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8화 〉 968. 광명승천도
낡은 가옥에서 문이 열리고 한 명의 여성이 나왔다.
“왔나.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객이 많군.”
하얀색의 경장을 입은 여인이었다. 옷에 주름 하나 없고, 손과 얼굴을 제외하면 노출된 부위도 없었다. 정갈하게 옷을 입었다.
그러나 숨길 수 없는 볼륨감이 옷 너머로 느껴진다. 남궁설이 말했던 대로 가슴이 남궁린보다 컸고, 머리카락은 허벅지까지 내려갈 정도로 길었다. 얼굴도 반듯하고 아름다웠다. 남궁린과 미령에 버금가는 미모가 팍하고 이해되었다.
솔직히 겉으로 봤을 때 나보다 강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평범한 미녀로 보였다. 그렇기에 나는 긴장했다. 내가 그녀의 역량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뜻이니까.
“낙월신녀를 뵙습니다! 저는 낭궁린이라 합니다!”
“오랜만이에요!”
남궁린이 포권을 취했고, 남궁설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미령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도 포권을 취하며 예의를 표했다.
“미령이에요. 대단하신 분을 여기서 뵙네요!”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머니랑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사람이 또 있을 줄이야.”
모두가 인사하는데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남궁설의 남편인 성유진입니다.”
낙월신녀는 우리를 한 차례 둘러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위유(魏瑜)다. 사람들은 날 낙월신녀라고 부르더군. 일단 안으로 들어와서 차라도 한잔 하지.”
낙월신녀, 위유.
그녀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짜증이나 분노도, 반가움이나 귀찮음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녀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뭐랄까. 조금 더 근엄하거나, 다혈질적으로 대할 것 같았다. 그게 아니어도 괴짜라는 느낌이 물씬 풍길 줄 알았다. 이런 산에 혼자 산다면 괴짜일 게 분명하니까.
‘근데 실제로 보니 웬만한 사람보다 더 상식적으로 보이는데.’
우리는 그녀의 뒤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집안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좀 많이 휑한 느낌이 들긴 하는데 이런 곳에 있으니 당연했다. 그는 주전자와 찻잔을 들고 왔다.
위유는 주전자의 아래쪽을 잡고 내공을 움직였다. 후끈한 공기가 느껴지더니 곧 주전자 속의 물이 끓었다. 내공으로 물을 끓인 것이다.
“직접 기른 찻잎이다. 백호은침이나, 용정차에 비하면 부족하겠지만, 마시기에 나쁘지는 않을 거야.”
우리는 녹차를 들었다. 나쁘지 않았다. 까다로운 입맛인 내가 이 정도이니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위유는 뜨거운 녹차를 한 모금 마신 뒤에 말했다.
“우선 확실히 하고 넘어가지. 나는 남궁세가에 세 가지 조건을 걸었고, 남궁세가는 조건을 받아들였다.”
“네. 맞아요.”
남궁설이 대답했다. 평소의 멍한 표정의 그녀와 달리 지금은 다부진 표정이었다. 두 눈이 활활 빛난다.
“첫 번째 조건은 네가 내 제자가 되는 것이지.”
절맥을 타고나는 인간에겐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외모가 뛰어나다는 것과 무공에 대한 재능이 놀라울 정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무공의 재능은 어디까지나 절맥을 치료 가능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남궁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위유를 향해 구배지례를 올렸다. 작은 몸은 착실하게 아홉 번의 절을 끝냈다.
“스승님.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나야말로 잘 부탁하마. 두 번째 조건은 남궁세가의 지원이지. 영약이 있어야 더욱 효율적으로 수련할 수 있으니까. 이건 남궁세가가 해줄 일이지. 세 번째 조건은 네가 일정 경지에 이르기까지 네 부군도 이곳에 머무르는 것이지. 이건 내 억지라기보다는 치료를 위한 일이야. 음양조요대법(陰陽照耀大法)을 한다고 해도 한 번에 치료되는 건 아니니까.”
위유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이름이 성유진이라고 했나? 잠시 네 몸을 확인해봐도 되겠나? 남궁세가가 이미 확실히 했겠지만, 내가 직접 확인해보고 싶군.”
“네.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손을 다오.”
손을 줬다. 그녀는 진기를 내게 흘려보냈다.
“제대로 찾았군. 막대한 양기가 느껴져. 게다가 별의 기운까지 타고났군.”
위유는 미련 없이 손을 뗐다. 나를 보는 두 눈이 흥미로 반짝인다.
“스승이 없다면 내 제자가 되지 않겠나?”
“…낙월신녀께서는 쉽게 제자를 들이시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원래는 그랬지. 하지만 최근에 심경의 변화가 생겼네.”
“어떤 심경의 변화입니까?”
“말하고 싶지 않군.”
“혹시 제자를 아무나 받아들이시는 겁니까?”
위유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럴 리가. 나는 제자를 받을 때 재능을 많이 따지는 편이다.”
“제겐 재능이 없습니다만.”
“농담으로도 그런 말 하지 말도록. 별의 기운을 타고났으면서 그런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면 칼 맞아도 이상하지 않다.”
별의 기운.
아마도 천강성 시스템을 말하는 거겠지.
“고민할 시간이 더 필요하나?”
나는 위유를 빤히 바라봤다. 대답할 시간이 더 필요하냐고? 필요 없다. 이미 대답은 나왔다. 눈앞에 있는 끝내주는 미인은 이 세상에서 쉬이 찾아보기 힘든 강자다. 이 기회를 걷어차는 건 멍청한 짓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구배지례를 올렸다.
“제자, 성유진이 스승님께 인사 올립니다!”
구배지례를 받은 위유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녹차를 호로록 삼켰다.
“음. 제자 두 명을 받았으니 오늘은 좋은 날이군.”
위유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남궁린이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남궁세가의 여식이군. 이곳에 온 이유는… 짐작이 간다. 한 수 가르쳐 주지.”
“감사합니다!”
남궁린이 대답했다. 그러나 기대감은 사라지고 약간의 실망이 드리운다. 자신도 낙월신녀의 제자로 권유받지 않을까 기대한 것이다.
“미안하지만, 제자는 두 명으로 충분하다. 이 이상 제자를 늘릴 생각은 없다.”
“아, 네….”
“그래도 내 제자의 언니이고, 남궁세가의 이름도 있으니 제대로 가르쳐 주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제자가 아니더라도 상상을 초월하는 고수에게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 그 자체만으로도 기연이었다.
이어서 위유의 시선이 미령에게 향했다.
“……여기서 여우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
“서방님이 가시는데 제가 떨어질 수는 없잖아요?”
“서방님?”
위유는 나를 보다가 무언가 눈치챈 듯 우리 모두를 한 번씩 훑어봤다. 남궁린은 얼굴을 살짝 붉혔고, 남궁설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설마, 절 내쫓으실 건 아니죠?”
“꺼림칙해서 내쫓고 싶다만… 제자의 아내라면 그럴 수는 없겠지.”
위유는 나를 보며 말했다.
“문란하구나. 뭐, 내가 간섭하기엔 늦었고, 그럴 이유도 없긴 하다만….”
그런 것치곤 못마땅한 눈치가 가득했다.
“여우. 이곳에 머물려면 밥값은 해야 할 거다.”
“켁. 이상한 일은 시키지 말아 주세요.”
“뛰어난 술법사가 있으면 여러 가지로 편해지지. 어떻게 보면 잘된 일이군. 다만 문제가 있다.”
“문제요?”
남궁설이 물었다.
“거주지의 문제다. 내가 만들어둔 가옥은 제자의 부부가 온다길래 둘이 지내기에 충분하게 지었다. 셋이 지내기엔 많이 비좁고, 넷이 지내면 불편하기만 할 테지. 그러니 너희 둘은 지낼 가옥을 만들어라.”
남궁린과 미령을 가리키며 말했다. 남궁린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미령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냥 넷이서 지내죠? 어차피 살 맞대며 지낼 텐데. 귀찮게 새로운 집을 만들 필요는 없잖아요.”
“여기서 지내고 싶으면 내 말에 따라라. 그게 싫다면 당장 하산하도록.”
미령은 날 보고는 입술로 댓 발로 내밀었다.
“…하면 되잖아요. 하면.”
이어서 위유는 내게 말했다.
“유진. 너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도록.”
“…전 요리 잘 못 하는데요.”
“상관없다. 앞으로 차근차근 배워가면 될 일이다. 오늘은… 고기 정도는 구워라. 식사를 준비하는 것도 제자의 일이다. 옛날 생각나는군. 나 때는 스승님의 그림자도 감히 밟지 못했었지.”
“…….”
나는 미묘하게 웃었다. 위유에 대해서 알 것 같았다. 위유는 꼰대였다.
“남궁설. 너는 남거라.”
“스승님. 음양조요대법(陰陽照耀大法)은 언제 시작하나요?”
남궁설이 기대하며 물었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빨리 지긋지긋한 구음절맥을 떨쳐내고 싶을 것이다.
“조급해하지 마라. 준비가 되면 음양조요대법을 시작할 거다.”
“준비요?”
“네 몸은 지나칠 정도로 약하다. 대법에 앞서 기초적인 체력과 지식은 알아야지.”
위유는 이어서 우리에게 말했다.
“그럼 각자 일을 하도록.”
???
위유의 집에서 나온 나는 부엌으로 향했다. 나는 팔짱을 끼고 부엌을 둘러봤다. 한쪽에 있는 식재료와 아궁이가 보였다. 조미료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고기 정도는 구우라는 건 고기를 짐승을 잡아서 구우라는 뜻이겠지.
‘귀찮아. 그리고 어차피 요리해도 못 먹어.’
그냥 편하게 가기로 했다. 시간이 됐을 때 인벤토리에서 요리를 꺼내는 것이다.
부엌에서 나와 미령과 남궁린을 바라봤다. 그녀들은 나와 남궁설이 지낼 집 옆에서 땅을 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미령 언니. 술법으로 집을 만들 수 없나요?”
“집을 만드는 게 쉬운 일인 줄 아니? 술법이라고 해서 뚝딱 하고 집을 만드는 건 불가능해. 뭐, 이런 건 간단하지만….”
미령이 손을 휘둘렀다. 땅바닥의 흙이 치솟더니 집을 만들었다. 단순히 술법으로 흙을 일으키고 고정시켰을 뿐인 집이었다.
“린아, 이런 곳에서 지내고 싶니?”
“이건… 많이 심하네요. 뭔가 축축하고 이상한 냄새도 나서 기분 나빠요. 차라리 동굴이 더 좋을 것 같아요. 제가 가서 나무라도 베어 올까요?”
“나무를 베어와도 마찬가지야. 나와 넌 건축에 대한 지식이 아예 없으니까. 우리 둘이서 해결하는 건 불가능해.”
“…낙월신녀님께 도움을 구해야겠군요.”
“그 여자는 바로 도와주지 않을걸? 물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듯이 건축하는 방법을 알려줄 여자야.”
“그럴 것 같긴 한데…. 계속 민폐를 끼칠 수는 없잖아요.”
“린아. 이럴 땐 서방님이 답이야.”
“가가요?”
“응. 서방님!”
이미 내가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던 미령은 나를 부르며 달려와 껴안았다.
“서방님! 도와주세요! 이러다 저희 밖에서 자야 할지도 몰라요.”
미령은 내 목에 매달리며 풍만한 가슴으로 내 몸을 눌렀다. 부드럽고 푹신한 감촉에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텐트라도 줄까?”
미령의 엉덩이를 주물렀다. 언제 만져도 탱탱하고 끝내주는 엉덩이다.
“이 날씨에 텐트에서 자면 입 돌아가요!”
반박하기 힘들었다. 산의 고도가 높아서 그런지 날씨가 저물수록 날씨가 쌀쌀해지고 있다.
“잠깐 기다려.”
나는 다른 세계에서 물건을 가져올 수 있다. 약간의 수고만 하면 이 일은 해결해줄 수 있다.
‘내 여자들이 입 돌아가게 둘 순 없지. 이왕 이렇게 된 거 끝내주는 집을 가져오자.’
내가 생각한 건 컨테이너 하우스였다. 컨테이너를 약간 개조하면 그대로 집으로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찾다 보니 더 괜찮을 걸 발견했다.
조립식 주택.
이름 그대로 재료를 가져와서 조립만 하면 된다. 물론 조립에도 시간은 걸리겠지만, 그건 미령의 술법으로 커버할 수 있다.
‘현실에 가서 구매하는 것보다… 백환 세계에서 드워프 노예 새끼들을 갈구면 되겠지. 그게 더 믿음이 가고.’
백환 세계에서 드워프를 갈구고 또 갈궜다. 일주일 만에 그럴싸한 물건이 만들어졌다. 역시 드워프는 최고의 노예 종족이었다.
광명승천도 세계로 돌아온 나는 적당한 곳에 재료들을 꺼냈다.
“그러니까 일단 땅을 조금 파고 기초를 세워야 해.”
“땅이라… 이렇게 파면 될까요?”
미령이 술법을 사용했다. 생각했던 대로 그녀의 술법은 편리했다. 나는 드워프 노예들이 조립하는 동영상을 보면서 미령에게 지시했다. 재료를 큼직큼직하게 만들고 가져와서 세부적인 일을 할 필요는 없었다.
“이 벽은 저기에 세우고… 아, 잠깐. 철근을 딱 맞추고 콘크리트를 바르라는 게 낫다던데. 술법으로 바로 굳히는 거 가능하지?”
“그 정도는 가능해요!”
“린. 그거 꽉 잡고 있어.”
“네. 가가.”
여차해서 3시간 만에 2층짜리 주택을 만들었다. 5명이 지내기에 충분한 현대적인 집이었다.
‘역시 난 현대적인 집이 제일 편해.’
나는 주택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주택 내부는 비어있지만, 침대나 식탁, 옷장 등의 필수적인 가구는 갖춰져 있다. 에어컨 같은 건 당장 필요한 게 아니니 나중에 설치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