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0화 〉 950. 아카데미의 구원자
“나와 계약 하기 싫나? 허나 내 구역에 들어온 대가는 치러야지…. 대가는 네 목숨이다!”
암오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침착하게 찰나를 사용해 그의 돌격을 피했다. 암오의 행동은 반쯤 예측하고 있었다. 암오의 계약 조건은 나와 계약할 생각이 전혀 없기에 내뱉을 수 있는 요구 조건에 가까웠으니까.
정말로 나와 계약할 생각이 있었다면, 무난한 조건을 내밀었을 것이다.
“암오 님! 이게 무슨 짓이죠?! 그는 저의 제자입니다!”
칼레스가 외쳤다.
“너의 제자라고 해서 내 계약자는 아니지. 인간 고기가 그립다…. 이놈의 고기는 분명 극상의 맛일 테지….”
암오의 긴 몸이 하늘로 솟구치는 듯하더니 그대로 바닥의 어둠 속으로 다이빙하듯이 들어갔다. 그 거대한 몸체가 사라지기까지 3초도 걸리지 않았다.
내 황금색 눈동자는 쉴새 없이 움직였다. 내게는 어둠 속을 기어 다니는 암오의 움직임이 보였다.
“……아까 했던 말씀이 농담이 아니셨군요.”
“농담이 서투르다고 말하지 않았나. 난 오늘 농담을 한 적이 없다.”
어둠 속에서 암오의 말이 울렸다. 칼레스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암오 님. 부탁드릴게요. 이대로 저와 제 제자를 보내주세요.”
“칼레스. 가만히 있어라. 너를 죽일 생각도, 먹을 생각도 없다. 내 목적은 오직 하나, 저 배신자의 핏줄을 잡아먹는 것이다. 아아, 잡아먹는다면 분명… 더 강해질 수 있겠지. 기대되는구나.”
암오의 몸이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등 뒤다.
나는 오른손에 롱소드의 형태를 한 스톰브레이커를 소환했다. 검신을 타고 푸른 검기와 뇌전이 내달린다.
“죽어라, 지네.”
영천류(影天流) 뇌광(雷光).
푸른 빛줄기가 거대한 지네의 몸을 가른다. 베인 암오의 몸이 땅에 떨어지려는 순간, 암오의 몸이 시간을 되돌린 것처럼 다시 붙었다.
“나는 어둠이다. 이깟 공격이 통할 것 같으냐?”
“허세 부리기는.”
공격은 통했다. 암오의 기다란 몸에 남아 있는 푸른 뇌전이 그 증거다. 암오는 어둠인 동시에 실재하는 존재다. 그리고 나를 잡아먹기 위해 실체화한 상태. 공격은 충분히 먹힌다.
“암오 님!!”
칼레스가 달려와 내 앞에 섰다. 암오의 붉은 눈이 가늘어진다.
“비켜라, 칼레스. 나는 널 죽일 생각이 없다.”
“암오 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요! 암오 님은 냉정하시잖아요. 유진을 죽이려는 진짜 이유는 무엇이죠?!”
“그놈에게서 배신자의 냄새와 존재가 느껴진다. 이야기는 들었지. 배신자가 아이를 낳았다고. 배신자의 핏줄은 여기서 없애야 한다. 마지막 경고다. 비켜라, 칼레스.”
암오가 말하는 배신자가 성하리라는 걸 눈치챘다. 예전에 정령왕이 나를 배신자의 피붙이라고 말했던 게 기억난다.
“진정해요. 유진이는 암오 님이 말씀하시는 배신자 당사자가 아니잖아요. 그건 단순한 화풀이에요.”
“그 화풀이라도 해야 한다. 배신자는 내 친우를 먹었다. 내가 놈을 삼키려는 건 그 복수다. 덤으로 나는 더 강해질 수 있다. 힘과 복수를 함께한다. 일석이조가 아닌가?”
“못 본 사이에 많이 변하셨군요. 제가 아는 암오 님은 이러시지 않았어요. 설마 다른 계약자가 생기셨나요?”
“다른 계약자가 생기긴 했지. 덕분에 많은 걸 배웠다.”
“누구와 계약을…!”
칼레스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암오가 달려들었다. 설마 정말로 공격할지 몰랐던 칼레스의 반응이 약간 느렸다.
‘칼레스가 다치면 안 돼! 찰나!’
칼레스의 어깨를 잡고 옆으로 뛰어 암오의 공격을 피했다.
철컥, 철컥. 암오의 턱이 위협적으로 움직였다.
스그그그, 스그그그. 암오가 바닥을 기면서 나를 향해 접근한다.
“모카!!”
천둥부엉이 모카를 소환했다.
“꾸욱!”
모카는 소환되자마자 상황을 파악하고 사방에 번개를 흩뿌렸다. 바닥을 기며 접근하던 암오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나 어둠 속에 모습을 감췄다.
나는 인상을 썼다. 내 정령안으로도 암오를 찾을 수 없었다. 내 정령안에 버금가는 특수한 능력을 사용한 게 분명하다.
‘암오는 모카를 경계하고 있어.’
운이 좋은 건 아니다. 번개의 정령인 모카는 상급을 바라보는 중급 최상위 정령이며, 어둠의 정령인 암오에게서 상성으로 우위에 있었다. 암오는 모카를 함부로 보지 못한다.
“선생님. 일어날 수 있어요? 어디 다친건 아니죠?”
“…내가 겨우 이 정도로 다칠 리 없잖니.”
칼레스는 암울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계약이 일방적으로 끊어졌어. 암오 님은… 아니, 암오는 정말로 우리를 죽일 생각이야.”
“일방적으로 계약을 끊는 게 가능해요?”
“가능해. 그런 계약이었으니까.”
자세히는 몰라도 암오가 갑에 위치한 계약이었던 모양이다.
“이제 어쩌죠?”
“암오가 저렇게 나온 이상 진정시킬 방법은 없어. 해가 지기 전에 산에서 벗어나야 해.”
위에에에에엥!
귀에 거슬리는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날아왔다. 손바닥만 한 어둠 모기였다. 내가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칼레스가 반응했다. 허벅지에 숨겨두었던 단검을 꺼내 재빠르게 휘둘러 모기를 베어낸 것이다. 단검의 검신에는 새까만 검기가 이글거렸다.
‘맞다. 칼레스의 단검술은 S랭크였지.’
A급 히어로이자 전직 암살자. 내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의 여인이 아니었다.
“이쪽으로 가자.”
“거긴 돌아가는 길이 아닌데요?”
“암오라면 돌아가는 길에 함정을 준비했을 거야. 굳이 함정에 당해줄 필요는 없어.”
“과연.”
그녀의 뒤를 따라 달렸다.
암오가 뛰쳐나왔다. 놈이 준비한 함정이 있는 곳으로 가지 않자 초조해진 것이다. 암오는 내가 아니라 칼레스의 다리를 노렸다.
칼레스는 위로 점프해 암오의 첫 번째 기습은 피했으나, 이어지는 암오의 공격에 위기에 몰렸다.
“모카!! 전광석화!!”
전신에 번개를 감은 모카가 날아가 암오의 몸에 부딪혔다. 암오의 몸이 붕 떠올라 나무에 부딪혔다. 암오의 다리가 분노에 떨 듯이 일제히 꿈틀거렸다.
“이 빌어먹을 새 놈이…!!”
“꾸욱, 꾸욱!”
암오는 길쭉한 몸으로 똬리를 틀 듯이 모카의 몸을 감쌌다. 의외로 한 성깔 있는 모카는 피하지 않았다. 도리어 놈의 공격을 받으며 맞불을 놓듯 전류를 사방으로 방출했다.
파지지직, 파지지지직!
수 백 줄기의 번개가 어둠을 밝힌다.
“선생님! 가요!”
“…뭐? 이대로? 천둥부엉이는 어쩌고?”
“모카는 괜찮아요. 위험하면 역소환 할 테니까요.”
“차라리 함께 싸우는 건….”
“저기에 가서요?”
칼레스는 입을 다물었다. 암오와 모카가 있는 곳은 어두웠다. 지성 없는 어둠의 정령들이 꿈틀거리고 암오의 다리가 꿈틀거린다. 상성의 우위에 있다고 해도 모카는 아직 중급 정령. 반면에 암오는 200년 넘게 이 구역을 지배해온 터줏대감. 1대1 싸움에선 모카가 버티는 게 고작이다.
칼레스는 어둠이 거의 없는 곳을 향해 달렸다. 나는 그녀의 뒤를 따르며 정령안으로 모카의 상황을 지켜봤다.
‘모카. 고생했어. 돌아가. 만일을 대비해서 준비해둔 정령옥이 어디 있는지 알지? 그거 하나 먹고 회복해.’
꾸욱.
모카의 힘없는 대답이 머릿속에 울렸다. 모카는 잘해주었다. 덕분에 암오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함부로 우리 뒤를 쫓지 못하리라.
“칼레스 선생님. 뭔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아요?”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얼굴이 바위처럼 굳어 있었다. 그녀의 매끈한 갈색 피부를 타고 땀방울이 흐른다.
“…암오가 수작을 부렸어. 우린 암오의 허락 없이는 산을 벗어나지 못해.”
나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바깥과 연결이 되지 않았다. 암오의 힘이 전파를 방해하고 있다.
‘……정령 소환은 되는 것 같으니 도움을 구할 수는 있어.’
정령과 나는 이어져 있다. 마키나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성하리의 도움을 받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 방법은 안 돼. 성하리는 이 사건을 공론화할 거야. 그렇게 되면 칼레스는 교사직에서 해고당할 테고….’
칼레스를 교사로 추천한 강지영의 입지도 타격을 받는다. 여러모로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다. 여기서 나와 칼레스, 둘이서 해결하는 게 최선이다.
“방법을 바꿔야겠어.”
“어떻게요?”
“도망에서 대항으로. 암오를 죽이긴 힘들지만… 치명적인 일격을 입힐 순 있어. 암오도 죽음을 바라는 건 아닐 테니 우릴 밖으로 보내 줄 거야.”
칼레스는 조용히 한 손을 들었다. 그녀의 주위로 어둠이 모여들더니 사방으로 퍼졌다.
나는 두 개의 어둠을 느꼈다. 칼레스의 어둠과 암오의 어둠이다. 암오의 어둠 쪽이 더 상위에 있으나, 칼레스의 어둠도 미약하지는 않다.
칼레스가 특성인 어둠의 숲(A+)을 발동한 것이다.
“암오가 어디에 있는지 발견했어. 천둥부엉이와 싸웠던 탓에 약해진 것 같아. 이번이 놓칠 수 없는 최고의 기회야. 유진아, 네 도움이 필요해. 네 번개의 힘은 암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어. 할 수 있겠니?”
“당연한 말씀을 하시네요. 우리가 살려면 해야죠.”
“……!”
칼레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야. 그저… 옛날 기억이 떠올랐어.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었거든.”
칼레스는 더 말하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그녀의 호감도를 확인했다.
『칼레스의 호감도: 70』
『칼레스의 심리: 대현이의 첫 만남 때도이랬는데….』
호감도 70이 되면서 칼레스의 심리가 보였다.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녀의 심리보다 칼레스의 호감도가 급상승해 70이 되었다는 게 더 중요했다.
‘호감도 70이면 결혼이 가능한 수준…. 즉, 기회가 오면 바로 자빠뜨리면 돼…!’
???
암오를 찾았다.
암오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 몸을 둥글게 말고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놈의 몸 곳곳에 상처가 보였다. 모카와 싸우면서 입은 상처들이다.
칼레스는 내게 눈짓했다. 작전은 여기 도착하기 전에 짰다. 그녀가 암오의 시선을 끌고 내가 빈틈을 노려 암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것.
암오의 더듬이가 꿈틀거렸다. 우리의 존재를 알아차렸는지 바로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킨다.
“직접 찾아왔나? 어리석은 것들.”
“해가 떠 있어. 밤이 되면 정말 희망이 없으니 합리적인 선택을 했을 뿐이야.”
“칼레스. 그동안의 정을 봐서 마지막 기회를 주마. 놈을 내게 바쳐라. 그럼 나는 너와 다시 계약할 용의가 있다.”
“…구차하네. 상태가 많이 안 좋은가 봐?”
“네겐 내 힘이 필요할 텐데?”
“필요 없어. 나는 이제 아카데미의 교사니까.”
칼레스가 뛰었다. 동시에 나도 옆으로 달려 암오를 노렸다. 암오는 내가 아닌 칼레스를 먼저 처리하기로 한 듯 나를 무시하며 움직였다. 계획대로였다. 다만, 암오 주위에 있던 자그마한 벌레들이 내게 달려들었다.
영천류(影天流) 유선(流線).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검이 움직였다. 가장 가까운 벌레부터 시작해서 베어내고, 베어내고, 또 베어냈다. 벌레들은 검의 흐름에 말려들어 죽어 나갔다.
어둠 벌레는 시체를 남기지 않았다. 푸른 검기에 베이면 그대로 어둠으로 변해 사라졌다.
‘찰나!’
벌레를 상대하던 나는 갑자기 몸을 틀어 칼레스와 싸우던 암오의 등 뒤를 노렸다. 푸욱. 스톰브레이커의 검날이 암오의 등에 제대로 박혔다.
“이 역겨운 놈이…!”
“잘했어! 놀랄 정도로 완벽한 기습이었어!”
암오와 칼레스의 반응은 상반되었다.
나는 숨을 들이켜며 뇌전을 일으켰다. 파지지지직! 검을 통해 뇌전이 어둠 지네의 몸을 질주했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악!”
암오가 괴로움에 가득 찬 비명을 내질렀다. 놈의 다리 수 십 개가 빠르게 움직이며 어둠 속으로 기어간다. 나는 이를 악물고 놈의 등에 꽉 달라붙었다. 끈적한 어둠이 내 몸에 달라붙는다. 어둠은 압력이 되어 나를 떨쳐내려고 했다.
한계였다.
결국 손을 놓친 나는 어둠에 휩싸인 몸에 움직이지 못하고 입만 크게 벌려 소리쳤다.
“모카!!”
“꾸우욱!”
정령옥을 섭취해 절반 이상을 회복한 모카를 소환했다. 모카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암오의 더듬이를 뜯어내고 벼락을 쉴 틈 없이 떨어뜨렸다.
“아, 안 된다…! 내가 이리 허무하게… 크아아아앗!”
암오는 어둠 속으로 도망치려고 했으나, 시의적절하게 칼레스가 끼어들었다. 그녀가 일시적으로 어둠을 장악하며 암오의 도망을 막은 것이다.
이윽고 모카의 번개 발톱 쐐기에 암오의 몸이 부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