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964 - 964. 무지개 과일 (744/2,000)

〈 964화 〉 964. 무지개 과일

콜만이 탱커를 맡고, 나는 빈틈을 노려 검을 쑤셨다. 물론 남작도 샌드백처럼 당하지 않았다. 그도 반격한다. 뼈 가시를 날리고 손톱을 휘두른다. 그러나 가장 위협적인 건 그의 손아귀였다. 한 번 잡히면 내 다리가 그러했듯이 짓이겨지니까.

그런 의미에서 강석수의 마법이 크게 도움 되었다. 강석수는 굳이 남작에게 피해를 주려 하지 않고, 나와 콜만이 위험할 때 마법으로 틈을 만들었다.

전투는 20분 이상 이어졌다. 나와 콜만은 말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지친 상태였다.

“이 벌레들이! 감히 나를! 브라마센이시여! 곧 이놈들을 바치겠습니다! 나를 지켜봐 주십시오!”

남작이 다시 돌진해온다.

운이 좋았다.

태어날 떄부터 귀족이었다는 이유만으로 편하게 도시를 군림했던 남작은 싸우는 법을 몰랐다.

“여신이시여!”

콜만이 여신을 부르짖으며 성스러운 철퇴를 휘둘렀다. 철퇴는 남작의 대퇴부를 뭉갰다. 남작이 바닥에 엎어진다.

‘기회다!’

나는 빠르게 뛰어가 남작의 뒷덜미에 검을 꽂아 넣고 뇌전을 일으켰다. 화련비도와 합체한 스톰브레이커의 검에선 붉은 뇌전이 튀었다.

붉은 뇌전은 효과가 있었다. 남작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이 덜덜덜 떨렸으니까.

“끄, 아, 아아아아아!”

괴물이 되었다고 해서 고통까지 없는 건 아닌 모양이다. 아니지. 이성이 있기에 고통을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눈동자를 옆으로 돌렸다.

무지개 과일의 빛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희미해졌다. 저 빛이 완전히 사그라들 때, 남작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놈이 일어나네!”

콜만의 말에 나는 검을 빼며 거리를 벌렸다. 남작이 일어났다. 짜증 가득한 포효를 내지른다. 귀가 먹먹해질 지경이다.

“내가 다시 놈을 쓰러뜨리겠네.”

콜만이 남작에게 뛰었다.

실수가 일었다. 콜만의 다리가 휘청인 것이다. 콜만의 바닥 난 체력 때문이다. 그리고 실수는 치명적이다. 콜만은 남작에게 어깨와 다리가 붙잡혔다.

“아아아악, 아아아악!”

걸레 짜내듯이 콜만의 몸을 비틀어 쥐어짠다. 콜만의 갑옷이 부서지고 붉은 피가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이 더러운 이단아!!!”

퍽! 퍽! 퍽!

콜만이 철퇴를 휘둘러 남작의 머리를 때렸다. 성스러운 철퇴의 힘은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유진! 이놈을 죽이게! 어서!”

“고생하셨습니다, 콜만 님!”

무지개 과일의 빛이 전부 사라진 것을 확인한 나는 남작의 뒤로 달려가 검을 찔러 넣었다. 단단한 뼈가 검의 진로를 방해한다. 나는 이를 악물고 모든 마나를 사용해 검을 찔러 넣었다. 검은 심장에 닿았다.

“커억! 브라마센이시여…!”

남작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콜만이 그의 육중한 몸에 깔렸다. 나는 검을 빼냈다. 콜만은 이미 죽었으니 지금 꺼내도 의미 없었다.

“이걸로 이 던전도 끝났어.”

남작 부인에 대한 복수도 끝났다.

나는 강석수에게 다가갔다. 허나 강석수의 얼굴에는 기쁨은 없었다. 오히려 일그러졌다. 패배자의 그것이다.

“강석수. 왜 그래?”

“무지개 과일이 빛나고 있다.”

그의 말이 사실이었다. 빛을 잃었던 무지개 과일이 다시 빛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남작의 몸이 꿈틀거린다. 내가 입힌 상처가, 관통된 심장이 재생하고 있다.

“젠장. 이게 뭐야?!”

“무지개 과일. 저건 아마 저 괴물이 가진 힘의 원천이다. 엔진이라 볼 수 있겠지. 엔진 연료를 소모해서 가동하지.”

“…연료?”

“이 도시 내에 있는 사람들이겠지. 그게 아니면 굳이 가둬들 필요가 없으니.”

요컨대 이 도시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제물이었다. 날뛰는 괴물들은 사람을 죽여 악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이다.

“우리 중에 가장 강한 이단심문관이 죽었으니 가망이 없군. 나는 여기서 손을 털겠다.”

강석수는 기원의 실타래를 꺼내 마나를 불어넣었다. 실타래가 불탄다.

“성유진. 너도 포기해라. 답이 없다. 우린 공략에 실패했다. 커리어에 흠집이 좀 나긴 하겠지만… 새로운 괴물과 새로운 방식의 던전 공략이니 변명은 되겠지. 성유진?”

“…먼저 가. 난 저 새끼 죽이고 갈 테니까.”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여긴 던전이다. 우리가 실패해도 던전 브레이크는 일어나지 않는다. 나중에 다시 던전 공략을 시도하면 그만이다.”

“난 내 여자 건드린 놈은 가만히 안 놔두는 주의라서.”

“…여자?”

강석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곧 그가 사라졌다.

“크으르르르….”

남작이 몸을 일으킨다. 나는 지금 내가 소환할 수 있는 모든 폭탄을 소환하여 놈에게 던지고 도망쳤다.

쾅! 콰콰콰쾅! 쾅!

스톰브레이커를 방패로 변형시켜 폭발을 일부 막았다. 등 뒤가 조금 뜨겁긴 했으나 남작이 다시 소환하기까지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릴 것이다.

‘강석수의 말이 진짜라면… 도시 내에 있는 사람을 전부 죽이면 무지개 과일의 빛도 약해지지 않을까?’

브라마센인가 뭔가 하는 악신에게 바쳐지기 전에 내가 전부 죽여버리는 것이다.

‘핵폭탄을 쓴다면….’

일거에 쓸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어느 정도 모았잖아. 핵폭탄을 쓴 이후에 저놈을 감당할 수 있고?’

콜만이 죽고 엄호해줄 강석수도 없었다. 나 혼자서 남작을 감당하는 건 불가능했다. 천심은 쿨타임이고, 완전 회복을 통해 기습해도 무지개 과일의 힘으로 다시 재생하면?

‘방법이….’

몇 가지 떠오른다. 그중 하나는 절대 황권. 일회용인 그것을 사용하면 남작을 없애버릴 수 있다. 그러나 남작 따위에게 쓰기엔 너무 아ㄲㆍㅂ다.

‘엘레나를 소환하는 것도 방법이야. 엘레나의 힘이라면 쓸어버리겠지.’

소환된 엘레나에겐 한계 돌파가 있다. 한계 돌파로 1분 동안 본래의 힘을 사용하면 남작은 감당하지 못 하리라.

‘엘레나를 소환… 아니지. 랜덤 소환이 있잖아? 랜덤 소환에서 대박을 치면 굳이 엘레나를 소환할 필요가 없어.’

이 와중에도 나는 랜덤 소환이 근질거렸다. 긴박한 상황인 만큼 내 운을 실험해보고 싶다.

‘엘레나를 소환해서 1분만 이용하고 다시 역소환되면 현실에서 섹스를 못하잖아.’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던전 안에서 소환하면, 던전 공략에 성공했을 때 나와 함께 밖으로 나가지 못할 수도 있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던전에 입장한 게 아니니까.

“의미 없다!! 네놈은 그분의 뜻대로 죽을 것이다!”

뒤에서 분노한 남작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나는 달리는 걸 멈추며 눈살을 찌푸렸다.

‘랜덤 소환으로 가자.’

마음을 정했다. 랜덤 소환은 쿨타임으로 인해 사용하지 못했으나, 내겐 쿨타임을 초기화할 방법이 있었다.

[스킬 재사용 대기시간 초기화권

스킬의 쿨타임을 초기화합니다.

가격: 2,000 포인트

※주의

소모된 스택 같은 경우 1개만 충전됩니다.]

[스킬 재사용 대기시간 초기화권을 사용합니다.]

[랜덤 소환 스킬의 재사용 대기시간이 초기화되었습니다.]

‘내가 가진 포인트는 1,150 포인트. 랜덤 소환을 하기엔 충분하지.’

[500 포인트를 소모해 랜덤 소환을 시작합니다.]

[워메이저 세계의 레브르가 소환되었습니다.]

[워메이저 유희 세계가 비활성화됩니다.]

[소환 유지 시간은 15일입니다.]

‘워메이저? 그 세계는 SF판타지 게임 세계잖아.’

내 앞에 벌레가 나타났다. 연분홍색의 사람 머리 크기의 애벌레다. 허공에 두둥실 떠 있다. 20개의 다리가 동시에 꼼지락 꼼지락 움직인다. 머리 부분에 있는 하나의 주먹만 한 황금색 눈동자는 나를 빤히 바라본다.

레브르의 모습을 보자 그 정체에 대해 떠올랐다.

-네가, 나를. 불렀나?

머릿속에 탁한 음성이 들린다. 전음이 아니다. 이건 텔레파시다.

‘존나 위험한 놈이 소환됐잖아!’

레브르는 [워메이저] 세계에서 기생 군주라 불리는 악역이다. 그 태생은 오염된 행성에 돌연변이로 태어났다. 염력, 텔레파시, 텔레포트를 사용할 수 있으며 몸을 분열하여 생물에 기생시킨다. 사람과 몬스터는 물론이고 로봇이나 안드로이드에도 기생한다.

레브르는 자연재해다. 행성을 돌아다니며 번식, 즉 기생을 계속하기 때문이다. 레브르가 나타난 행성은 그 자체로 망한다.

“내게 기생하려고?”

-허락한다면, 기생, 하고 싶음.

“…허락한다면? 네가 언제부터 허락 맡고 기생했지?”

-너는, 평범한, 인간과 다름, 나는, 네 능력을, 알고 있음. 우호 관계를, 맺고 싶음.

“하긴 내 능력이 좀 쩔긴 하지.”

미령이 처음 내게 소환되었을 때가 떠오른다. 미령도 나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나는, 더 많은 세계, 더 많은 행성, 번식, 하고 싶음.

“번식이라. 이해해. 나도 섹스를 좋아하니까.”

-나는, 섹스 못함. 생식기 없음.

“알아. 무좆 벌레 새끼야.”

-…….

키이이이이이잇!

광기에 찬 소리가 들렸다. 내 주위로 괴물 4마리가 나타난 것이다. 괴물들이 나를 향해 맹렬히 돌진한다.

“야, 저 새끼들 어떻게 좀 해봐!”

-기생, 해도 됨?

“돼! 나 말고 여기에 있는 모든 것에 기생해도 돼!”

-좋음.

레브르의 등에서 엄지 크기의 작은 벌레들이 나타났다. 레브르의 능력인 분열이었다. 4마리의 작은 벌레는 괴물들을 향해 날아갔다. 괴물들은 벌레에 대해 반응하지 않았다. 위험 자체를 못 느끼는 모양이었다.

기생 벌레는 숙주의 몸속에 파고 들어갔다. 검기를 막아내는 강도를 가진 뼈 가시라도 기생 벌레를 막진 못했다.

-기생, 좋은 심장.

기생은 순식간에 끝났다. 내게 달려들던 괴물들이 우뚝 멈춰 섰다. 괴물들의 입과 눈, 귀에서 작은 촉수 같은 것들이 튀어나와 꾸물거린다.

“야. 존나 쎈 놈을 죽여야 해. 그러니 최대한 빨리 번식해.”

-알겠음. 근처에, 숙주, 많음.

기생 당한 괴물들이 움직였다. 나와 레브르는 기생 괴물들을 쫓아갔다. 기생 괴물들은 좀비처럼 번식했다. 인간이나 괴물을 입으로 물어뜯으면서 번식하는 것이다. 번식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개인 차이는 있지만 길어도 30초면 번식이 끝났다.

‘괴물보다 인간의 기생 속도가 느리잖아. 인간이 괴물보다 더 똑똑해서 그런가.’

기생 당한 괴물과 인간은 사방으로 흩어져 기생을 이어나간다.

-번식, 매우 좋음.

“이놈! 내 제물에 무슨 짓이냐! 바르마센께서 진노하셨다!”

쿵, 쿵쿵.

저 멀리서 남작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쿵쿵 울리는 건 놈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리다. 놈의 모습이 보였다. 잔뜩 분노해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저건, 뭐임?

“내 여자를 죽인 놈이지.”

-약함. 근데, 내가, 더 약함.

레브르는 바로 강함의 차이를 판단했다. 레브르의 본래 능력치가 어느 정도인지 몰라도, 지금 그 능력치는 내게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레브르의 강함은 육체의 강함이 아니다. 마치 역병과도 같은 기생 능력이 레브르의 진짜 강함이다.

“죽여 버려.”

-복수는, 자기 손으로, 해야, 하는 거, 아님?

“널 소환한 게 나다.”

-알겠음.

레브르가 텔레파시를 썼다. 사방에서 좀비 떼가 몰려왔다. 기생 당한 괴물과 인간들이 남작에게 달려든 것이다.

“너희들 따위가 아무리 많아도 내겐 안 된다!”

남작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괴물을 손으로 으깨고, 인간을 잡아 던진다. 그러나 기생 당한 인간은 머리가 부서져도, 팔이 떨어져도 움직였다. 몸 어딘가에 있는 기생 벌레가 본체이기 때문이다.

나는 웃으며 상황을 지켜봤다.

남작은 처음엔 우세했다. 그 엄청난 힘으로 괴물과 인간을 짓밟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남작의 압도적인 신위는 볼 수 없게 되었다.

남작이 3마리의 적을 해치우면, 10마리 이상의 적이 나타나 달라붙는다. 그 10마리는 곧 30마리가 되고, 30마리는 100마리가 된다.

수 천 마리가 남작에게 달라붙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아아아아아악! 브라마센이시여!! 힘을! 내게 힘을!!! 아아아악!!”

남작은 자신이 악신에게 바쳤던 제물들에게 산채로 뜯어 먹혔다. 무지개 과일이 그에게 준 재생력이 독이 되었다. 거의 1시간 넘게 산채로 뜯어 먹혔으니까.

-도시, 번식, 완료.

“저건 기생 안 해?”

-너의, 복수, 일부러, 기생 안 함.

“하려면 할 수 있고?”

-조금, 힘들지만, 가능함.

“됐어. 하지 마. 저 새낀 죽어야 해. 그리고 수고했다.”

나는 무지개 과일이 있는 성의 정원으로 걸어갔다. 레브르는 내 뒤를 조용히 따라왔다.

남작 부인의 시체를 보며 착잡함을 느끼고서 빛을 잃은 무지개 과일을 손에 넣었다.

무지개 과일은 내 손에서 사라졌다.

<무지개 과일을 찾았습니다.>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