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5화 〉 995. 광명승천도
“저기다.”
장춘몽이 손끝으로 정면을 가리켰다.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장춘몽이 날 이끈 곳은 통수를 맞은 절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 딱 그 꼴이군.’
정면을 바라본다. 조금 더 집중해서 바라보자 흐릿한 2개의 인영이 점점 선명해진다. 검을 손에 쥔 남자 둘. 이쪽을 긴장한 상태로 지켜보고 있다.
“오지무의 부하지. 혹시 내 도움 필요하신가?”
“네 일은 여기서 끝이다. 나서지 마라.”
“지켜보는 건 상관없지?”
“방해하지 마라.”
장춘몽에게 경고했다. 장춘몽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뒤로 물러났다. 기척이 희미해진다. 은신술 하나는 엄청난 놈이다.
놈들에게 다가간다. 놈들이 당황한 목소리로 인상을 구겼다.
“잘못 본 게 아니군…. 왜 네놈이 살아 있는 거지?”
“심장에 칼이 박히고 목이 부러지지 않았나? 인간이 아니라 요괴였나?”
그들은 나의 생환에 당혹스러워하면서도 물러서지 않고 검을 뽑았다. 그들의 살의가 휘몰아치며 내 몸에 달라붙는다.
저들은 알고 있다. 불리한 건 내가 아니라 자기들임을. 그런데도 도망칠 생각이 전혀 없다.
‘충성심인가? 대단하군.’
감탄을 느꼈다. 이 세상에서 저런 놈들은 흔하지 않으니까. 허나 그렇다고 해서 놈들을 살려둘 생각은 전혀 없다.
“오지무의 부하들. 너희가 죽는 건 순전히 오지무 때문이다. 오지무를 원망하며 죽어라.”
“우리는 소문주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리고 죽는 건 너다.”
놈들이 동시에 오른쪽과 왼쪽으로 움직였다. 자연스레 시선이 분산될 수밖에 없다. 그들이 동시에 검을 휘두른다. 목과 가슴. 일말의 주저도 없이 급소를 노린다. 수많은 훈련과 실전을 통해 갈고 닦아진 협력이다.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단지 그것만으로 그들의 검이 기세를 잃었다. 오른쪽 검은 스톰브레이커로 쳐내고, 왼쪽으로 오는 검은 피하며 발차기를 날렸다. 걷어차인 놈이 저 멀리 날아간다.
나는 오른쪽에 있는 놈부터 몰아쳤다. 놈이 이를 악물고 검을 부딪쳐온다.
‘1대1로 싸우면 별거 아니군.’
그래도 잘 싸운다. 기본기가 잘 잡혀 있었다. 좀 더 빠르게 놈을 죽이기 위해 찰나를 사용했다.
영천류(影天流) 뇌광(雷光).
푸른 빛이 번뜩이며 놈의 머리통을 베어냈다. 가만히 놈의 죽음을 보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걷어찼던 놈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죽어라!!”
동료의 죽음으로 적이 지나칠 정도로 흥분했다. 그리고 흥분하면 시야가 좁아지기 마련이다.
영천류(影天流) 벽계(碧溪).
놈의 검을 종이 한 끗 차이로 피한 뒤에, 옆을 스쳐 가며 몸통을 베어냈다. 동강 난 시체가 피와 함께 바닥에 흐른다.
나는 시체를 무시하고 앞으로 계속 전진했다.
앞에 지하 공간 같은 곳이 있다. 저 안에 황보가혜가 있을 것이다.
‘이 시발년! 내가 왔다!’
발걸음을 앞으로 내디딘다.
키이잉.
반투명한 벽이 내 발을 막아섰다. 나는 대번에 인상을 구겼다.
‘결계까지 설치해놨군.’
검을 손에 들었다. 푸른 검기가 압축하여 검강으로 변한다. 나는 결계를 향해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렀다.
‘결계는 무적이 아니야. 때리다 보면 결국 부서진다. 뭐, 나보다 출력이 더 강한 결계라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지만….’
그런 결계를 황보가혜가 가지고 있을 리 없다.
콰앙! 쾅! 콰콰쾅!
10분이 넘도록 결계를 향해 검을 내리친 끝에 결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쩌적. 듣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소리다.
‘금 간 순간부터 게임 끝이지.’
전력을 다해 검을 내리찍었다. 결계가 부서진다. 바닥에 떨어진 거울처럼 산산조각이 난다. 나는 부서지 결계를 밟으며 당당하게 지하 공간에 들어섰다.
지하 공간의 중심에 황보가혜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주위로 뜨거운 기운이 천천히 회전하고 있다. 옷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으나, 냄새는 나지 않았다.
‘운기행공…. 오기의 경지를 넘보고 있는 건가. 무방비하군.’
아니, 무방비한게 아니다. 황보가혜가 준비해둔 방비를 내가 뚫은 것이다.
지금 황보가혜는 어린아이도 죽일 수 있다. 어린아이의 주먹질이 그녀의 집중력을 깨트리고, 역류하는 내력이 그녀의 몸을 알아서 망가뜨릴 것이다.
뚜벅뚜벅.
그녀에게 다가가던 나는 뜨거운 공기를 느꼈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공기다. 이 공간 자체가 무척 더웠다.
‘황보가혜…. 온몸이 흠뻑 젖어 있군. 이야. 꼴리는 데.’
황보가혜를 건들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잘못 건들면 황보가혜가 죽어버린다. 내 목적은 황보가혜를 죽이는 게 아니다.
‘스마트폰이 여기에 있군.’
스마트폰을 들어 확인했다. 부서지거나 망가진 곳은 없었다. 소프트웨어도 마찬가지다.
‘유희 생활 어플도 역시 멀쩡하고.’
스마트폰을 대충 주머니에 찔러 넣고 황보가혜의 앞에 앉았다. 황보가혜의 상태를 대충이나마 파악했다.
‘앞으로 이틀이면 일어나겠군.’
그녀의 기운은 안정되어 있었다. 오기의 경지에 이를 것이다.
???
이틀이 지났다.
내 예상대로 황보가혜는 몸에 내단을 형성하고 오기경에 올랐다. 황보가혜는 차분하게 호흡하며 기운을 갈무리했다.
‘오기 1단이라 하기엔 기를 다루는 게 너무 자연스러운데. …1단을 건너뛰고 2단에 올랐나?’
그녀가 복용한 태양화가 그만큼 대단한 영약이라는 뜻이다. 또한, 그녀가 가진 천부적인 재능도 빛을 발했을 것이다.
“후우우.”
뜨거운 호흡을 내뱉은 그녀가 드디어 감았던 두 눈을 떴다. 그리고 정면에 있는 나를 보고 두 눈이 미친 듯이 커진다. 나는 씨익 웃었다.
“서, 성유진?!”
“황보가혜, 보고 싶었다! 이 씨발년아!”
“어,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넌 분명 내가 죽였다! 심장을 찌르고 목을 부순 감각이 아직도 생생한데… 어떻게!”
“네년을 따먹지도 못하고 죽을 수는 없지.”
황보가혜는 당황한 정신을 빠르게 수습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세를 잡는다. 뜨겁게 달아오른 몸과 달리 그녀의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나는 그녀를 따라 설렁설렁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이제 오기경이야. 당신한테 꿇리지 않아.”
“방금 막 오기의 경지를 뚫은 주제에 건방진데? 같은 경지라도 수준 차이가 있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잖아.”
“큭….”
기습적으로 황보가혜가 주먹을 휘두른다. 나는 고개를 까딱이며 그녀의 주먹을 피했다.
“이야. 저번에 비무했을 때보다 속도가 더 빨라졌네?”
“…….”
이번엔 황보가혜의 발이 내 머리를 노렸다. 나는 팔을 들어 올려 그녀의 발차기를 막았다.
“위력도 강해졌어. 근데 날카롭지가 않아. 몸이 무겁지? 다리와 팔이 천근만근이고, 당장 시원하게 목욕 한 번 하고 침대에 엎어져서 자고 싶지?”
황보가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내 말에 반박하지 못한다. 오기경에 방금 막 오른 그녀는 정신적으로 굉장히 피로한 상태다. 대충 일주일 정도 운기행공에 집중했을 테니 당연했다. 거기에 아직 강해진 신체에 적응도 못 했다. 내단을 쌓기 위해 기를 받아들이고, 운기를 한 육체에도 피로가 쌓이는 건 당연한 일이다.
“황보가혜. 지금의 네 상태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날 이기지 못해.”
“나한테 한 번 죽을 뻔 한 주제에 잘난 척은….”
“그때는 내가 화염 거인이랑 싸우다가 지친 상태였고. 또 네가 내 통수를 때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거든.”
“난 그때보다 더 강해졌어.”
황보가혜가 봉황신공(鳳凰神功)을 사용한다. 그녀의 몸 주위로 황금색 기운이 날개옷처럼 하늘거렸다. 그리고 그녀가 주먹과 발을 섞어 나를 공격했다. 그녀의 공격은 내가 피하고 막아내도 멈추지 않았다.
공격이 이어질수록 그녀의 주먹과 발에 붉은 기운이 불꽃처럼 일렁였다. 황보가혜의 봉황선수권(鳳凰仙手拳)이다. 연격이 이어질수록 위력이 강해지고 있다.
‘벌써 10연격을 넘겼군. 이거 이대로면 나도 위험해지겠는데?’
흐름을 끊어야 한다.
쿵!
천마신공(天魔神功)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
황보가혜의 몸이 움찔거렸다. 연격의 흐름을 끊기에는 부족했다.
천마신공(天魔神功) 용권(竜拳).
황보가혜의 붉은 주먹과 나의 검은 주먹이 부딪혔다. 충격파가 발생하고 지하 공간이 흔들렸다.
“아악!”
황보가혜는 충격파를 버티지 못하고 뒤로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나는 황보가혜의 앞으로 다가갔다.
“황보가혜. 넌 날 못 이겨.”
“크읏….”
황보가혜가 다시 자세를 잡으려고 했다.
“차라리 목숨 구걸을 해. 태양화를 먹고 오기경에 도달하고, 만무탑 정복도 코 앞인데 여기서 죽으면 아깝지 않나?”
황보가혜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이내 그녀는 땅바닥에 무릎 꿇었다.
“성 대협! 제가 잘못했습니다! 부디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크크. 진짜 목숨 구걸을 할 줄이야. 뭐, 이해는 가. 방금 오기경에 올랐는데 어처구니없게 죽고 싶지는 않겠지. 힘을 얻었으면 누려보고 싶다. 그게 사람 심리니까.”
그녀의 목에 손을 뻗었다. 깜짝 놀란 그녀의 몸이 펄떡 뛰었으나, 내 손을 피하지 못했다. 자신의 목숨이 이미 내 손아귀에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황보가혜의 목은 따뜻했고, 땀으로 축축했으며, 생생하게 박동하는 맥박이 느껴졌다.
“…대협…. 저를 죽이실 겁니까?”
“오기의 경지에 이르면 수명이 총 250년으로 늘어나지. 오기부터가 경지를 올리는 게 진짜 힘들어진다고 하는데… 넌 이제 겨우 서른 근처잖아. 200년이 넘는 시간이 남았지. 그리고 그 많은 시간이면 다음 경지인 삼정에 이르는 것도 불가능한 게 아니야. 기울어진 황보세가도 네가 충분히 일으켜 세울 수 있지.”
“……하고 싶은 말이 뭐죠?”
“네가 삶의 미련에 가지게 대충 지껄인 것뿐이야.”
“…….”
“근데 너무한 거 아니냐? 넌 내 목을 부수고 심장도 찔렀잖아. 날 배신했어. 그런데 고작 말만으로 살려달라고 구걸한다고? 네 양심은 기대도 안 하는 데 이건 너무 심하잖아.”
“제게… 무엇을 원하시죠?”
“일단 벗어. 그 몸뚱이를 내게 바쳐. 그게 싫으면 자살하든가.”
나는 그녀의 목에서 손을 뗐다. 황보가혜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흐느적거리듯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단단히 고정한 허리띠를 풀기 시작했다.
“성 대협. 제 몸을 바친다면 정말로 살려주시는 거죠?”
“네가 헛짓거리를 하지 않는다면 자비를 베풀어주지.”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제 목숨만큼은 살려주세요.”
황보가혜는 옷을 한 꺼풀씩 벗으며 목숨을 구걸했다. 비참하지 태도와 모양새는 아니었다.
이 세상은 나름 처녀성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황보가혜는 평범한 여자가 아닌 무인이었다. 넘치는 재능과 나름의 행운을 받아 서른 근처의 나이에 오기경에 이른 무인. 고작 처녀를 지키겠다고 목숨을 버리기에는 그녀의 가치가 너무 높았다.
내 시선은 그녀의 가슴으로 향했다. 그녀의 가슴을 봉인했던 붕대가 풀리고 아래로 떨어졌다. 나는 멍청하게 입을 벌리며 그녀의 가슴을 바라봤다. 상상 이상이상이었다.
‘J컵…? 아니, K컵이다!’
미친 가슴이었다. 가슴 한쪽이 내 머리통보다 더 크다. 농구공 두 개를 달아놓은 것 같다.
‘…붕대로 강력히 압박한 이유가 있었군. 저 가슴이면 주먹을 휘두르기도 힘들 테니까.’
어찌나 압박을 한 건지 하얀 가슴에는 붕대 자국이 빨갛게 남아 있었다.
유두와 유륜은 선홍색이다. 유방이 큰 만큼 유두와 유륜도 컸다. 특히 유두는 내 엄지손가락과 비슷한 수준의 크기다.
‘엄청난 K- 가슴이다.’
내가 멍하니 가슴만 바라보고 있자 황보가혜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가슴에 콤플렉스라도 있는 듯한 반응이다.
이해는 간다. 저 정도 크기면 자랑스러워 할 크기를 넘어섰으니까.
나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녀는 가장 마지막으로 가슴을 공개했다. 보지를 가리던 천 쪼가리는 이미 바닥에 떨어진 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