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974 - 974. 광명승천도 (754/2,000)

〈 974화 〉 974. 광명승천도

무작정 도시를 나서지 않았다.

이 세계는 넓다. 만무탑이 있는 도시가 근처에 있다고 해도, 이 세계 기준으로 근처에 있는 것뿐이다.

길을 조금이라도 잘못 드는 순간 정해진 기간 내에 도착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나와 성지곤은 길을 잘 모른다. 여행에 대한 경험 자체가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길을 모르면 길을 아는 길잡이를 고용하면 된다. 그것도 아니면 표국에 부탁해서 함께 움직이거나.

‘문제는 개인 길잡이를 구하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고, 근처에 있는 표국 중에 만무시로 향하는 표행이 이미 일주일 전에 출발했다는 거지.’

한 마디로 늦었다.

그러나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나와 성지곤은 방법을 찾아냈다.

철오단(鐵烏團).

우리는 실력을 숨기고 비우단도(飛牛斷刀) 진구언이 이끄는 낭인단(浪人團)에 입단했다.

낭인.

이 세상을 돌아다니는 삼류무인들을 뜻한다. 누군가는 강호의 낭만을 쫓는 무리라고 좋게 포장하는데, 실제로는 정착하지 못한 용병에 가깝다.

철오단은 기회를 찾아 만무탑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나와 성지곤은 이 철오단에 편승하여 만무탑으로 향한다. 그게 우리의 계획이다.

“집합!”

철오단의 단주 진구언이 소리쳤다.

철오단에 속한 낭인들이 다급히 움직이며 그의 앞에 섰다. 나와 성지곤도 포함되어 있었다.

진구언은 40대의 남성이었다. 그는 인상이 더러웠다. 피부는 구릿빛에 이마에 긴 흉터가 있으며 왼쪽 귀가 없는 짝귀다. 목소리도 어찌나 거친지. 만년 가래가 그의 목에서 들끓는 것 같다. 그의 등허리엔 커다란 참마도가 햇빛을 받아 번쩍였다.

“지금부터 우린 만무탑으로 향한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이탈할 놈이 있으면 지금 빠져라.”

진구언이 두 눈을 부라렸다. 그의 앞에 선 낭인들이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진구언의 경지는 출지(出志) 3단. 낭인 중에서는 상위에 속하는 실력이다.

“…빠지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나 보군.”

낭인들은 조용히 진구언의 말에만 집중했다.

“만무탑은 근본 없는 우리가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만무탑의 정복은 바라지도 않는다. 우리의 목표는 절반, 만무탑의 10층이다. 10층에만 도달해도 상승무공을 배울 수 있다. 또한 이것도 경력이 되어 괜찮은 문파에 입문할 수 있다. 나는 이번 만무탑에 목숨을 걸었다. 그러니 너희에게 마지막으로 말하겠다. 나와 같이 만무탑에 목숨을 걸 생각이 없으면 내 발목 잡지 말고 당장 빠져라!”

진구언의 눈이 이글이글 타오른다.

만무탑에는 나이 제한이 있다. 50살. 그리고 만무탑은 10년마다 열린다. 40대인 진구언에겐 이번 만무탑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이다.

“저희도 단장님과 같은 심정입니다! 낭인으로서 조롱만 받고 살아갈 생각은 없습니다! 이번 만무탑으로 인생을 바꿀 겁니다!”

“맞습니다!”

“인생을 걸어야 하는데 당연히 인생을 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철오단 소속 낭인들이 하나같이 떠들었다. 그들의 목소리에서 각오가 느껴진다. 그리고 진구언은 흡족한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좋다! 만무탑에서 인생을 바꾸자! 지금부터 만무탑으로 출발한다! 각오 단단히 먹어라! 내 발목을…, 철오단의 발목을 잡는 놈들은 버리고 가겠다!”

“네! 단장님!”

낭인들의 사기를 한껏 끌어 올린 진구언은 앞장서서 도시를 나섰다.

철오단은 날카로운 기세를 사방에 흩뿌리며 길을 걸었다. 그러나 시간이 좀 지나자 날카로운 기세가 한풀 꺾였다.

나와 성지곤은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철오단의 가장 뒤쪽에서 걸었다.

“이봐, 신입들. 여기 까지 오는데 지치지도 않고 제법 하는데?”

30대 초반의 남자가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허리춤에 검을 찼다.

“저희가 이래 보여도 꾸준히 단련했어요.”

성지곤이 대답했다.

“뭐, 몸을 보니 단련한 놈들이건 알겠더군. 싹수가 있으니 단장님이 너희를 받아들인 거겠지. 난 우영태다. 철오단에 들어온 지는 2년이 됐지.”

“그래요? 저는 성지곤입니다!”

“성유진입니다.”

이름을 바로 밝혔다. 대단한 세력이 우리 뒤를 쫓는 것도 아니니 굳이 숨길 필요는 없었다.

“우영태 대협은.”

“우영태 대협? 웃기는 말이군. 그냥 형님이라 불러라.”

“네. 형님. 형님도 처음 철오단에 들어왔을 때 짐을 들었나요?”

성지곤이 두 눈을 빛내며 질문을 던졌다. 성지곤의 순수한 모습에 우영태가 피식 웃는다.

“내가 처음 철오단에 들어왔을 때? 난 그때 짐이 아니라 검을 들었어. 그때 철오단은 다른 세력의 낭인단이랑 전투를 벌였거든.”

“우와….”

성지곤은 귀를 쫑긋이며 우영태의 말을 들었다. 우영태는 신이 나서 자신의 경험담을 떠벌렸다.

‘아, 젠장.’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원래 내 계획은 철오단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굳이 낭인단의 신참으로 들어갈 이유는 없었다. 철오단의 단장인 진구언을 두들겨 패고 난 뒤, 철오단을 장악하고 낭인놈들을 노예처럼 부려 편하게 만무탑으로 가면 되니까.

허나 내 계획은 성지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설마 성지곤이 낭인단에 환상을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흔한 이야기였다.

낭인은 거처 없이 강호를 돌아다니는 무인들. 그리고 낭인들의 이야기는 3할의 진실과 7할의 허세로 포장되어 협행(俠行)이 된다.

‘성지곤, 이 새끼. 아직 협객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렸어.’

일종의 낭인 체험이었다.

‘할망구나 따먹는 주제에 협객을 노린다니…. 미친 할카스 놈.’

무척 짜증 나지만, 이미 성지곤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나와 성지곤 사이의 거래는 끝났다.

‘처녀를 나한테 바치는데 어떻게 거절해.’

후우.

당분간만 고생하자.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걸었다.

???

“신입! 가만히 앉아있지 말고 저녁을 준비해라!”

웬 낭인이 우리에게 소리쳤다.

“저, 저녁이요?! 우리가요?!”

성지곤이 당황해서 되물었다. 낭인이 인상을 확 구겼다.

“여기 너희 말고 신입이 더 있나? 우리 철오단은 원래 신입이 허드렛일을 맡는다. 그게 전통이지. 설마 여기까지 와서 못하겠다고 지껄일 생각은 아니겠지?!”

“아, 아뇨. 그럴 리가요. 전통이면 어쩔 수 없죠…. 저희가 할게요.”

“저녁 끝난 뒤에는 잠자리도 준비해라. 아, 불침번도 서야 하는 거 잊지 말고. 너희는 마지막 불침번이다.”

성지곤이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다. 다른 낭인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놀고 있었다. 인생을 바꾸고 싶다며 만무탑으로 향하는 주제에 정작 무공 수련을 하는 놈은 한 명도 없었다. 낭인 왜 좋은 대우를 못 받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불침번까지 하는 건 너무 해요. 저희도 쉴 시간이 있어야죠.”

“씁.”

낭인이 성지곤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또 말해야 하나? 이건 철오단의 전통이다. 나도 신입 때 온갖 고생을 다 했지. 원래 신입이 하는 일이니 잔소리 말고 해.”

“…알겠어요.”

“젠장. 웬 어리바리한 놈이 들어와서는… 퉷.”

낭인은 투덜거리며 침까지 뱉고 떠났다.

성지곤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유진아. 전통이 그렇다는데 어쩌겠어. 고생 좀 하자. 그런데 요리할 줄 알아?”

“요리? 난 내가 직접 요리해서 안 해 먹어. 너도 마찬가지잖아.”

“그렇긴 해…. 어쩔 수 없지. 우 형님에게 물어봐야겠다.”

“성지곤. 지금도 늦지 않았어. 되지도 않는 낭인 짓은 때려치우고 뒤집어엎자. 진구언은 내가 알아서 조질게.”

“아니야. 좀 더 해보자. 이건 철오단의 전통이라잖아. 철오단의 인정을 받으려면 그래야 해. 우 형님도 말씀하셨어. 신입 낭인 생활은 조금 어렵지만, 경험이 쌓이고 모두의 인정을 받아야만 진정한 낭인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망할 할카스.”

“뭐라고?”

“네 하고 싶은 대로하라고. 대신 앞으로도 처녀는 나한테 꼭 바쳐라.”

“고마워. 뭣하면 3명 정도는 내 취향의 여자도 양보해줄 수 있어.”

“필요 없어, 새꺄. 그 말라비틀어진 고목 같은 보지에 거리낌 없이 박을 수 있는 건 너 정도밖에 없을 거야.”

“무수한 세월을 견딘 보지야. 존중해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후에 성지곤과 함께 저녁 준비를 했다. 철오단의 단원은 35명. 대량의 저녁 식사를 2명이 준비해야 했다. 저녁은 국밥으로 정했다. 식재료를 전부 한곳에 때려 박은 것이다. 반응은 당연히 나빴고, 낭인들로부터 조롱과 모욕을 받아야 했다.

이후에 설거지를 하고 낭인의 잠자리까지 펼쳐준 뒤에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유진아. 조금 귀찮긴 해도 딱히 힘든 일은 아니잖아.”

성지곤의 경지는 출지의 경지였다. 철오단에선 나와 단장을 제외하고 성지곤이 가장 강했다.

“육체적으로는 안 힘들지. 다만 정신적으로 좆 같잖아.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엎자.”

“조금 지나면 우리도 낭인으로 인정해줄 거야. 유진아, 이거 먹을래?”

“뭔데?”

“아까 우 형님이 나한테 준 산딸기인데. 너도 나눠줄게.”

“됐어. 안 먹어.”

나는 눈을 감았다. 사실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성지곤도 마찬가지인 듯 계속 재잘거렸다.

“아, 섹스 하고 싶다. 원래 이 시간엔 섹스하고 있을 시간인데…. 유진아, 너도 섹스하고 싶지?”

“당연히 하고 싶지. 근데 이 낭인단에는 여자가 없잖아.”

“우 형님이 말해줬는데 여자 낭인의 수는 엄청 적대. 100명 중 한 명이 여자 낭인이래.”

“그렇게 많다고? 예상 외네. 위험한 낭인 짓 할 바엔 몸을 파는 게 나으니까.”

“근데 난 요즘 창녀들은 별로 안 꼴리더라.”

“고급 창녀 중엔 늙은 여자가 없어서 그렇지. 아니, 평범한 창녀 중에도 네 취향은 없잖아.”

고급 창녀는 갓 지어진 따끈따끈한 햇반이다. 하지만 성지곤의 취향은 쉬다 못해 썩고 곰팡이 핀 쌀밥이다. 성지곤의 취향을 관통하는 창녀는 찾는 게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도 내 취향의 그녀들은 돈만 주면 쉽게 벌려준다고.”

“그 나이에 돈을 벌기 쉽지 않으니 당연히 그러겠지.”

우리는 꽤 오래 잡담을 나누었다. 그러다 잡담은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아아. 엄마 보고 싶다. 독립해서 그런지 엄마 보지가 무척 그리워…. 할머니는 잘 있을까? 내가 돌아갈 때까지 죽으면 안 되는데…. 아, 할머니의 시큼한 보지 냄새가 느껴져….”

“미친 새끼.”

나는 성지곤의 말에 낄낄 웃었다. 이놈이 실없이 내뱉는 말은 날 웃기게 한다.

“아무튼, 내일도 고생해라.”

“유진아. 너도 같이 고생하잖아. 왜 남 일처럼 말하는 거야.”

“남 일이니까.”

“아니. 너도 같이한다니까.”

내게는 자동 진행이 있었다. 조뺑이를 치는 건 내가 아니라 아바타가 될 것이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물론 내 기준이 아니라 성지곤의 기준이다. 나는 이틀마다 밤에 몰래 낙월산에 갔다 왔다. 남궁린, 남궁설, 미령과 함께 밤을 보내며 쌓인 정욕을 풀었다. 허나 성지곤은 아니었다.

여자를 안지 못한 성지곤은 기운이 없었다. 일주일 동안 성실하게 잡일을 했지만, 철오단은 신입인 우리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이쯤되면 눈치챌 수밖에 없다. 철오단의 단장인 진구언은 사람을 부려 먹기 위해 나와 성지곤의 입단을 받아들인 것이다.

“우 형님은 말했어.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고. 그리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으으…. 섹스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아….”

섹스 중독인 성지곤이 괴로움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매일 섹스를 하던 놈이 일주일이나 섹스를 하지 못했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겠지.

“참아.”

이주가 지났다.

잠자리를 준비하던 우리는 우연히 우영태와 낭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우영태, 언제까지 그놈들 가지고 장난칠거냐?”

“하하. 장난이 아니라 관리야, 관리. 너무 빡세게 굴면 도망쳐버린다고. 적당히 풀어주고, 희망찬 소리를 지껄여줘야 군말 없이 일하지. 성지곤, 걔를 봐 아주 열심히 일하잖아.”

“성지곤? 그 새끼 아주 애완견처럼 졸졸 따르더만.”

“하하. 걘 진짜 멍청한 새끼야. 저번에 뭐라고 했는지 알아? 낭인이 협객이란다. 협객.”

“협객? 하하하하, 미친 새끼, 요즘 누가 낭인이 협객이라고 하냐?”

“그러니까.”

성지곤을 비웃는 소리였다.

힐끗. 성지곤의 상태를 확인했다. 붉게 변한 그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우영태에 대한 배신감 때문일까. 성지곤의 눈동자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이윽고 그가 씹어뱉듯이 말했다.

“유진아…. 난 저 새끼들의 애미들을 전부 따먹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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