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3화 〉 963. 무지개 과일
“근데 성벽 주위에 있는 결계를 뚫고 안으로 들어갈 수는 있는 겁니까?”
사람들이 죽어가면서도 레빌리디 도시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이유. 결계. 결계로 인해 공간이 갈라져 있다면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할 거다.
“나는 이 결계를 처음 보는 게 아닐세. 옛날 다른 도시에서 이와 비슷한 결계를 보고 경험했지. 저건 막이를 가둬두는 결계일세. 제 발로 들어오는 먹이를 막을 필요는 없지.”
“일종의 통발입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들어가면 100% 죽는 통발이지.”
“경험했다면서요?”
“그때는 나 혼자가 아니었네. 신성기사단이 함께했지.”
나와 콜만은 성문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사람들의 비명이 절절하게 들려온다. 성문에서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손을 뻗고 있다고. 도와 달라고. 제발 살려달라고.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들의 절박함에 두려움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유진 경.”
“네. 말씀하시죠.”
“우리 목적을 다시 상기하지. 영주를. 그러니까 이 사달을 일으킨 이단을 죽이는 게 목적일세.”
“맞습니다. 남작 부인의 복수만이 지금 제 목적입니다.”
“누군가 자네에게 살려달라고 발목을 잡는다면, 가차 없이 죽여버리게. 자네를 방해해도 마찬가지야. 우리가 이단자를 처단하지 못하면 저들은 무슨 짓을 해도 이미 죽은 목숨이라는 걸 잊지 말게.”
“걱정 마십시오. 뭣하면 저기 있는 사람들부터 전부 죽이고 시작해도 됩니다.”
“하하. 원흉을 만날 때까지 힘은 최대한 아끼게. 음. 준비 시간이 필요하나?”
“아니요. 전 일분일초라도 빨리 남작 부인의 복수를 하고 싶습니다.”
“알겠네. 가지.”
성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사람들의 압력이 갑옷에 느껴진다. 그들의 절박한 손이 내 팔과 다리를 붙잡는다.
“살려줘! 살려주세요!”
“밖으로 나가게 해주세요! 제발!”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다고!!”
옆을 바라봤다. 콜만도 나와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콜만은 주저 없이 철퇴를 들어 올렸다.
“나는 이단심문관 콜만이다. 이단을 처단하러 왔다. 나를 막는 자는 모두 이단이니, 살고 싶다면 비켜라.”
콜만은 거침없이 철퇴를 휘둘렀다. 사람의 머리가 터지고, 몸통이 짓이겨지며, 팔다리가 뭉개진다.
‘화끈하군.’
저 모습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비켜라. 안 비키면 벤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원형으로 크게 휘둘렀다. 8명의 배가 갈라진다.
그럼에도 인파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그들도 절박했다. 도시 내에서 날뛰는 괴물에 대한 두려움과 어쩌면 도시 밖으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주 작은 희망과 기대감.
나는 그런 사람들을 베어 죽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대충 30명 정도 죽이고 난 뒤에야 인파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마침 옆에 콜만도 인파를 헤치고 나왔다.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겨우 이 정도로 다칠 것 같은가?”
“온몸이 피투성이라 물어봤습니다.”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지.”
나와 그는 피칠갑을 했다. 물론 이 모든 피는 모두 다른 사람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좀 미쳐있는 것 같습니다. 배가 갈라져도 도망갈 생각만 하더군요.”
“악신 브라마센의 힘이네. 브라마센은 광기를 퍼뜨리지. 또 광기는 쉽게 전염되지. 아마 조금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저들끼리 살육을 벌이겠지. 살아남으면 자살을 시도하거나, 괴물이 되거나, 광증으로 이성이 소멸하거나.”
저벅저벅.
거리를 걸었다.
괴물들이 판을 치고 있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사람을 습격해 잡아먹는다. 죽은 사람의 내장을 파먹는 것이다. 꼴을 보면 좀비라 해도 믿을 정도다.
의외인 건 콜만의 반응이었다. 콜만은 직접 덤벼드는 괴물 외에는 모두 무시했다.
“이단은 처리하지 않으십니까?”
“이런 특수한 상황에는 우선순위를 정해야 하네. 지금 가장 시급한 건 이 사태의 원흉을 없애야 하는 일이지. 정리는 나중에 해도 늦지 않네.”
폭음이 들렸다.
폭음은 영주성과 가까워질수록 잘 들렸다. 누군가가 영주성에서 싸우고 있다.
더 가까워지자 영주성에서 치솟는 얼음과 불길이 보인다. 마법이었다.
“누군가가 영주성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군. 마법사인가? 누군지 몰라도 전력을 쉽게 잃을 순 없지! 도와야 하네!”
콜만이 달리기 시작했다. 나도 그의 뒤를 따라 달렸다.
‘영주성에서 싸우고 있는 마법사는… 강석수겠지. 모종의 준비를 해놨다고 하더니… 혼자서 원흉을 쓰러뜨릴 정도인가?’
콜만은 성앞에서 멈춰섰다. 반대로 나는 성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낮은 가능성이지만, 강석수가 늦지 않게 나섰을 경우 레빌리디 남작 부인이 살아 있을 수도 있다.
“기다리게.”
콜만이 내 어깨를 잡았다.
나는 콜만을 돌아보며 인상을 썼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빨리 들어가서 원흉을 해치워야 합니다.”
“저쪽에서 형용하기 힘든 사악한 힘이 느껴지네…. 먼저 확인해봐야겠네.”
그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봤다. 성의 정원이 있는 곳이었다. 불타는 성과 도시와 다르게 정원은 꽃과 나무가 검게 물들었다는 걸 제외하면 평온했다. 그렇기에 이질적이었다.
콜만은 처음엔 주저했다. 이 앞에 도사린 어둠에 두려움을 느끼는 듯했다. 그러나 의무감인지 뭔지가 그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조용히 콜만의 뒤를 따랐다.
“이 무슨 기괴한…!”
“씨발.”
콜만이 경악하고, 나는 욕설을 내뱉었다.
정원의 중심. 흐드러지게 핀 검은 장미밭의 중심에 벌거벗겨진 남작 부인과 그 아들과 딸의 사체가 장미꽃잎처럼 기괴하게 뒤틀어져 있었다. 시체로부터 흘러나온 피와 내장이 꽃에 묻은 이슬처럼 장식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동그란 무언가가 있었다. 구슬이라기보다는 사과처럼 생겼다. 이게 무지개 과일이 틀림없었다. 무지갯빛이 약한 걸 보면 아직 완전한 상태는 아닌 것 같다.
‘운이 좋은 건가? 던전 공략의 조건은 무지개 과일을 손에 넣는 것이니… 저걸 얻으면 던전 공략은 끝이야.’
내 손은 무지개 과일이 아닌 검으로 향했다. 시선은 죽어 있는 남작 부인의 얼굴에 꽂혔다.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그녀와 보냈던 뜨거운 섹스….
‘지금 던전 공략을 끝내면 남작 부인을 이렇게 만든 놈을 못 죽이잖아.’
던전 공략이 중요한 게 아니다.
복수가 중요했다.
검자루를 쥔 손에 힘이 꽉 들어간다.
“이 도시 내의 비통이 모두 저 구슬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비통을 먹고 성장하는 것인가…. 이런… 이렇게 끔찍할 수가! 이건 없애야 한다!”
콜만이 철퇴를 들어 올렸다. 철퇴는 성스러운 힘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철퇴는 정확히 무지개 과일을 내려쳤다. 그러나 튕겨나는 건 오히려 철퇴였다. 무지개 과일은 부서지기는커녕 꼼짝도 하지 않았다.
“크으으으!”
반동으로 덜덜 떨리는 손을 잡은 콜만은 무지개 과일을 한껏 노려보다가 다시 철퇴를 휘둘렀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콜만 님. 제가 볼 때는 원흉을 죽여야 할 것 같습니다.”
“…자네 말이 맞네. 이 모든 사태는 원흉으로부터 비롯되었으니…. 원흉을 죽여야지.”
우리가 성을 향해 발끝을 옮기는 순간이었다. 성의 일부가 박살 나더니 무언가가 날아와 우리 앞에 떨어졌다.
사람이었다. 아니, 사람의 형상을 한 괴물이었다.
키는 3M가 넘었고, 눈과 피부는 붉었으며, 온몸에 뼈 가시가 삐죽 솟아나 있었다.
“네놈들이 감히 내 보물을 탐냈느냐?”
놈이 우리를 보며 으르렁거렸다.
“레빌리디 남작인가?”
콜만이 철퇴를 겨누며 물었다.
“그렇다. 네놈이 그 이단심문관이로군?”
“심문하지 않아도 상황을 알겠군. 전부 네놈의 짓이겠지. 여신님의 이름으로 네놈을 처단하겠다.”
“할 수 있으면 해봐라!”
남작이 포효를 내질렀다. 그때, 하늘에서 빛의 구체가 떨어져 남작의 몸을 가격했다. 남작의 몸이 바닥에 처박히고 강석수가 내 옆에 떨어졌다. 그의 코트는 반쯤 찢어져 있고, 입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성유진. 드디어 왔군. 나는 네가 포기한 줄 알았다.”
“꼴이 말이 아니잖아? 더 싸울 수 있겠어?”
“한계다. 준비해둔 것들을 써서 겨우 싸우고 있었다. 내 마법으로 놈에게 경상은 입혀도 중상 이상은 입히기 힘들다.”
바닥에 처박힌 남작이 꿈틀거렸다. 콜만이 빛나는 철퇴를 들고 남작의 머리를 후려쳤다. 섬뜩한 소리가 났다. 남작의 머리가 수박처럼 부서진 것이다.
“이단심문관인가. 대단하군. 하지만 의미 없다.”
남작의 머리가 다시 재생한다. 나는 옆에 있는 무지개 과일을 힐끗거렸다. 남작의 재생과 동시에 무지개 과일의 빛이 줄어들었다. 어떠한 연관이 있는지는 뻔했다.
검을 들고 남작에게 뛰어가려는데 강석수의 목소리가 날 잡았다.
“성유진.”
“왜?”
“이 던전의 등급은 B등급이 아니다. 못해도 A등급이다. 포기가 답이다. 이미 가망이 없다. 다른 헌터도 포기하고 던전을 탈출했다. 아마 이 던전에 남아 있는 건 너와 나뿐일 거다.”
“더 빨리 움직였다면 쉽게 끝냈을걸.”
“그게 무슨 소리지?”
“지금 설명할 시간 없어. 포기할 거면 포기해. 난 저 새끼를 죽여야 하니까.”
남작이 여유롭게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박살 난 머리도 다시 재생되었다.
“…무모해 보이는군. 하지만… 네가 있다면 가능성은 아예 없진 않겠지.”
강석수가 다시 마나를 끌어 올리고 마법을 사용했다. 그의 마법은 내 신체를 강화했다. 몸이 가벼워지고 힘이 더욱 들어갔다.
‘뇌전.’
시퍼런 뇌전이 검기와 함께 검을 타고 흘렀다.
영천류(影天流) 뇌사(雷蛇).
검이 뱀처럼 움직여 남작의 명치를 찔렀다. 검은 명중했다. 문제는 깊숙하게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검기에도 불구하고 잘리지 않는 놈의 뼈가 심장을 철저하게 보호하고 있었다. 뇌전도 통하지 않았다.
“오, 오오, 오오오…!”
갑자기 남작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꺼림칙함을 느낀 나는 검을 뽑고 거리를 벌렸다.
남작의 빈틈을 포착한 콜만은 있는 힘껏 남작의 등에 성스러운 철퇴를 휘둘렀다. 남작의 몸이 반쯤 날아갔으나, 남작은 반격하지 않고 환희의 미소를 짓는다.
“바르마센께서 신탁이 내리셨다!”
남작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이윽고 그는 나를 보며 웃었다.
“바르마센께서 네놈의 심장을 원하고 계신다. 네놈을 잡아 바르마센께 바치겠다!”
자신의 등을 공격한 콜만을 무시하고 나를 향해 저돌적으로 다가와 솥뚜껑보다 큰 손을 내게 뻗는다.
속도 자체는 민첩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작의 손에 느껴지는 힘은 어마어마하다.
‘아마도 잡히는 순간 한 번은 죽어야겠지.’
찰나를 사용해 남작의 손을 피하고 어깨 위에 올라섰다. 남작이 고개를 위로 꺾어 날 바라봤다. 180도 이상 꺾인다. 후두부가 등에 닿을 정도다.
“얌전히 제물이 되어라!”
“좆까.”
놈의 입에 검을 쑤셔 박았다. 검은 목을 뚫고 놈의 심장을 노린다. 심장을 꿰뚫었다. 감각이 느껴졌다. 이걸로 다른 괴물처럼 죽을 것이다.
텁!
남작이 내 왼쪽 다리를 잡았다. 다리가 짓이겨지는 고통에 신음이 흘러나왔다.
‘뭐야, 왜 안 죽어?! 심장이 약점이잖아?’
저 옆에 반짝이는 무지개 과일이 보였다. 아마도 저거 때문이겠지.
뿌득.
왼쪽 종아리가 부러졌다.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천심은 아까 농부 페널티 때문에 썼어. 쿨타임이라 못써. 빌어먹을. 어떻게 해야….’
잠깐 간과한 게 있었다.
지금 남작과 싸우는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강석수와 이단심문관이 있었다. 이단심문관의 철퇴가 남작의 팔을 박살 냈다. 다리가 자유로워진 나는 재빨리 검자루를 놓고 남작에게서 떨어졌다.
“윈드 필드!”
강석수가 마법을 사용했다. 강대한 바람이 지면에서 솟아올라 남작의 몸을 하늘로 날려버렸다.
“성유진! 괜찮나?!”
나는 주머니에서 꺼낸 고급 포션을 삼키고 왼쪽 다리에도 뿌렸다. 그럼에도 단번에 재생되기는 힘들다.
“싸울 수는 있어. 기동력은 잃었다고 봐야겠지만….”
바람에 날려졌던 남작이 다시 우리 앞으로 당도했다. 우리는 숨을 들이켰다.
“이 역겨운 이단…. 내가 반드시 처단하겠다!”
콜만이 남작에게 달려든다. 나는 다리를 절뚝이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검 형태의 스톰브레이커를 소환해 손에 쥐었다.
“강석수. 넌 뒤에서 엄호해줘.”
남작을 죽이기 위해선 힘을 합쳐야 한다. 혼자서 죽이기엔 벅찬 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