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991 - 991. 광명승천도 (771/2,000)

〈 991화 〉 991. 광명승천도

배운 장군이 사방으로 기운을 흩뿌렸다. 마치 파도와도 같은 그의 압도적인 기운에 나를 비롯한 무인들이 잠시 몸을 떨었다. 본능적인 두려움이 스멀스멀 일어나려고 한다. 나는 내력을 일으키며 몸을 옭아매는 기운을 떨쳐냈다.

“만무탑의 관리자로서 10층의 시련을 통과하고 11층에 올라선 그대들에게 찬사를 보내겠다.”

짝짝짝. 그가 박수를 치자 병사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공간을 가득 채우는 박수 소리에도 입탑자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배운을 주시하며 다음으로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대들은 내 옆에 계신 분이 누구인지 궁금할 것이다. 10층에 올라선 그대들은 이 분의 정체를 알 자격이 있다.”

노파가 앞으로 나섰다. 걸음걸이, 눈빛, 옷 가짐, 그 모든 것들이 우아한 노파다. 성지곤의 눈은 아까부터 노파에게 콱 박혀 떨어질 줄 모른다. 입가에서는 침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이미 짐작하시는 자들이 몇몇 있는 것 같구려. 본인은 능소려라 하오. 세간에서는 구월선자(九月仙子)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오.”

구월선자. 만무탑 20층 정복 보상으로 걸린 무공인 구월영검법(九月靈劍法)의 주인이며, 강호에는 이미 죽었다고 알려진 조화(造化)의 경지에 이른 고수다.

“본인은 죽음을 위장했소. 그 이유에 대해 밝히지는 않겠으나, 만무탑을 정복하면 구월영검법은 보상으로 주어질 것이오.”

능소려는 할 말은 다했다는 듯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우아한 분위기와는 반대로 고집이 느껴지는 입매다.

능소려의 목적은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죽지 않고 만무탑에 자신의 독문무공을 걸었다? 거기에 만무탑의 입탑자들을 지켜보고 있다? 답은 어렵지 않게 나온다.

‘능소려는 제자가 없지. 제자를 구하는 거야.’

만무탑을 정복해도 구월영검법은 선택해서는 안 된다. 구월선자가 순순히 독문무공을 줄 것이라곤 생각하기 어렵다.

‘억지로 제자가 돼야 한다면 선택하지 않는 게 더 나아.’

저런 늙은 여자의 제자가 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물론 내 옆에 있는 성지곤은 생각이 좀 다르겠지만.

배운 장군이 다시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10층을 통과한 그대들에게 황제 폐하를 위해 일할 기회를 주겠다. 처음에는 부사관으로서 일하겠지만, 군의 지원으로 영약과 무공을 받을 수 있으며, 공을 쌓을 때마다 지원은 더 많아진다. 그대들이 하기에 따라 나와 같은 위치에 오를 수도 있다.”

병력 모집이었다.

무뚝뚝해 보이는 배운은 의외로 입을 잘 털었다. 충성의 대가로 지원을 받고, 매월 봉급까지 나오는 안정적인 직업임을 어필했다.

부사관으로 시작하여 장군이 된다. 멋진 말이다. 장군이 되어 수십 만, 수백 만의 병사를 호령하는 자신을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장군을 노리는 자들은 이들만이 아니다. 명문 가문 혹은 명문 문파 출신의 배경 쨍쨍한 자들도 장군의 자리를 노릴 것이다.

‘현대에서도 군생활은 지옥이라고 하는데… 인권이란 개념조차 없고, 사람이 죽어 나가도 아무렇지 않은 이 세계에서 군생활을 하라고? 그건 지옥에 다이빙하는 짓이지.’

그러나 이 세계 사람들의 생각은 나와 다른 모양이다. 이미 약 100명 정도가 시련을 포기하고 군에 입대했다.

“군의 문은 언제든 열려 있다는 걸 잊지 말도록.”

이어서 배운 장군은 11층 시련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

11층을 시련을 시작하고 약 3년이 지났다. 그리고 우리는 17층에 도달했다.

시련은 층을 올라갈수록 위험해졌다. 17층에 오른 입탑자의 수는 약 300명이 넘었다. 이들은 기본으로 출지의 경지에 올랐고, 이 중 50명 이상이 나와 같은 오기(五氣)에 올랐다. 죽음의 문턱을 몇 번이나 겪으며, 시련 통과 보상으로 얻은 무공과 영약으로 실력이 수직으로 상승했다.

‘젠장. 자동 진행으로 시간 대부분을 건너 뛴건 좋은데…. 황보가혜와의 관계가 제자리걸음이잖아.’

나는 몇 번이나 황보가혜에게 접근했다. 가장 분위기가 좋았던 건 15층에서다. 그때 황보가혜는 호위무사들을 잃고 약해져 있었다. 스킨십 수준도 입맞춤 직전까지 갔었다. 그러나 황보가혜는 다시 일어섰다. 접근하는 내게 넘지 못할 선을 그었다.

‘평범한 여자는 이미 함락돼서 내 밑에 깔려 앙앙거리고 있었을 텐데…!’

황보가혜는 평범한 여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더 끌리는 걸지도 모른다.

저 앞에 배운 장군이 나타났다.

“17층에 300명이라…. 놀랍군. 경이적인 기록이다. 이번 시련은 특히나 더 어려웠을 텐데…. 구월영검법의 효과인가?”

턱을 쓰다듬으며 몇 번 중얼거리던 그는 병사들에게 명령해 커다란 지도를 가져와 벽에 걸었다.

“주목해라. 나는 딱 한 번만 말한다. 이 지도에 그려진 지형이 17층 시련의 지형이다. 17층은 개인전이고 시작 장소는 무작위로 결정된다.”

지도를 보는 입탑자들의 안색이 흐려졌다. 지도의 지형은 동그란 섬이었다. 주위는 바닷물로 가득하고, 그 중심에는 검은 연기를 뿜어내는 그림의 화산이 존재한다.

입탑자 중 누군가가 배운에게 물었다.

“…배운 장군님. 저 화산… 진짜입니까?”

“특별히 말해주지. 17층의 시련은 이 세상 어딘가에 실재하는 섬이다. 화산은 진짜다. 펄펄 끓고 있지. 평균적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폭발하는 화산이다.”

“미친…! 그런데 화산 주위에 숲이 있군요?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그건 이 섬의 특별함이라 할 수 있다. 본론으로 돌아가 17층 시련에 대해 설명하지. 17층 시련은 구슬 찾기다. 이 섬에 500개의 구슬이 숨겨져 있다. 석 달 내로 구슬 5개를 찾아라. 그리고 구슬 5개를 동시에 합쳐라. 그럼 자동으로 만무탑으로 전이 된다.”

300명 중 100명만이 18층으로 오른다. 물론 100명은 최대한으로 잡은 거다. 구슬을 못 찾는 일도 발생할 테니까.

“구슬을 찾는 방식에 대해서는 참견하지 않겠다. 알아서 해라.”

이 말에는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17층까지 올라오며 시련 내에서 서로 빼앗고 죽이는 일쯤은 이미 당연한 일상이 되었다.

“표정들이 굳어 있군. 그대들을 위해 이 섬의 장점을 하나 알려주지.”

“저 지옥 같은 곳에도 장점이 있습니까?”

“그대들이 환장할만한 장점이 있지. 저 섬에는 요괴가 있고, 영물이 있으며, 영약이 있다. 요괴와 영물을 사냥하면 그 전리품은 그대들의 것이고, 영약을 찾아내면 그 또한 그대들의 것이다.”

“……!!”

“그대들에겐 지옥의 섬이자 기회의 섬이 되겠군.”

배운 장군이 씨익 웃는다. 순식간에 진지하게 바뀐 입탑자들의 눈빛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나는 반사적으로 황보가혜를 쳐다봤다. 입을 꾹 다물고 지도를 살벌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약혼자인 오지무가 있었다. 그 거리는 1M. 예전에 봤을 때보다 거리가 가까워졌다.

‘오지무와 황보가혜는 이전 층에서 같이 활동했었지. 그때를 계기로 가까워진 건가.’

황보가혜에게 입을 털던 오지무의 시선이 내게 향한다. 오지무의 얼굴이 잠깐 굳어졌으나, 곧 나를 보고 씨익 웃더니 황보가혜의 어깨에 손을 올린 것이다. 황보가혜가 인상을 쓰며 곧장 오지무의 손을 쳐냈다.

‘이 새끼가…. 감히 내 여자를 건드려? 오지무 넌 저기가 진짜 지옥이 될 거다.’

오지무는 이번에 오기(五氣)의 경지에 올랐다. 나와 같은 경지에 올랐으니 자신감이 붙은 것이다. 거기에 놈의 주위에는 10명이 넘는 부하들이 존재했다. 이 중에 3명이 오기경(五氣境)이다. 똘똘뭉치면 나 정도는 대항할 수 있다는 거겠지.

‘젠장. 난 저번에 겨우 오기 6단에 올랐는데….’

경지가 높은 나는 거의 성장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원래 게임도 레벨이 높을수록 레벨업이 잘되지 않으니까.

“설명할 건 다 했다. 나머지는 그대들의 몫이다. 17층 시련은 한 시진 뒤에 시작하겠다. 그때 동안 휴식을 취하든, 전략을 세우든 마음대로 해라. 단, 서로 간의 전투는 금한다.”

배운 장군은 물러나고, 그 자리를 부관이 차지했다. 부관은 병사들을 시켜 입탑자들이 싸우지 않도록 감시했다.

내 주위로 사람이 다가왔다. 성지곤과 정빈뿐만이 아니다. 이미 내 실력은 여기서 유명하다. 입탑자 중에서 최강으로 손꼽히는 게 나다. 나와 동맹을 맺고 싶은 자들은 줄을 섰다.

“성 대협. 17층 시련은 성 대협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저와 대협이 손을 잡으면 17층은 쉽게 통과할 것입니다.”

“대협. 저는 상해에서 왔습니다. 혹시 상해의 목중백가를 들어보셨습니까? 제가 목중백가의 삼공자입니다. 절 도와주시면 이 은혜는 잊지 않고, 가문의 이름으로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남자 새끼들의 상판을 보니 짜증이 밀려왔다. 그들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몰라도 특유의 뉘앙스와 분위기가 있다.

“병신들의 뒤치다꺼리를 할 생각은 없으니 꺼져, 좆밥들아. 저 섬에서 날 만나면 대가리부터 박고 구슬을 넘겨라. 그럼 최소한 살려는 줄 테니까. 알았냐?”

내 눈치를 보던 그들의 태도가 돌변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오만하고 예의가 없군. 남궁세가라는 이름이 울겠어.”

“이 일은 후회하게 될 거다.”

“어리석은 놈. 우리 모두를 적으로 돌려? 네 한계는 17층이군.”

그들이 이런저런 험한 말을 쏟아내며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추가로 뻐큐를 날려주며 그들을 비웃었다.

저들이 날 죽이기 위해 뭉치는 일은 없다. 그러기엔 원한도 약하고, 그보다는 개인의 이득을 훨씬 추구할 것이다. 저들의 말은 단지 불만에 불과했다.

‘이 좆밥 새끼들 보다 신경 쓰이는 건….’

구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검은 옷을 뒤집어쓴 8명이 저들끼리 모여 있었다. 음산한 기운이 풀풀 난다. 느낌이 영 좋지 않은 놈들이다.

“유진아. 우리는 어떻게 할까?”

“아미타불. 저기 지도가 있으니 적당한 곳을 정해 모이는 것이 낫지 않겠소? 소승의 생각으로는 17층 시련은 혼자서 돌파하기 힘든 시련이오. 반드시 협력해야 하오.”

성지곤과 정빈이 말했다.

“합류는 좋지. 근데 그게 생각보다 힘들 걸. 시작하자마자 우리끼리 합류하기엔 섬이 너무 커. 못해도 며칠은 걸릴 거야.”

“초반에는 혼자서 활동할 수밖에 없겠네.”

“음…. 발생할 변수들을 생각하면 합류에 집착하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소.”

“내가 너희를 찾으러 갈게. 그러니 그때 동안 너희는 어떻게든 살아남아.”

“알았어.”

“아미타불. 소승의 걱정은 하지 마시오. …그보다 시작하기에 앞서 음식을 나눠주시오. 제발 부탁하겠소…. 소협의 발이라도 핥겠소… 제발 부탁이오!”

정빈이 내 앞에 무릎 꿇었다. 고개를 조아릴 기세였다.

“이 땡중 새끼가. 당장 일어서. 혀 내밀지 마. 진짜 죽여버린다.”

셋이서 잡담이나 지껄이고 있을 때였다.

“성 대협.”

황보가혜가 다가와 나를 불렀다. 의지로 가득한 검은 눈동자가 내 얼굴에 향한다.

“황보 소저! 무슨 일입니까?!”

오른손을 등 뒤로 돌려 휘저었다. 성지곤과 정빈은 내 신호를 알아듣고 자리를 비켰다.

“이번 17층 시련은 성 대협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제가 노리는 건 구슬만이 아니라, 이 섬에 있을 영약들입니다. 물론 요괴와 영물의 내단도 원하고요.”

영약을 노리고 만무탑에 들어온 황보가혜다. 이번 시련은 한탕 제대로 할 기회였다.

나는 미소가 지어지려는 것을 멈췄다.

“저도 물론 황보 소저와 함께하고 싶습니다. 소저. 저랑 둘이서 함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리품은 사람이 많을수록 적어집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죠. 우리가 합류한다면 어디서 만나야 할까요?”

“화산을 중심으로 서쪽에서 만나지요. 여기 보면 고양이 머리를 닮은 바위가 있지 않습니까?”

“알겠습니다. 다만 너무 눈에 띄는 게 아닐지….”

“하하. 걱정 마십시오. 합류 지점이 아니더라도 제가 먼저 소저를 찾아내어 만나게 될 테니까요.”

이건 둘도 없는 기회였다. 나는 멀어지는 황보가혜의 뒤태를 쳐다보며, 성지곤과 정빈에게 말했다.

“대충 들었지? 이번 시련은 너희끼리 해. 난 좀 바빠.”

“응원할게. 뭐, 유진이 너라면 황보가혜도 쉽게 따먹겠지.”

“아미타불. 아이스크림처럼 쉽게 따먹으시오. 그런데 아이스크림 좀 줄 수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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