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2화 〉 992. 광명승천도
만무탑 소속 술법사들이 입탑자들을 동시에 섬으로 전이시켰다.
풍경이 획 바뀌고 속이 울렁거렸다.
확 오른 기온에 답답함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봤다.
저 멀리 검은 연기를 끊임없이 하늘을 물들이는 화산이 보인다. 보기만 해도 뜨거워진다. 그리고 하늘에서 시커먼 무언가가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었다. 화산재였다.
‘화산 근처에 울창하고 푸른 숲이 있군. 이건 진짜 이상한 일인데….’
깊게 생각하는 건 관뒀다.
이 세계는 창작물 속 세계다. 현실의 법칙과 상식이 어그러져도 이상하지 않다. 쓸데없는 생각을 할 시간에 움직이는 게 더 낫다.
인벤토리에서 드론을 소환해 하늘로 날렸다. 화산재가 모든 공간을 뒤덮은 건 아니니 정찰의 의미는 있다.
‘황보가혜는 어디에 있지? 이 근처에 있으면 좋을 텐데.’
힐끗힐끗. 태블릿을 보면서 드론을 조종했다. 태블릿을 통해 드론에 부착된 카메라 영상을 볼 수 있었다.
‘사람이 있군. 황보가혜는 아니고….’
드론을 사람으로부터 멀찍이 떨어뜨렸다. 드론이 무인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갔다가 공격받는다. 실제로 무인의 공격을 받은 적이 2번 정도 있었다.
콰직!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태블릿의 영상이 끊어졌다. 드론이 어떠한 공격을 받고 추락한 것이다.
‘카메라의 사각에서 온 공격이었어.’
누구의 공격인지, 공격수단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드론의 위치는 육안으로 확인하기엔 멀리 있으니까. 지금와서 천안(天眼)을 사용해봐야 늦었고.
‘영상이 끊어지기 전에 인영이 보였어.’
영상은 자동으로 저장된다. 영상을 되돌려 인영을 확인했다.
‘찾았다! 황보가혜다!’
영상 속의 황보가혜는 드론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짓고 있다. 드론이 나의 법기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니 그리 놀랄 이유는 없다.
‘드론을 박살 낸 무언가를 본 거지. 카메라가 아래쪽에 있고 근처에서 날아온 게 없으니…. 드론보다 더 높은 곳에서 공격했나? 그럼 요괴나 영물이겠군.’
요괴와 영물.
내 입장에선 두 마리 모두 몬스터지만, 이 세계에선 엄연히 구분한다.
사악한 기운을 가진 괴물은 요괴이고, 신성한 영기를 가진 괴물은 영물이다. 라고.
그러나 그 구분에 큰 의미는 없다. 영물도 인간을 먹고, 요괴가 인간을 돕기도 한다. 그리고 인간과 마찬가지로 영물과 요괴도 경지가 높으면 내단이 존재한다. 인간이 인간의 내단을 먹어봤자 얻을 수 있는 건 거의 없기에 노리지 않을 뿐이다.
‘분명… 이쪽이었지. 먼곳은 아니야.’
황보가혜를 만나기 위해 다리에 내력을 불어 넣고 내달렸다. 약 15분 뒤, 웬 요괴와 싸우고 있는 황보가혜를 볼 수 있었다. 요괴는 2M 크기의 고릴라였다. 두 눈이 새빨갛고 벌어진 입에는 날카로운 이빨이 살벌하게 빛났다.
“하아압!”
황보가혜가 기합을 지르며 단단한 주먹을 내질렀다. 고릴라는 피하지 않고 도리어 주먹을 내질렀다.
작은 인간의 주먹과 요괴 고릴라의 커다란 주먹이 부딪힌다.
“커어어어어어!!”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른 건 고릴라 쪽이었다. 커다란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펄쩍펄쩍 뛰었다. 고릴라의 주먹이 망가진 상태였다. 반면 황보가혜의 주먹은 멀쩡했다.
황보가혜는 고릴라를 향해 맹수처럼 달려들었다. 그녀의 주먹과 발이 연격이 되어 고릴라에게 쇄도한다.
나는 이미 몇차례 황보가혜와 비무를 했기에 저 권법이 무엇인지 안다.
‘봉황선수권(鳳凰仙手拳)…. 연격이 이어질수록 강력해지는 이상한 무공이지.’
황보가혜의 연격이 열 번이 넘자 그녀의 손발에 변화가 생겼다. 마치 불꽃처럼 점점 붉은색으로 변하는 것이다. 물론 진짜 불꽃은 아니고 기운이다.
‘콤보만 이어지면 점점 강해지는… 진짜 이상한 무공이라니까.’
나는 비무때 그녀의 주먹이 어디까지 강해지나 궁금해서 일부러 연격을 끊지 않고 받아 본 적 있었다.
23번.
내가 받아낼 수 있었던 연격이었다. 그 이상은 나도 못 버틴다.
봉황선수권의 파훼법은 간단하다. 연격을 끊어내면 된다. 끊어내는 게 힘들면 잠깐 뒤로 도망쳐서 흐름을 없애는 것도 좋은 전략이다.
“쿠어어억! 쿠어억! 꿕!”
고릴라 요괴는 19번의 연격을 얻어맞고 절명했다. 마지막 일격에는 고릴라의 두꺼운 팔뚝이 날아갔다.
황보가혜는 고릴라 요괴가 죽자마자 작은 칼을 들고 고릴라의 배에 푹 찍었다. 그러다 칼이 부러졌다. 고릴라 가죽이 그만큼 단단하고 질긴 것이다. 인상을 쓴 황보가혜는 칼을 내다 버리고 맨손으로 고릴라의 가죽을 찢고, 내장에 손을 쑤셔 넣었다. 섬뜩한 광경이었다.
‘예쁜 미모와 그렇지 못한 행동…. 으음. 그 차이점이 날 꼴리게 하는군.’
물론 나는 그녀가 어떤 목적인지 알고 있다. 고릴라 요괴의 내단을 찾는 것이다.
내단을 집어 든 황보가혜는 못마땅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단이 너무 작았기 때문이겠지. 그래도 땅에 버리거나, 바로 복용하지 않고 주머니에 조심히 집어넣었다.
“황보소저.”
“성 대협. 오셨군요. 조금 흉한 꼴을 보였습니다.”
“흉하기는요. 황보 소저는 한 명의 무인으로서 훌륭했습니다.”
“그런가요.”
황보가혜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녀는 미인이다, 아름답다는 칭찬보다 강하다, 무인답다라는 말을 더 좋아했다.
‘빨통은 맘마통으로 딱이고, 엉덩이는 애 낳기에 최적이다! 라고 칭찬해주고 싶은데…. 그랬다간 날 죽이려 하겠지.’
입이 근질근질하는 걸 참았다.
“황보 소저. 이거 받으십시오.”
“이건…?”
“100년 정도 묵은 산삼입니다.”
“이 귀한 걸 제가 받아도 될까요?”
“오다 주웠습니다. 산삼을 보니 황보 소저가 생각나더군요. 절 민망하게 하지 마시고 호의를 받아주십시오.”
“……고마워요, 대협.”
감동한 표정을 지은 황보가혜가 산삼을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그녀의 허리춤에 매달린 주머니를 본 나는 흡족하게 웃었다.
실제로 오다 주운 물건은 아니고, 보름 전에 천강성 시스템의 출석보상으로 받은 물건이었다.
“황보 소저. 이제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구슬을 모으는 일이에요. 저와 성 대협의 것을 합쳐 총 10개의 구슬을 모은 뒤에 영약을 찾는 일에 집중하죠.”
“이견은 없습니다. 소저의 계획대로 하지요.”
그 후로 우리는 둘이서 섬을 돌아다녔다. 요괴를 죽이고, 마주치는 무인과 싸우고, 절벽 위에 핀 영약을 따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황보가혜를 차근차근 공략하기에 딱 좋은 상황이었다.
그렇게 약 30일을 다른 누군가의 방해도 없이 둘이 함께 보냈다. 지난 몇 년 보다 지금의 한 달이 더 의미 깊은 시간이었다.
비틀.
걸어가던 황보가혜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나는 서둘러 그녀에게 다가가 허리와 어깨를 잡았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의 체향이 확 느껴졌다. 나도 얼마전에 알게 된 사실인데 황보가혜는 다른 사람들보다 체향이 강했다.
이 섬에는 물이 귀해서 잘 씻지 못했다. 바닷물로 씻는다? 오히려 더 불쾌해질 뿐이다.
“괜찮으십니까, 소저?”
“…괜찮아요. 잠깐 어지러워졌을 뿐입니다.”
“17층 시련이 시작되고 제대로 휴식을 취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소저, 오늘 딱 하루만이라도 좋습니다. 오늘은 휴식을 취하죠. 시련은 아직 70일 정도 남았습니다. 체력 관리를 해야 합니다.”
“대협의 말이 맞아요. 여기서 체력 때문에 발목 잡힐 수는 없죠. 휴식을 취하죠.”
“제가 그간의 피로를 풀기 딱 좋은 곳을 알아두었습니다.”
나는 황보가혜를 데리고 천천히 걸어 한 동굴로 걸어갔다. 유황 냄새와 뿌연 수증기가 가득한 곳이었다.
“여긴… 온천이군요.”
“네. 천연 온천입니다. 전 밖에 있을 테니 먼저 온천을 즐기십시오.”
“그건….”
“제 이름을 걸고 절대로 훔쳐보지 않겠습니다. 황보 소저도 아시겠지만, 전 이미 결혼한 몸입니다. 남궁세가의 명성이 제 어깨에 달려 있습니다. 맹세코 남궁세가의 명성이 땅에 떨어질 일은 하지 않겠어요.”
“피로해서 그런지 온천에 들어가고 싶네요. …믿겠습니다, 성 대협.”
거절하지 않을 줄 알았다. 본인 스스로가 자신의 몸에서 냄새가 난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테니까.
“전 동굴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순순히 동굴 밖으로 나갔다. 몰래 엿보거나, 덮칠 생각은 없다. 지금은 그녀의 신뢰를 쌓아야 한다.
‘천안으로 황보가혜의 가슴만 훔쳐볼까? …아니야. 벗겼을 때의 즐거움을 위해 남겨두자.’
동굴 앞 바위에 앉았다. 머릿속으로는 황보가혜의 알몸을 상상한다. 허리나 엉덩이는 쉽게 상상이 가는데 봉인된 그 가슴은 영 상상이 되지 않는다.
‘아, 훔쳐보고 싶다.’
30분이 지났을 때였다.
화산 쪽에서 굉음이 울렸다. 화산재가 아까보다 더 치솟더니, 폭발이 일어났다. 분화구에서 새빨간 용암이 흐른다.
‘왜 지금 폭발이야? 주기가 안 맞잖아. 원래라면 모레 즈음에 폭발해야 정상인데.’
당혹스럽긴 하나 다행히도 여긴 화산과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귀를 기울이면 파도 소리가 들릴 정도니까.
쿵. 쿠웅. 쿵!
화산 쪽에서 무언가가 다가온다.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먼 곳을 내다봤다.
붉은 피부에 10M가 넘은 크기를 가진 거인이었다.
‘화염 거인이잖아.’
화염산 근처에 서식하고 있는 거인. 20일 전쯤에 1대1로 싸웠다. 저 망할 체급이 깡패라는 걸 깨닫자마자 바로 도망쳤다. 지금도 나 혼자서 싸우면 질 확률이 높았다.
나는 동굴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큰 목소리로 외쳤다.
“황보 소저! 화염 거인이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자리를 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지금 빠르게 옷을 입고 있으니까요!”
곧 황보가혜가 나왔다. 촉촉하게 젖은 피부와 젖은 머리카락과 소매가 보였다. 급하게 나오느라 가슴 부분이 느슨했다. 아까 봤을 때보다 가슴이 더 크다.
‘저 정도 크기면 최소 H컵이야. 봉인이 아직 덜 풀린걸 감안하면 진짜 크기는….’
나는 애써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도망쳐야 할 때다.
“소저. 일단?오른쪽 방향으로 도망칩시다. 지금이라면 늦지 않았습니다.”
“…아뇨. 싸우죠.”
황보가혜가 투지를 불태웠다. 평소의 그녀라면 위험함을 무릅쓰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그녀의 눈길을 따라 화염 거인을 바라봤다.
‘…옆구리에 뭐가 있는데? 저건… 태양화?’
화염 거인의 옆구리에서 이글거리는 붉은 꽃. 최상급 영약으로 알려진 태양화가 확실했다. 황보가헤에게 탐욕이 생긴 것이다.
“저와 성 대협 둘이라면… 힘들어도 화염 거인을 쓰러뜨릴 수 있을 거예요.”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저 태양화를 꺾어 황보가혜에게 내주며 고백하기로 했다.
‘황보가혜는 내 마음을 알고 있을 거야. 태양화를 계기로 황보가혜에게 고백하자.’
계획을 세운 나는 화련비도를 뽑아들었다.
“소저. 우리의 힘이라면 화염 거인이라도 쓰러뜨릴 수 있을 겁니다.”
“고마워요, 성 대협.”
우리는 화염 거인에게 달려들었다. 이미 예전에 합을 맞춰봤기에 거침이 없었다. 나는 오른쪽을, 그녀는 왼쪽을 노렸다. 화염 거인이 눈동자를 굴리며 양손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나무가 박살 나고, 주위 땅이 뒤집히듯이 흔들린다. 무시무시한 힘이다.
‘천천히 하면 돼! 천천히!’
그렇게 화염 거인을 상대로 4시간이 지났다. 나는 입에서 단내를 풍기며 쓰러지는 화염 거인의 미간에 화련비도를 꽂아 넣었다.
“이겼다…!”
도중에 그동안의 피로로 컨디션이 좋지 않은 황보가혜가 화염 거인의 일격을 받고 떨어져 나가 거의 혼자 화염 거인을 상대했다.
나는 절벽으로 화염 거인을 유인하면서 싸웠다. 절벽을 때리는 파도가 화염 거인의 움직임에 틈을 만들었다. 여차할 땐 화염 거인을 절벽 밑의 바다로 떨어뜨릴 생각도 했었다.
‘이겼으니 됐어! 놈의 옆구리에 핀 태양화를 채취하자!’
화련비도를 뽑아 들고 이글거리는 태양화로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뒤에서 날아온 검에 배가 뚫렸다.
“억?!”
뒤를 돌아봤다. 약 30M 떨어진 곳에 오지무가 있었다. 썩은 미소를 짓고 있는 놈의 얼굴을 보자 기분이 확 나빠졌다.
황보가혜가 내 옆으로 달려왔다.
“황보 소저…! 오지무 놈이 기습을…?”
황보가혜의 눈이 무척 서늘했다. 그녀는 내 팔을 잡아 반대방향으로 꺾었다. 우드득, 왼팔이 완전 작살났다. 고통은 둘째치고 힘도 들어가지 않는다.
“황보 소저?!”
“성 대협. 지금까지 고마웠습니다. 태양화는 제가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왜, 왜 이러십니까. 태양화 정도는 당연히 황보 소저에게 주려고 했습니다…!”
“그 대가로 제 몸을 요구하려 했겠죠. 성 대협의 속셈은 진즉에 알고 있었습니다.”
“…….”
“다만, 그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성 대협은 입탑자 중에서 너무 강합니다. 다음 층, 혹은 다다음 층에서 적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때가 오면 이길 수 없을 테니… 지금 여기서 성 대협을 없애는 편이 현명한 일입니다.”
“……오지무와 처음부터 손을 잡았나?”
“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와 저에겐 가문이 걸린 일이니까요. 성 대협 이만 죽어주세요. 화련비도라고 했던가요? 그 칼은 보통의 보물이 아닌 것 같으니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덤으로 대협의 공간함도요.”
무표정한 황보가혜가 내 손에서 화련비도를 빼앗아 내 심장을 찌르고,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가져갔다.
“……!!”
내가 아끼는 칼날이 심장을 꿰뚫는다. 섬뜩한 감각이었다.
[죽음 저항이 발동했습니다. 앞으로 15초간 죽지 않습니다.]
나를 죽인 황보가혜는 내 목을 잡아 꺾었다. 우드득. 이건 확인 사살이다. 황보가혜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절벽 밖의 파도 치는 바다로 내 몸을 내던졌다.
‘이 씨발년이! 내가 얼마나 잘 해줬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