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4화 〉 944. 아카데미의 구원자
저녁 식사를 끝낸 다음에 근처에 있는 동물 카페를 들렸다.
애견 카페였다.
강지영은 그 이름처럼 강아지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원작 게임을 통해 알고 있던 정보였다. 허나 강지영은 내색하지 않았다. 물론 애견 카페에 오자는 말에 거부하지도 않았다.
강지영은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손을 소독하며, 카페의 규칙을 읽었다.
“…네가 애견 카페를 찾을 줄 몰랐다. 개를 좋아했나?”
“좋아하는 편이지.”
나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다. 애완동물에 관심 없다. 개든, 고양이든 귀찮았다. 예쁜 인간 암컷이라면 이야기는 다르지만.
그녀와 함께 적당한 테이블에 앉았다.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강지영에게 엉겼다. 강지영은 작게 웃더니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가 호인이란 걸 알아본 것일까. 다른 개들도 그녀 주위로 모여들었다.
반면 내 주위에는 개들이 모이지 않았다. 그런 내가 불쌍했는지 중형 개새끼 한 마리가 털을 날리며 다가왔다. 슬쩍 봤다. 수컷이었다. 강지영이 보지 못하는 각도에서 발로 개새끼를 밀었다. 개새끼가 감히 날 쏘아보더니 강지영 쪽으로 향했다.
“개가 널 그리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군.”
“그렇더라고.”
나는 오렌지에이드를 쪽 빨았다.
애견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고 밖으로 나왔다.
오후 9시 32분.
약속했던 데이트 시간은 오후 10시까지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30분도 되지 않았다.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강지영은 앞을 보며 걷고 있었다. 당당한 그 얼굴은 무슨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손잡아도 돼?”
“잡을 필요가 있나?”
“지금 우린 데이트 중이잖아.”
“…….”
강지영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손을 맞잡았다.
“옛날 생각나네.”
“…그랬지. 어렸을 적의 너는 유독 내 손을 많이 잡았지.”
성하리와 강지영과 친구 사이란 걸 알게 된 후, 나는 종종 성하리에게 떼를 써 강지영을 만났다. 강지영을 공략하기 위한 밑밥을 만들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녀가 미녀라 자주 만났다. 강지영의 외모는 몇 년 전과 비교하여 변함이 거의 없었다.
“이번에 동아리를 만들려고 하는데….”
“동아리를 만들 때 내가 도와줄 일은 없다. 규정대로 하면 된다. 고문 교사 1명과 동아리 인원 5명. 이상한 동아리만 아니라면 허가는 빠르게 날 거다.”
대화를 하며 걸을 때였다.
뚝. 뚜욱. 뚝.
비가 떨어졌다. 한 방울, 두 방울, 세 방울. 천천히 떨어지던 비는 10초도 지나지 않아 폭우가 되었다. 쏴아아아아. 너무 갑작스러운 폭우에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폭우에 깜짝 놀라서 허겁지겁 도망쳤다.
나와 강지영은 가만히 서 있었다.
“안 도망쳐?”
내가 물었다.
“이깟 폭우에 도망치는 것도 웃기지 않나? 그리고 도망치기엔 이미 늦었다.”
그녀와 나는 흠뻑 젖었다. 강지영의 블라우스가 물에 젖어 피부에 달라붙었다. 풍만한 가슴을 보호하는 풍만한 가슴이 보인다.
나는 재킷을 벗어 그녀의 머리 위에 둘렀다. 강지영이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의미 있나?”
“계속 맞고 있는 것보단 낫잖아.”
“감기 따윈 걸리지 않는다.”
“그래도 보통 남자친구들은 이렇게 한다고.”
“넌 드라마를 많이 본 모양이군.”
“엄마는 심심하면 드라마를 보거든.”
나는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갔다. 내가 가까워지자 강지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너와 나는 그런 사이가 아니다.”
“아직 그런 사이 맞아. 57분이야. 앞으로 3분 동안은.”
강지영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고민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평소였다면 씨알도 먹히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형성한 분위기와 앞으로 남은 3분.
겨우 3분.
그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그 안일한 생각이 그녀를 망설이게 했다. 그녀의 망설임 자체가 내겐 기회였다. 재킷을 잡고 조금 당겼다. 재킷이 강지영의 얼굴을 가린다. 주위에 아무도 없고, 얼굴까지 가려졌으니 마음의 벽이 조금이나마 풀어졌을 것이다.
“이해할 수 없군. 나보다 더 괜찮은 여자는 많을 텐데. 특히 네 또래 중에서….”
“지금 내 눈에는 지영이, 너밖에 안 보여.”
강지영은 내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봤다. 그녀의 눈에 비치는 내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고 정면을 직시하고 있었다.
“…딱 3분이다.”
강지영이 말하고 두 눈을 감았다.
나는 슬쩍 웃었다.
지금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오늘 데이트를 한 것이다. 계획은 성공했다. 겨우 3분의 키스 타임에 불과했지만, 이 일은 계기가 될 것이다.
고개를 내렸다.
젖은 입술과 입술이 부딪혔다. 물컹. 부드러우면서도 탄력적이다. 강지영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내게 맡겼다. 나는 그녀를 실망하게 할 생각이 없었다. 천천히 입술을 비비다가 벌렸다. 맞댄 상태에서 그녀의 입술도 벌어진다.
움찔.
강지영의 몸이 한 차례 떨렸다. 나는 그녀의 입안에 혀를 넣었다.
‘급하게 움직여선 안 돼. 보통 때였다면 나의 키스 테크닉으로 혼을 쏙 빼놓았겠지만… 지금은 보통 때가 아니니까.’
섹스를 위한 키스 테크닉을 선보였다간 지금 만들어진 분위기가 깨진다. 지금은 참아야 했다. 천천히 혀를 섞었다. 그녀의 혀는 내 혀가 닿을 때마다 움찔움찔거렸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달아오르기 시작했는지 그녀의 혀가 소극적으로 움직였다. 나는 그때서야 좀 더 격하게 키스를 했다. 입술을 움직이고 혀를 더 깊숙하게 넣었다.
“으웁….”
강지영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조금씩 떨리는 손은 곧이어 내 어깨를 밀어냈다. 입술 사이로 끈적한 실타래가 이어졌으나 끊어졌다. 그녀의 턱을 타고 물방울이 흐른다. 빗물인지, 타액인지 알 수 없었다.
“3분 지났다. 데이트는 여기서 끝이다. 이만 헤어지지.”
강지영이 평소보다 더 쌀쌀하게 말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걸어갔다. 그녀의 머리 위에는 여전히 내 재킷이 있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그녀가 떠나기 전, 얼굴이 붉게 변했음을 확인했다.
씨앗을 심었다.
다만 씨앗이 싹을 트려면 관심이 필요하다. 햇빛을 느끼게 해줘야 하고 물도 줘야 한다.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나는 스마트폰을 들었다.
11시 02분.
3분이 아니라 5분이나 입을 맞췄다.
나는 천안을 발동한 상태로 멀어지는 강지영의 등을 지켜봤다. 뚜벅뚜벅. 폭우를 맞으며 당당하게 걸어가던 강지영이 돌연 멈추더니 주먹을 쥐어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크, 크큭.”
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아마도 친구 아들에게 순간적으로 연애 감정을 품었던 게 부끄러운 모양이다.
『이름: 강지영
근력: S+ 체력: SS 민첩: A+ 내구: S+ 마나: A+
특성: 호루스의 눈(SS), 대지의 늑대(S)
스킬: 중검(S), 마법(A), 육감(S), 괴력(A), 자연회복(S).
호감도: 61』
마지막으로 그녀의 호감도가 60을 돌파한 걸 확인한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성하리가 목이 빠지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
나는 선도부 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내 얼굴은 벌레라도 씹어 먹은 것처럼 구겨져 있다.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 불렸다는 게 맞다. 그동안 지각을 밥 먹듯이 하며 쌓였던 벌점이 오늘 터졌다. 다시 말해 벌로서 화장실 청소든 뭐든 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젠장. 이 나이 먹고 화장실 청소를 해야 한다니…. 모카나 마키나를 소환해서 시켜야지. 정령옥을 걸면 알아서 청소하겠지.’
귀찮음에 구시렁거리며 선도부실을 둘러봤다. 선도부실은 현재 절반도 채워지지 않았다. 지금 2학년들은 대부분 실습에 나갔기 때문이다.
“성유진이지? 부장실로 들어가면 돼.”
“넵.”
3학년 선배에게 대답해주고 부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선도부장, 남궁화연은 오늘도 어떤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잠시만…. 이제 마무리다.”
나는 그의 앞에 앉았다. 서류를 힐끗 봤다. 일지다. 오늘 있었던 일을 간략히 쓰고 있다.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지각으로 인한 벌점을 부여받은 것이다. 추가로 다른 사람의 이름도 몇몇 적혀 있었다.
“선배는 2학년인데 실습 안 나가요?”
“나는 선도부장이다. 나를 비롯해 몇몇은 실습 일정이 다른 학생들과는 좀 다르다. 선도부장의 일을 인정받아 실습 기간도 짧지.”
남궁화연은 펜을 움직여 마지막 문단을 적었다. 특이사항 ? 정령과 건물 확인. 보고서 별도 첨부.
“그래서 제가 어딜 청소하면 될까요? 제발 깨끗한 화장실을 지정해주세요.”
“화장실 청소? 아, 미안하지만 네 벌칙은 나와 함께 정령과 건물을 확인하고 청소하는 거다.”
“정령과 건물이요? 거기 귀신 나오는 곳이잖습니까.”
“그런 소문도 있지.”
어떤 학교든 오싹한 소문이 몇 개 있다.
마루한 아카데미에도 칠대 불가사의가 있고, 그 불가사의 전부가 지금은 사용하지 않은 정령과 건물에 몰려 있었다. 원작 이벤트 중에도 정령과를 탐색하는 이벤트도 있을 정도다. 그러나 지금 시기에 일어나는 이벤트는 아니다.
“…이해가 안 가는데요. 정령과는 왜요?”
“이번에 정령과 선생이 오지 않았나.”
“아.”
칼레스.
정령학과를 맡은 다크 엘프.
“정령과 교사가 나타남에 따라 부학장님으로부터 명령이 떨어졌다. 13년 전에 폐건물이 되었던 정령과 건물을 확인하고 청소하라는군. 예산이 많지 않으니 폐건물을 다시 쓰려는 모양이겠지.”
“그걸 선도부가 한다고요?”
“교사도 직원도 실습 기간이라 바쁘다. 그리고 선도부가 하는 일이 대부분 그렇다. 이름은 선도부지만 심부름꾼이나 다름없지. 뭐, 그만큼 얻는 것도 있으니 불평은 없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춤에 칼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희 둘이서 건물을 청소하는 겁니까? 진짜로?”
“가보면 안다. 그리고 지금 넌 거절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닐 텐데?”
“큭….”
벌점!
지난 시간 동안 즐겁게 지각하며 쌓아왔던 업보가 귀찮음이 되어 찾아왔다.
‘…아니지. 남궁화연과 둘이서 움직이게 됐으니… 행운인가?’
나는 입술을 핥으며 머리를 굴렀다. 남궁화연과 친해질 계획을 짜기 시작한다.
???
가보면 안다.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폐건물 앞에 다른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색 머리카락에 탄력적인 갈색 피부. 암회색 눈동자와 두툼한 입술. 다크 엘프이자, 정령학과 교사인 칼레스였다. 그녀는 처음 봤을 때처럼 옆이 트인 긴 치마를 입고 있었다. 탄탄한 갈색 허벅지와 가는 종아리가 무척 섹시했다.
“왔어?”
“기다리게 했군요.”
남궁화연이 미안함을 담아 말했다.
“아니. 나도 방금 왔어. 흐응.”
칼레스는 나를 보며 콧소리를 냈다. 눈동자에 호기심이 담겨 있다.
“네가 성유진이구나?”
“…저를 아십니까?”
“당연히 알지. 아카데미에 나를 제외한 정령사는 너밖에 없으니까.”
그 말대로 아카데미에는 정령사가 나밖에 없다. 현재 마루한 아카데미의 정령과는 폐지된 상태다. 그 사실은 인터넷에 조금만 검색해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러니 아카데미 입학생 중 정령사의 재능을 가진 자들은 굳이 아카데미에 입학하지 않는다.
“원래는 나도 정령학과 교사가 아니라 경호학과 교사가 될 예정이었지만… 학부모회에 대단하신 분이 있어서 말이야. 내가 정령학과 교사가 된 건 어떻게 보면 너 때문이란다.”
“저 때문이라니… 죄송합니다.”
칼레스는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내 어깨를 만지던 손이 내 뺨을 만진다. 손톱이 조금 길었지만, 미녀가 날 만지는 손길은 나쁘지 않았다. 그녀에게도 숲과 비슷한 좋은 냄새도 났다.
어떻게 된 건지 대충 짐작이 갔다. 아마도 성하리가 힘을 쓴 모양이다. 성하리는 이번에 명분도 가지고 있었으니 강하게 떼를 썼겠지.
“사과하지 않아도 돼. 솔직하게 말해서 난 만족하고 있어. 여러 학생보다 너 하나만 신경 쓰면 되잖아. 그리고… 너한테서 좋은 냄새가 나네. 정령친화도가 상당히 높아. 정령들이 널 아주 좋아하겠어. 흐응…. 덤으로 엘프들도.”
칼레스의 숨결이 내 뺨에 느껴져서 간지러웠다.
나는 그녀의 말이 진실인지 상태창을 열어 확인했다.
『이름: 칼레스
근력: B 체력: B- 민첩: A- 내구: C 마나: B+
특성: 어둠의 숲(A+)
스킬: 은신(S), 정령술(A), 단검술(S).
호감도: 50』
처음부터 호감도가 50.
그녀의 말은 진실이었다.
‘어쩌면 난 엘프에게 먹히는 타입이었던 건가….’
좋은 걸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