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2화 〉 962. 무지개 과일
우리는 영주를 찾아 죽이기 위해 성을 나섰다.
나는 영주의 위치를 몰랐으나, 콜만은 영주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듣기로는 성내의 하인 중 이단을 붙잡아 심문했다고 한다.
집사와 불어먹은 놈들이었다. 그 수는 대충 10명가량이었고, 심문 끝에 영주가 도시 뒷산 거처에 있다는 정보를 알아냈다.
50명에 달하는 인파가 도시 거리를 당당히 걸었다. 도시민들의 시선이 당연히 이쪽으로 모였다.
“잠깐.”
앞장서서 걷던 콜만이 멈췄다. 50명이 동시에 멈췄다. 성기사들은 이런 일이 익숙한지 빠르게 행동했다. 콜만이 가리키는 남자를 붙잡은 것이다.
“네게서 이단의 기척이 느껴진다.”
“아닙니다! 전 이단이 아닙니다!”
“확인해보면 알겠지. 벗겨라.”
성기사들이 남자의 옷을 벗겼다.
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아무리 그래도 대낮에 지나가는 사람을 잡아 거리에서 발가벗겨도 되나?
주위를 둘러봤다. 모두 당연하다는 듯이 바라보고만 있다.
‘되는 모양이군. 이단심문관… 개쩌는 권력이다….’
강제로 옷이 벗겨져 알몸이 된 남자는 돌연 괴성을 내질렀다.
“왼쪽 겨드랑이 아래에 더러운 흔적이 있군. 죽어라, 이단.”
콜만의 성스러운 철퇴가 또 하나의 이단을 처리했다. 성기사들은 이단의 시체에 불을 붙여 태웠다.
“가지.”
작은 해프닝을 끝으로 우리는 다시 움직였다. 기사와 병사들은 콜만의 행태에 조금 겁을 집어먹은 것 같았다.
나는 콜만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저놈이 이단인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혹시 특별한 능력이 있으십니까?”
콜만의 눈동자가 내게 향했다. 그는 왠지 내게 호의적이었다.
“내게 그런 편리한 능력은 없네. 굳이 말하자면 경험이지. 오랫동안 이단을 찾아내고 죽이다 보니 말로 설명하기 힘든 느낌이 오더군.”
“대단하시군요.”
“편리할 때가 많긴 하지.”
이후로 도시 내에 있던 4명의 이단을 죽이고 도시 밖으로 나왔다.
“콜만 님. 남작 부인을 죽이실 겁니까?”
“글쎄. 아직 판단을 내리지 않았네. 영주가 어떤 이단인지에 따라 다르지. 만약 사제급 이상이라면…. 그 가족까지 전부 죽여야겠지. 악의 씨앗이 뿌려져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자네 표정을 보니 그건 바라지 않는 모양이군.”
“남작 부인을 죽게 내버려둘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를 막을 텐가? 이단심문관을 막는 자는 이단일세. 자네는 이단인가?”
“콜만 님. 저는 남작 부인의 검입니다. 제가 저지르는 모든 행동은 남작 부인의 의지입니다.”
“……계속해보게.”
“제가 이단인 영주를 죽이겠습니다. 허나 이단은 제가 죽인 게 아닙니다.”
“남작 부인이 죽인 것이 되는군. 틀린 말은 아니군. 내가 이단을 죽이는 공로는 모두 여신님의 것이니…. 자네가 활약한다면 남작 부인이 이단으로 몰릴 일은 없을 것이네.”
“감사합니다.”
뒷산에 향하는 도중에 마을을 발견했다.
“…이단의 냄새가 진동하는 군.”
콜만은 마을을 지나치지 않았다. 마을 여기저기에서 악신 브라마센의 상징품이 숨겨져 있었고, 마을 사람들의 몸에 악신의 흔적이 있었다.
“레빌리디 남작 부인의 이름으로 명한다. 전부 죽여라.”
기사와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들은 아직 괴물이 되지 않은 마을 주민들을 껄끄럽게 보면서도 검과 창을 휘둘렀다.
“여기 아기가 있습니다!”
병사가 외치며 아기를 데려왔다.
“내 명령을 개떡으로 알아들었군. 몰살이 그렇게 어려운 명령이었나?”
“유, 유진 경! 크아아아악!”
나는 직접 병사와 아기를 베어냈다.
“이단의 마을에서 태어난 아기다. 당연히 이 아기도 이단이다. 이단에게 자비를 베푸는 놈도 이단이다.”
아기의 발바닥을 가리켰다. 이단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기사와 병사들은 존경이 아닌 두려움이 섞인 눈으로 날 바라봤다.
“대단하군. 역시 자네는 이단심문관이 될 인재야.”
콜만이 다가왔다. 그가 이단심문관 직을 권유한다. 여기가 던전이 아니라면 넙죽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단심문관의 어마어마한 권력을 보았는데 거부한다면 멍청이니까.
“저는 남작 부인의 검입니다.”
“여신의 검이 되지 못할 것도 없지. 마을과 시체를 태우고 뒷산으로 들어가지.”
“곧 밤이 될 겁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단은 한시라도 빨리 이 세상에서 없애야 하네.”
횃불에 의지하며 어두운 산길을 올랐다.
이상한 동굴을 발견했다. 피 냄새가 진동하고 짐승 소리가 들리는 동굴이었다.
“인위적인 동굴이군. 제단을 만들었나. 악신의 악취가 코를 찌르는구나. 평범한 이단의 사제가 가진 힘만으로는 불가능하지. 흑사제가 있는 건가.”
마을 사람을 몰살할 때도 태연했던 콜만의 얼굴은 잔뜩 굳어져 있었다.
“흑사제는 뭡니까?”
“악신의 계시를 받아 사악한 짓을 저지르는 놈들이지. 일반 사제보다 훨씬 강하다. 무엇보다 흑사제는 사악한 주술과 마법을 부린다. 들어가기 전에 장비를 점검한다. 아차 하는 순간에 목숨을 잃을 수 있다.”
모두가 장비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조우생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성유진 씨. 이거 진짜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콜만. 저 인간이 성격이 안 좋긴 해도 헛소리는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여기서 죽을지도 몰라요.”
“느낌이 안 좋긴 하네요.”
“우리 그냥 여기서 포기하죠.”
조우생이 말했다.
“여기까지 한 게 아깝지 않습니까?”
“아깝죠. 그래도 목숨이 최고로 중요하잖아요. 성유진 씨는 묘하게 부정적이시네요. 혹시 남작 부인에게 충성한다는 게 진심이었습니까?”
“그럴 거라 생각하십니까?”
“…아까 광경을 보니 아닌 것 같네요. 어쨌든 여기서 그만두죠.”
“전 계속할 겁니다. 이런 경험을 또 경험하겠습니까.”
머릿속에서 레빌리디 남작 부인이 떠올렸다. 그녀의 야들야들한 보지는 나를 매료시켰다. 비록 의미 없더라도 마음에 든 보지를 아무렇지 않게 버릴 수 없지.
“경험도 살아야 가능한 거죠. 위험을 감수할 정도는 아니에요. 전 여기서 그만둘게요.”
조우생은 주머니에서 붉은 실타래를 꺼내 들었다. 조우생이 실타래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실타래가 빛나더니 불타기 시작했다. 조우생은 손이 조금도 뜨겁지 않은 듯 실타래를 계속 손에 쥐고 있었다. 곧 그의 몸 주위로 따스한 빛이 나타났다.
“밖에 나가는데 혹시 하실 말씀 있습니까? 제가 전해드릴게요.”
“아뇨. 없습니다.”
“나중에 식사 한번 해요.”
“그러죠.”
이뤄지지 않을 약속을 나누었다. 조우생은 그대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준비는 끝났지? 이제 놈들의 소굴로 들어간다.”
“콜만 님. 성기사 한 명이 없어진 것 같지 않습니까?”
“경.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죄송합니다. 모두 있군요.”
콜만은 조우생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에겐 조우생이 처음부터 없었던 존재다.
횃불을 들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마나가 무거웠다. 걸을수록 질척한 늪에 끌려들어 가는 느낌이다.
“…전방에 괴물 4마리가 있습니다.”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군. 자네, 꽤 눈이 좋은 모양이군.”
“놈들이… 방어!”
괴물들이 뼈 가시를 쏘았다. 나와 콜만은 검기와 신성한 힘을 무기에 담아 어렵지 않게 쳐냈다. 기사들도 실력은 있으니 내 경고 덕분에 기습에서 무사했다.
문제는 병사들이었다. 괴물의 뼈 가시는 병사의 보잘것없는 방패와 갑옷을 꿰뚫었다. 병사 3명이 첫 번째 기습에 버티지 못하고 즉사했다.
“성가신 놈들.”
콜만이 혀를 차며 앞으로 뛰어갔다. 신성한 철퇴에서 나온 빛이 주위를 밝혔다.
“저도 돕겠습니다!”
나도 앞으로 뛰어갔다. 공을 쌓는 게 내 목적이니 적극적으로 나서야 했다.
뼈 가시를 쏘아내던 괴물은 내가 가까이 다가오자 펄쩍 뛰어 천장에 달라붙더니 나를 향해 다시 떨어졌다.
찰나를 사용했다. 괴물의 낙하가 느려진다.
“죽어라, 괴물!”
내 검은 괴물의 손톱보다 빠르게 그 심장을 찔렀다. 괴물이 축 늘어진다. 괴물 하나 죽이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바로 옆에 있던 괴물이 내 목숨을 노리고 있었으니까. 검을 빼 들고 괴물의 목을 쳤다. 목 없는 괴물의 몸은 그래도 계속 움직였다. 나는 괴물의 몸을 심장과 함께 반으로 갈랐다.
“대단한 솜씨군.”
“감탄한 건 접니다. 콜만 님은 괴물들의 머리를 아주 산산조각내셨군요. 근데 심장을 없애지 않아도 됩니까?”
“내겐 여신의 가호가 있네.”
그가 성스럽게 빛나는 철퇴를 들었다. 성스러운 힘이 괴물의 재생력을 막은 모양이다.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다. 괴물들의 습격은 계속되었다. 병사가 죽어 나가고, 기사 중에서도 전사자가 발생했다.
나는 기시감을 느꼈다. 내가 아는 괴물들은 이 정도로 어둠을 이용해 기습할 정도로 뛰어나지 않았다.
“콜만 님. 괴물들이 뭔가 이상합니다.”
“지성이 느껴져서 그러나?”
“예. 제가 아는 괴물들은 더 멍청합니다.”
“훈련받아서 그렇네. 사제는 평범한 괴물을 훈련할 수 있지. 최악의 경우 수천 단위로 훈련될 수도 있지.”
“그건 군대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그 말대로네. 그러니 사제는 반드시 척살해야 하네.”
동굴의 끝에 도달했다.
중심에는 제단이 있었고 그 주위에는 수많은 인간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시체 위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는데도 부패의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다.
“빌어먹을…. 의식을 진행한 건가.”
콜만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바위처럼 굳건할 것만 같던 그의 표정에 절망의 그림자가 보였다.
“콜만 님. 의식이란 게 뭡니까?”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멍하니 있던 콜만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인신 공양이네. 인간을 악신에게 바치고, 악신의 힘을 받는 거지. 힘이 아니라 다른 것을 받을 수 있고…. 하지만….”
콜만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내가 아는 의식과 조금 다르군. 보통 인신 공양에서 사람을 제단에 올리고 산채로 몸을 갈라 심장을 꺼내지. 하지만 이 시체들을 보면 몸에 어떠한 상처도 없지.”
“다른 방식의 인신 공양이 아닙니까?”
“어쩌면 인신 공양이 아닐 수도 있지.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는 뒤로 돌아섰다. 그의 두 눈은 동굴 밖을 보고 있었다.
“영주. 그 이단자가 이곳에 없다는 거지. 최악이군. 어쩌면 도시는 이미…. 지금 당장 도시로 간다. 모두 죽을 각오를 해라.”
???
도시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경악했다.
도시가 불타고 있었다. 시뻘건 화마가 도시 곳곳에서 허공으로 치솟았다.
사람의 비명소리가 도시 바깥까지 흘러 나왔다. 성 입구에는 사람이 잔뜩 몰려 있었으나,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혀 도시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악이 도시를 삼켰군.”
도시를 보며 한탄한 콜만은 이어 성기사에게 명령했다.
“너희는 교단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알려라. 레빌리디에 악이 창궐했음을. 악을 토벌하기 위해선 못 해도 신성기사단이 파견되어야 한다.”
“콜만 님의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콜만 님은…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이단심문관은 이단을 앞에 두고 물러나지 않는다. 이단자를 처단하는 게 내 일이다.”
그는 이미 죽을 각오를 끝마친 모양이다. 오늘이 아니라 훨씬 예전에.
콜만은 나와 기사, 그리고 병사들에게도 말했다.
“너희도 도망가라. 여긴 이미 지옥이다. 굳이 나와 함께 희생하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살아야 할 자는 살아야 한다.”
기사와 병사들은 도시 쪽을 쳐다봤다.
타오르는 불꽃, 도망치려는 인간. 인간을 잡아먹는 괴물들. 이미 이곳은 지옥이었다.
“나, 나는 죽고 싶지 않아.”
“미친 짓은 사양이다.”
“으아아아아아악!”
기사와 병사들이 도망쳤다. 콜만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내게 물었다.
“자네는 도망치지 않나?”
“이전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남작 부인의 검입니다. 검이 어떻게 도망갑니까.”
“저기 불타는 성이 안 보이나? 현실을 직시하게. 남작 부인은 죽었을 거네.”
“이 짓을 벌인 건 영주가 아닙니까?”
“이단자에게 가족에 대한 정이 있다고 생각하나? 가족을 잡아먹고, 인신 공양으로 바치는 것들…. 그게 이단자네.”
“그럼 더더욱 가야겠군요. 남작 부인의 복수를 해야겠습니다.”
차분히 말하고 있지만, 눈 돌아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감히 내 여자를 건드려? 다 죽여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