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975 - 975. 광명승천도 (755/2,000)

〈 975화 〉 975. 광명승천도

“유진아…. 난 저 새끼들의 애미들을 전부 따먹을 거야….”

성지곤의 두 눈이 살벌하게 빛났다.

이런말하긴 그렇지만 성지곤은 여자와 관련된 것만 빼고 봤을 땐 전체적으로 괜찮은 놈이다. 성격도 순한 편이고, 허세도 잘 부리지 않는다. 게다가 무인으로서 재능까지 있다. 그런 성지곤이 이렇게까지 분노하는 건 무척 드문 일이었다.

“저 새끼들 애미까지 전부 따먹을 시간 없어.”

“나중에… 나중에 찾아가서 따먹을 거야.”

성지곤은 단단히 각오한 모양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건 성지곤의 일이지 내 일이 아니었다. 사사건건 성지곤에게 간섭할 이유는 없었다.

성지곤은 낭인들을 계속 노려보다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코에 가져다 댔다. 킁킁. 킁킁. 적극적으로 냄새를 맡고 있다.

‘부적인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성지곤의 손에 들린 걸 좀 더 자세히 살펴봤다. 부적이 아니라 약간 꼬불한 털을 끈으로 묶은 것이었다.

성지곤의 버릇을 떠올렸다. 잠시 깜빡했었는데 성지곤은 여자의 보지털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 미친놈아. 그건 또 누구 보지털이야?!”

“아, 이거? 할머니 보지털이야. 지금은 좀 희미해졌는데 맡으면 할머니의 보지 냄새가 나. 꽤 중독적이야. 맡아 볼래?”

“…됐어. 너나 실컷 맡아.”

“킁킁. 킁킁.”

성지곤은 몇 번이나 보지털을 킁킁거렸다. 이윽고, 안정된 성지곤은 보지털은 조심스레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슬쩍 본 주머니 속에는 다른 보지털 묶음이 많았다.

“털이 왜 그렇게 많아?”

“이건 엄마꺼고, 이건 저번에 만난 소 부인의 것이고, 이건 죽어가던 할망구의 마지막 유산이고….”

“뭐, 마지막 유산? 설마 할망구를 죽인 거야?”

“내가 죽인게 아니야. 병에 걸렸던 할망구야. 자식에게 돈을 주는 대신에 나한테 보지를 대줬어. 모정이 깃든 숭고한 보지였지….”

“혹시나 해서 묻는데 그 아들이 제안한 건 아니지?”

“제안은 내가 먼저 했어. 받아들인 건 그 할망구와 아들이지만. 아들은 금자 1냥에 엄청 좋아하더라고.”

어떤 상황일지 대충 머릿속에 그려진다. 이 세상은 현대가 아니다. 가난한 사람이 대부분이다. 당장 도시에 가도 거지를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런데 저 새끼들은 어떻게 할 거야? 바로 엎어?”

내가 물었다. 지금 성지곤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아니야.”

“뭐? 너 저 새끼들한테 빡친거 아니야? 애미들까지 다 죽인다고 했잖아.”

“그건 맞아. 바꿀 생각은 없어. 하오문에 의뢰를 해서라도 애미를 찾아내서 따먹을 거야.”

“그런데? 엎지는 말자고? 이깟 허접한 낭인단 정도는 우리가 먹을 수 있어.”

철오단은 뒷배경 따윈 없는 낭인단이다. 그러니 철저하게 힘의 논리를 들이밀어 우리가 철오단을 장악할 수 있다.

“협객은 말이야. 마음이 넓어.”

“이 새끼. 또 어디 가서 이상한 거 주워들었구만.”

성지곤은 옛날부터 유독 협객이란 말에 약했다. 협객이 되는 것. 그게 성지곤의 꿈이었기 때문이다.

“들어 봐, 유진아. 협객은 한 번의 실수를 용서해줘. 사람은 누구나가 실수를 하는 거잖아? 나도 언젠간 실수를 할지도 모르고….”

“그러니 저 새끼들한테 한 번 더 기회를 준다?”

“응. 우 형님… 아니, 우영태한테 기회를 줄 거야.”

난 우영태를 쳐다봤다. 우영태는 여전히 동료들과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다시 기회를 준다고 해도 바뀔 것 같지 않았다.

“네가 그럴 거라면 알아서 해. 근데 넌 협객이 아니야. 알지? 협객은 강간 안 해.”

“알아. 난 협객이 될 수 없어. 강간을 포기한다면 모를까…. 하지만 유진아, 협객은 못되어도 협객인 척은 할 수 있어.”

“뭐, 안 될 게 뭐 있냐.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성지곤은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

성지곤과 우영태는 나무 뒤에 둘이 모였다.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척을 숨기고 그들의 대화를 엿봤다.

“우 형님.”

“여기까지 불러내고… 얼굴도 심각하잖아. 무슨 일이야? 혹시 문제라도 생긴 건 아니지?”

“형님의 본심을 알고 있어요. 저를 가지고 놀고 계시다는 걸 알아요.”

“……하.”

우영태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윽고 그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알아차렸나? 누가 말해줬지? …음. 뭐, 좀 시간이 지났으니 슬슬 알아차려도 이상하지 않지.”

우영태의 분위기가 변했다. 한층 날카로워졌다. 여기저기를 구르며 닳고 닳은 낭인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그래서? 지난 시간 동안 내가 잘해주지 않았나? 네가 불이익을 당한 일은 없었을 텐데? 오해할까 봐 미리 말해두지. 신입이 잡일을 맡는 전통은 거짓말이 아니다.”

“우 형. 저한테 사과해주세요. 어쨌든 절 가지고 논 건 사실이잖아요. 그리고 앞으로 잡일을 저희에게만 시키지 말고 돌아가면서 해주세요. 들어보니 저랑 유진이가 오기 전에는 돌아가면서 잡일을 했다면서요?”

우영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선을 넘는군. 나한테 사과를 바라면 사과해줄 수 있다. 그러나 너희가 우리와 맞먹으려 드는 것은 용납하지 못한다. 단장이 너희를 신입으로 받아들인 이유는 딱 하나뿐이다. 잡일을 할 놈들이 필요해서지. 너희의 본분은 잡일을 하는 것에 있다는 걸 잊지 말도록.”

우영태가 으르렁거렸다. 그에게서 살기가 흘러나온다. 여기서 물러나지 않으면 손을 쓰겠다는 경고였다.

성지곤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저희가 원하는 건 많은 게 아니에요. 잡일이라면 충분히 했잖아요. 저희를 철오단의 정식 단원으로 인정해주세요.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안 돼.”

우영태는 딱 잘라 말했다.

“단장님이 직접 내게 말씀하셨다. 신입들의 관리를 잘하라고. 너희는 못 해도 만무탑에 갈 때까지 잡일을 맡아줘야겠다. 잡일을 맡아주는 너희가 없으면 철오단의 사기는 떨어지고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단장님이나, 나나 철오단의 사기가 떨어지는 건 바라지 않는 일이다.”

“저희가 도망갈 거라곤 생각 못 했어요?”

“도망? 하하. 할 수 있으면 해봐라. 하지만… 각오는 단단히 해야 할 거다. 너희의 도망은 배신이고, 우리 철오단을 포함해 어떤 낭인단이든 배신은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는다.”

챙.

우영태가 검을 뽑았다. 검은 정확히 성지곤의 목을 겨누었다. 나는 나서지 않았다. 우영태는 노골적으로 살기를 흘리고 있다. 성지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려고 하는 것이다. 즉, 성지곤을 여기서 죽일 생각이 없다.

‘더 부려 먹어야 하니 죽어선 안 되지. 그렇다고 도망가게 놔둘 수도 없고. 그러니 공포로 성지곤을 지배하려는 거야.’

그러나 우영태가 잘못 생각한 게 있다.

성지곤의 실력이다. 입식 7~8단 경지에 불과한 우영태가 출지의 경지인 성지곤을 죽일 수 있을 리가 없다.

“우영태. 난 협객답게 기회를 줬어. 근데 왜 그런 선택을 하는 거야? 같이 사이 좋게지내면 되잖아. 너도 저번에 내게 협객이 되고 싶다고 말했잖아?”

“그런 말도 했었나? 기억이 가물가물한 데, 아마 거짓말일 거다. 그런데 아직 상황 파악을 못 했나? 지금 네 목숨을 쥐고 있는 건 나다. 고분고분하게 굴어라. 그럼 만무시에 도착할 때까지는 살아 있을 테니까.”

“…그 이후에는? 저희를 죽일 생각이에요?”

“글쎄. 그건 단장님이 내리실 판단이지. 한 가지 좋은 걸 가르쳐줄까? 우리 단장님은 그렇게 보여도 자비심과 의리가 넘쳐. 너희가 군말 없이 일하고 좋은 모습을 보인다면… 단장님도 너희를 인정할 거야. 단장님의 인정을 받으면 다른 단원들도 당연히 인정하겠지.”

성지곤의 얼굴에 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실망감.

우영태에게 걸었던 기대가 완전히 박살 났다.

“넌 또 날 속이려고 했어. 기회를 줬는데도 이러다니…. 하아. 강호에 협객은 많으나, 그중에 진정한 협객은 찾기 힘들다는 말이 이런 뜻일까.”

성지곤은 숨겨두었던 기세를 풀었다. 성지곤의 존재감이 사방으로 퍼진다. 깜짝 놀라고 위기감을 느낀 우영태는 성지곤에게 검을 휘둘렀다. 일종의 낭인의 감이라 할 수 있었다.

허나 그의 검은 성지곤의 손가락에 막혔다. 엄지와 검지에 붙잡힌 검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죽이지는 않아. 유진이랑 둘이서 철오단을 장악하기로 했거든. 난 철오단과 정말 잘해보고 싶었어. 낭인단에 대한 동경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됐어.”

“너, 너, 힘을 숨기고…!”

우영태가 뒷걸음질 쳤다.

그와 성지곤 사이에는 입식과 출지의 경지 차이만 있는 게 아니다. 익힌 무공의 차이도 있으며, 재능의 차이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지곤은 저래 보여도 꾸준히 노력하는 놈이다. 잠자고 여자를 따먹는 시간을 제외하고 전부 수련에 힘쓴다. 놀고먹기 바쁜 낭인들과는 처음부터 다르다.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안심해.”

성지곤의 손가락이 우영태의 검을 분질렀다. 빠각. 검신이 부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우영태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근데 좀 맞자. 유진이가 할거면 철저하게 굴복시키라고 했거든.”

“서, 선배님. 죄송합니다. 감히 제가 선배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망언을 내뱉었습니다! 자비와 용서를! 부디 부탁합니다, 선배님!”

우영태의 행동은 신속했다.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성지곤에게 고개를 조아린 것이다.

나쁘지 않은 처세술이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성지곤은 이미 그에게 기회를 줬다. 기회를 걷어 찬 건 우영태였다.

퍼억, 퍽! 퍼억! 퍼퍼퍽!

박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숨어 있던 나는 단장인 진구언에게 향했다. 진구언은 출지 3단의 낭인. 3분 안에 조지는 건 일도 아니었다.

???

그렇게 하여 1시간 뒤, 철오단은 단장인 진구언을 비롯하여 단원들 모두가 땅바닥에 무릎 꿇었다. 이곳에서 두 발로 서 있는 건 두 명이었다. 나와 성지곤.

퍼억! 퍽! 퍼억!

성지곤은 무릎 꿇은 낭인들 사이로 돌아다니면서 지금까지 당한 불합리를 갚아 주듯이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낭인들은 비명을 지르지 않고 묵묵히 폭행을 받아들였다. 비명과 불만을 내뱉는 순간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폭행이 덮쳐 오리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바위 위에 앉아서 정면을 바라봤다. 철오단의 단장, 진구언. 그가 나를 보고 있다. 정상인 상태는 아니었다. 얼굴은 부어있고, 오른쪽 눈은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식은땀으로 가득한 그 얼굴에는 날 향한 두려움이 차올라 있다.

“진구언.”

“……네! 성유진 님!”

“말이 한 박자 늦다?”

“죄,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십시오!”

파지지직.

손바닥 위로 시퍼런 뇌전이 낼름거렸다. 진구언이 몸을 덜덜 떨었다. 지난 1시간 동안 진행된 전기 고문의 효과였다.

진구언은 머리를 조아렸다.

쿵쿵쿵.

이마가 바닥을 찧었다. 이마의 피부가 찢어지고 붉은 피가 흘렀다.

“내가 너희 버러지에게 원하는 건 딱 하나다. 복종.”

“저희의 모든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충성이 아니라 복종이라고.”

“복종하겠습니다!”

진구언이 절절하게 외쳤다. 말은 그렇게 해도 기회가 된다면 도망치려고 할 거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럴 테니까.

“말만이라면 누구나가 그렇게 할 수 있지.”

“믿어주십시오! 성유진님!”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라.”

쿵쿵쿵. 다시 머리를 찧는다.

“그 행동 말고. 네가 가장 아끼는 부하를 죽여. 행동으로 복종심을 보이라고. 내가 믿을 수 있게.”

“…….”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진구언을 비롯한 단원들 전원이 굳어졌다. 철오단에서 진구언이 가장 아끼는 부하는 한 명이다. 공식적으로 부하지만, 실제로는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친구인 경마백.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내 시선이 진구언의 오른편으로 향했다. 경마백이 몸을 덜덜 떨었다.

파직, 파지지직.

내 손아귀에서는 번개가 계속 튀었따.

진구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안하다, 마백아.”

“구, 구언아! 이, 이러지 마. 우린 친구잖아!”

경마백은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진구언을 올려다봤다.

“이 죄는… 지옥에서 갚으마.”

내력이 담긴 주먹이 경마백의 머리를 후려쳤다. 머리가 터졌다. 피와 뇌수가 바닥을 더럽혔다.

“성유진 님! 저의 복종심을 증명했습니다!”

설마하니 이렇게 쉽게 죽마고우를 죽일 줄이야. 깜짝 놀랐으나,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이걸로 진구언은 단원들의 신의를 잃었다. 진구언을 중심으로 단원들이 뭉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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