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7화 〉 967. 광명승천도
채송경은 수하가 가져온 냉수를 벌컥벌컥 삼키며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가 이곳에서 남궁린을 만난 건 우연이 아니었다. 며칠 전에 낙월산으로 떠나는 남궁린의 정보를 접하고 미리 이 마을에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남궁린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실제로 만난 남궁린은 과연 그 명성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가 만나본 어떤 여자들보다 더.
‘남궁린이 가진 건 미모만이 전부가 아니야. 남궁세가라는 배경이 그녀를 더 돋보이게 하지.’
남궁린이 자신의 청혼을 받아들였다면 일은 쉽게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채송경도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오연채가의 장남과의 혼담도 아무렇지 않게 무시했었는데, 삼남인 자신에겐 더 관심 없는 게 당연했다. 오히려 혼담을 받아들였다면 어떠한 계획이 숨겨져 있을 거라 의심했을 것이다.
밤이 깊어졌다. 채송경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밤이 더 깊어지도록 끈덕지게 기다렸다. 그리고 축시(丑時 01~03시)가 되어 활동에 나섰다.
그는 품에서 두 가지의 물건을 꺼냈다. 그동안 몰래 모아두었던 비상금을 탈탈 털어 암시장에서 구매한 물건들이다.
하나는 우용향(牛龍香). 작은 종이에 감싸여 있는 그것은 소와 용을 단숨에 잠들게 한다는 수면향이다. 효과는 이미 확인했다. 출지(出志)의 경지에 이른 무인도 우용향 앞에선 일다경도 버티지 못하고 잠들었다.
다른 하나는 미혼대침(迷魂大針)이다. 목 뒤에 꽂으면 상대는 넋을 잃게 되고, 이 상태에서 명령을 내리면 어떤 명령이라도 따르게 된다. 침을 빼더라도 말이다.
채송경의 계획은 실로 간단했다. 우용향으로 재우고, 미혼대침을 남궁린의 목 뒤에 꽂는다. 그리고 남궁린에게 자신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반발하지 않도록 만든다.
‘남궁린은 내 여자로 만들 수만 있다면… 큰형을 넘어서 내가 가문의 가주가 될 수 있어. 덤으로 최고의 미녀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지.’
그저 그런 인생을 단번에 역전시킬 기회였다.
채송경은 창문을 통해 벽을 기어올라 남궁린의 방으로 향했다. 닫혀 있는 창문 사이에는 미리 작업해두었던 작은 구멍이 있었다. 그 구멍 사이에 우용향을 넣었다. 우용향의 하얀 연기가 방안을 가득 채울 때까지 잠깐 기다렸다. 채송경은 일다경 후에 조용히 창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어차피 남궁린은 우용향에 의해 잠들어 있을 게 분명했다.
뚜벅.
방안에 들어온 채송경은 코를 손으로 막았다. 뿌연 우용향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열린 창문 사이로 뿌연 연기가 빠져나갔다. 하늘 위로 올라가던 연기는 곧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남궁린. 잠들어 있군. 팔이 잘려도 아침까지는 일어나지 않겠지.’
침대에 누워 잠든 남궁린을 보는 채송경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렇게 보니 정말 아름답다. 이런 여자가 자신의 아내가 된다니.
탄탄대로의 인생을 생각하며 남궁린을 향해 손을 뻗는다. 남궁린의 몸을 뒤집고 그 목에 미혼대침만 박으면 된다.
허나 그의 손은 도중에 막혔다. 갑자기 옆에서 나타난 남궁설의 남편, 성유진에 의해.
“뭐, 뭐냐!”
예상 못 한 사태에 당황한 채송경이 두 눈을 치뜨며 뒷걸음질 쳤다.
“남의 여자에게 수작 부리려면 쓰나?”
성유진이 그의 손을 잡아 꺾었다. 마른 나뭇가지처럼 손이 꺾였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채송경은 되도록 크게 소리를 내질렀다. 상인 가문에 태어난 그는 무인이 아니었다. 익힌 무공도 건강유지 수준에 불과했다. 일이 틀어진 이상 객잔 안에 있을 호위 무사들의 힘이 필요했다.
“끄아아악! 끄아아아아아악!”
채송경의 비명은 요란스러울 정도였다.
성유진은 피식 웃으며 채송경을 비웃었다.
“소용없어. 네가 무슨 지랄 발광을 하든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는 일은 없을 거야.”
“술법사가 있었나…!”
채송경은 손목이 꺾인 고통에 눈물을 줄줄 흘렸다. 이건 함정이었다. 상대는 이미 자신이 오리란 걸 알고 대비하고 있었다.
‘방법이, 방법이…!’
머리를 굴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살아날 방법이 있을 것이다. 허나 성유진은 그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성유진의 다리가 그의 발목을 걷어찼다. 발목이 부서지고 발이 예상 못 한 방향으로 꺾인다.
“……!”
너무 강렬한 고통에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바닥에 엎어진 챙송경은 성유진을 올려보고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는 걸 느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에는 조금의 자비도 없다. 저자는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자였다.
“자, 잘못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이 일에 대한 보상은 반드시 하겠습니다!”
“그럴 거면 하지 말았어야지. 근데 이건 뭐야?”
성유진은 그의 왼쪽 손목을 짓밟고 침을 들어 올렸다.
검지 길이에 비해 얼핏 보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가느다란 은색 침이었다. 침을 자세히 보면 곡선을 그리는 검은색 문양 같은 게 있다.
“미혼대침이에요.”
침대에 누워있던 남궁린이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잠들지 않았다. 수면향? 대비하고 있다면 어렵지 않게 대처할 수 있다. 거기에 그녀의 무공은 제왕신공(帝王神功)이다. 절세 무학이라 칭송받는 무공. 방심한 것도 아니니 수면향 따위에 당할 이유는 없었다.
“미혼대침?”
“사람의 목 뒤에 꽂으면 넋을 잃게 되고, 그 상태에서 명령을 내릴 수 있어요. 일종의 최면이라고 할까요.”
“최면?!”
성유진은 조심스럽게 미혼대침을 다뤘다. 남궁린은 성유진의 생각을 짐작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제법 유명해요. 몇 년 구른 강호인이라면 거의 다 알고 있어요. 저도 몇 번이나 미혼대침에 당할뻔했죠.”
“해결법도 있어?”
“쉬워요. 미혼대침은 일종의 술법이에요. 다른 술법사에게 찾아가 미혼대침의 술법을 해제하면 돼요. 평범한 사람이 아닌 이상 미혼대침에 완전히 걸리는 일은 거의 없어요.”
“뭐야, 생각보다 시시하잖아.”
성유진은 미혼대침의 성능에 노골적으로 실망하며 미혼대침을 부러뜨렸다. 그에게 미혼대침을 대신할 끝내주는 성능의 물건인 최면스티커를 포인트만 있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이런 남자가 구할 수 있는 물건에는 한계가 있어요. 암시장이라고 해도 돈만으로 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고, 암시장의 대우를 받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부자는 아니니까요.”
“간단히 말해서 제 주제도 모르는 놈이었군.”
성유진이 부러진 미혼대침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미혼대침은 정확히 왼쪽 눈알에 박혔다. 바닥을 구르는 소리와 끔찍한 비명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성 가가. 정말 죽이실 생각이시네요.”
“죽일 거라고 말했잖아. 네가 걱정하는 것도 알아. 뒤처리지?”
“…네. 본가가 오연상단을 통해 얻는 이득이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적은 건 아니니까요.”
“시체가 없으면 실종이야. 뒤처리는 걱정하지 마.”
성유진은 남궁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손은 그녀의 풍만한 가슴을 움켜쥐고 희롱한다. 남궁린은 저항하지 않고 손길을 받아들였다.
“살려… 살려주십시오, 제발…!”
“안 돼.”
귀찮다는 듯이 대답한 성유진의 손가락에서 푸른 전격이 쏘아졌다.
???
낙월산.
하늘의 달이 이 산에 떨어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렇게 불렸기에 실제로 달이 떨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산의 아래에서 고개를 들어 산을 올려봤다.
대충 2km 정도의 높이다. 높았다. 곤란한 점은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없었다. 낙월신녀는 낙월산 정상 근처에서 살고 있다고 하니 만나려면 못해도 한나절을 걸릴 것이다.
“서방님, 술법을 써서 한 번에 슝~ 날아갈까요?”
미령의 제안에 혹했다.
허나 남궁린은 고개를 저었다.
“낙월신녀는 술법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몇십 년 전에 들은 이야기로는 한 술법사가 낙월신녀의 허락 없이 술법을 사용했다가 팔이 잘린 상태로 산에서 헐레벌떡 도망쳤다고 해요.”
미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구역에서 알지도 못하는 술법사가 술법을 사용하는 건 화날만한 일이긴 해. 우린 낙월신녀에게 잘 보여야 하니 꼼짝없이 걸어가야겠네? 아~ 벌써부터 다리 아프다! 서방님! 저 업어주면 안 돼요?”
“엄살 부리지 마. 나보다 더 체력이 좋잖아.”
나는 남궁설을 바라봤다. 이 자리에서 가장 체력이 좋지 않은 건 남궁설이었다. 당장은 열정이 가득 찬 눈으로 낙월산을 보고 있지만, 앞으로 몇 시간 뒤엔 내가 그녀를 안고 가야 하리라. 그게 싫다는 건 아니었다.
‘몸이 약하고 등산의 경험도 없을 테니 남궁설의 옆에서 걸어야겠다.’
등산을 시작했다.
낙월신녀의 정확한 거처는 모른다. 단지 정상 근처에 있다는 걸 알 뿐이었다.
‘요괴의 기척은 전혀 없군.’
보통 낙월산처럼 커다란 산일 경우 요괴가 존재하고, 산에 들어오는 인간을 습격한다. 허나 산에 문파가 있거나, 관리하는 자가 있으면 이야기는 다르다.
‘낙월신녀 혼자서 낙월산을 완벽히 관리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지.’
미령을 힐끗 봤다.
산에 들어오고서부터 미령의 말수가 줄었다. 평소에는 내게 엉겨오거나, 남궁 자매와 자주 수다를 떨던 그녀였다.
‘미령이 저렇게 진지해졌다는 건 낙월 신녀를 경계하고 있다는 거겠지.’
그리고 1시간 뒤, 남궁설은 내 예상대로 체력의 한계에 부딪혀 헉헉 거렸다.
“쉬었다 가기엔 갈 길이 멀어. 설아. 안아 줄게.”
“더 걸을 수 있는데….”
남궁설은 말과는 달리 순순히 내 품에 안겼다. 나는 그녀를 공주님처럼 안아 들었다. 내 양손은 자연히 그녀의 둔부와 가슴을 매만졌다. 내 품에 안겨 있으면서도 그녀의 호흡이 여전히 가쁜 이유였다.
“낙월신녀의 나이가 1,000살이 넘는다는 말이 사실이야?”
남궁설에게 물었다. 내 손에 희롱당하는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게 들었어.”
남궁린이 덧붙였다.
“사실이에요. 실제로 천 년 전의 기록에 낙월신녀가 언급됐어요.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최소 1,000살이 넘는건 확실해요.”
천 년.
아득한 나이였다.
그러나 이 세계라면 인간이 그렇게 오래 사는 게 불가능하지 않았다.
‘입식의 경지가 수명이 100년이고, 지금 내 경지인 오기에 달하면 수명이 총 250년이지. 경지에 오를수록 수명은 늘어나. 천 년 이상을 살려면 만상(萬象)의 경지에 올랐다는 건데….’
물론 아닐 수도 있다. 이 세상에는 수명을 늘려주는 술법이나 법기, 영약 같은 게 잔뜩 있으니까. 실제로는 만상이 아니라 조화의 경지일 수도 있는 것이다.
입식(入式) ? 출지(出志) ? 오기(五氣) ? 삼정(三頂) ? 조화(造化) ? 만상(萬象) ? 등선(登仙).
만상은 여섯 번째 경지.
‘…조화의 경지라고 해도 내가 만난 인간 중에 가장 강한 인간이겠지.’
삼정에 경지에 이른 미령이 긴장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런데 그렇게 대단한 인물치고 낙월신녀에 대한 소문은 별로 없는 것 같네.”
“낙월신녀는 낙월산에서 잘 안 나온대.”
남궁설이 말했다.
“나이가 그렇게 많으면 할머니겠지?”
“아니야.”
남궁설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 중에서 유일하게 낙월신녀를 만나본 사람이 그녀였다.
“낙월신녀는 예쁜 사람이었어.”
예쁜 사람.
내 흥미를 사정없이 끄는 단어였다. 나는 남궁설에게 낙월신녀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어떻게 예쁜 사람이었는데? 미령이나 남궁린보다 예뻐?”
“으음. 더 예쁘기도 하고, 비슷한 것 같기도 해.”
“가슴은?”
“린 언니보다 조금 더 컸어. 머리카락은 허벅지까지 내려갈 정도로 길었고…. 차분한 사람이었어.”
가슴이 남궁린보다 조금 더 크다면 G컵일 확률이 높다. 천 년 묵은 탱탱한 피부의 미녀라. 자세한 건 봐야 알겠지만 의외로 좀 꼴린다.
‘겉모습이 미녀라면 나이는 숫자일 뿐이지.’
대표적으로 엘프가 그러하듯.
낙월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우리의 발걸음은 정상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서 멈췄다. 초목 위에 지어진 가옥 두 채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가옥 두 채는 서로 50cm 정도 떨어져 있었다. 하나는 꽤 낡았고, 다른 하나는 최근에 지은 것 같았다.
쉬지 않고 부지런히 걸은 덕분에 오후 3~4시쯤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귀를 기울이면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낡은 가옥에서 문이 열리고 한 명의 여성이 나왔다.
“왔나.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객이 많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