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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60 - 960. 무지개 과일 (740/2,000)

〈 960화 〉 960. 무지개 과일

침대에 뻗어 세상모르게 잠든 남작 부인의 엉덩이를 주무르며 주위를 노려봤다. 천안을 발동한 내 눈에는 주위 상황이 투시되어 보인다. 투시에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마나 소모가 좀 많아지긴 하지만, 버티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성에 집사가 없군. 어디로 간 거지?’

혹시 몰라 성 내부를 한 번 더 살펴봤다.

대부분의 사람은 잠자리에 든 야심한 시각. 움직이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더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집사는 없었다.

이참에 지하에 있는 곳도 확인했다. 창고와 지하 감옥. 죄수 몇 명이 보이는 게 전부였다. 집사는 없었다. 물론 영주도 없었고.

‘집사는 몰래 성 밖으로 나갔군. 이 새낀 진짜 뭔가 있다니까.’

내 목적은 무지개 과일을 찾는 것. 그리고 무지개 과일은 집사와 영주와 관련이 있다. 내 직감이 말하고 있다.

‘내일은 집사를 철저히 감시해야겠어.’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내 방으로 돌아갔다.

???

강석수를 만났다.

어제와 달리 그는 피곤해 보였다.

“얼굴이 죽상이잖아.”

“네가 준 자료를 읽고 분석하느라 잠을 자지 못했다.”

“그래서 얻은 건 있고?”

“도움이 되었다. 다만, 자료를 보면 어색한 부분이 있더군. 빠뜨린 자료가 있나?”

“아니. 서재 안에 있던 무지개 과일 자료는 전부 찍었어.”

“그럼 이야기는 하나가 되겠군. 누군가가 무지개 과일의 자료 중 일부를 뺐다.”

강석수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짐작 가는 인물이 있는 모양이군?”

“있어. 집사가 의심스러워. 그리고 어제 집사 몰래 영주를 만나러 갔는데…. 영주가 없었어.”

나는 저택의 상황에 대해 말했다.

“확실히 그 집사는 수상하군. 밤이 되면 성을 나간다라…. 내가 직접 미행하도록 하지.”

“네가 직접?”

“여기에 가만히 앉아 있는 일도 좀이 쑤셔서 말이야.”

“자료 분석 결과 좀 말해봐. 나도 궁금하니까. 혹시 무지개 과일이 어디 있는지 알아낸 거야?”

“그거까지 알아냈다면 여기에 가만히 앉아 있지 않았겠지. 이 자료들은 무지개 과일과 관련된 이야기를 모아놓은 것에 가깝다. 제각각의 전혀 다른 이야기 같으면서도 공통점이 있지.”

“나도 알아. 무지개 과일을 가진 놈들의 끝은 항상 좋지 않다는 거잖아. 이야기가 어째 배드엔딩 밖에 없어.”

“맞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공통점은 더 있다. 무지개 과일을 먹는다는 거지.”

“과일이니까 당연히 먹겠지.”

“내가 만약 무지개 과일 같은 신비한 과일을 얻었다면, 먹지 않고 연구했을 거다. 그리고 땅에 심어 재배하려고 했겠지.”

“……그게 무슨 상관있어?”

“없지. 중요한 건 무지개 과일을 얻는 과정이다. 이야기 속에서 무지개 과일을 얻는 사람은 다양하다. 왕, 귀족, 평민. 심지어 노예까지 무지개 과일을 얻지.”

“과정이 뭐 특별한 게 있었나?”

“이야기를 보면 모두 누군가가 무지개 과일을 갖다 준다. 진상, 뇌물, 선물, 보답 등등의 이유로. 꼭 누군가가 무지개 과일을 건네주지. 꼭 파멸의 열매를 건네주는 악마처럼 말이다. 그리고 무지개 과일을 어디서 얻는지 명확하게 나오지 않고 하나같이 두루뭉술하지. 아예 무지개 과일을 얻는 말이 안 쓰여 있는 이야기가 부지기수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여긴 던전이고, 우리 목표는 무지개 과일을 얻는 거지. 무지개 과일은 실존한다. 그러니 이 이야기들을 무시할 수 없다.”

“무지개 과일을 가져오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거야?”

“맞다. 나는 이 무지개 과일을 가져오는 사람이 누구인지 한 명 떠오르던 참이다. 확신할 순 없지만, 의심이 가지.”

“집사?”

강석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집사가 엄청 의심스럽긴 하다. 나도 바로 집사를 떠올렸을 정도니까.

“집사가 무지개 과일을 가져오는 사람이라면… 영주가 무지개 과일을 받는 사람인가?”

“그렇겠지. 이제 이야기에 빠진 부분이 뭔지 너도 알겠지.”

“…….”

나는 침묵을 유지했다. 모르겠다. 모르면 닥치고 있어야 반은 간다.

다행히 강석수는 의외로 말이 많은 남자였다.

“대가. 무지개 과일을 가지는 대가로 무엇을 줬는지 적혀 있는 이야기가 하나도 없었다.”

“아예 대가가 없었을 수도 있잖아.”

“이미 검증은 끝냈다. 어젯밤에 행상인에게 무지개 과일에 대한 전설을 들었지. 무지개 과일로 지혜를 얻은 귀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아나?”

“알아. 결국, 질투심을 느낀 왕비의 손에 창녀 엔딩으로 끝나잖아.”

“자료 중에는 귀부인이 지불한 대가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지만, 행상인은 그 대가를 알고 있었다. 대가는 다리라고 하더군.”

“다리?”

“정확히는 인간의 다리가 괴물의 다리로 변했다고 하더군.”

“괴물이라면….”

“네가 떠올리는 대로다. 괴물과 무지개 과일은 무언가의 연관이 있을 거다.”

???

“유진 경. 부탁이 있어요. 오늘 오후에는 제 곁에 계속 있어 주세요.”

레빌리디 남작 부인이 내게 말했다. 나는 음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오늘 확실하게 에스코트해드리죠. 원하신다면 저 하늘 위까지 에스코트하겠습니다.”

레빌리디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유진 경. 조금 있다가 셀 교단의 이단심문관이 도착할 예정이에요.”

“중요한 손님입니까? 신참에 불과한 제가 남작 부인의 곁에 있어도 됩니까?”

“이 성에서 유진 경이 가장 믿음직해요.”

몸을 섞긴 했지만, 나와 그녀가 만난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를 가장 믿는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단심문관이 오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지 않습니까?”

나는 은근한 눈길을 계속해서 보냈고, 남작 부인은 거절하지 못했다.

그리고 약 2시간 후. 우리는 뺨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다급히 닦아내고는 성 밖으로 나갔다. 말을 탄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 중심에는 갑옷을 입은 남자가 있었다. 검은색 망토를 두른 그는 깔끔한 얼굴의 소유자였다. 그렇다고 잘생겼다는 말은 아니었다. 평범하게 생겼다. 30대 사내였고, 두 눈이 부리부리했다. 자세히 보면 콧대가 약간 삐뚜름했다.

‘남작 부인이 말한 이단심문관인가.’

내 시선은 이어 그의 옆으로 향했다. 시종으로 보이는 자 중에 현대인이 있었다. 나와 함께 던전에 들어온 헌터였다. 그도 나를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이름이 조우생이었나?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조우생이 나를 보며 환하게 웃는다. 자세한 사정을 모르지만 그동안 고생 꽤나 했는지 얼굴에 숨길 수 없는 피곤함이 있었다.

‘대충 어떤 처지인지 이해는 가네.’

조우생은 딱 봐도 어리바리해 보인다. 던전이 부여한 역할에 이리저리 치였겠지.

“셀 교단에서 온 콜만 디렙이오. 이 도시에 이단이 있다는 보고를 들었소. 레빌리디 남작 부인이시오?”

콜만 디렙이 말에서 내렸다. 철컥. 갑옷 소리가 울린다. 그는 땅에 내려서자마자 허리춤에서 철퇴를 꺼내 손에 들었다. 예의는 밥 말아 먹었다. 그러나 레빌리디 남작 부인은 물론이고 기사와 병사들까지 항의하지 못하고 두려워했다. 셀 교단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예. 제가 레빌리디의 안주인입니다.”

“영주는 어디 있소?”

“남편은 현재 병상에 누워 나올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리 먼 곳도 아닌데 나오지 못한다라…. 상태가 많이 안 좋은가 보오.”

“제가 영주 대리로서 콜만 님은 대접하겠습니다.”

“됐소. 나는 대접 받으러 온 게 아니오. 일을 하러 온 거지. 이 도시의 영주를 만나야겠소. 영주의 방으로 안내하시오.”

“하, 하지만 영주님은 지금 안정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남작 부인이 말했다.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나를 앞에 두고도 당당하던 그녀의 모습에 신선함을 느꼈다. 이단심문관이 그렇게나 무섭나?

“나는 내 일을 해야 겠소. 안내하시오. 부인, 나를 막는다는 건 이단을 옹호하는 일이오. 나는 부인이 이단이 아니라고 믿소.”

힐끔. 남작 부인의 눈치를 살폈다. 내가 대신 나설까? 그러나 지금 내가 나서면 일이 복잡해질 것이 확실했다.

‘그리고 영주는 지금 이 성에 없잖아. 일이 어떻게 흐를지 보자.’

나는 다른 한 사람을 찾았다. 집사. 도망가지 않고 서 있었다. 얼굴은 평온하다. 당황하지도 않는다.

“안내… 하겠습니다.”

남작 부인이 말했다.

우리는 영주의 방앞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이단심문관 콜만은 터프했다. 쾅! 영주 문을 노크도 없이 열어젖히고 성큼성큼 들어선 것이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고 씹어뱉듯이 말했다.

“없군.”

“그, 그럴 리가…! 집사! 그는! 그이는 어디에 있죠!?”

당황한 남작 부인이 집사를 불렸다. 영주를 담당한 건 집사였다.

“그게… 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 오늘 점심까지 영주님이 계셨었는데….”

“수상하군. 심문하겠다. 집사를 잡아라.”

“예!”

콜만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성기사들이 잽싸게 움직여 집사의 양팔을 잡았다.

“노, 놓아 주십시오! 전 이단이 아닙니다!”

“그걸 판단하는 건 네가 아니라 나다.”

콜만이 차갑게 말했다. 자비 따윈 한 스푼도 들어있지 않은 건조한 목소리다. 그는 팔다리를 움직여 방안을 헤집었다. 침대 끝을 잡아 올려 바닥을 확인하고, 철퇴를 휘둘러 침대를 박살 냈다. 그의 철퇴는 사방에 향했다. 쨍그랑! 꽃병이 부서지고. 콰직! 서랍이 박살 났다. 그는 벽과 바닥, 천장을 천장으로 두들겼다.

“성유진 씨. 당황스러우시죠?”

조우생이 내게 다가와 조용히 말을 걸었다.

“갑자기 이러니 좀 당황스럽군요. 조우생 씨는 익숙해 보이는군요.”

“여기까지 오면서 몇 번이나 본 광경이라 그래요. 이단의 흔적을 찾는 겁니다. 성기사라는 역할을 받았을 때는 얼마나 당황했었는지… 저 이단심문관한테 맞기도 많이 맞았습니다.”

“조우생 씨는 절 보고도 별로 놀라지도 않더군요. 혹시 다른 헌터와 이미 마주했습니까?”

“예. 어제 박조혁 씨와 만났습니다. 사냥꾼이었는데 이번 던전은 시간 낭비라며 탈출했습니다.”

던전 탈출.

박조혁이란 인간을 탓할 생각은 없다. 그는 자신을 위해 선택했을 뿐이다.

“성유진 씨. 콜만은 조심하십시오. 기분 나쁘게 하더라도 일단은 머리를 숙이는 걸 추천드립니다.”

“예?”

“저 인간, 엄청 강해요. A급은 될 것 같습니다. …이런. 며칠같이 생활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저것들에게 정이라도 들었나?”

조우생은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입을 열려다가 다물었다. 영주의 방을 개판으로 만든 그가 집사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이 상황에서 침착하군. 일개 집사 주제에 강단이 있어.”

“콜만 님. 전 이단이 아닙니다. 이단심문관은 이단만을 죽이니 제가 당황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단을 판단하는 건 나다.”

찌이이익!

콜만은 집사의 옷을 잡아 뜯었다. 나는 혀를 찼다. 늙은 남자의 알몸 따윈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콜만이 뭘 하려는지 호기심이 들었다.

조우생이 내 옆에서 조용히 설명했다.

“이단자 중에는 몸에 이단의 흔적을 남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이단을 보셨습니까?”

“예. 봤습니다. 여기에 오면서 34마리를 봤지요. 아십니까? 이단자는 갑자기 괴물로 변합니다. 마치 B급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괴물로요.”

“붉은 피부에 뼈 가시가 툭 튀어나온 괴물?”

“어? 어떻게 아십니까? 혹시 마주쳤습니까?”

“…예, 직접 죽이기까지 했죠.”

“고생하셨겠네요. 보통 아닌 놈들인데.”

조우생이 재잘거렸다. 이 새끼도 말이 많은 편이었다.

“브라마센의 흔적이다! 이단이다!”

집사의 옆구리에 있는 다섯 개의 물방울이 회전하는 문양을 본 콜만이 소리쳤다. 성기사들이 재빨리 검을 뽑았다. 조우생도 마찬가지였다. 푸욱! 그들의 검이 집사의 몸을 관통했다. 조우생의 검은 정확히 집사의 심장을 꿰뚫었다.

집사는 신음 하나 흘리지 않았다. 집사의 피부와 눈동자가 붉게 변한다. 집사는 혀를 낼름 핥으며 말했다.

“이단심문관이여, 넌 너무 늦게 왔다. 하루만 일찍 도착했어도 곤란할 뻔했다. 과일은 이미 무르익었다.”

“과일? 무슨 뜻이냐!”

“크크. 직접 알아봐라. 나는 모든 내 임무를 완수했다.”

“심문은 의미 없겠군. 여신이시여! 이 악의 종자를 쓰러뜨릴 힘을 내려주소서!”

그의 철퇴는 새하얗게 변했다.

“브라마센이시여!”

집사는 신의 이름을 부르며 두 눈을 감았다. 철퇴가 괴물의 머리를 박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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