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7화 〉 987. 광명승천도
내 좆침반은 명백하게 단상 위의 여인을 가리켰다.
면사를 써서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겨우 그것만으로 내 감각을 속일 수 없었다. 느껴지는 분위기와 목소리, 몸의 윤곽. 그 모든 걸 조합했을 때 100% 미인이다.
‘면사를 써서 얼굴을 가린 것만으로도 확실하지.’
못생겼다면 면사로 얼굴을 가릴 필요가 없었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 면사를 썼다? 못생겼다면 아예 관심도 주지 않는 세상이다.
‘만무탑의 도전자 중에 여자 무인도 있어. 근데 예쁜이들은 없지. 애초에 예쁘면 굳이 무공을 익히려 하지 않지. 무공을 익혀도 위험한 낭인 짓거리는 안 하지. 돈이 목적이면 기녀가 되는 게 더 현실적이니까.’
황보세가. 명문가의 자식. 좋은 유전자와 부족함 없는 생활, 무공으로 단련된 몸. 예쁘지 않을 수가 없다.
‘직접 나선 건… 이번 시련을 통과하기 위해서군.’
이번 시련은 좋든 싫든 뭉쳐야 한다. 뭉쳐서 깃발을 지키고, 적의 깃발을 빼앗아야 한다. 무인으로서의 실력은 물론이고 전술적인 움직임까지 요구된다.
‘황보세가라는 이름으로 조의 중심이 되어 행동하겠다는 거지. 그게 아니면 굳이 정체를 밝힐 필요가 없으니까.’
가문의 권위를 앞세워서 55조를 장악하겠다는 뜻이 훤히 보였다. 실제로 낭인 출신의 무인들은 황보세가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주눅이 들었다. 낭인들에게 있어 명문 문파나, 무가는 넘지 못하는 벽이며, 동경하는 다른 세상이다.
나는 손을 번쩍 들고 단상 위의 황보가혜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황보세가 소속이란 걸 어떻게 믿습니까?! 면사로 정체를 숨기고 말해봤자 설득력이 없습니다! 진짜 황보세가라면 당당하게 면사를 까시죠!”
시선이 내게 몰린다. 따끔따끔하다. 특히 황보가혜의 뒤에 있는 두 명의 삿갓 쓴 놈들에게선 노골적인 살기까지 느껴졌다. 아마 그들은 황보가혜의 호위이리라.
“맞아! 얼굴도 안 까면서 황보세가라고 말하면 누가 믿냐! 진정 황보세가 소속이라면 얼굴을 까라!”
성지곤이 옆에서 고함을 질렀다. 그게 시작이었다. 다른 무인들도 황보가혜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우린 현재 만무탑에 들어와 있는 상태니… 황보세가를 사칭해도 알아보기 힘들겠군.”
“면사로 얼굴을 가리다니… 너무 수상쩍어.”
“난 황보가혜란 이름도 처음 보는데? 진짜 황보세가의 일원이 맞긴 한 거야?”
“황보가혜를 모른다고? 그 이름은 유명하잖아. 산동보옥(山東寶玉) 황보가혜. 그 미모는 보석과도 같다고 하지. 정말 황보가혜라면 얼굴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증명될 터!”
분위기는 달아올랐다. 이제 입을 터는 것만으로 진정되지 않는다. 황보가혜가 신뢰를 얻으려면 그 얼굴을 공개해야 한다.
황보가혜는 당황하지 않았다.
“좋습니다. 면사를 벗어 제가 황보가혜임을 증명하겠습니다.”
검은 면사가 떨어진다.
침묵이 찾아왔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그녀의 미모를 보며 감탄사를 흘렸다. 빛이 나는 것 같은 새하얀 피부와 깨끗한 검은색 눈동자. 아름다운 눈썹과 앵두 같은 입술. 틀어 올린 검은색 머리카락은 비단처럼 고와 보인다. 겉모습만 보자면 나이는 대략 20대 중반 정도로 보인다.
‘역시 미녀였군.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남궁린보다는 약간 못하군.’
남궁린과 비교하는 건 좀 너무했던 걸지도 모른다. 남궁린은 한 소설의 히로인이며, 천하제일미녀라고 묘사되기까지 하니까. 그에 반해 황보가혜는 어느 소설 출신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모르는 걸 보면 게임 속 출신일 가능성이 높지.’
뭐, 중요한 건 내 좆침반이 그녀를 맹렬히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반드시 그녀를 따먹을 것이다.
“저는 황보세가의 황보가혜입니다. 아직도 못 믿으시겠다면… 비무로 증명해드리죠.”
“…….”
이미 증명은 끝났다. 그녀는 55조의 조장이 되었다.
???
조장이 된 황보가혜는 기본적인 방침을 정했다. 낭인들은 군말 없이 따랐다. 무난해서 이해가 가는 방침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기회를 보다가, 황보가혜가 한가해진 틈을 타서 그녀에게 접근했다.
가까이서 본 그녀는 생각했던 것보다 몸집이 컸다. 키는 나와 비슷했고, 어깨도 보통의 여인들보다 넓었다.
‘어깨가 넓으면 보통 가슴도 큰 편인데…. 이제 보니 옷으로 가슴을 압박하고 있군.’
꿀꺽. 침이 넘어간다. 정확히 어느 정도 크기인지는 몰라도 최소 H컵은 넘을 것이다. 저 봉인된 가슴을 당장 내 손으로 풀어버리고 싶다.
‘황보세가는 대대로 몸집이 크다지. 그걸 생각하면 황보가혜의 몸집도 이해가 되는군.’
황보가혜의 시선이 내게 향한다. 경계심이 가득하다. 아까 내가 사람들을 선동한 것 때문도 있겠지만, 내 실력은 어느 정도 파악한 것 같다.
“무슨 일이시죠?”
“남궁세가의 일원으로서 황보가혜 소저와 이야기나 나누려고 합니다. 아까 일은 죄송했습니다. 황보세가와 만무탑에서 만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이미 정리된 일이니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보다 남궁세가 이시라고요?”
평범한 무협지에는 오대세가니, 칠대세가같은게 존재한다. 그 중에서 남궁세가와 황보세가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가문이다.
“네. 비록 제 몸에는 남궁의 피가 흐르지 않으나, 저는 남궁의 가족입니다.”
“…데릴사위로군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당신이… 성유진 소협이시군요.”
“저를 아십니까?”
“소협에 대해선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습니다. 소협의 출신과 실력에 관해서도. 소협에겐 못마땅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번 시련은 제 지휘에 따라주세요. 부탁합니다.”
황보가혜가 고개를 숙였다. 허리도 30도 정도 내려갔다. 내 시선은 그녀의 가슴 쪽으로 향했다. 가슴은 미동조차 없었다. 얼마나 단단하게 가슴을 봉인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천안을 써서 봉인을 꿰뚫어 볼까?’
충동을 느꼈으나, 저 봉인은 직접 손으로 풀었을 때의 쾌감을 기대하며 참아냈다.
“물론입니다. 전 사람을 이끄는데 영 소질이 없습니다. 황보 소저가 조를 이끌어주시니 제가 더 감사합니다.”
“저에겐… 아니, 우리에겐 성 소협의 힘이 꼭 필요합니다. 성 소협의 힘이 있으면 9층 시련을 확정적으로 통과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허심탄회하게 말해주세요. 성 소협이 원하는 건 뭐죠?”
당신을 원합니다.
라고 말하는 건 최악의 급발진이다.
“황보 소저. 저도 소저와 같습니다. 시련을 통과하기를 원합니다. 그를 위해서 소저에게 협력할 것이고요. 다른 대가는 바라지 않습니다.”
“다행이네요. 함께하는 건 이번 9층 시련 한정일지도 모르지만… 함께 잘해보죠.”
황보가혜가 싱긋 웃었다. 다시 봐도 예쁜 얼굴이었다. 그리고 저 옷 아래에 있는 몸도 틀림없이 예쁘겠지.
자르르르르. 자르르르르르르르!
???
55조는 최소한의 채비를 끝마치고 밖으로 나갔다. 겁쟁이처럼 내부에 모여 있어 봤자 이익이 될 건 하나도 없었다. 시련을 통과하려면 열흘 내에 다른 조의 깃발 2개를 빼앗아야 한다.
“성 소협.”
황보가혜가 내 손을 붙잡았다. 그녀의 손은 얼굴만큼 곱지 않았다. 울퉁불퉁하다. 굳은살이 박혀 있다. 손가락과 손등에는 자잘한 흉터가 가득하다. 권법으로 유명한 황보세가 다운 손이다.
환골탈태를 경험하면 이 거친 손도 곱게 변하겠지만, 그녀에겐 한 참 먼 미래였다. 어쩌면 찾아오지 않을 미래일 수도 있고.
“성 소협이 정찰을 맡아주세요. 성 소협을 제외하고 믿을 사람이 별로 없어요. 부탁할게요.”
그녀의 생각을 이해한다. 나를 제외한 다른 이를 함부로 정찰을 보냈다가 괜히 전력만 잃을 수 있으니까. 전력 손실을 피하기 위해선 확실히 살아 돌아올 수 있는 내 힘이 필요하다.
“하하.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성 소협!”
황보가혜가 내 손을 꽉 쥐었다. 아프지는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그녀에게서 향긋한 냄새가 나는 건 알았다.
‘체향인가? 아니면 향수?’
모르겠다. 예쁜 여자의 몸에서 나는 땀 냄새는 고급 향수 뺨칠 정도로 좋아서.
어쨌든 황보가혜의 부탁대로 정찰에 임했다. 발바닥에 땀 나도록 뛰려다가 귀찮아져서 드론을 꺼내 하늘로 날렸다. 누군가가 뭐라 하면 법기라고 대충 둘러대면 된다. 이 세상은 그런 점에서 편리했다.
‘찾았다.’
근처에 5개의 조가 있었다. 14조, 71조, 101조, 37조, 44조. 이 중 2개 조는 매복을, 다른 조들은 먹이를 찾는 짐승처럼 어슬렁거리고 있다.
‘근데 탑 내부인데 더럽게 넓군. 최소 서울 이상의 크기인 거 실화냐…. 이 세계는 인구수든, 땅이든, 술법이든 스케일이 지랄 맞게 커.’
나는 정찰을 끝내고 55조에 돌아갔다. 일다경도 되지 않은 시점에 내가 돌아오니 황보가혜의 두 눈에는 불신이 깃들었다.
“성 소협…? 문제가 생겼습니까?”
“이미 정찰을 끝냈습니다. 매복하는 조가 2개. 주위에 움직이는 조가 3개 있습니다.”
“네? 이, 일다경밖에 지나지 않았는데요?”
“운이 좋게도 제가 가진 법기 중에 정찰에 특화된 놈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불신의 눈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웃었다. 앞으로 몇 시간 후면 저 눈빛이 180도 바뀔 것이다.
‘여자는 능력있는 남자에게 끌리는 법이지. …남자도 마찬가지지만 말이야.’
아름다운 외모도 여자의 능력 중 하나다.
“71조를 목표로 정하겠습니다. 적의 매복을 안다면 역으로 노릴 수 있습니다.”
“좋은 선택입니다.”
황보가혜는 조곤조곤 말하는 것과 다르게 노빠꾸 상여자였다. 한 번 목표를 정하더니 일말의 망설임 없이 71조를 덮쳤다. 뭐,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녀의 단단한 주먹을 보고 그녀의 성격을 어느 정도 예측했으니까. 평범한 여자였다면 돌보다 단단한 주먹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적이다! 55조가 뒤에서 공격해온다!”
“빌어먹을! 빨리 싸워! 깃발을 빼앗기면 끝이야!”
“오기(五氣)의 무인이다! 저놈만 잡으면 별거 없어!”
전투는 30분만에 끝났다.
나는 가장 먼저 앞장서서 7명의 무인을 죽였다. 전부 출지의 경지에 오른 무인들이었다. 71조는 절반이 죽고, 절반은 항복했다. 55조의 경우 4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거 이제 보니 만무탑이 완전 랜덤으로 조를 짠 건 아니군. 71조는 오기의 강자는 없었지만, 출지의 무인이 13명이야. 나머지도 입식 후반의 경지고.’
반면에 55조는 나를 포함해 출지 이상의 경지는 5명밖에 없었다. 황보세가 측 3명과 나와 성지곤.
그리고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는지, 한쪽에서 병사들이 나타났다. 50명이 넘는 그들은 패배한 71조의 무인들을 구속했다.
“55조의 첫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잠시 전장을 정리하겠습니다. 55조에서도 사상자가 5명 발생했군요. 혹시 포로를 흡수할 생각은 없으십니까?”
“…그게 가능한가요?”
“조는 30명으로 완성됩니다. 비어버린 다섯 자리를 포로로 채우는 것도 가능하죠.”
패배한 71조의 무인들의 눈빛이 변했다. 패배자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살아남을 수 있는 건 15명 중 5명.
“나를! 나를 선택해주시오! 난 출지 2단의 경지요!”
“전 부상이 없습니다! 칼도 멀쩡합니다!”
“…8층 시련 보상으로 받은 법기를 드리겠습니다! 절 받아주십시오!”
무인들이 바닥에 무릎 꿇고 아우성쳤다. 머리를 바닥에 찧는 일은 예삿일이었고, 무공이나 법기, 영약까지 바쳤다. 10층 시련을 통과하면 그보다 더 좋은 보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 소협. 어떻게 할까요?”
예상대로 날 보는 황보가혜의 눈빛은 변해 있었다. 신뢰감이 차오르고, 호의적인 미소가 그려진다.
“55조를 이끄는 건 소저입니다. 소저가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정말 그래도 될까요?”
“소저. 남아일언 중천금입니다. 저는 한 입으로 두말 하는 남자가 아닙니다.”
“성 소협은 무척 남자답습니다.”
“하하. 제가 좀 그렇습니다.”
황보가혜는 실력 순서대로 5명의 포로를 55조에 받아들였다. 전력이 보강된 것이니 불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