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951 - 951. 아카데미의 구원자 (731/2,000)

〈 951화 〉 951. 아카데미의 구원자

부서진 암오의 몸은 어둠 그 자체였다.

당연했다. 어둠의 정령이었으니까. 그 본질은 어둠 그 자체였다.

“꾸우욱!”

모카가 포효를 내질렀다. 그의 몸에서 새파란 뇌전이 방출되어 어둠을 훑고 지나갔다. 나는 내 몸에 달라붙은 어둠을 털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암오가 죽으면서 어둠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내 곁으로 칼레스가 다가왔다. 일부러 몸을 비틀거리자 그녀가 서둘러 내 어깨를 잡아 부축했다. 내 팔은 은근슬쩍 그녀의 가슴팍에 닿았다.

“뭔가… 평소와 다른데. 모카가 왜 저러는 거죠?”

“이번 전투로 깨달은 게 있는 모양이야.”

파지지직. 파직. 파지지직.

모카의 몸에서 쉴 틈 없이 뇌전이 방출되었다. 모카는 주변의 어둠을 번개로 모두 태우고는 이내 하늘로 날아올랐다.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모카의 몸이 번쩍번쩍거렸다.

“정령도 깨달음을 얻어요?”

“정령에게도 자아가 있잖니.”

“모카는 이제 상급 정령이 되는 건가요?”

“확신할 수는 없어. 하지만… 모카는 상급 정령이 되기에 충분히 힘을 쌓았다고 생각해. 지금 하늘로 날아간 건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해서겠지. 모카를 믿고 기다려주렴.”

“네, 뭐. 계약이 끊어진 것도 아니니 곧 돌아오겠죠.”

정령안으로 모카의 시야를 공유했다. 지금 모카는 구름 사이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모카의 주위로 벼락의 존재감이 느껴진다. 모카는 계속해서 강해지고 있었다. 내가 신경 쓰지 않더라도 상급 정령의 경지에 도달할 것이다.

칼레스는 복잡한 표정으로 암오가 있었던 곳을 바라봤다. 그동안 함께해온 어둠의 상급 정령이 이렇게 소멸했으니 허무함도 느꼈으리라.

“칼레스 선생님….”

그건 그거고. 지금은 그녀를 달래면서 꼬실 좋은 기회였다. 나는 천천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이 세계가 얼마나 넓은데. 찾아보면 다른 어둠의 상급 정령도 있을 거예요.”

“상심? 그런 게 아니야. 이상함을 느꼈어. 내가 아는 암오는 원래 이런 성격이 아니야. 아마 새로운 계약자가 암오에게 영향을 끼친 거겠지. 그리고 암오의 새로운 계약자는 위험해. 되도록 정체를 알아내고 싶지만….”

“방법이 있나요?”

“없어. 그게 가장 큰 문제야.”

칼레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제자리에 서서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내게 말했다.

“우리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없어. 돌아가자. 학장님에게 보고하면 한 소리 듣겠네….”

“바로 돌아가요?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잠깐 정도는 놀다 가죠? 딱히 다친 곳도 없잖아요.”

바로 돌아간다? 안 된다. 아카데미 밖으로 단둘이 나와 있는 지금 칼레스를 꼬실 절호의 기회다.

“원래라면 관광도 조금 하고 돌아갈 계획이었지만… 사고가 발생했잖니. 당장 아카데미에 돌아가는 편이 좋을 것 같아.”

칼레스는 단호했다. 나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내가 뭐라 설득하더라도 그녀는 쉽게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카, 칼레스 선생님. 잠깐 볼일 좀 보고와도 될까요?”

“볼일? 아…. 여기서 기다릴 테니 천천히 보고 오렴.”

시간을 벌었다. 나는 칼레스로부터 멀찍이 떨어졌다. 목소리는 물론이고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거리에서 멈췄다.

“마키나.”

마키나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소환되었다. 부풀어 오른 볼때기에는 채소 조각, 입술에는 붉은 소스가 묻어 있었다.

“얼굴이 왜 그래?”

“몰라서 물어? 지금 점심때잖아. 치킨 샐러드랑 로제 떡볶이 먹고 있었는데… 너땜에 다 먹지도 못했어!”

“정령 주제에 왜 그렇게 식탐이 많아.”

“정령 무시하지 마!”

“엄마는?”

“방금까지 같이 있었어. 빨리 돌려 보내줘! 너무 늦게 돌아가면 아줌마가 떡볶이를 다 먹어버릴 거야!”

“네가 해야 할게 있어. 그것만 해주면 바로 돌려보내 줄게.”

“꼭 지금 해야 해? 밥 먹고 하면 안 될까?”

“밥 먹기 싫어?”

“아, 알았어. 하면 되잖아.”

나는 손가락을 들어 어느 한 방향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날아가다 보면 자동차가 나올 거야. 자동차를 달리지 못할 정도로 고장 내. 인위적으로 망가뜨리지 말고 아주 자연스럽게 고장 난 것처럼. 할 수 있지?”

마키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쳐다봤다.

“할 수 있긴 한데…. 이번에는 또 무슨 꿍꿍이를 벌이는 거야?”

“몰라도 돼. 아, 엄마한테도 말하지 마. 물어보면 대충 둘러대.”

“알았어. 그것만 하면 바로 돌려보내 줘야 해.”

마키나가 빠르게 나무 사이를 날아갔다. 나는 정령안을 통해 마키나와 시야를 공유했다. 1분도 지나지 않아 갓길에 주차되어 있는 자동차를 발견했다. 나와 칼레스가 타고 온 렌트카다.

-이 차야?

‘맞아. 망가뜨려.’

-안 굴러가게만 만들면 되지?

‘어. 자연스럽게.’

마키나는 근처에 있는 나뭇잎을 들어 엔진안에 넣었다.

-끝났어. 돌려 보내 줘. 로제 떡볶이 먹어야 해!

‘나뭇잎만 넣은 것뿐이잖아. 장난해?’

-최대한 자연스럽게 고장 나길 원하잖아. 이거면 충분해.

마키나는 저래 보여도 기계 정령이다. 기계에 관해선 나보다 잘 알 것이니 일단 믿기로 했다. 그리고 자동차가 고장 나지 않고 움직인다면 마키나를 다시 소환해 갈구면 되는 일이다.

나는 마키나를 역소환하고 칼레스에게 다가갔다.

“죄송해요, 선생님. 오래 기다리셨죠?”

“오래 기다리기는 무슨. 아래로 내려가자.”

칼레스가 앞장서서 움직였다. 엘프라 그런지 산속에서도 쉽게 길을 찾아냈다. 자동차를 발견했다. 겉으로 보기엔 아주 멀쩡했다.

우리는 차에 올라탔고, 그녀가 시동을 걸었다. 시동이 걸렸다가 갑자기 팍 꺼졌다.

“으응?”

당황한 칼레스가 다시 시동을 걸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시동이 걸리다가 꺼졌다. 그 행동을 3번 정도 더 시도했다가 곧 엔진이 완전히 맛이 가버렸다.

칼레스가 당황했다.

“이, 이게 왜 이래?”

“저, 저도 자동차는 잘 몰라서…. 우리 설마 여기서 조난당하는 거예요?”

“요즘 시대에 조난이 무슨 소리니.”

당황하던 칼레스는 빠르게 침착함을 되찾았다. 사람이 다친 것도 아니고 자동차가 고장난 것뿐이다. 그녀는 스마트폰으로 렌트카 회사에 연락했다.

‘맞아. 여기 현대였지.’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조난 당한 산속에서 야릇한 일이 일어나기엔 대한민국의 인프라가 뛰어났다.

“렌트카 회사 쪽에서 사람을 보내겠대. 3시간 정도 걸릴 거라 하는데… 흐음. 차라리 근처 마을까지 걸어가는 편이 빠를 것 같네.”

“걸어서요? 근처에 마을이 있어요?”

“아까 오면서 봤잖니. 대충 1시간 거리야. 작은 마을이긴 하던데… 택시 정도는 있지 않을까? 그게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말해서 차를 빌려 타는 것도 한 방법이고.”

머리를 굴렸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똑같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차에서 가만히 기다리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3시간의 여유 시간이 발생하니까.

“……칼레스 선생님은 어떻게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으세요?”

“여기서 가만히 있는 것보다 움직이는 편이 좋을 것 같아. 혹시 못 걷겠니? 따로 사람을 부를까? 학장님에게 부탁한다면 헬기 정도는 지원받을 수 있을 거야.”

“아니요. 굳이 그럴 필요 있어요? 그 정도로 급한 것도, 다친 것도 아니잖아요. 걸어가요.”

우리는 그대로 차에서 내렸다. 차를 버리고 도로를 걸었다. 대한민국에서도 워낙 구석진 곳이라 그런지 도로는 지나다니는 차는 없었다.

나는 머리를 굴렸다. 뭔가 방법이…. 내가 떠올리지 못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걷는 것도 나쁘지 않네. 그렇지?”

“네. 운동도 되고 좋아요. 그런데 선생님. 궁금한 게 있습니다.”

“궁금한 거? 개의치 말고 물어보렴.”

“아까 암오가 저를 먹으면 강해진다고 말했잖아요. 정령은 원래 사람을 잡아 먹으면서 강해지나요?”

“그럴 리가 없다는 걸 너도 잘 알고 있잖니.”

“그렇긴 한데 혹시 몰라서요.”

내가 알기로 이 세상에 절대적인건 없었다.

“…일반적인 정령은 생물을 먹고 강해지지 않아. 자연의 기운을 흡수해서 강해지지. 그리고 자연의 기운이란 자연스럽게 쌓이기 마련이고…. 암오가 이 산을 자기 구역으로 삼은 건 천천히 산의 기운을 흡수해 강해지기 위해서야. 사람을 먹고 강해질 수 있다면 이미 수백, 수천 명의 사람을 잡아 먹으려 했을 거야.”

“하지만 암오는 저를 먹으면 강해진다고 확신하고 있었어요.”

“나도 그게 마음에 걸려. 어쩌면 암오의 다른 계약자가 뭔가 한 것일 수도 있고….”

칼레스가 말끝을 흐렸다. 그녀의 얼굴은 정말 복잡했다.

분위기가 딱딱해진다. 나는 말을 돌려 분위기를 풀었다. 분위기가 풀어지자 대화는 더 매끄러워졌다.

마을에 도착했다. 작은 마을이었다. 인구수는 500명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웬만한 건 갖추고 있었다. 밭일하는 노인들이 보인다. 젊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우선 이 마을 촌장과 이야기를 하고 차를 빌리자.”

으레 이런 작은 마을은 촌장과 직접 이야기 나누는 편이 빨랐다.

‘……방법이 없나? 이대로 차를 타고 기차역에 가서 아카데미로 돌아가야 한다니…. 기껏 둘이서 아카데미 밖으로 나왔는데… 이 좋은 기회를….’

마을 길을 걷는데 민박집이 눈에 들어왔다. 도시의 모텔과 비교하면 낙후되고 작았다. 하지만 넓은 마당과 조용히 시골 풍경을 배경으로한 민박에는 나름의 운치가 있었다.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야릇한 상상 끝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칼레스 선생님.”

“응? 왜 그러니?”

“오늘은 여기서 머물고 내일 귀환하면 안 될까요?”

칼레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다른 여자였다면 대뜸 화부터 냈을지도 모를 일인데도 그녀는 차분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니?”

전투의 여파로 몸이 안 좋아졌다. 라는 말은 내뱉어선 안 된다. 교사로서 책임감이 있는 칼레스는 내 몸 상태가 안 좋아진 걸 알면 바로 아카데미 학장에게 헬기 지원을 요청할 것이다. 그리고 성하리에게 연락이 가겠지. 성하리가 성격이라면 히어로 협회를 압박할 수도 있으니 나와 칼레스가 함께 할 시간은 더욱더 줄어들 것이다.

“모카 때문에요. 모카가 이 근처에 있어요. 모카의 계약자로서 모카의 성장을 여기서 확인하고 싶어요. 그리고 어쩌면 제가 여기에 없다면 모카는 저를 따라올 테고….”

“천둥부엉이가 상급의 경지에 오르지 못할지도 모른다…?”

“네.”

“들어본 적 없는 말이지만… 아예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야. 정령은 민감하니까. 중급 정령이 상급 정령으로 올라가는 일이 드문 것도 아니니….”

칼레스는 팔짱을 끼며 스스로의 턱을 매만졌다. 깊이 생각에 잠겼던 그녀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일단… 학장에게 보고부터 하자. 외박은 학장의 허락을 맡아야 해.”

“네. 선생님.”

강지영이라면 허락할 것이다. 아카데미 학생이 강해질 기회를 겨우 귀환이 늦어진다는 이유로 거부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내 예측대로 강지영은 허락했다. 나와 칼레스는 민박집에 머물게 되었다. 물론 각방이었다. 침대도 없었고 컴퓨터도 없었다. 허나 마당이 넓고 마루가 있었다. 칼레스는 만족스러워했다.

나는 마을 슈퍼에 가서 음식물을 잔뜩 구매해서 돌아왔다. 해가 저물 시간에 저녁을 먹었다. 삼겹살은 어디에서 먹든 맛있었다.

마루에 칼레스와 나란히 앉았다. 작은 술잔을 들였다. 투명한 소주가 찰랑였다.

“아카데미 학생은 음주가 금지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니?”

“에이. 여긴 아카데미가 아니잖아요? 아카데미의 규칙은 안 통해요.”

“궤변이지만 인정해줄게. 우리가 같이 술을 먹었다는 건 다른 사람에게 비밀이야.”

칼레스가 술잔을 들었다. 짠! 술잔이 부딪치며 청명한 소리를 냈다.

술이 들어갔다. 목구멍을 넘어간 뜨거움은 몸을 달궜다. 나와 그녀는 술과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술이 없어질수록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는 점점 좁혀 들었다.

밤하늘의 별은 반짝이고, 벌레 우는 소리가 들렸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기분 좋게 간지럽힌다.

분위기는 만들어졌고, 때를 찾아왔다. 나는 칼레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살짝 풀린 그녀의 눈과 내 눈이 마주했다.

“칼레스.”

“……유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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