”
강지영이 천장을 가리켰다. 숫자 61이 천장에 적혀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알파벳을 확인했다. 61. 6과 1의 자리에 있는 알파벳은 파란색이었다.
“알파벳은 A와 I. 숫자대로 대입하면 1과 9, 책의 19페이지나 10페이지겠지. 한 번 확인해 봐라.”
나는 먼저 19페이지를 확인했다. 사람이 양손을 펼친 포즈였다. 사람의 색깔은 붉은색.
“10페이지겠군.”
10페이지를 펼쳤다. 파란색 사람이 한쪽 손을 번쩍 든 포즈의 그림.
“알파벳 숫자를 더하는 게 정답이었군.”
“이 포즈대로 사진을 찍으면 된다는 거네?”
“아마도.”
나는 카메라 앞으로 다가가 책에 나온 그대로 포즈를 취했다. 한쪽 손을 번쩍 들었다. 찰칵. 강지영이 엔터키를 눌러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닌가?”
“……일단 다른 단서를 모두 모으는 게 좋겠군.”
단서를 모았다. 침대 왼쪽 다리, 옷장의 안쪽, 노트북 아래 등등 숫자가 적혀 있는게 많았다.
“같은 색의 포즈가 두 개라…. 왜 커플 전용인지 알겠군. 혼자서 포즈를 취하는 게 아니라, 커플끼리 같이 포즈를 취해야 하는 모양이다. 사진은… 카메라의 타이머 기능을 이용하면 되겠지.”
나와 강지영은 카메라를 앞에 두고 포즈를 취했다. 다소 민망한 포즈였지만, 방 탈출에 빠진 강지영은 남은 시간을 훨씬 더 신경 썼다.
‘포즈도 선을 넘는 포즈는 없으니까.’
나는 마음속으로 히죽 웃으며 포즈를 취했다. 몸이 닿으며 스킨십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정확한 포즈를 취하자 노트북으로 메시지가 날아왔다. 오직 숫자만 적힌 메시지였다. 우리는 이어서 3가지 포즈를 연달아 취했고, 비밀번호를 모두 받아 다음 단계의 방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강지영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단서부터 찾았다. 그녀가 제대로 즐기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
50분 만에 방 탈출을 끝냈다.
성공 보상으로 음료수를 받았다. 그리고 보너스로 방 탈출에 집중하는 나와 강지영이 찍힌 사진을 받았다. 그중에는 내가 강지영을 뒤에서 끌어안는 사진도 있었다.
“지영아. 재밌었지?”
“나름 재밌었다.”
이다음에는 노래방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을 먹고 근처 공원을 산책한 뒤에 헤어지는게 내 계획이었다. 그러나 돌연 찾아온 긴급 문자가 내 계획을 방해 냈다.
우우우우웅.
내용을 보니 근처에 몬스터가 났으니 대피하라는 내용이었다. 현실과 다르게 이 세상에선 몬스터가 느닷없이 도시 내에 출몰하기도 한다.
대피 메시지를 받은 사람들은 재빨리 뛰어 근처 건물로 들어가거나, 보다 안전한 곳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나는 강지영을 바라봤다. 강지영은 도망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몬스터와 싸우려고?”
“내가 몬스터에게 도망칠 이유는 없다. 몬스터가 근처에 있다면 내가 나서서 빠르게 없애는 편이 더 낫다.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너는 여기에 있어라.”
“아니. 나도 갈래. 이렇게 보여도 나는 마루한 아카데미 학생이야.”
“나는 그 학장이다만… 뭐, 네겐 이것도 좋은 경험이 될 테지. 잘 따라와라.”
그녀는 당당히 뛰어갔다. 몬스터가 어딨는지 이미 파악한 모양이다. 나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어찌나 빠른지 내가 전력으로 뛰어야 겨우 그녀의 뒤를 따라갈 수 있었다.
도시 내에 나타난 놈은 ‘사파이어 네거티브’라는 B급 몬스터였다.
3M가 넘는 거대한 몸체를 가진 이놈은 사람처럼 2족 보행을 하는 놈인데, 몸 곳곳에 사파이어같은 푸른 보석이 박혀 있는 몬스터다. 그러나 실제로는 보석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사파이어처럼 보이는 몸의 일부에 불과했다.
정신 공격을 하는 놈이라 B급 히어로라도 상대하기 까다로운 편에 속하는데, 강지영은 어떤 방비도 하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가 주먹을 휘둘렀다.
콰앙!
그걸로 끝이었다.
몬스터의 머리통이 사라지고 상황은 종료되었다. 역시 S급 히어로인 그녀의 힘은 대단했다.
“아직 안 끝났다.”
“뭐?”
“조금 떨어진 곳에 몇 마리 더 있다. 아마 도시 근처에서 던전이 폭발하고, 그 여파로 몬스터가 도시 곳곳에 나타난 거겠지.”
몬스터의 등장만으로 상황을 파악한 그녀는 다시 내달렸다. 도시 곳곳에 있는 몬스터를 전부 찾아내 죽이기까지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 후에 히어로 협회에서 파견된 직원들을 상대하며 뒤처리를 논의했다. 뒤처리만 1시간 넘게 걸렸다.
나는 뒤처리가 끝날 때까지 적당한 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아카데미 학생인 나와 아카데미 학장인 그녀가 함께 있었다는 걸 들켜서 좋을 건 하나도 없다.
“미안하군. 생각보다 뒤처리가 오래 걸렸다. 굳이 기다릴 필요 없이 돌아가도 상관없었다만….”
“아니. 괜찮아. 모처럼의 데이트인데 이대로 끝낼 수는 없지. 저녁때이니 식사하러 가자. 괜찮은 곳을 예약했어.”
강지영과 함께 고급 레스토랑에 찾아갔다. 클래식한 음악이 흐르고 TV에서도 자주 얼굴을 내비치는 셰프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애피타이저로 꽃새우 요리를 먹으면서 강지영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지영아. 솔직히 말해서 예전부터 궁금했던 게 있어.”
“궁금했던 것? 곤란한 것만 아니면 대답해주지.”
“왜 아카데미 학장이 된 거야?”
“그게 궁금했나? 진지한 얼굴로 말하기에 긴장했다만, 생각보다 심각한 질문은 아니군.”
“아니. 꽤 진지하게 묻는 건데. 내가 모르는 특별한 사연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대한민국 마루한 히어로 아카데미 학장.
듣기로는 엄청난 타이틀이 맞다.
아카데미는 엘리트 히어로 지망생들이 다니는 곳이니까. 아카데미만 졸업해도 최소 C급 히어로로 활동할 수 있다. 유명한 클랜에 취직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런 대단한 아카데미지만, S급 히어로인 강지영이 아카데미 학장을 맡을 이유로는 역부족이다.
S급 히어로인 그녀다. 굳이 아카데미 학장직을 맡지 않더라도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 돈을 원한다면 클랜에 들어가는 편이 더 낫고, 명성과 명예를 원한다면 히어로 협회에 들어가면 된다.
그녀가 진심으로 임한다면 한국 협회장의 자리도 어렵지 않게 꿰찰 수 있을 것이다.
“특별한 사연이라…. 그 정도로 특별한 사연은 아니다.”
그녀는 피식 웃더니 와인 한 모금을 마셨다.
“아카데미 2대 학장으로부터 부탁을 받았다. 그에게 빚이 있었기에 부탁을 받아들기로 했다.”
“그게 전부야? 그 부탁을 꼭 들어줄 필요는 없었을 텐데.”
“설마 그게 전부겠나. 지금 아카데미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아슬아슬한 상태다. 내부와 외부에서 크고 작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지. 현 한국 히어로 협회장은 아카데미를 탐탁치 않게 보고 있다. 정확하게는 아카데미에 할당되는 예산이 너무 많다는 것이 그 이유지.”
“미친놈인가. 아카데미는 히어로 협회의 미래잖아.”
강지영은 고개만 으쓱였다.
“문제는 내부다. 어차피 너도 대충은 알고 있을 테니 말하마. 부학장. 그는 학장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 2대 학장이 내게 학장 자리를 부탁한 것도 부학장 때문이지.”
“부학장이 왜? 큰 문제는 없어 보이는데.”
“겉으로 봤을 때는 멀쩡하지. 허나 부학장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인물이다. 아카데미의 학생은 미숙하다. 어리지. 조금만 바람을 불어도 흔들리지. 세뇌하기 좋은 환경이다. 거기에 넌 모르겠지만, 얻을 수 있는 상당히 많다. 특히 클랜으로부터….”
강지영이 입을 다물었다. 웨이터가 메인 요리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쓴웃음을 지었다. 꼴을 보니 이 주제로 대화를 이어가기 힘을어 보였다.
나는 그녀는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스테이크를 썰었다.
“요컨대 그거다. 내가 아카데미 학장이 된 건 2대의 부탁을 받았고, 내가 학생을 가르치는 데 적성이 맞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걸 좋아하는 것치곤 아카데미 운영만 하잖아.”
“내 몸은 하나다. 마음 같아선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으나, 아카데미 또한 운영해야 하지. 그래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3학년을 가르치고 있다.”
“빨리 3학년이 됐으면 좋겠네. 그래야 지영이의 교육을 받을 테니까.”
“글쎄. 내 가르침이 네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