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965 - 965. 무지개 과일 (745/2,000)

〈 965화 〉 965. 무지개 과일

<무지개 과일을 찾았습니다.>

던전 공략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 어떤 던전이든 던전 공략에 성공하면 예외 없이 보상이 주어진다.

내 앞에 반짝반짝 빛나는 무언가가 나타났다. 기대감에 부풀어 있던 나는 바로 손을 뻗어 그걸 낚아챘다. 빛이 사라지고 그것의 형태가 드러났다.

하얀 가죽 장갑이었다. 손등에 날개와 철퇴가 그려져 있다.

나는 장갑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안타깝게도 장갑의 능력을 바로 알아차릴 방법이 지금 내겐 없었다. 현실로 돌아가서 전문 감정사에게 맡기거나, 헌터샵에서 판매하는 감정 스크롤을 사용해야 한다.

‘감정 스크롤은 집에 처박아 뒀으니… 집에 돌아가야 이 장갑의 효과를 알 수 있겠네.’

B급 폐쇄형 던전을 공략하고 얻은 보상이니 보통 물건은 아닐 것이다.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 손등에 있는 문양. 날개와 철퇴는 콜만의 장비에 그려져 있는 것과 똑같이 생겼네. 셀 교단 이단심문관과 관련된 물건인가?’

장갑을 착용했다. 손에 달라붙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현실로 나가는 포탈이 보였다. 던전은 곧 붕괴할 것이다.

포탈을 향해 걸어갔다. 레브르가 내 뒤를 따라왔다.

“레브르. 너 포탈을 통해 밖으로 나갈 수 있냐?”

-가능, 하리라, 사료됨.

멈칫했다.

레브르가 현실로 나간다? 절대 좋지 않았다. 레브르는 지금 당장은 내 말을 잘 듣고 있지만, 현실에 나가서도 그렇다는 보장이 없다. [워메이저] 세계에서 자연재해라 불리는 기생 군주다. 이놈이 사고를 한 번 치면 수습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소환 기간이 15일이라 회귀권을 사용해 어찌어찌 수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회귀권이 있다고 던전 밖으로 데려갈 순 없지. 고작 이런 일에 회귀권을 쓰기엔 아ㄲㆍ우니까.’

그러니 레브르를 여기서 죽여야 했다. 가능할까? 텔레포트로 도망가기 전에 기습해서 죽인다면 가능할 것 같다.

“레브르. 넌 나가지 마. 여기에 있어.”

-내, 죽음을, 원함?

“맞아. 넌 밖에 데려가기엔 너무 위험해.”

나는 현실이 아포칼립스 세상이 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 레브르가 내 말에 철저히 따른다고 맹세하더라도 믿을 수 없다. 미녀도 아닌 벌레를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데려갈 이유도 없다.

레브르가 날 빤히 쳐다봤다. 레브르는 묵묵히 하나밖에 없는 눈으로 불만을 표출했다. 나는 물러나지 않았다.

-…알겠음. 너를, 존중함.

“잘 생각했어. 여기서 한 번 죽겠지만, 넌 실제로 죽는 게 아니라 본래 세계로 역소환되는 거잖아. 내가 나중에 다시 소환해줄게.”

물론 다시 소환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깟 애벌레를 소환할 바엔 미령을 소환하는 게 더 이득이다.

-여기서는, 내 마음대로, 해도 됨?

“마음대로 해. 하지만 절대 포탈 밖으로 나오지 마.”

-알겠음.

어차피 이 던전은 곧 붕괴한다. 밖으로 나오지 않고 던전안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도시 밖으로 나간다? 나가더라도 얼마나 나갈 수 있을까. 레브르의 텔레포트도 무적은 아니다.

“그럼 난 간다. 나중에 보자.”

-잘가셈.

“오냐.”

나는 레브르를 뒤로하고 포탈을 통해 던전 밖으로 나갔다.

공간이 확 바뀌었다. 던전 주위에 대기하고 있던 협회 직원들이 화들짝 놀랐다. 그중에는 병원에 가지 않고 남아 있던 강석수도 있었다. 강석수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단숨에 내 옆으로 다가왔다.

“던전 공략에 성공했다고? 대체 어떻게 된 거냐?”

“네 추측은 틀렸어. 막타를 제대로 꽂으니 못 일어나더라고.”

“젠장…. 좀 더 진득하게 던전 공략에 힘쓸 걸 그랬군. 내 섣부른 판단이 커리어를 망쳤다.”

강석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서 협회 직원들의 질문이 내게 쏟아졌다. 이번 던전의 특수성 때문인지 관심이 많았다. 나는 그들의 질문에 적당히 대답해주면서 던전을 지켜봤다.

‘레브르. 이 자식이 내 말을 어기고 현실로 나올 수 있으니까. 나오는 순간 죽여버려야 해.’

여기에 있는 협회 직원을 쉽게 믿을 수 없다. 전부 나보다 약했다. 그렇기에 내가 직접 던전을 지켜봤다. 던전은 사라졌다. 레브르는 내 말을 지켰다.

나는 강석수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아직 완전 회복을 사용하기 전이라 왼쪽 발목이 약간 불편하기도 했다.

‘적당히 아픈 척하다가 돌아가서 완전 회복을 써야지.’

그리고 강석수에게 할 말이 있었다.

“강석수. 네가 전에 했던 제안. 그거 아직 유효하지?”

머리에 붕대를 감은 강석수는 의외의 말을 들은 듯 두 눈을 키우더니 이내 씩 웃었다.

“물론이다. 나는 네가 우리와 함께할 거라 짐작했었다.”

“웃기고 있네. 방금 놀란 표정을 짓던 거 다 알아.”

“미리 말해두지만, 우리는 자금이 썩 여유롭지 않다. 길드가 네게 해줄 수 있는 지원도 한정적이다.”

“그건 바라지도 않아. 그런 걸 원했다면 대기업에 들어갔겠지. 중요한 건 일한 만큼 받는다는 것과 내 의지를 존중해줘야 한다는 거야.”

“당연한 말이다. 우리 세븐티어는 기존의 길드와는 다를 것이다. 다만, 길드를 위한 일에는 어느 정도 협조해줘야 한다.”

“알아. 그래도 길드는 길드니까. 그리고 세븐티어 길드가 더 커져야 내게 도움이 되겠지.”

나는 강석수와 협의하고 계약서를 작성한 뒤에 집으로 돌아갔다.

???

레브르는 성유진이 들어간 포탈을 바라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 포탈 밖에는 무수히 많은 숙주가 있는 행성이 나올 것이다. 성유진의 반응을 보면 확실했다. 허나 레브르는 성유진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레브르는 성유진의 능력에 대해 대략적으로 알고 있다. 그건 규격 외의 능력이다. 수백 억의 기생 숙주가 있다 하더라도 성유진을 어떻게 하긴 힘들었다. 결국 자신은 본래 있던 세계로 돌아가게 될 테고, 성유진의 정신은 자신보다 견고하다.

레브르는 붕괴하는 던전 내부를 돌아다녔다.

레브르는 번식을 원했다. 그에게 번식이란 곧 생존 욕구에서부터 발현되었다. 이대로 포기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건 레브르의 본능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방법을 찾아냈다. 붕괴되는 작은 세상 속에서 어딘가로 이어진 틈을 발견했다. 정신 파장에 민감한 레브르였기에 발견할 수 있는 틈이었다.

-성유진의, 세상, 아님. 다른, 세상임.

레브르가 짧게나마 분석한 성유진의 성격상, 성유진은 자신의 세상만 멀쩡하다면 다른 세상이 어떻게 되든 아무 상관 안 할 것이다. 거기에 포탈 밖으로 나가는 걸 제외하고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레브르는 기생 숙주들에게 텔레파시로 명령을 내렸다.

자살.

기생 숙주와 기생 벌레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물론 평범한 자살은 아니다. 기생 벌레가 기생 숙주로부터 빨아들인 에너지가 레브르에게 전부 모여들었다.

-에너지, 충분.

텔레포트로 이동하기 전에 이곳과 이어진 바깥세상을 잠깐 살펴봤다. 거대한 존재력이 느껴진다. 신이라 불리기에 충분한 존재력이다. 신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 신은 이미 이 붕괴하는 세상에 흥미를 잃은 것이다.

레브르에게도 관심 없다. 이 작은 세상이 붕괴하면서도 레브르 또한 자연히 사라질 것을 알기에.

-방심, 치명적.

레브르는 그 오만함이 기꺼웠다. 기생 군주라고 불리지만, 그 본질은 숙주에 달라붙어 삶을 이어가는 기생충이었다. 숙주가 방심하면 방심할수록 기생충의 생존률을 올라간다. 그리고 기생충이 숙주에게 몰래 접근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세상이 붕괴된다.

공간이 부서지고 아래로 떨어진다. 어마어마한 광경이지만 결국은 현상에 불과했다.

허공에 두둥실 떠 있는 레브르는 최적의 타이밍을 기다렸다.

틈이 닫히기 직전. 그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순간.

-지금.

레브르는 텔레포트를 이용해 다른 세상에 이동하는데 성공했다.

어두운 세상이었다. 시체가 돌아다니며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른다. 괴물들은 사방을 어슬렁거리며 괴물을 괴롭혔다.

-번식, 시작.

기생 벌레를 사방에 뿌렸다. 기생할 수 있는 것에 전부 기생한다.

-감염 활동은, 시기상조. 하지 않겠음.

강대한 힘을 가진 존재들이 느껴졌다. 레빌리디 도시에서처럼 무분별하게 감염 활동을 했다간 절명하기 딱 좋았다.

-숙주, 일시 공존.

물론 숙주는 그 사실을 모른다. 일방적인 공존이었다.

-부화장, 제작, 필요.

지하 깊숙한 곳, 기생 벌레 여왕과 기생 벌레 부화장이 필요했다. 자신은 15일 후에 사라지지만, 한 번 부화장을 만들어두면 자신의 자손들은 사라지지 않고 번식하리라.

-기생하고, 진화하고, 번식하라.

기생 군주는 악신의 영지에 기생을 시작했다.

그리고 15일 후, 레브르는 역소환되어 사라졌다. 허나 그가 남긴 부화장과 기생 벌레 여왕은 레브르의 명령대로 기생하고, 진화하고, 번식을 계속 이어갔다.

???

집으로 돌아온 나는 던전 공략 보상으로 얻은 장갑을 감정 스크롤로 사용했다. 이 감정 스크롤은 무척 유용하다. 어지간한 물건이 아니면 모두 감정된다. 유희 생활 어플 랜덤 뽑기에서 뽑은 아이템도 포함된다.

효과는 최고였다. 다만, 그만큼 가격이 좀 나간다. 감정 스크롤 하나에 약 2,000만 원이 넘는다. 헌터샵에서 직접 찾아가 감정하면 그 절반도 되지 않는 가격에 감정할 수 있었다.

‘감정 스크롤은 감정 스크롤만의 장점이 있지.’

헌터샵에서 물건을 감정하면 물건의 정보를 헌터샵이 알게 된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정보가 새어 나갈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감정 스크롤을 이용하면 그럴 걱정이 전혀 없다.

감정 스크롤의 사용법은 간단했다. 감정할 물건을 위에 두거나, 아래에 두고 감정 스크롤의 귀퉁이 일부를 찢으면 된다.

그럼 짜잔. 신기하게도 감정 스크롤에 글자가 나타나 물건의 이름과 능력을 알려준다.

현실의 마법사들은 감정 스크롤을 두고 우주의 위대한 기록이니, 어쩌고저쩌고하는 모양이지만, 난 감정 스크롤의 원리에 관해 별 관심 없다. 편리하면 그것으로 됐다.

‘어디 보자. 장갑의 이름은 이단심문관의 장갑이군. 이름 그대로라 놀랍지도 않다. 효과는….’

24시간에 한 번, 10분 동안 물건에 성스러운 힘을 부여하는 효과다.

‘이단심문관 콜만이 철퇴에 사용했던 그 힘을 말하는 건가?’

성스러운 힘이라면 사악하거나, 부정한 적에게 큰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유희 세계에 악마 같은 놈들이 좀 많아야지. 이 장갑은 아주 큰 도움이 되겠어. 광명승천도에 넣어서 강화하면 더 효과가 좋아지겠지. 그리고 이참에 광명승천도 세계에 들어가자.’

물론 지금 당장 들어가지 않고 조금 쉬다가.

???

[광명승천도를 선택했습니다.]

[유희를 시작합니다.]

광명승천도 세계에 들어왔다.

지금은 나와 남궁린, 남궁설, 마차를 모는 마부 넷이서 남궁세가를 떠나 낙월산으로 떠나는 때였다. 그 목적은 남궁설의 구음절맥을 치료하기 위해서다. 나와 남궁설은 이미 혼약을 올린 상태다. 남궁린이 함께하는 이유는 표면적으로 낙월신녀에게 한 수 배우기 위해서다. 실제로는 내 좆집이니 당연히 따라가는 거지만.

우리에겐 호위가 붙지 않았다.

남궁세가는 나와 남궁린의 실력을, 정확하게는 오기 3단의 경지인 나를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궁세가가 위치한 안휘성과 낙월산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안휘성에서 일주일 정도 마차로 이동하면 도착하는 곳이다. 이 세계에서 그 정도 거리면 무척 가까운 거다.

안휘성을 떠나기 직전, 미령이 몰래 합류했다. 그녀는 술법을 이용해 달리는 마차 안으로 마부 몰래 들어왔다.

“서방님! 드디어 떠나는 거네요!”

내 맞은편에 앉은 그녀가 활발하게 말했다. 그녀가 사용한 술법의 기척이 느껴졌다. 익숙하다. 외부로 나가는 소리를 막는 술법일 것이다.

“왜 그렇게 좋아해?”

“서방님이랑 자주 못 만나서 답답했거든요. 이제 남궁세가 눈치를 볼 필요는 없는 거죠?”

“없어. 낙월산에 도착하면 낙월신녀의 눈치를 봐야겠지만.”

낙월신녀. 그 이름을 들은 미령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신발 벗은 발을 들어 남궁린의 등에 올렸다. 남궁린은 알몸 상태로 마차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그녀의 새하얀 등은 발올리기 딱 좋은 높이에 있었다.

참고로 내 옆에 앉은 남궁설은 남궁린의 머리 위에 발을 올렸다. 신발도 벗지 않았다.

“언니. 아까부터 보지에서 물이 자꾸 떨어져서 마차 바닥을 더럽히잖아요. 좀 참을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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