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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3 - 993. 광명승천도 (773/2,000)

〈 993화 〉 993. 광명승천도

풍덩.

성유진의 시체가 절벽 아래 바닷속으로 떨어졌다. 본래 시체는 바다 위로 떠오르기 마련이지만, 거대한 파도가 입을 벌린 괴물처럼 성유진의 시체를 잡아먹었다.

황보가혜는 바다에서 시선을 뗐다. 확실히 죽였다. 심장을 꿰뚫고 목까지 부러뜨렸다. 아무리 오기경(五氣境)의 무인이라도 살아남을 일은 없을 것이다. 저 바닷속에는 평범한 물고기만 있는 게 아니니까.

‘여긴 만무탑이야. 남궁세가와 척을 질 필요는 없어.’

오지무를 비롯한 삼절문의 목격자가 있다. 그러나 그들도 한패다. 어디 가서 떠들지는 않을 것이다. 설령 남궁세가가 이 일을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고작 데릴사위를 위해 전쟁을 선포할 리 없다.

‘…근데 왜 이렇게 찝찝하지?’

황보가혜의 얼굴은 딱딱해서 퍼질 줄 몰랐다. 성유진은 다른 남자와 같았다. 대협인 척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미모에 낚인 남자에 불과하다.

“하하. 수고했어, 황보가혜.”

오지무가 웃으며 다가왔다. 약혼자. 가문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진행된 약혼. 황보가혜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성유진과 비교해서 오지무가 나은 점이 하나라도 있는가? 비교한 끝에 나온 대답은 하나도 없다.

무공은 누가 봐도 오지무가 떨어지고, 성유진의 배경은 남궁세가이며, 재력을 봤을 때 오히려 성유진이 더 대단해 보였다. 성유진은 자신에게 아무렇지 않게 영약을 선물하거나, 생전 처음보는 법기를 몇 개나 다뤘다. 거기에 공간함까지 가지고 있다.

‘그에 반해 오지무는…. 하아. 부족한 놈.’

결혼은 오지무가 만무탑을 정복하고 명성을 얻고 난 뒤에 진행된다. 오지무의 삼절문은 여러 가지로 겉모습을 신경 쓰는 자들이었다.

“그 붉은 칼 말이야. 꽤 괜찮은 명도군. 가혜, 내게 줘. 권장각(拳掌脚)을 쓰는 네겐 그 무기는 필요 없잖아?”

오지무의 두 눈에 탐욕과 색욕이 꿈틀거렸다. 오지무를 제어하기 위해 화련비도를 그에게 건넸다.

“네. 제게 필요 없는 물건입니다. 받으세요.”

“고마워, 가혜.”

오지무가 함박 웃음을 지었다. 황보가혜를 보는 그의 두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정작 황보가혜는 징그럽게 느낄 뿐이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지무와 삼절문을 이용할 생각이 그득했다. 당장은 힘들어도 몇십 년 후에 삼절문의 힘과 세력을 황보세가가 흡수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 공로를 가문에서 인정받아 가주가 되겠지.

황보가혜는 들끓는 야망을 느끼며 오지무를 향한 살심을 억눌렀다.

“크으윽?!”

허공에 화련비도를 휘두르던 오지무가 갑자기 신음을 흘리며 땅바닥에 칼을 내던졌다.

“오 소협. 갑자기 왜 그러시죠?”

“내력을 조금 흘려보냈는데, 이 빌어먹을 칼이 반발했어.”

칼 하나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는 건가. 그 한심함에 한숨을 나오려는 걸 꾹 참고 황보가혜가 말했다.

“뛰어난 병기는 주인을 가린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저 칼이 뛰어나다는 것이죠.”

“…가혜의 말이 맞아. 평범한 칼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 더 흥미가 생기네? 이 칼의 이름이 뭐라고 했지?”

“화련비도요.”

“그래, 화련비도. 다음 층으로 가기 전까지 날 인정하게 만들겠어.”

오지무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검을 주었다.

“그런데 가혜. 그 손에 든 검은 게 공간함이라고?”

“이건 제 겁니다. 오 소협에게 줄 수 없어요.”

“뭐, 그놈을 죽인 건, 가혜 너니 인정해줄게. 그리고 어차피 우리가 결혼하면… 흐흐.”

“…….”

오지무가 노골적으로 자신의 얼굴과 몸을 바라본다. 그녀는 무표정을 유지했다. 짜증이 나긴 하지만, 익숙한 일이기도 했다. 일일이 반응해봤자 오지무는 좋아할 뿐이다.

“구슬은 다 모으셨나요?”

“30개 정도 더 필요해. 우리가 인원수가 좀 많잖아. 가혜, 너는?”

“전 구슬을 다 모았어요. 남은 건 영약을 더 모으는 일인데….”

황보가혜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화가 그녀의 손에 들려있었다. 뜨거워 보이는 이 영약은 의외로 따뜻했다. 그리고 태양화는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영약 중에는 채취하고 특수한 처리를 해야 효과가 떨어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중에 하나가 태양화였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황보가혜는 태양화를 다루는 법을 모른다.

“…전 안전한 곳에서 태양화를 복용한 뒤에 다시 영약을 채취할 거예요.”

“아, 태양화의 영기가 점점 사라지고 있군. 안전한 곳은 어디를 말하는 거지?”

“여기까지 오면서 몇 군데 봐둔 곳이 있습니다. 그리고 결계용의 법기도 있고요.”

결계용의 법기는 다른 무인을 죽이고 빼앗은 거였다. 이게있으면 만일의 사태도 대비할 수 있을 것이다.

“네 뜻을 존중하지. 근데 널 혼자두려니 약혼자로서 마음이 편치 않군. 연주, 조궁. 너희가 가혜의 수발을 들어라. 그리고 만일의 사태가 발생하면… 그 목숨으로 가혜를 지켜라.”

“예, 소문주.”

“존명.”

부하 두 명이 황보가혜의 곁으로 다가갔다. 황보가혜는 마음속으로 혀를 찼다. 호위가 아니라 감시를 위해 사람을 붙인 거겠지.

황보가혜와 오지무는 빠르게 헤어졌다. 오지무는 구슬을 찾기 위해 움직였고, 황보가혜는 어느 지하 공간에 들어가 결계를 쳤다. 오지무의 부하인 연수와 조궁은 입구에서 모습을 감추고 경계를 섰다.

황보가혜는 주머니에서 성유진에게 빼앗은 공간함을 꺼냈다.

네모난 사각형의 딱딱한 물건. 표면은 매끄럽고 무게는 무척 가벼웠다. 그녀는 최상급 법기인 공간함을 몇 번 본적있다. 8할 이상이 작은 상자 형태고, 나머지 2할은 주머니 형태였다.

‘상자 형태는 상자를 열고 물건을 꺼내면 됐는데… 이건 어떻게 사용하는 거지?’

어느 버튼 같은 걸 누르자 표면에 빛이 나왔다. 황보가혜는 당황하지 않았다. 성유진이 스마트폰을 조작하는 걸 몰래 몇 번 본 적 있었다. 화면에는 9개의 점. 패턴 잠금 화면이 떠올랐다.

‘이렇게 손가락을 획획 움직이던데….’

빛나는 화면에 줄이 쫙쫙 그어지니 신기했다. 패턴은 성유진이 하는 걸 떠올리며 어떻게든 풀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전혀 생소한 문자와 그림들이 가득했다. 손가락으로 이것저것 만져보자, 화면이 반응하긴 했으나 어떻게 해야 물건을 꺼낼 수 있는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1시간 넘게 스마트폰을 만지던 황보가혜는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스마트폰을 바닥에 내려두었다.

‘이건 여기서 못하겠네. 나중에 법기 전문가에게 맡기는 수밖에….’

황보가혜는 지하 공간 중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태양화를 꺼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화는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현재 황보가혜의 경지는 출지(出志) 10단. 오기의 경지가 코앞이었다. 이 태양화의 효과를 잘 갈무리한다면 오기의 경지에 오르고도 남을 것이다.

“후우우….”

긴장감을 털어내듯 한숨을 내쉰 그녀는 입안에 태양화를 욱여넣었다. 입안이 뜨겁다. 열기가 몸의 중심으로 빠르게 퍼져나간다. 황보가혜는 운기행공에 집중했다. 그녀의 몸 주위로 뜨거운 바람이 계속해서 불었고, 그녀의 옷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갔다.

그녀는 내단을 형성하기 위해 집중하고 또 집중했다.

???

풍덩!

바다에 빠졌다. 죽긴 했으나 감각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몸 안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바닷물과 내 몸을 잡고 이리저리 흔드는 것 같은 파도에 기분이 더러워진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 내 기분을 나락으로 처박은 건 황보가혜의 통수다.

‘시발년! 지난 몇 년 동안 호의적으로 대우해줬는데!’

자동 진행을 사용해서 실제로는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황보가혜의 입장에선 나와 알고 지낸 지 몇 년이나 됐다. 남녀가 그 정도를 함께 지냈다면 이미 떡을 치고도 남을 정을 쌓았을 시간이다.

‘만무탑에서 몇 번이나 날 이용했으면서… 아직도 비싸게 굴기는…. 뭐, 비싸게 굴만큼 예쁜 미모이긴 해.’

인정할 건 인정한다.

그러나 기분은 영 나아지지 않는다. 날 사랑한다고 매달리는 황보가혜의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물 건너갔다.

‘시발년…. 네가 죽인 건 대협 성유진이야. 이제부터 나는….’

[죽음 저항의 남은 시간: 3초]

완전 회복을 사용했다. 꺾인 팔이 원래대로 돌아오고, 부서진 목뼈가 회복하며, 꿰뚫린 심장이 펄떡 뛰기 시작했다.

‘마두 성유진이다!’

나는 바닷속에서 균형을 잡았다. 당장 뛰쳐나가려고 했으나, 바다에서 살아가는 요괴들이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흉악한 생김새를 자랑하는 물고기 요괴들이다. 붉은 눈에 날카로운 이빨이 번뜩이는 물고기 요괴들은 내 주위를 빙긍빙글 돌았다.

놈들은 영악했다. 인간은 물속에서 오래 있지 못한다는 걸 알고 내가 지치는 걸 기다리고 있다. 기다리면 먹이가 생긴다.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허나 물고기 놈들이 모르는 게 있다. 내게는 [물의 축복]이 있다. 바닷속에서 숨을 쉴 수 있게 해주고, 물이라는 제약에서 조금 더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능력이다.

‘일단… 너희부터 죽인다.’

내가 먼저 움직였다. 물고기 요괴들이 깜짝 놀라더니 입을 한껏 벌리고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파지지지지직!

내 몸에서 발생한 전류가 물고기요괴들을 감전시켰다. 그걸로 끝이었다. 물고기요괴는 생김새도 물고기에 별반 다르지 않다. 바다라는 환경만 제외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다.

‘시시하군. 지금 당장 올라가서 오지무 새끼를 쳐죽이고 황보가혜를 범하겠… 음?!’

아래에서 무언가가 나를 향해 쇄도한다. 나는 깜짝 놀라 옆으로 이동했다. 문어 촉수 하나가 내가 있던 장소를 꿰뚫었다.

시선을 내렸다. 바다 아래, 거대 문어 한 마리가 붉은 눈을 번뜩이며 날 노려보고 있다. 그 크기만 해도 무려 30M가 넘는다.

‘시발, 파도에 밀려왔더니… 위험한 놈이 있는 곳으로 와버렸잖아.’

놈의 30개가 넘는 촉수가 일제히 꾸물거리는 꼴을 보아하니 날 놓아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죽이고 내단이나 가져가야겠군.’

맨손으로 처리하기엔 힘든 놈이다. 스톰브레이커를 인벤토리에서 소환했다. 스마트폰을 빼앗기긴 했으나, 물건 소환 효과 덕분에 인벤토리에서 아이템을 소환하는 건 문제 없었다.

‘화련비도랑 스마트폰은 천천히 찾으면 돼.’

이 세계의 문명 수준은 낮다. 스마트폰을 가져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전혀 모를 것이다. 우연히 어떻게 하더라도 [유희 생활 어플]은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조작되지도 않는다.

[유희 생활 어플]은 스마트폰이 아니라, 내 능력이다. 스마트폰은 단순히 편리한 조작기일 뿐이다. 지금 상태에서 유희를 종료하고 현실로 나가는 것도 가능하다.

‘찰나.’

전방위로 덮쳐오는 30개의 촉수를 찰나로 피하고 문어 대가리를 향해 헤엄쳤다.

스톰브레이커를 길쭉한 작살의 형태로 바꿨다. 파지직, 파지지직! 작살의 끝에서 번갯불이 계속해서 튀었다.

‘죽어라.’

전력을 다해 작살을 던졌다. 작살은 놈의 머리에 정확히 꽂혔다. 허나 문어는 죽지 않았다. 내 쪽으로 수백 개의 이빨이 돋아난 주둥이를 돌리더니 먹물을 뿜어냈다.

주위가 순식간에 어두워진다. 천안(天眼)을 발동하여 놈을 주시했다. 놈은 어둠 속에서 촉수를 휘두른다. 나는 일단 촉수를 피하는 데 집중했다.

‘이 먹물도… 평범한 게 아니잖아? 몸이 따끔따끔하군. 점점 힘도 빠지고 있고…. 힘을 아낄 때가 아니야. 더 위험해지기 전에 끝내자.’

천마신공을 운용한다. 내 몸의 주위로 시커먼 기운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운을 끌어올리는 그 잠깐의 틈을 놈은 놓치지 않았다. 10개가 넘는 촉수가 내 몸을 빈틈없이 휘감았다. 놈의 촉수는 사포처럼 무척 거칠었다. 촉수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며 피부 가죽이 갈려 나가고 붉은 피가 바닷물에 섞인다.

천마신공(天魔神功) 회천마룡(回天魔龍).

천 마기가 내 몸을 중심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놈의 촉수가 역으로 갈려 나갔다.

나를 중심으로 해류가 회전하며 소용돌이가 되었다. 내가 곧 소용돌이였다. 나는 문어를 향해 돌격했다.

문어는 믹서기에 갈려 나갔다. 놈의 몸 깊숙한 곳에 있던 내단은 어떻게든 손에 넣었다. 내 주위는 먹물, 놈의 살점이 뒤섞여 빙긍빙글 돌았다.

나는 회전을 더 가속시켜 위로 솟구쳤다. 소용돌이가 토네이도가 될 때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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