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957 - 957. 무지개 과일 (737/2,000)

〈 957화 〉 957. 무지개 과일

나는 도시 내부를 걸으며 고민했다. 무지개 과일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 도시에 오긴 했는데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아무에게나 가서 무지개 과일에 대해 물어볼 수는 없잖아. 물어봐도 자세히 알고 있을 리도 없고.’

정보를 가진 자를 찾아야 한다.

이 세계에 정보 길드 같은 게 있을까? 있어도 그것들을 찾고 거래할 걸 생각하면 머리가 아파진다.

‘그래서 언제 찾아? 이러다가 진짜 한 달 넘게 던전 속에 있어야 할지도 모르고….’

그냥 원하는 대로 즐기다가 적당히 던전을 탈출할까?

“비켜! 비켜라!”

갑옷과 창을 든 병사 무리가 빠르게 성문 쪽으로 달려갔다. 나는 사람들 사이로 비켜섰다. 방금 내가 죽인 경비병들 때문이리라.

경비병을 보니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았다.

‘영주다. 이 도시의 영주를 잡아서 무지개 과일에 대한 정보를 얻는 거야.’

영주에게 무지개 과일을 구해오라고 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인 것 같았다. 영주가 무지개 과일을 가져올 때까지 나는 놀면 되니까.

사람들은 빠르게 지나가는 병사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다시 자기 일을 시작했다. 나는 광장 쪽으로 향했다. 도시의 중심, 영주의 성으로 가려면 광장을 지나는 게 가장 빨라 보였다.

광장으로 향하는 길에는 상인들이 자리 잡고 여러 물건을 팔고 있었다. 과일이나 채소를 파는 가게가 유독 많았다. 그중에서 옷을 파는 가게가 내 시선을 끌었다. 익숙한 사람이 가게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강석수. 이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검은 코트를 입은 강석수가 가게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잠시 거리를 벌리고 지켜봤는데 그는 상인처럼 손님을 응대하고 옷을 팔았다.

무슨 일인지 알겠다.

그도 나처럼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다. 나는 농부이고, 강석수는 보이는 대로 상인일 테지.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강석수.”

“…성유진!”

무료하게 의자에 앉아있던 그가 두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사했나! 아니, 너라면 무사할 거라 생각 했다.”

“좀 위험하긴 했어.”

“위험? 나랑은 달랐던 모양이군. 몬스터와 마주했나?”

강석수가 내게 질문을 던지며 손짓했다. 그의 옆에 있는 빈 의자에 앉았다. 그늘막이 있고, 바람도 살살 불어와서 제법 편안했다.

“마주쳤지. 이게 놈들을 죽이고 얻은 마석이야.”

마석을 꺼내 손에 들었다. 강석수는 잠깐 마석을 지긋이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B급 마석이군. 처음 겪어보는 이질적인 던전이라 당황했다만, 역시 B급 던전은 던전이로군. 어떤 몬스터였지?”

강석수는 몬스터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당연했다. 어떤 던전이든 몬스터는 헌터를 공격하고, 헌터 또한 몬스터를 사냥하고 마석을 얻으니까.

“그 몬스터는….”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수많은 사람이 지나가고 있었다. 남자, 여자, 노인, 어린아이. 얼핏 보이는 사람의 수만 해도 수백 명이다. 만약 이들이 일시에 몬스터로 변한다면? 아무리 나라도 전부 감당할 자신은 없었다.

“사람이었다가 몬스터로 변했어.”

“뭐?”

한순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강석수는 미간을 좁혔다. 그러다가 경계어린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수많은 사람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확실하나?”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해서 뭐할까.”

“여기에 있는 인간들이 전부 몬스터라고? 몬스터라면 지금 우리를 공격해야 하지 않나?”

“나도 자세히는 몰라. 처음 보는 몬스터였으니까. 뭔가 몬스터로 변하는 조건이 있는 걸지도….”

“넌 도시 밖에서 시작했나? 상세히 말해봐라.”

그가 원하는 대로 상세히 말해주기로 했다. 물론 몇 가지 사실은 빼고 말이다.

“나는 시작 지점이 밭이었어.”

“밭? 혹시 농부 역할을 받았나?”

“맞아. 오자마자 하루에 3시간 이상 농사일을 하지 않으면 쇠약해진다는 메시지가 떴어. 그리고 웬 늙은 노부부가 날 한스라고 부르더라.”

“역시 나랑 비슷하군. 나는 상인이다. 3시간 이상 상인 일을 해야 페널티를 피할 수 있지.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날 로멜론이라 부르더군.”

작은 마을에서 있었던 일을 들은 강석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이 몬스터로 변한다면… 여긴 최악이다. 혹시 몰라 대비를 해두긴 했는데… 부족하겠군.”

“다른 헌터들은?”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기대는 하지 않았다. 강석수의 반응을 보면 뻔하니까.

“만나지 못했다. 도시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고, 너처럼 도시 밖에서 시작했을 가능성도 있다. 어쩌면 위험함을 느끼고 던전을 탈출했거나.”

“넌 어쩔 생각인데? 여긴 완전히 새로운 던전이야. 탈출해도 비난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

“실망하는 사람은 있겠지. 나를 주시하는 사람이 많다. 이번 실패는 창설할 길드에도 영향을 끼칠 거다. 불가능하다 판단될 때까지 던전을 공략할 거다.”

“앞으로의 계획은? 설마 계획도 없이 말하는 건 아니겠지?”

“우선 너를 비롯한 헌터들과 합류하는 게 먼저다. 서쪽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상황이 이러니 서쪽에 가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다른 헌터들도 우리처럼 역할과 페널티를 받았을 테니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거 아니야?”

“그 부분은 어쩔 수 없다. 최대한 안정적으로 던전을 공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가만히 기다리고 있진 않을 거다. 내가 부여받은 역할, 로멜론이란 상인은 이 도시에서 발이 넓은 상인이더군. 그 인맥을 이용해 무지개 과일에 관한 정보를 모을 계획이다.”

“당분간은 상황을 보며 여기에 있을 거라는 거네.”

“맞다. 너도 나와 함께 해줬으면 좋겠군. 여기 있는 사람들이 언제 몬스터로 변할지 모르니, 혼자 움직이는 것보다 함께 움직이는 게 낫지 않겠나?”

“싫어.”

바로 고개를 저었다.

혼자서 움직이는 게 편했다. 남자랑 함께 지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혼자 움직여야 마음에 드는 여자를 발견하면 거리낌 없이 따먹을 수 있다.

“네게도 따로 계획이 있는 듯하니 강요하진 않겠다. 그 계획이 어떤 건지 물어봐도 되나?”

“이 도시의 가장 큰 권력자인 영주를 만나서 조력을 구할 거야.”

“……너는 농부. 그것도 소작농이라고 하지 않았나.”

영주가 도와주기는커녕 만나기조차 쉽지 않다. 찾아갔다가 치도곤을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이 세상의 상식은 그랬다.

“너도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난 소작농 한스가 아니야. 헌터인 성유진이지.”

강석수의 눈동자가 잠깐 커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내가 괜한 말을 했군. 성유진. 한 가지 부탁해도 되나? 껄끄럽다면 거절해도 상관없다.”

“무슨 부탁인데?”

“사람을 죽여줬으면 한다.”

???

“끄윽!”

나는 광장 근처에 있는 저택 안으로 들어가 중년인의 목을 베어 죽였다. 강석수가 죽여달라고 한 사람이었다. 이놈은 강석수를. 정확히는 강석수가 던전에게 받은 역할인 로멜론을 견제하는 상인이었다. 강석수는 이놈 때문에 활동하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강석수. 생각보다 더 냉정하고 결단력 있는 놈이야.’

강석수는 잘하고 있었다.

지구의 헌터들이 그러하듯, 던전 속의 인간을 같은 인간으로 보고 있지 않다. 특히나 내가 여기 사람들은 괴물로 변한다고 했으니까.

나는 강석수의 부탁대로 놈의 시체를 뒤적였다.

마석을 발견했다.

직경 2cm도 되지 않는 마석.

‘F등급. 던전 인간의 평균 마석 크기군. 몬스터로 변했을 때는 8cm였지.’

마석을 회수하고 잠시 기다렸다. 남자가 괴물로 변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대충 30분이 지났는데도 변화는 없었다. 나는 혹시 몰라 남자의 심장을 꺼내 발로 밟았다. 몬스터의 약점이 심장이었다. 심장이 없으면 몬스터로 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강석수에게 다가가 일을 완수했음을 보고했다.

강석수는 2cm의 작은 마석을 만지작거렸다.

“과연…. 괴물이 사람의 가죽을 쓰고 숨어 있는 건 아니었나.”

“시체가 괴물로 변해서 다시 일어날지도 몰라. 아, 어린아이라고 해서 경계를 풀지 마. 갓난아기도 괴물로 변했으니까.”

“그 정도로 어리숙하지 않다.”

“그럼 가본다.”

“……사람을 죽여달라고 했는데, 자세한 사정은 묻지 않나?”

“뭔 소리야. 몬스터가 언제부터 사람이었어?”

“…실언했군. 너는 나보다 더 뛰어난 헌터다.”

“당연한 소리를 또 하네. 아무튼, 난 간다. 내일 낮에 찾아올게. 안 오면 그러려니 하고.”

나는 손을 흔들어줬다.

예쁜 여자가 내 옆을 지나갔다. 내 눈동자가 자연히 그녀에게 굴러갔다. 몬스터라도 예쁘면 꼴린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동물을 보고 꼴리는 새끼들 보다는 내가 훨씬 정상이니까.

문득 고등학생 시절에 본 끔찍한 동영상을 떠올렸다.

그 시절의 나는 웬만한 야동을 설립하고 좀 더 자극적인 야동을 찾는 시기였다. 인터넷 어딘가에 파묻혀 있는 명작을 찾기 위해 깊은 곳을 탐사하기도 했다.

그리고 깊은 곳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심연이 있다.

‘수컷 대형 개한테 박히는 남자 영상을 봤지. 씨발. 지금 생각해도 또 토 쏠리네.’

나는 얼굴을 구기며 예쁜 여자의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

아무도 없는 골목길에서 여자를 해가 저물 때까지 범한 나는 드디어 영주성을 향해 걸어갔다.

도중에 던전의 페널티가 발동했다.

<농부의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몸이 쇠약해집니다.>

다리가 무거워졌다. 시야가 침침해진다. 목에는 가래가 끼인 듯 답답해지고, 위가 살살 아파왔다.

주먹쥔 손을 바라봤다. 평소보다 힘이 30% 가량 들어가지 않았다.

‘이게 페널티인가. 컨디션 불량 정도가 아니잖아. 이 정도면 심각할 정도야.’

[천심(天心)을 발동합니다. 1분 동안 지속됩니다.]

육체를 약하게 만들던 쇠약이 사라졌다. 완전 회복을 쓰지 않은 건 비장의 수단으로 남겨두기 위해서다.

‘완전 회복은 무려 죽었다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스킬이지.’

저 앞에 영주성 입구가 보인다. 입구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병사가 있었다.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 따위와는 장비부터가 다르다. 느껴지는 기세 또한 강대하다.

‘헌터로 따지면 D급 하위? 그 정도 되겠군.’

나는 정면으로 당당히 걸어갔다. 지금 나는 현재 강석수에게 받은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 강석수의 말로는 평민이 10년 동안 돈을 모아야 구입할 수 있을 정도로 값비싼 옷이라 한다.

경비병들의 시선이 내게 향한다. 나는 그들에게 씨익 웃으며 말했다.

“영주를 만나러 왔다. 기별을 넣어라.”

경비병들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농부 놈이 주제도 모르는군.”

창을 꼬나쥔 경비병 다섯이 내 주위를 에둘러 쌌다.

“이게 무슨 짓이지? 이 옷이 안 보이나? 난 귀빈이다.”

펄럭펄럭. 화려한 옷을 자랑하듯 선보였다.

경비병들은 내 옷을 확인했음에도 위협적인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도리어 나를 비웃는다.

“돼지에게 사람 옷을 입혀도 돼지일 뿐이다. 화려한 옷을 입었다고 해서 너의 천박한 신분을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당연히 숨기지.”

나는 누가봐도 농부가 아니었다. 키도 크고 피부도 하얗다. 그리고 내 분위기를 보면 누구도 날 농부라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경비병들은 내가 농부라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한스란 놈이 영주성 경비병이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할 리 없으니… 던전의 농간이겠지.’

던전이 부여한 역할은 절대적이다. 왠지 던전이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영주님을 모욕하고 우리를 무시한 죄…. 팔 하나는 부러뜨려주마. 목숨을 거둬가지 않을 걸 감사해라!”

경비병들이 달려들었다. 창은 쥐고 있으나 위협만 할 뿐이지 손과 발만 사용한다. 그에 보답하듯 나도 주먹과 발만 사용하기로 했다.

‘여기서 이놈들을 죽여버리면 빼도 박도 못하게 영주랑 적대해야 하잖아.’

퍽! 퍼억! 퍽!

“크아아악!”

주먹 한 방, 발길질 한 번에 경비병들이 날아갔다. 땅을 구른 그들은 고통에 신음을 흘리며 일어나지 못했다.

“일어나 새끼야. 영주한테 안내해야지.”

“어, 어떻게 농부 따위가 이런 힘을…!”

“농부 아니라고.”

짝.

싸대기를 맞은 경비병은 몸을 부르르 떨다가 고개를 떨궜다.

“…안내…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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