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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83 - 983. 광명승천도 (763/2,000)

〈 983화 〉 983. 광명승천도

“지금부터 한 시진 뒤에 5층 시련을 시작한다. 시련은 생존. 열흘간 살아남는 것. 5층의 시련은 중도 포기가 불가능하다. 포기할 놈들은 앞으로 한 시진 내에 포기해라.”

여기저기서 진지한 얼굴로 고민하는 자들이 말했다.

만무탑은 10년마다 열리고, 나이 제한에만 걸리지 않는다면 중복 참여도 가능하다. 문제는 다음 시련 내용도 바뀌기 때문에 한 번 만무탑을 경험했다는 이점이 거의 없다.

“…나는 포기하겠소. 내 실력의 한계를 느끼고, 내 재능의 보잘것없음을 느꼈소. 난 고향으로 돌아가 밭이나 갈 것이오.”

“이번 만무탑은 들었던 것보다 더 힘든 것 같군. 난 다음을 노리겠다.”

“부상을 입었소. 전투가 일어나면 개죽음밖에 더 당하겠소? 포기하겠소.”

포기하는 자들이 제법 있었다. 숫자로 따지면 5,000명 정도다. 포기한 낭인이 썰물처럼 빠져나갔으나, 남아 있는 입탑자들은 여전히 많았다.

“말했던 한 시진이 지났다. 5층의 시련을 시작하겠다. 어떻게 해서든 열흘 동안 살아남아라.”

배운 장군은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5층에는 적막함이 내려앉았다.

“유진아. 어떻게 할까?”

성지곤이 물어왔다. 나는 주위를 한 번 둘러봤다. 분위기가 날카로웠다. 불붙지 않은 화약고다. 한 번 터지면 수백, 수천 명을 상대해야 할지도 모른다.

“비상식량이랑 식수 확인해. 특히 식수를. 그 외에는 경계만 해.”

“알았어. 식량은 문제없을 거야. 원래 가지고 있던 식량이랑 준비해온 비상식량이 있으니까.”

잠시 후 성지곤이 다시 나타났다.

“비상식량은 충분해. 다만 식수는 좀 부족할 것 같아.”

“어느 정도?”

“일주일은 쉽게 버틸 수 있어.”

“알았어. 내가 해결할게.”

“유진아. 너도 이거 먹을래? 의외로 먹을 만 해.”

성지곤은 동그란 단약을 들어 보였다. 벽곡단. 이 세상에선 유명한 비상식량이다. 열량이 높은 대신에 맛은 별로 없었다.

“됐어.”

나는 고개를 획 돌려 어느 한 남자를 노려봤다. 숨죽이고 대화를 엿듣고 있던 남자가 뻔뻔하게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남자의 옷차림은 무척 추레했다. 드러난 피부 여기저기에는 때가 묻어 있고, 머리카락은 최소 몇 달은 감지 않은 것 같다.

‘평범한 거지새끼가 여기에 있을 리 없지. 개방인가?’

개방(?幇).

거지들의 문파.

무협 소설에서 흔히 나오는 구파일방 중 일방이 개방이다. 이 세계에도 구파일방은 있으나 다른 세계에서처럼 명성이 엄청나게 높은 건 아니다.

‘…무공 익힌 거지라고 해서 꼭 개방 소속이란 법은 없지.’

거지에 대해선 신경을 껐다. 이쪽을 염탐하는 건 거지 한 놈만이 아니었다. 이미 이 주위에서 우리는 요주의 대상이 되었다.

하루가 지났다. 나는 이쪽을 주시하는 자들이 많아졌음을 깨달았다.

‘이 새끼들. 식량이랑 식수가 떨어지기 시작했군. 아직은 괜찮지만, 궁지에 몰리면 미쳐서 덤벼들 수도 있다. 방벽이 있으면 더 낫겠지만… 이 근처에는 초원밖에 없어. 나무는 다른 놈들이 점령했고….’

하루가 더 지났다. 철오단의 단장 진구언의 표정이 무척 심각했다. 그도 이 살벌한 기류를 느낀 것이다.

“성유진 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이놈들 어쩌면… 작정하고 덤벼들지도 모릅니다. 대비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대비하게?”

역으로 물었다.

“…….”

진구언은 입을 다물었다. 주위는 탁 트여 있는 초원이다. 뭔가를 하려고 해도 방법이 없었다.

“불침번이나 잘 서.”

“네.”

이틀이 더 지났다. 5층에 변화가 생겼다. 입탑자들 사이로 구심점이 생겨난 것이다. 사람을 모으고 세력을 형성한다. 형성하는 방법은 식량과 식수를 걸었다. 일시적인 동맹. 아니, 고용에 가깝다.

‘식량을 지키기 위해 식량의 일부를 팔아 고용하는 거지.’

저들도 멍청이가 아니다. 식량을 빼앗기 위해 싸우다가 큰 부상이라도 당하면 자신들만 손해라는 걸 알고 있다. 이제 겨우 만무탑 5층. 저들의 최소한의 목표는 법기를 얻을 수 있는 7층이다.

“유진아. 이거 위험한 거 아니야? 저들이 한 번에 덮쳐들면 아무리 우리라도 방법이 없어.”

성지곤이 검자루를 만지작거렸다. 주위에는 굶주린 놈들이 형형하게 두 눈을 빛낸다. 일촉즉발의 분위기다.

“슬슬 나서 볼까.”

나는 앞으로 당당히 걸어나갔다. 그리고 큰소리로 외쳤다.

“지금부터 식량과 식수를 팔겠다! 돈은 물론이고 현물로도 교환 가능하다!”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 주위로 다가왔다.

“식량과 식수를 판다고? 우리가 돈 내고 살 필요가 있나? 네놈들을 죽이고 빼앗으면 그만이다.”

“마침 잘 됐군. 대화로 끝내지. 식량을 공짜로 넘겨라.”

“너희 숫자로 우리 모두를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놈들은 기고만장했다. 숫자를 믿는 것이다. 나는 피식 웃었다.

“이거 또 신박한 자살희망자군. 첫날에 못 봤나? 뇌절단인가, 뭔가가 나한테 개터지는 모습을 지켜봤을 텐데?”

손바닥을 들었다. 파지지지지직. 시퍼런 뇌전이 손바닥 위에서 춤춘다. 평범한 무인으로서는 불가능한 일. 놈들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긴장감이 서린다.

“난 너희를 전부 쳐죽일 자신 있다. 다만 그럴 필요가 없어서 안 그러는 것뿐이지. 식량을 살 놈이 아니면 당장 꺼져.”

뇌전을 땅바닥으로 던졌다. 뇌전은 벼락이 되어 땅에서 하늘로 거꾸로 치솟아 올랐다. 번개의 기둥을 본 놈들의 얼굴에 두려움이 서렸다.

“……식량을 구매하겠다. 가격은 어느 정도 되지?”

“얼마 안 한다. 나도 양심이 있으니 적당한 가격에 팔지. 아, 돈이나 물건이 없다고 실망하지 마라. 노동력으로도 교환해줄 테니.”

“우리를 고용할 생각인가?”

“싫냐?”

“그럴 리가. 우리도 원하는 바다. 단, 기한은 5층의 시련이 끝날 때까지다.”

800명이 넘는 인원이 내 앞으로 모여들었다. 식량을 구매하는 자들은 없었다. 모두 내게 고용되기를 원했고, 나는 모두 고용했다. 식량과 식수가 부족해지면 인벤토리에서 몰래 꺼냈다.

분위기가 풀렸다.

배가 부르고 갈증도 없으니 몸이 편안해진 것이다. 피를 볼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유진아. 원래부터 이럴 생각이었어?”

“그래. 5층의 시련은 경쟁이 아닌 생존이니까. 굳이 칼 들고 싸울 필요는 없어.”

“피곤한 일이 없어져서 좋긴 한데 800명은 너무 많은 거 아니야? 그 절반만… 아니, 500명만 고용해도 됐잖아.”

“따까리는 많을수록 좋아. 권력이 기본적으로 어디에서 나오는 줄 알아? 기본적으로 인원수에서 나오는 거야. 그리고….”

“그리고?”

“배운 장군이 말했잖아. 살아남으라고. 내 생각이 많다면 뭔가 일이 생길 거야. 그게 아니라면 열흘 동안 살아남는 시련은 너무 시시하지.”

“하긴. 입식의 경지에만 올라도 열흘 동안 굶는다고 죽는 건 아니니까. 약해지긴 해도 말이야.”

시련 시작 5일째. 이변이 일어났다. 초원의 끝에서 요견(妖犬)이 나타난 것이다. 호랑이만 한 덩치에 회색빛의 털을 가진 요견 수백 마리가 시뻘건 두 눈을 빛내며 달려들었다.

‘만무탑이 일부러 요견을 풀었군. 이래야 시련이라 할만하지.’

무인들이 깜짝 놀라 검을 뽑아 들고 요견과 싸우기 시작했다.

“요견이다!!”

“흩어지지 마! 모여서 싸워! 요견은 우리보다 빠르다고! 반격을 노려야 해!”

“요견은 배가 약점이다! 배를 노려!”

이곳에 있는 대부분이 낭인이다. 그리고 낭인으로 활동하면서 한 번도 요견을 상대하지 않은 낭인은 없다. 그만큼 요견은 흔한 요괴다.

그러나 요견의 숫자가 지나치게 많았다. 무인 중에서 사망자가 몇몇 발생했다.

“유진아. 가서 도와야 하는 거 아니야?”

“안 그래도 돼. 요견 정도는 알아서 처리해야지. 그러라고 식량을 주고 고용했으니까.”

“아 씨. 손이 근질거리는데….”

“정 심심하면 갔다 오던가. 안 말려.”

“……잠깐만 갔다 올게.”

성지곤은 5층에 올라오고 영초를 흡수하는 데 집중했다. 성과가 생기면 확인해보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 성지곤은 요견을 향해 달려가 검을 휘둘렀다.

‘성지곤의 경지는 출지. 혼자서 수백 마리를 상대하는 것도 아니니 크게 다칠 일은 없겠지.’

나는 사이다를 먹으며 조용히 구경했다.

한 시간 정도 지나자 상황은 정리되었다. 무인들은 자리에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그들의 얼굴은 밝지 못했다.

‘이게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하다는 걸 아는 거지.’

열흘 중의 절반. 남은 절반을 버텨야 한다.

다음날에는 더 많은 요견이 나타났다. 20명이 넘는 무인이 사망했다. 그 다음 날에는 요견 사이에 그림자 요괴가 섞여 있었다. 40명이 넘는 무인이 사망했다. 그리고 무인들의 불만이 터졌다.

“이보시오! 왜 당신은 안 움직이는 거요? 여기서 당신이 가장 강하지 않소? 당신이 나섰다면 죽는 이는 크게 줄어들었을 거요!”

산적 같은 놈이 나와서 내게 따지고 들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주위에는 어중이떠중이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대범한 척하고 있지만, 겁에 질려 있었다.

‘진짜 대범한 놈이었다면 혼자서 날 찾아왔겠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것만으로 놈들이 움찔거렸다.

“내가 나서지 않은 이유? 이런 귀찮은 일을 대비해서 너희를 고용했다. 지금 여기서 무엇보다 귀한 식량과 식수를 받았으면, 불평을 터트리기 전에 받은 만큼 일해라.”

“…우리는 당신이 나서서 좀 도와주기를 원할 뿐이요.”

“아, 그랬나? 내 대답은 하나다. 싫다.”

“그렇게 막 대해도 좋소? 우리가 떠나면 곤란한 건 그쪽 아니오.”

“글쎄. 딱히 곤란해질 것 같진 않군. 떠나고 싶으면 떠나라. 그런데 갈 곳은 있나? 식량은 있고?”

“…….”

“난 너희를 정당하게 고용했다. 그 사실을 잊지 마라. 알아들었으면 자리로 돌아가서 밥이나 처먹어.”

“최악이군. 이름이 성유진이라 했소? 당신에겐 힘이 있으나, 협이 없소. 나중에 이 일을 후회하게 될 거요.”

“넌 이름이 뭐지?”

“…대부온협(大斧溫俠) 하문소요. 하남 출신이요.”

대분온협. 처음 듣는 별호다. 뭐, 별호가 붙었다고 해서 꼭 대단한 무인인 건 아니다. 강호에서 몇 년 활동하다 보면 별호는 쉽게 붙는다. 별호가 유명한 것과는 별개다. 그리고 별호 대부분은 과장되기 마련이다.

“별호에 협까지 붙었나? 아주 대단한 놈이군. 근데 네겐 협은 있어도, 힘은 없어 보이는군. 적당히 나대라. 지금까지는 어떻게 살아온 모양이다만, 힘없는 협은 허세에 불과하다.”

“내게 그런 말을 지껄인 작자는 지금까지 많았소. 하지만 그들 대부분이 오래 살지 못하더군.”

“병신들만 만난 모양이군.”

“…이번 시련에서는 당신을 따르겠소. 일단 고용된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다음 층에선 그러지 않을 것이오.”

하문소가 돌아섰다. 그의 뒤를 따라 200명의 무인이 움직인다. 어떻게 보면 장관이었다.

“멋지다…!”

성지곤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유진아. 진정한 협객을 드디어 만난 것 같아!”

“진정한 협객은 무슨. 저거 다 정치질이야.”

“그래도 좀 의외네. 대부온협을 왜 바로 죽이지 않고 살려둔 거야? 수적으로는 우리가 우위잖아. 500명이 우리 편이야.”

쯧.

혀를 찬 나는 성지곤에게만 들리도록 조용히 말했다.

“지곤아. 넌 뭔가 착각하고 있네. 여기에 우리 편은 너랑 나. 둘 뿐이야. 다른 놈들은 식량에 고용된 놈들이지. 당장 돌아서서 우리에게 칼을 겨눠도 이상하지 않아.”

“어…. 대부온협을 죽이지 않은 이유는 알겠어. 근데 철오단은 우리 편이 아니야?”

“그 새끼들은 부려 먹는 놈들이고. 아마 기회가 되면 바로 뒤통수를 때릴걸? 야, 혹시 철오단에 정 붙인 거 아니지?”

“아니야. 철오단은 언제든지 죽일 수 있어. 지난 시간 동안 함께 생활해서 이젠 알아. 가족이 아닌 놈 중에선 믿을 놈이 거의 없어.”

“알면 됐어. 7층이나 8층쯤에서 철오단을 버릴 거야. 철오단은 딱 그 수준이니까. 그때까지 준비해둬.”

성지곤은 조용히 칼자루를 매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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