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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88 - 988. 광명승천도 (768/2,000)

〈 988화 〉 988. 광명승천도

“한 번의 승리지만, 저희의 목적은 아직 달성되지 않았습니다. 시련을 통과하기 위해선 깃발이 하나 더 필요합니다. 바로 다음 목표를 노리겠습니다.”

황보가혜는 55조 앞에서 말했다. 그녀의 말에 55조는 쉴 틈 없이 움직여 매복 중인 101조를 덮쳤다.

이번에도 내가 앞장섰다. 원래 이렇게 나서는 성격은 아니지만… 내 뒤에는 마이 레이디인 황보가혜가 지켜보고 있다. 점수를 따려면 전공을 세워야 한다.

“나는 대 남궁세가의 데릴 사위인 성유진이다! 무기를 버리고 깃발을 내놔라!”

자비심까지 뽐냈다. 허나 적들은 내 자비심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미타불.”

적지에서 누군가가 앞으로 나왔다.

머리를 빡빡 밀고 승복을 입은 남자였다. 몸은 비쩍 말랐으나, 그렇기에 도리어 단단한 근육이 돋보인다.

‘만무탑에 입탑하고 9층까지 올라왔다면 평범한 승려는 아니지. 무승인가?’

무승하면 소림사가 단번에 떠오른다. 워낙 유명하니 말이다. 그는 내게 합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날 보는 두 눈은 날카롭게 벼려진 칼과도 같다.

“소승은 정빈이라 하오. 시주의 두 눈에는 살기가 그득하니, 소승이 나서서 시주를 막겠소.”

“정빈!! 그 소림사의 미식승(美食僧)이 여기에 있다니?!”

반응은 내가 아니라 황보가혜로부터 터져 나왔다. 제법 유명한 놈인 모양이다.

“…소승의 근간은 소림이나, 지금의 소승은 소림과 어떤 인연도 없소. 그저 한 명의 승려로 봐주시오.”

“시끄럽고, 막을 수 있으면 막아봐라.”

영천류(影天流) 뇌광(雷光).

소림사든, 승려든 뭐든 내 적이었다. 봐줄 이유는 없었다. 붉은 궤적을 그리는 칼끝은 정빈의 목을 노렸다.

직후, 정빈의 몸 전체가 황금처럼 누렇게 변한다.

깡!

정빈의 목을 노린 화련비도가 튕겨 나갔다. 나는 당황했다. 검이 그의 목을 베어내지 못했다. 고작해야 생채기 하나.

“아미타불…. 무시무시한 검격이었소. 금강경(金剛經)을 사용했는데도 피부가 베일 줄이야.”

“보통이 아니군.”

방금 일격으로 알았다. 상대는 오기(五氣)의 무인이다. 나는 깊이 한숨을 내쉬며 정빈을 향해 달려들었다.

파지지직.

붉은 뇌전이 칼날을 타고 흘렀다. 이번에는 속도가 아닌 힘으로 저 목을 끊어 버릴 생각이다. 정빈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합장하던 손바닥으로 칼을 쳐낸다. 그 수법이 절묘했다. 과연 소림의 장법이다.

‘느껴지는 경지로 따지면 내가 조금 더 앞서있는 것 같은데…. 돌겠네. 뚫는 게 쉽지가 않아.’

어떤 방식으로 검을 휘둘러도 모조리 손바닥으로 쳐낸다. 정빈의 팔과 다리는 사람의 것이 아닌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콰르르르르릉!

낙뢰가 정빈의 반짝이는 황금 정수리에 꽂혔다. 소용없었다. 벼락은 황금 무승을 1초도 멈추게 하지 못했다.

‘젠장. 뇌전도 안 통해? 그럼 이건 어떠냐.’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

진각을 밟는다. 그로 인해 발생한 보이지 않는 압력이 정빈에게 가해진다.

“으음. 이 사악한 기운…!”

정빈이 갑자기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곧 그의 두 눈에서 새하얀 빛이 나왔다.

“윽?!”

나는 다리를 주춤거렸다. 정빈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마기(魔氣)가 흔들린다. 마기가 저 정순한 기운을 꺼리고 있다.

“항마신공(降魔神功)이오. 마에 대항하기 위한 신공이지. 세상 모든 마인들이 소림을 겁내는 이유가 이 항마신공 덕분이지. 충고하겠소. 마기를 거두고 순수한 무공으로 날 상대하시오.”

“항문신공? 좆까고 자빠졌네.”

천마신공이 겨우 저딴 거에 당한다? 그러기엔 천마라는 이름이 너무 아깝다.

나는 도리어 천마기를 끌어올렸다. 붉은 칼날에 시커먼 마기가 타오르며 뭉쳐진다.

“흐으으음…. 이 정도로 사악한 마기라니…. 시주는 대체….”

“그 잘난 항문신공으로 막을 수 있다면 막아봐라.”

“항문신공이 아니라 항마신공이오.”

정빈이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었다. 항마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손바닥. 보기만 해도 기분 더럽다.

나는 검을 휘두르는 척하며 마기를 움직였다.

천마신공(天魔神功) 천마신장(天魔神掌).

천마신장이 하늘에서 정빈의 맨들맨들한 머리를 노리며 떨어졌다. 쾅! 충격이 퍼지고 먼지가 피어올랐다.

“크흠!”

정빈은 버텨냈다. 그 허리가 살짝 꺾였지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천마신장을 떨쳐내고 합장한다.

“…아미타불.”

“이번엔 칼로 썰어주마.”

“성 소협!! 전투는 끝났습니다!! 적의 깃발을 손에 넣었어요!!”

황보가혜가 소리쳤다. 칼을 치켜든 자세 그대로 굳었다. 황보가혜의 말을 무시하고 움직일까? 3초간 고민하다가 칼을 내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일로 황보가혜와 틀어질 수는 없다.

전후 정리가 시작되었다. 우리 쪽에서 3명이 죽었고, 적 중에서 3명이 채워졌다. 그중에는 당연히 정빈이 있었다.

“유진아. 기분 나빠 보이는데 괜찮아?”

“괜찮아.”

성지곤이 다가와서 물었다. 아까부터 인상을 계속 쓰고 있으니 신경 쓰였나 보다. 나는 인상을 풀었다.

‘항마신공을 썼을 때부터 정빈이 마음에 안 들었어. …이건 천마신공의 영향인가?’

날씨가 더워서 기분 나쁘다. 수준이지만 천마신공에 영향을 받았다고 판단되니 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정빈이라하는 승려 말이야. 나중에 몰래 죽여버릴까? 우리가 같이하면 가능할 것 같은데.”

“됐어. 그랬다간 황보가혜의 경계만 살 거야. 황보가혜를 공략해야지.”

“작전은?”

“일단 호의를 사는 거지. 그리고 은혜를 입히고…. 같이 있다 보면 정이 쌓일 테니… 황보가혜는 자연스럽게 내 여자가 될 거야.”

“그럼 내가 도와줄 일은 없는 거네?”

“없지.”

“무공 수련이나 해야겠다.”

성지곤은 주위를 둘러보며 지루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이곳에 여자는 황보가혜 한 명뿐이다. 그 흔한 못생긴 여자도 없었다.

저벅저벅.

호랑이도 제말하면 찾아온다고, 황보가혜가 나를 향해 이쪽으로 다가온다.

성지곤은 눈치 빠르게 내게서 떨어졌다.

“성 소협…. 아니, 제가 잘못 판단했습니다. 성 대협. 고마워요. 대협 덕분에 반나절도 안 걸려 2개의 깃발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대협이라 인정받았다. 립서비스라고 해도 기분이 순식간에 좋아졌다. 이 세상에서 대협이란 칭호는 쉽게 불리는 칭호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하. 전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소저. 이다음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깃발을 모았으니 열흘만 버티면 되니… 농성을 하실 겁니까?”

“깃발을 좀 더 모을 필요가 있습니다.”

“네?”

“남은 열흘 동안 안전하게 깃발을 지키려면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동맹을 모으려면 깃발이 딱 좋은 선물이 테니까요.”

“아, 동맹. 그러고 보니 동맹을 맺지 말라는 규칙은 없었지요. 대단하십니다. 이 시련의 요체를 바로 알아차리셨군요.”

“그래서 말인데… 성 대협. 정찰 좀 해주세요.”

“하하. 소저께서 원하니 그래야죠.”

이날 55조는 총 6개의 깃발을 얻었으며, 다른 조 4개를 회유해 덩치를 대폭 놀리고 농성에 들어갔다. 총 150명이 뭉쳤으니 55조의 시련 통과는 확실해졌다.

???

밤하늘을 보며 콜라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오른쪽에서 정빈이 날 찾아왔다. 그의 시선은 내 손에 들려있었다.

“아미타불…. 성 소협, 그 검은 물이 무엇인지 물어봐도 되겠소?”

“이거? 콜라.”

“콜라…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오. 한 입만…. 딱 한 입만 맛봐도 되겠소?”

정빈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미식승 정빈. 별호 그대로 미식을 찾아 강호를 돌아다니는 승려가 바로 정빈이다.

“못 줄 것도 없지. 단, 내 질문에 답해야지.”

“소승에게 궁금한 게 있나 보구려. 알겠소. 성실히 답해주겠소.”

“소림사 출신이라며?”

“그렇소. 다만… 지금 소승은 소림사에서 파문되어 파계승이 되었소.”

“왜지?”

정빈은 잠시 망설였다. 내가 손에 든 콜라를 흔들어 보이자 곧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소승이 인육을 먹었기 때문이오.”

“인육을? 소림사의 승려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입이 벌어졌다. 소림사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최고의 불교 세력 중 하나다. 그런 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지 꿈에도 몰랐다.

“…3년 전이었소. 소승은 강호를 돌아다니며 요괴와 마인을 토벌하고 다녔소. 그러다 한 흑점에 들어갔는데… 한 마인이 너무나도 맛있게 인육을 먹고 있는 게 아니겠소? 소승은 그때 열흘을 굶은 상태였고… 치밀어 오르는 식욕을 참지 못하고 인육을 입에 넣었소.”

의외로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한순간의 실수… 인가 뭔가냐?”

“아니오. 소승은 참으려면 참을 수 있었소. 소승은 인육의 맛이 궁금해서 참지 않았소.”

“이거 또라이네. 파문당했다면서 당당하게 소림사의 무공을 쓰는 이유는 뭐야? 보통 파문당하면 무공도 잃지 않나?”

손발을 끊어버리거나 단전을 없애 버린다. 아예 처형해버리는 문파도 많다.

“이런저런 사정이 겹쳤소.”

“보나 마나 인맥이 뛰어났겠지. 그 나이에 오기에 이른 재능도 한몫했을 테고.”

“…….”

정빈에게 콜라 한 캔을 던졌다. 차가운 캔을 받아든 정빈이 깜짝 놀랐다.

“이, 이건?”

“콜라 먹고 싶다며. 줬잖아.”

“이게 콜라요? 어떻게 먹는 것이오?”

캔 따는 법을 가르쳐줬다. 뻥! 하고 터지는 소리에 정빈이 깜짝 놀랐다가 이내 콜라를 한 모금 마셨다.

“오, 오옷?! 이, 이런 물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니!”

정빈은 벌컥벌컥 마시지는 못하고 한 모금씩 콜라를 마셨다. 전부 마시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성 소협! 이런 귀한 걸 내게 내주어서 감사하오! 콜라! 그 이름은 잊지 않겠… 꺼어억!”

“아, 씨발. 더럽게 트림 질이야.”

“미, 미안하오. 나, 나도 모르게 그만….”

“됐어. 잘 먹던데 하나 더 줄까?”

“더 준다면! 기꺼이 먹겠소!”

“이번엔 사이다나 먹어 봐.”

나와 그는 사이다를 한 캔씩 들고 마셨다.

“크아아아아, 뻑예!”

“뻐, 뻑예? 그게 무슨 뜻이오?”

“기분 좋을 때 쓰는 말이지.”

“그렇소? 뻑예!”

정빈은 곧잘 따라 했다. 사이다를 한 모금 마실 때마다 뻑예, 뻑예 거렸다. 파문당했다곤 하나 걷보기엔 승려 그 자체라서 재밌었다.

그러다가 무시무시한 걸 발견하고 말았다. 정빈, 이 미친 승려는 사이다를 마시는 내내 발기하고 있었다.

내 시선을 깨달은 정빈은 얼굴을 붉혔다.

“시발, 너 게이냐? 게이살!”

게이슬레이어를 꺼내 휘둘렀다. 방심 상태였던 정빈이 깜짝 놀랐다.

“성 소협! 갑자기… 음?”

그리고 정빈은 죽지 않았다. 게이가 아니라는 뜻이다. 정빈은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봐, 땡중. 왜 발기한 거냐?”

“……이건 비밀이오만, 소승은 맛있는 것을 먹으면 발기해버리는 체질이오.”

“…혹시 사정도 하냐?”

“그… 너무 맛있으면 그러하오.”

“여자를 보면 발기 안 해?”

“소승을 뭐로 보는 것이오? 소승은 식욕을 제외한 모든 욕구를 초탈했소. 희대의 색녀가 소승을 유혹해도, 소승은 현혹되지 않소.”

정빈이 정색하며 말했다.

“성지곤같은 미친놈이 또 있을 줄이야. 이 세상은 역시 지나치게 넓어….”

이제는 감탄이 나올 정도다. 동시에 호기심이 들었다. 정말로 맛있는 걸 먹으면 사정할까?

나는 치킨 닭 다리 한 조각을 꺼내 그에게 던졌다. 평범한 치킨이 아니다. [백환] 세계의 메이드들이 날 위해 정성을 다해 병아리를 키우고 튀긴 최고급 치킨이다.

“이건 무엇이오? 맛있는 냄새에… 꿀꺽…. 참을 수가 없소…. 내가 이걸… 치킨을 먹어봐도 되겠소?”

“먹지 말라면 안 먹을 거야?”

“…….”

정빈이 입을 크게 벌리더니 치킨을 베어 물었다.

“옷, 오오오옥! 뻑예!!”

정빈의 두 눈이 커지고… 이하 생략. 아무튼 나는 이 세상에 개또라이가 또 존재한다는 걸 확인했다.

그 이후로 정빈은 나를 졸졸 쫓아다녔다. 내가 가진 맛있는 음식들을 맛보기 위해서다.

“공짜로 줄 순 없어.”

“…무엇을 원하시오? 소승은 가진 게 별로 없소. 아, 9층 시련 보상을 줄 수 있소. 부디 소승에게 새롭고 맛있는 음식을 주시오!”

“사람을 죽이라면 죽일 수 있나?”

“죽이겠소. 소승은 이미 파문당한 몸…. 따지고 보면 승려도 아니오. 진미(眞美)를 위해서라면 인륜을 벗어날 준비가 되어 있소!”

1초의 버퍼링도 없이 대답했다. 미친놈이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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