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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4 - 994. 광명승천도 (774/2,000)

〈 994화 〉 994. 광명승천도

“…….”

두둥실.

바다 위에 힘없이 부유하고 있던 나는 손을 들어 뜨거운 태양빛을 가렸다. 파도가 더럽게 강해서 휴식을 취하기도 영 힘들었다. 물의 축복 스킬이 아니었다면 바다에서 휴식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천마신공의 마룡 시리즈는 강력하긴 한데, 체력과 내력 소모가 극심하다는 게 단점이다. 제대로 펼치면 한동안 움직이고 싶지 않을 정도다.

‘신의 아틀란티스 세계에선 이 정도가 아니었는데.’

[신의 아틀란티스] 세계의 나와 [광명승천도] 세계의 나. 누가 더 강한가. [광명승천도]의 내가 더 강하다. 천강성 시스템의 도움도 있지만, 오기의 경지가 결정적이다.

그러나 강함을 둘째치고 천마신공의 효율만 따지면 [신의 아틀란티스] 세계의 내가 더 낫다. [신의 아틀란티스] 세계에선 특성과 스킬로서 천마신공에 보정을 받기 때문이다.

한참 동안 쉬던 나는 몸을 일으켰다. 높이 치솟는 파도 위를 걸으며 해변 쪽으로 향했다.

‘황보가혜랑 오지무는 17층 시련을 통과하지 않았을 거야. 이 섬에서 최대한 머물며 영약을 채취하다가 아슬아슬한 시점에 통과하겠지.’

그게 최대한의 이득을 보는 방법이다. 특히 황보가혜는 영약에 혈안이 된 상태다.

높은 파도를 뒤로하고 해변가로 걸어온 나는 무작정 섬안으로 걸었다. 드론을 사용하지 않을 거다. 황보가혜에게 내가 살아 있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았다.

‘드론을 보고 다음 층으로 도망갈 수도 있어. 그건 절대 안 되지. 여기서 끝장을 봐야 해.’

섬을 돌아다니다 보면 황보가혜와 오지무 놈들과 결국은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근데 황보가혜는 언제부터 오지무와 손을 잡은 거지? 층으로 올라가기 전인가? 오지무가 그 타이밍에 찾아와서 검을 던졌다는 건 이 섬에서도 한 번 만났다는 건데….’

틈은 있었다.

황보가혜가 불침번을 설 때, 그리고 황보가혜가 대소변을 해결하러 잠시 떨어졌을 때. 그 틈을 이용해 오지무를 만난 것이리라.

“크르르르르….”

숲 안으로 들어가자 맹수 한 마리가 나를 보며 으르렁거렸다.

‘아까 문어도 그렇고 날 방해하는 것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군.’

???

쏴아아아아아!

폭포가 시원하게 떨어졌다. 나는 흐르는 계곡물 위를 걸으며 폭포 쪽으로 걸어갔다. 폭포를 맞으며 명상에 잠겨 있던 정빈이 두 눈을 번쩍 떴다.

“아미타불! 성유진 소협! 여기서 만나는구려! 목적했던 일은 잘 이루었소?!”

“아니, 통수를 맞았어.”

“통수?”

나는 이틀 전에 있었던 일을 정빈에게 말했다. 내가 죽을 뻔했다는 말을 들은 정빈이 두 눈을 부릅떴다.

“이, 이럴 수가! 그게 정말 사실이라면… 황보 소저… 아니, 황보가혜는 정말이지 사악한 년이로구려! 이 세상의 보물을 없애려 했다니…!”

“…이 세상의 보물?”

“성 소협이 죽으면 온갖 새로운 음식들이 그대로 사라지지 않소! 게다가 콜라나 사이다도 못 마시고…! 아미타불!”

“아, 뭐, 그럴 거라 생각했어.”

“부처께서 성 소협을 지켜주신 듯하여 다행이오. 황보가혜와 오지무…. 그 간악한 연놈들은 소승이 징벌하겠소.”

“헛소리 하지 마. 내 복수는 내가 해.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데… 황보가혜를 손끝 하나라도 건드리는 순간… 너한테 줄 음식은 이제 없다.”

“헉!”

경악한 정빈이 숨을 들이켜더니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아, 안 건드리겠소! 절대 안 건드리겠소!”

성지곤 만큼이나 다루기 쉬운 놈이다.

“성지곤은? 너랑 같이 행동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

“아미타불. 성지곤 소협은 소승의 뒤에 있소. 소승은 성지곤 소협을 지킬 겸, 폭포를 맞으며 좌선 중이었소.”

정빈이 가리키는 곳을 들여다봤다. 폭포 뒤쪽에 작은 공간이 있었다. 성지곤은 가부좌를 튼 채로 두 눈을 감고 운기 중이다. 성지곤의 주위로 기운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고 있다.

“언제부터 이랬어?”

“3일 전에 영약과 내단을 잔뜩 먹고 운기에 들어갔소. 기운을 갈무리 중이오. 이번에 성공하여 내단을 형성한다면…. 성지곤 소협도 오기경(五氣境)에 이를 것이오.”

“성공할 것 같아?”

“성지곤 소협의 영성은 무척 뛰어나오. 그간 성지곤 소협이 해온 노력이 있고, 성지곤 소협은 16층 보상으로 오인단(五引丹)을 선택했소. 성공할 것이오.”

오인단은 오기의 경지로 넘어갈 때 도움을 주는 영단이었다. 성지곤은 특별한 일이 없다면 오기경에 이를 것이다.

“근데 왜 여기에 자리 잡은 거야? 이 섬에 먹을 수 있는 물이 귀한거 알잖아. 무인놈들이 찾아와서 방해할걸?”

“어쩔 수 없었소. 성지곤 소협이 가진 영약과 내단 대부분이 화기(火氣)의 성질이었소. 좀 더 쉽게 화기를 다스르기 위해 이곳을 선택했소. 정순한 영약이라면 그럴 필요가 없었겠으나… 성지곤 소협이 먹은 것들은 조금 잡스러운 것들이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수련에 들어갔으니 내가 뭐라해도 늦었다. 그리고 정빈이 직접 호법을 서니 어지간해선 아무 일도 없을 거다.

“성 소협. 바로 떠날 것이오?”

“부지런히 움직여야 복수하지.”

“…성 소협. 소승은 지난 사흘 동안 물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먹지 못했소….”

“물고기라도 잡아먹지 그랬냐? 근처에 나물 같은 것도 있잖아.”

“소승은 맛이 없는 걸 못 먹는다는 걸 알지 않소.”

정빈의 몸은 비쩍 말랐다. 미식승이란 별호가 붙을 정도로 음식을 좋아하는 주제에 몸이 말랐다. 그건 정빈이 맛없는 걸 입에도 못 대기 때문이다. 정빈은 필요한 일이 아니면 맛없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먹을 걸 달라는 말이군. 뭘 먹고 싶은데?”

정빈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소승은 오늘 짜장라면 요리사가 되고 싶소.”

“그래. 한 번 기가 막히게 끓여 봐.”

???

콰왕! 콰콰콰쾅!

화산이 폭발했다. 화산재가 하늘을 가득 채우고, 뜨거운 용암이 사방팔방으로 떨어졌다. 나는 혀를 차며 주위를 둘러봤다.

오늘은 내가 뒤통수를 맞은 지 5일째 되는 날이다. 황보가혜와 오지무의 흔적은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화련비도는… 오지무가 가지고 있겠지? 황보가혜는 주먹으로 싸우니까. 씨발, 그 새끼가 내 화련비도를 쥐고 휘두른다고 생각하니 열불이 나네.’

나는 인벤토리 내의 물건을 소환하고 역소환할 수 있다. 허나 지금 화련비도는 예외다. 화련비도는 소환하지 않고, 인벤토리에서 꺼낸 물건이기 때문이다. 소환할 때 소모되는 마나와 활력을 아끼려다가 화련비도를 잃게 생겼다.

‘무기는 스톰브레이커도 있긴 한데… 화련비도 만큼의 손맛이 없단 말이지.’

천안(天眼)을 발동하고 주위를 천천히 둘러봤다. 오지무와 황보가혜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나를 향해 다가오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추레한 옷차림에 피부에는 떼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거지다.

‘정확히 내가 있는 쪽으로 오고 있다. 기세를 숨기지도 않는군.’

곧 거지를 만날 수 있었다. 거지는 나를 보며 씩 웃는다.

“안녕하신가, 성유진 대협. 우리 두 번째지?”

놈이 내게 인사를 했다. 그의 손은 청죽봉(靑竹棒)을 쥐고 있다.

나는 머리를 굴렀다. 어디서 봤더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 안 나? 5층에서 시선 교환했잖아.”

“5층? 그때면 몇 년 전의 일이다. 그걸 기억하는 게 이상하지. 그리고 보는 건 두 번째라도 이야기를 나누는 건 이번이 처음일 텐데.”

“이거 참. 난 댁이 워낙 대단해서 기억에도 잊혀지지 않아 고생했는데…. 짝사랑이었구만.”

“남색가냐?”

“농담 좀 한 거 가지고 뭘 그리 정색하시나.”

“내가 싫어하는 것 3개가 있다. 남색가, 거지, 나보다 약한 주제에 건방 떠는 놈.”

“에헤이. 그만, 그만 난 댁과 싸우러 온 게 아니야. 거지는 맞지만 남색가도 아니고, 건방 떨려는 생각도 없어.”

거지가 손을 흔들며 싸울 의사가 없다는 걸 알렸다. 거짓말은 아니다. 그에게서 투지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 목적이 뭐지? 미리 말해두는데, 난 지금 기분이 무척 안 좋다.”

“본론은 댁과 거래를 하고 싶어서 댁을 찾아왔어.”

나는 검을 들었다. 이 거지와 거래를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다짜고짜 검을 들자 거지의 얼굴에 다급함이 서렸다.

“어허! 검 내려! 난 개방의 장춘몽, 다른 사람들을 모두 날 방랑걸이라고 부르지. 소속은 당연히 개방이고. 방랑걸(放浪乞).”

깜짝 놀랐다.

“개방의 방랑걸이라고?”

“맞아. 혹시 내 이름을 들어보셨나?”

“아니. 처음 듣는다.”

“…그럼 왜 놀라셨지?”

“방랑걸이라하면 왠지 여자 같잖아. 방랑하는 걸(girl).”

“뭐?”

장춘몽은 뭔 개소리를 지껄이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뭐라 할 말은 없다. 그에게는 개소리가 맞으니까.

어쨌든 검을 내렸다. 그와 거래를 할 마음이 생겼다.

“개방의 거지가 거래할만한 건 정보밖에 없지. 내가 원하는 정보가 뭔지 알고 있나 보군.”

“그것도 모르면 찾아오지도 않았어. 원하는 정보는 황보가혜와 오지무의 위치… 맞지?”

“…너 혹시 그날 있었던 일을 알고 있는 거냐?”

“댁이 황보가혜에게 통수 맞아 심장이 뚫리고 바다에 버려진 일 말이야? 그때는 깜짝 놀랐다고. 설마 댁이 그렇게 당할 줄은 몰랐거든. 뭐, 며칠 뒤에 멀쩡하게 살아 있는 댁을 보고 더 놀랐지만. 어떻게 지금 멀쩡히 살아 있는지 물어봐도 되려나?”

“말해줄 생각 없다.”

“그렇겠지. 비장의 한 수일 테니.”

나는 의아함이 들었다. 이 섬에 오고 나서 천안을 자주 사용했다. 허나 그가 내 뒤를 쫓고 있다는 걸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특수한 법기라도 사용했나?’

호기심이 들었으나 묻어뒀다. 지금 급한 건 그게 아니다.

“확실한 정보냐?”

“확실해. 이 정보를 얻는다고 고생 좀 했거든. 참고로 오지무 일행은 지금도 움직이고 있어.”

“대가는 뭐지? 보아하니 돈이나 영약을 원하는 건 아닌 모양이고….”

“이번에 살아 돌아온 댁을 보며 확실히 판단을 내렸지. 만무탑을 정복하려면 댁의 적이 되어선 안 된다고. 만무탑을 정복할 때까지 댁과 협력하고 싶어.”

“다음 층의 시련이 너와 내가 싸워야 할 수도 있다.”

“그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게 아닐 가능성도 있지. 나랑 손을 잡자고. 댁에게도 손해가 아니라는 걸 약속하지.”

“좋다. 거래를 받아들이지.”

내겐 손해는 아니었다. 영 마음에 안 들면 거래고 나발이고 죽여버리면 된다.

“시원하시구만.”

“정보는?”

“오지무는 여기서 동쪽으로 3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어.”

“제법 많이 떨어진 곳에 있군.”

“아, 그놈, 댁이 사용하던 빨간 칼을 차고 있던데.”

얼굴이 구겨졌다. 화련비도. 역시 오지무가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인상 쓰지 마. 그놈은 그 칼을 잘 쓰지도 못하더구만.”

“칼을 쓰지 못해? 왜?”

“그거야 나도 모르지. 그 칼에 대해선 댁이 나보다 더 잘 알지 않아?”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그냥 안 쓰는 건가?

어쨌든 오지무가 화련비도를 잘 못 쓰고 있다는 건 좋은 소식이다.

“황보가혜는?”

“그 여자는 여기서 55리 정도 떨어진 곳에 틀어박혔어. 입구는 결계로 막혀 있고, 오지무의 부하 2놈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어. 그 위치를 찾는데 3일 넘게 걸렸다니까.”

“틀어박혔다고? 왜?”

“왜긴. 댁의 친구랑 같은 목적이지.”

친구. 여기서 친구라 불릴만한 존재는 성지곤과 정빈뿐이다.

“황보가혜는 오기경을 넘보고 있는 건가. 의외군. 황보가혜라면 영약을 얻는 일에 집중하리라 생각했는데.”

“그 여자가 얻은 영약이 태양화잖아. 특수한 처리를 안 하면 점점 영기가 약해지는 태양화. 태양화의 영기를 완벽히 흡수하려면 급하게 복용할 필요가 있지.”

그랬나? 몰랐다.

‘어쨌든 황보가혜와 오지무가 떨어져 있다는 거군.’

내겐 좋은 소식이었다.

“황보가혜는 어디에 있지? 정확한 위치를 말해라.”

“따라오셔. 특별히 근처까지 안내해주지.”

나는 장춘몽의 뒤를 따라 걸었다.

‘황보가혜, 씨발년! 반드시 내 전용 육변기로 만들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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