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947 - 947. 아카데미의 구원자 (727/2,000)

〈 947화 〉 947. 아카데미의 구원자

정령과 건물의 악령을 퇴치하고 칼레스와 남궁화연은 일사천리로 움직였다.

남궁화연은 상부에 보고를 올렸고, 행정부에서 정령과 건물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걸 알고는 사람을 파견해 정령과를 청소하게 했다.

리모델링이라도 하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예산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정말로 예산이 없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정령과에 속한 인원은 나를 포함해 칼레스. 기껏해야 두 명이 전부니까. 예산을 쓰기엔 아까울 것이다.

칼레스는 낡은 정령과 건물에 만족했다.

“정령들은 이 건물에 만족하고 있어. 오래된 건물일수록 신비함이 깃드는 법이고, 정령들은 신비한 걸 좋아하니까.”

칼레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정령이라 해서 다 같은 건 아닐 텐데.’

나는 마키나를 떠올렸다. 인간의 외형을 한 기계 정령인 마키나의 일상은 컴퓨터 게임, TV 시청, 배달 음식 등으로 이루어져있다. 성하리는 마키나가 놀고먹는 모습을 귀여워하고 있다. 사람이 아니라 애완동물을 보는 시선과 비슷하다.

마키나는 내가 따로 소환하지 않으면 집에서 글러 먹은 백수 생활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정령과가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정령과에 속하게 된 나는 오늘부터 정식으로 수업을 받게 되어 정령과에 들어섰다. 아카데미 본관과 떨어져 있어서 걸어야 한다는 걸 제외하면 나쁘지 않았다. 장령과 교사인 칼레스도 섹시하고.

스릉스릉.

‘음?’

복도를 지나가는 검은 액체 같은 존재가 보였다.

그림자 정령.

다크 엘프인 칼레스가 계약한 정령이다. 그림자 정령은 나를 발견하더니 액체같은 몸체에서 손을 쑤욱 꺼내 손을 흔들었다. 마찬가지로 손을 흔들어주자 그림자 정령은 다시 복도를 기어가기 시작했다. 저건 일종의 로봇 청소기였다. 그림자 정령이 지나간 자리는 걸레로 닦은 것처럼 깨끗하게 변하고 있으니까.

시선을 다른 쪽으로 옮겼다. 다른 그림자 정령이 벽에 붙어서 꿈틀거리고 있다. 이 그림자 정령 또한 칼레스와 계약한 그림자 정령이다.

칼레스의 특성, 어둠의 숲(A+)은 그림자나 어둠과 높은 친화력을 가지게 된다.

“왔니?”

강의실로 들어가자 칼레스가 웃으며 나를 반겼다.

그녀는 정령과에 사람이 없기 때문인지 전에 보았을 때보다 더 편한 옷을 입고 있었다. 어깨 일부가 드러나고 풍만한 가슴 윗부분이 오픈된 옷과 짧은 핫팬츠. 보기에도 시원한 복장이었다.

“네. 정령술 수업은 처음이라 긴장되네요.”

“에이. 거짓말 하지말렴. 정령술 수업은 처음이 아니잖니. 나보다 더 뛰어난 정령사에게 교육을 받았을 텐데?”

“아카데미에서 받는 건 처음이에요.”

진령성가.

나는 외가 쪽에서 이미 정령술에 대한 수업을 받았다.

“칼레스 선생님. 미리 말해둘게요. 전 정령술에 대한 재능이 없어요.”

정령술.

정령을 부리는 방법이 아니라, 정령의 힘을 이용한 술법을 말한다.

예를 들면 물의 정령이 있다고 하자. 정령술을 이용하면 물의 정령이 가진 치유력을 이용해 상처를 회복할 수 있다. 정령술이란 달리 정령의 힘을 응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겐 정령술에 대한 재능이 전혀 없었다. 다만 정령 친화력은 천재라 말해도 부족함 없을 정도로 타고났다. 그래서 내가 정령을 부릴 때는 정령 본래의 힘을 사용한다.

“으음. 나도 그거에 대해선 들었어. 오늘은 첫 수업이니 아주 간단히 하고 잡담이나 나누도록 할까?”

“좋네요.”

내가 웃자, 칼레스도 웃었다.

1대1 수업. 그녀의 바로 앞에 앉은 상태라서 칼레스의 얼굴과 몸매가 잘 보이고, 그녀가 뿌린 향수도 느낄 수 있었다.

“릴. 이리 오렴.”

그림자 하급 정령이 칼레스의 손바닥 위에 소환되었다. 하급 그림자 정령. 흔하지 않은 속성의 정령이었다.

“정령술의 가장 기초적인 방법은 변화야. 정령은 영체니까 변하기도 쉬워. 그러니 이렇게….”

그림자 정령이 그녀의 손아귀에서 꾸물꾸물 거린다. 이어 칼레스의 손에 착 달라붙어 장갑의 형태를 취한다. 검은색 장갑. 그 끝에는 날카로운 손톱이 5cm 가량 자라있었다. 칼레스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아주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기초 중의 기초라고 할 수 있어. 정령이 잘 협력해준다면 너도 어렵지 않게 성공할 수 있을 거야.”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정령술의 기초는 나도 안다. 당연히 진령성가에서 교육받았다.

정작 정령사들은 잘 쓰지 않는 정령술이다. 그야 정령을 굳이 장비로 바꿀 이유가 없으니까. 정령사에겐 오히려 전투력을 떨어뜨리는 짓이다.

“모카.”

꾸욱.

손위에 천둥부엉이를 소환했다.

“…천둥부엉이. 네 정령이구나. 하급… 이라 하기엔 느껴지는 존재감이 보통이 아닌걸. 상급을 앞두고 있구나. 생각보다 더 대단한걸.”

과연 칼레스는 뛰어난 정령사가 맞았다. 설마하니 모카의 상태를 바로 알아볼 줄은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손 위에 모카를 올렸다. 모카는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만 갸웃거렸다.

“꼭 내가 했던 것처럼 아니어도 돼. 네게 익숙한 물건을 떠올리고 마나를 이용하렴. 마나로 기초적인 설계를 하는 거야. 그리고 정령을 설계대로 이끄는 거지.”

장갑이 아닌 칼을 떠올렸다. 내겐 칼이 더 익숙했으니까.

‘모카. 시키는 대로 해.’

모카에게 의지를 발휘했다. 모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카의 형체가 노이즈가 낀 것처럼 흐릿해지며 변하려고 했다.

실패했다.

모카의 형체는 변하지 않았다. 바로 그대로였다. 나는 실망도 하지 않았다. 예측했기 때문이다.

“실패했어요.”

“으음. 실패의 원인은… 내가 봤을 땐 마나 설계도가 확실하지 않은 것 같아.”

“저도 그래요. 칼레스 선생님이 마나를 설계도처럼 펼치라고 말했지만, 솔직히 감이 전혀 잡히지 않아요.”

“…정령술은 포기할까.”

“의외네요. 그렇게 쉽게 포기해도 되요?”

“안 되는 걸 붙잡는다고 좋은 건 아니야. 너는 정령술을 사용하지 못해도, 정령은 부릴 수는 있잖니. 다소 효율적이지는 못하지만… 어떨 때는 그편이 더 나을 수도 있어.”

“네. 그게 더 편해요.”

나는 나대로. 정령은 정령대로 싸우는 것이다. 서로에게 방해만 되지 않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무엇보다 내겐 비장의 수단인 ‘정령 강령’이 있고.

“오늘 수업은 여기서 끝내자. 네게 맞는 수업은… 따로 생각해봐야겠네.”

칼레스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내 책상 위에 앉아 옆으로 다리를 꼬았다. 갈색 피부의 탱탱한 허벅지가 겹쳐진다. 그녀에게서 달콤한 냄새가 났다.

“아직 시간이 남았어. 선생님에게 궁금한 게 없니?”

“없지는 않죠. 칼레스 선생님은 왜 제게 이렇게 잘해주시는 거죠?”

“유진이, 네가 마음에 들어서 그래.”

“학장님의 부탁은 아니고요?”

“눈치가 빠르네. 맞아. 학장님이 널 부탁한다고 했지. 하지만 네가 마음에 든다는 것도 사실이야.”

칼레스가 내 머리로 손을 뻗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왜요?”

“내가 엘프라서 그래. 네게서 진한 정령의 냄새가 나거든.”

나는 정령안을 발동했다. 내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빛난다. 칼레스의 얼굴이 한층 풀어졌다. 내 머리를 쓰다듬던 손은 어느새 내 뺨을 매만졌다. 동시에 그녀는 내 눈을 빤히 쳐다봤다.

“정말 예쁜 눈이야….”

이 분위기면 따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였다.

정령과에 불청객이 찾아왔다.

2명의 우락부락한 남성들이었다. 검무과와 창무과의 교사들이다.

“이보시오, 정령과 선생! 유진이는 검무과에 걸맞은 인재요! 그 검술 실력은 이미 학년 최고라 해도 손색이 없소! 정령과에 보내는 건 다이아몬드를 똥통에 버리는 거나 다름없소! 유진이는 검제가 될 재목이오!”

검무과 교사가 말했다. 칼레스를 보는 눈동자가 이글거린다.

“…헛소리가 심하군. 성유진의 투창 실력을 봤나? 창술 실력은 별 볼 일 없어도 투창 하나만큼은 세계 최고라 할 수 있다. 그 관천의 뇌성에게서 투창 실력만큼은 고스란히 물려받았지. 성유진은 투창 하나만으로도 세계를 제패할 수 있다. 성유진은 창무과에 남아야 한다.”

창무과 교사가 말했다. 검무과 교사보다 차분했다. 너무 차분해서 한기가 느껴질 정도다.

나는 정령과가 생기기 전에 검무과와 창무과를 번갈아 다녔다. 전공과가 없다고 농땡이는 칠 수 없었기 떄문이다.

“칼레스 선생. 유진이를 검무과에 보내시오. 학생이 한 명밖에 없는 정령과에 의미가 있겠소? 유진이는 내가 잘 가르치겠소.”

“성유진은 내가 데려간다. 일어나라, 성유진. 나와 함께 창무과로 가자. 내 이름을 걸고 최고의 지원을 약속하마.”

“창무과 따위… 이미 한물간 과다. 유진아! 검무과를 택하거라! 네 검술에는 로망이 있다!”

“로망? 같잖은 소리를 잘도 하는군. 만병지왕은 창이다. 인류는 예로부터 창을 써왔지. 성유진, 너의 어머니…. 관천의 뇌성도 창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걸 잊지 마라! 네 몸에는 창의 피가 흐른다!”

“왜곡도 적당히 하시오, 창무과! 만병지왕은 검이오! 백일창! 천일도! 만일검! 검이야말로 만병지왕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기요. 유진아! 검무과로 오거라! 검제가 되어 세상을 호령하게 해주마!”

힐끗.

칼레스의 얼굴을 살폈다. 칼레스의 미소가 짙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화가 나면 웃는 사람이었다.

“두 분, 지금 여기서 무슨 짓이죠? 제가 신입이라해서 그렇게 우습게 보였나요?”

흠칫.

검무과와 창무과 교사가 칼레스의 기백에 말려 잠깐 몸을 떨었다. 그러나 아주 잠시일 뿐, 그들은 빠르게 평정심을 찾았다.

“무례는 인정하오.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소. 하지만 그만큼 유진이는 검무과에서 놓치기 힘든 인재요. 유진이의 미래를 위해서 정령과에서 포기해주시면 안 되겠소? 유진이는 아카데미 최고의 검사가 될 소질이 있소.”

“…나 또한 무례를 사과하지. 성유진은 최고의 투창사가 되어야 한다. 그러니 정령과에서 포기해줬으면 하는군. 검무과는… 따로 결판을 내야겠지.”

검무과와 창무과 교사를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하아…. 여러분. 제가 유진이를 포기하는 건 불가능해요. 정령과에 찾아온 건 유진이니까요. 그러니 유진이가 어떤 전공과를 선택할지 맡기도록 하죠.”

모두의 시선이 다시 내게 향했다.

검무과와 창무과는 내가 불세의 천재라고 착각하고 있다. 내 일부만 봤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천재로 보이는 건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일반 학생들보다 더 뛰어난 신체 능력 때문이다. 거기에 그들은 정식으로 날 가르친 적이 없다.

시간이 지나면 내가 남들보다 재능이 없다는 걸 알게 되겠지. 그때 가서 실망하여 내게 지랄할 수 있다.

‘검무과나 창무과. 둘 중 한 곳에 들어가도 귀찮게 간섭해오겠지. 무엇보다… 다크 엘프 미녀를 냅두고 남자 새끼들 밑에서 땀흘리며 훈련하고 싶겠냐고.’

칼레스를 쳐다봤다. 갈색 피부가 너무도 탐스러웠다.

“전 정령과 선택할 겁니다.”

“왜냐?!”

“왜지?”

그들이 동시에 내게 물었다.

“전 정령사니까요.”

물론 이걸로 납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거라면 정령과에 사이좋게 처들어오지도 않았겠지.

나는 그들이 불만을 토해내기 전에 이어 말했다.

“엄마랑 할아버지는 내가 정령사가 되길 원하고 있어요.”

화를 내려던 그들은 뚝 멈췄다.

내 엄마는 성하리고, 내 할아버지는 진령성가(眞靈成家)의 가주다. 그 두 개의 이름을 거론하자 검무과와 창무과는 입을 다물고 서로의 눈치를 봤다.

무시하기 힘든 이름들.

그중에서 성하리의 이름은 그들에게 더 크게 다가갔다.

“성하리 님이 네가 정령사가 되길 원하신다고?”

“네. 뭣하면 전화라도 걸어서 확인해드릴까요?”

“아, 아니 됐다. 검무과는 네 선택은 존중해주마. 크흠, 정령과 선생. 무례를 용서해주시오. 난 이만 물러가겠소….”

검무과 교사는 어색한 걸음으로 떠났다.

“창무과도 네 선택을 존중하다.”

창무과 교사는 고개를 깊이 숙이고 떠났다.

“으음…. 일은 잘 처리된 것 같지만… 복잡한 기분이야.”

칼레스는 팔짱을 낀 상태로 쓴웃음을 지었다.

“칼레스 선생님. 궁금한 게 있는데요.”

“궁금한 거? 뭐니? 망설이지 말고 물어보렴.”

“좋아하는 남자 스타일이 뭐예요?”

쿡쿡. 칼레스가 낮게 웃었다.

“글쎄. 너 같은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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