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4화 〉 954. 무지개 과일
강오적을 따라 임시 대기실 팻말이 걸린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나 말고도 7명의 헌터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그중에 한 명, 눈에 들어오는 헌터가 있었다.
“오랜만이군.”
여름이 다 와 가는데도 검은 코트를 입고 있는 남자였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그는 다른 7명의 헌터 중 가장 젊었다.
강석수.
대한민국의 젊은 천재 마법사로 유명한 남자다.
나와는 약 2년 전에 던전 서바이벌에서 만나 경쟁했던 사이다.
나는 보통 남자의 이름이나 생김새는 잘 기억하지 않는다. 기억해도 어지간히 인상적이지 않으면 잘 잊는 편이다. 강석수를 잊지 않은 건 이놈이 TV나 인터넷에 자주 오르락거리고, 이놈의 여자친구가 맛있었던 게 이유다.
‘아니지. 그때는 여자친구가 아니었어. 소꿉친구이긴 했지만. 이름이 유정미야. 확실히 기억해. 여기엔 없네.’
나는 강석수의 옆에 앉았다. 자리가 거기밖에 없었다.
“오랜만이긴 해. 뭐 하고 지냈냐?”
“헌터가 뭐 하고 지냈겠나. 당연히 협회의 의뢰를 수행하고, 던전을 공략하며 지냈다. 너는….”
“나도 비슷하게 지냈어.”
“그게 아니라 간간이 네게 연락했다만, 나를 완전히 무시하더군. 수신 차단까지 한 이유가 뭐지? 내가 네게 잘못한 건 없을 텐데?”
강석수의 목소리가 서늘했다. 날 보는 눈빛도 곱지 않았다. 한 대 칠까 하다가 참았다.
“네가 날 귀찮게 했잖아. 난 남자가 귀찮게 전화하면 수신 차단하는 버릇이 있어. 미안하다고 생각하니 차단을 풀어줄게.”
나중에 다시 차단하면 그만이다.
“허.”
헛웃음을 흘린 강석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어서 대기실로 강오적이 다시 등장했다. 그는 B급 던전에 대한 브리핑을 시작했다.
“이번 B급 폐쇄형 던전에 대한 정보는 전무 합니다. 정찰을 못한 게 아니라 정찰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여러분이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정보 없이 공략해라.
아예 아무것도 없이, 0에서부터 공략을 하라는 뜻이었다. 경험을 쌓게 하는 목적이니 그러려니 했다.
“물론 위험하다고 판단되시면 바로 탈출하시면 됩니다. 실패했다고 해서 누구도 탓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여러분의 생명이니까요.”
그는 우리에게 붉은 실타래를 건네주었다.
기원의 실타래.
폐쇄형 던전에서 긴급 탈출할 수 있게 해주는 아이템.
“제가 브리핑할 것은 던전이 아니라 여러분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서로 협력 해야 하지만, 서로에 대한 정보가 없지요.”
그가 나와 다른 헌터들에 대한 정보를 설명했다. 나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브리핑을 겨우 넘겼다. 헌터 중에는 여자가 2명 있긴 했으나, 내 시선을 끌 정도로 빼어난 미녀가 아니었다.
“브리핑은 이걸로 끝입니다. 문제가 없다면 1시간 뒤에 던전 공략을 시작하겠습니다.”
헌터들이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능력을 바탕으로 포지션을 정하며 전술을 결정한다. 그 중심에는 강석수가 있었다.
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20분 만에 끝났다. 나는 남은 시간에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한하린은… 대답이 없네. 벌써 A급 던전에 들어갔나.’
강석수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내 앞에 캔커피를 올려두었다.
“내가 예전에 했던 말. 생각해봤나?”
“예전에 했던 말?”
미간을 좁혔다. 머리를 굴려본다. 떠오르는 기억이 없었다. 강석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길드 말이다. 함께 길드를 만들자고 네게 제안하지 않았나.”
“아, 그랬지. 아직 안 만들었어?”
“난 아직 A급 헌터가 아니다. 그러나 실적도 거의 채웠다. 아마 다음 달, 혹은 다다음 달에 승급 시험을 치르겠지.”
“오. 축하해. 나보다 빨리 A급 헌터가 되겠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강석수는 어렸을 때부터 천재 취급을 받아 왔고, 나보다 2살 더 많으니까.
“그때의 제안. 지금도 유효하다.”
“굳이 나를?”
“현 대한민국에서 네 가치는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다. 네가 얼마 전에 세이컬 길드의 가입 권유를 거절하면서 네 가치는 더 올랐지.”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내 뒷조사라도 한 거야?”
강석수가 피식 웃었다.
“뒷조사? 대한민국은 좁다. 가만히 있어도 정보가 굴러 들어올 정도지.”
정말 가만히 있어도 정보가 굴러오는 건 아니다. 따로 정보 체계가 있는 모양이다.
“세이컬 길드를 거절했는데 네 길드에 들어갈 거라 생각해? 세이컬 길드 만큼 날 지원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아직 길드도 없고. 솔직히 지금 네 말은 다단계 수준으로밖에 안 보여.”
다소 선을 넘는 말에도 강석수의 얼굴은 평온했다.
“이해한다. 거대 길드에 비하면 아무것도 없다. 길드 창설이 포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는 스마트폰을 들어 내게 보여주었다. 길드에 대한 정보가 들어 있었다.
“뭐야.”
“나는 A급으로 승급하자마자 길드를 창설할 거다. 그를 위한 준비를 해왔다. 2년 전에 계획을 잡았고, 지금은 거의 완성 단계다.”
“세븐티어?”
“길드의 이름이다. 고심해서 고른 이름이지. 멋지지 않나?”
“아니. 별생각 없는데.”
자랑스러워하는 강석수를 무시하고 길드의 정보를 확인했다.
보통 길드와 달랐다.
세븐티어 길드는 7명의 길드 마스터가 함께 길드를 운영한다. 다수의 길드 마스터가 동시에 길드를 운영하는 건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실제로 2명의 길드 마스터가 함께 운영하는 길드는 많다.
그러나 7명은 지나칠 정도로 많았다.
“7명의 길드 마스터라니. 이래도 되는 거야? 너무 많잖아.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야.”
“대표자는 1명이다. 2년마다 마스터끼리 회의와 투표로 대표자를 정하는 거지. 원래는 나도 이럴 생각은 없었다만…. 마스터 정보를 봐라.”
5명의 마스터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중 한 명은 당연히 강석수였다.
5명의 이름을 본 나는 깜짝 놀랐다. 대한민국에서 이미 이름을 날린 유망주들이 모두 속해 있었다. 그중 2명은 여자다. 2명 다 미녀였고, 헌터로서의 실력도 뛰어난 유명인들이다.
“…용케도 스카웃 했네?”
“기존 10대 길드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10대 길드의 텃세가 워낙 심해야 말이지. 뭐, 그렇다 해도 설득하는 일은 보통이 아니었지.”
“후원하는 기업까지 있잖아.”
“탐탁치 않으나, 어쩔 수 없었다. 자본이 있어야 빠르게 성장하니까. 다만 후원 기업이 길드 내부에 영향을 끼칠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길드에 대한 정보를 모두 읽었다. 평가를 하자면 지금 당장 창설하더라도 손색이 없었다. 만약, 제대로 성장한다면 10대 길드의 위치를 빼앗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이 정도면 굳이 날 데려갈 이유는 없지 않아?”
“세븐티어 길드의 목표는 대한민국 최고의 길드가 되는 거다. 그래야 기존의 10대 길드를 변화 시킬 수 있으니까.”
최고의 길드.
그 자리에 오르려면 한 가지 조건을 반드시 충족해야 한다.
“…S급 헌터.”
“맞다. S급 헌터가 존재해야 최고의 길드 자리를 넘볼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네가 미래에 S급 헌터가 될 거라 예측하고 있다. 물론 나 또한 S급 헌터가 될 거다.”
강석수가 광오하게 말했다. 가능성은 아예 없진 않았기에 딴죽은 걸지 않았다.
세븐 티어 길드 마스터의 조건이 뭔지 알았다. 모두 뛰어난 유망주, 훗날 S급 헌터가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오는 자들이었다.
“……너, 진심이구나.”
“난 진심이 아니었던 적이 없다. 성유진. 나도 길드 없이 헌터 활동했기에 B급부터 슬슬 힘이 부친다는 걸 알고 있다. 당장 길드의 도움 없이 C급 이상의 던전을 찾기도 힘든 것이 사실이지. 무엇보다 믿을 수 있는 동료의 존재가 간절할 것이다.”
그의 말이 맞다.
C급 던전을 공략하다 보면 위기의 순간이 몇 번 있었다. 믿을 수 있는 동료가 있었다면 별거 아니었던 위기들.
그래서 최대한 쉽고 안전한 던전에 들어가려고 한다.
“성유진. 우리와 함께하자. 우리라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아니, 바꿀 것이다.”
강석수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을 보지 못한 척 시선을 돌렸다. 세븐티어 길드의 정보를 다시 한 번 훑어봤다.
“…생각할 시간을 줘.”
강석수가 웃으며 손을 내렸다. 바로 거절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오래는 기다리지 못한다. 세븐티어의 남은 자리는 2자리다.”
“꼭 일곱 자리일 필요는 없잖아.”
“마스터의 자리는 일곱으로 정했다. 이건 앞으로도 절대로 바뀌지 않을 거다. 무엇보다 에잇티어는 좀 이상하지 않나.”
“이상하긴 하네.”
???
전위를 맡은 나는 가장 먼저 던전으로 들어갔다.
순간적으로 시야가 빙글 도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후에 이질감을 느꼈다.
‘…평소와 다른데? 던전 자체가 흔들린 듯한 느낌이….’
던전을 몇백 번이나 들어갔던 나다. 그 익숙한 감각을 착각할 리 없었다. 이 던전은 이질적이다.
휘유우우우웅.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고개를 올리자 우중충한 하늘이 보였다. 나는 멍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나는 밭에 홀로 있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원래라면 3초 이내에 다른 파티원이 나타나야 했다.
‘흩어져서 공략해야 하나. 최악이군. 흩어졌을 경우 분명 서쪽에서 만나기로 했지? 서쪽이 어디야.’
<무지개 과일을 찾으십시오.>
던전은 공략 조건을 알려줬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과일이었다.
<당신은 농부입니다.>
<하루에 3시간 이상 농부 일을 하지 않으면 쇠약해집니다.>
눈앞에 쇠스랑과 밀짚모자가 나타났다.
‘돌겠네. 이건 또 뭐야.’
나는 뺨을 긁적였다. 폐쇄형 던전이 좀 기괴하긴 해도 이런 던전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었다.
‘폐쇄형 던전의 새로운 형태라고 해야 하나?’
당혹스럽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영웅의 회오’같은 헌터를 훈련 시켜주는 던전도 있으니까.
일단 밀짚모자를 머리에 쓰고 쇠스랑을 들었다.
‘밭일을 하라고? 지랄하네.’
꼼수가 통하는지 안 통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밭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죽는 것도 아니다.
‘나한텐 완전 회복이랑 천심이 있어. 상태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서쪽을 찾았다.
해는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진다. 그러니 해가 지는 방향이 서쪽이다.
‘여기가 던전이 아니라면 거기가 서쪽이겠지. 뭐, 거기가 서쪽이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들도 해가 지는 쪽을 서쪽으로 상정할 테니 의미 없나.’
쇠스랑을 던지고 해가 지는 쪽으로 걸어갔다.
“아이고, 이놈아!!”
뒤에서 웬 늙은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몸을 뒤로 돌렸다. 60대의 노파가 나를 향해 맹렬히 뛰어오고 있었다. 머리카락 대부분이 희끗했고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다. 이빨은 6~7개 정도밖에 없었는데, 그것마저도 누런 게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성지곤이 보면 발기를 멈추지 못할 것 같은 할망구였다.
할망구는 달려오는 그 기세로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아프지는 않았다. 불쾌할 뿐이다. 내가 눈살을 찌푸리자 할망구는 도리어 성을 냈다.
“한스, 이놈아! 또 밭은 내팽개치고 가려고?! 이놈아! 대체 언제 정신 차리려고 그러느냐!”
“할망구. 미쳤어?”
“할망구? 어미한테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이놈!”
할망구가 다시 주먹을 휘두른다. 아까 맞은 건 설마하니 나를 때릴 줄 몰라서 맞은 거였고, 이번은 달랐다. 가볍게 몸을 틀어 주먹을 피하고 발을 뻗어 할망구의 다리를 걸었다.할망구가 축축한 흙밭에 엎어졌다.
“허억!”
할망구의 뒤통수에 발을 올렸다. 할망구가 일어나려고 팔과 두 다리를 버둥거렸다. 나는 할망구의 머리를 몇 번 즈려 밟다가 살짝 힘을 빼주었다.
“하, 한스야! 왜, 왜 이러느냐…?! 일으켜 세워다오. 어미는 너무 힘들구나….”
할망구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한다.
“할망구. 난 한스가 아니야. 우리 엄마는 당연히 할망구가 아니고.”
“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느냐… 프억!”
할망구의 머리를 다시 밟았다. 이번에 아까보다 더 세게. 할망구의 귀굿멍에 흙이 들어간 모양이지만, 내 알 바 아니다.
발에서 힘을 뺐다. 할망구가 서둘러 머리를 들어 올렸다. 흙투성이의 얼굴로 공기를 마신다. 할망구는 몸을 떨며 내 눈치를 살폈다.
“하, 한스야. 이 어미가 네게 뭔가 잘못 했느냐…?”
“한스가 아니라니까. 확 진짜.”
“히익!”
머리를 몇 번 더 밟아줬다. 할망구의 태도가 바뀌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난 한스가 아니야.”
“네, 네. 맞습니다. 당신은 한스가 아닙니다…!”
“할망구. 무지개 과일 어딨어?”
별 기대 없이 물었다.
“무지개 과일…? 전설에 나오는 무지개 과일 말이냐?”
“씁. 말투.”
“무, 무지개 과일 말입니까?”
“그래. 무지개 과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