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8화 〉 1008.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큰일? 무슨 일인데?”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키며 물었다.
엘노아 크레이퍼.
노예 출신의 그녀는 저택에서 일하는 고참 메이드 중 한 명이다. 맡은 일을 잘했고, 나와 몇 번이나 몸을 섞었다. 사고 친 적도 없고 본인 입으로도 지금 생활이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성격도 서글서글한 편이다.
요컨대 모난 곳이 없다. 지금처럼 함부로 내 침실에 들이닥치는 일은 처음이었다. 큰일이라고 말했으니 정말 큰일이 터진 것이리라. 잠기운이 싹 달아난다.
“그게, 벨리아크 마을이 위험해요!”
엘노아가 외쳤다.
“……벨리아크 마을?”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 이름을 곱씹었다. 이번 전쟁으로 내 영토가 늘어났다. 당연히 내가 다스리는 마을도 몇 배나 많아졌다.
근데 벨리아크 마을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들어본 것 같긴 한데 어디였지?
“너무 두서없이 말하는군. 엘노아, 우리의 주인님을 너무 고평가하지 마라.”
엘노아의 뒤쪽에서 멜리사가 들어오며 말했다.
“주인님. 벨리아크는 엘노아의 고향이다.”
“아.”
기억났다.
벨리아크는 서쪽의 비트라세 왕국의 폴랭프의 숲에 있는 엘프 마을이다.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엘프의 인구수는 대략 6,000명이 넘는다. 대륙 각지에 있는 엘프 마을 중에서도 큰 편이었다.
‘내가 노리고 있던 곳이기도 했지.’
벨리아크 마을의 이름은 알 사람은 다 안다. 문제는 폴랭프의 숲이다. 이 숲에 들어가면 10명 중 1명은 실종된다. 베테랑 모험가도 예외 없다. 이 숲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벨리아크 출신 엘프의 길 안내가 필요하다.
‘엘노아를 살살 꼬셔 벨리아크 마을로 쳐들어가 전부 노예로 삼을 계획이었지.’
유리아의 힘이 없으면 불가능한 계획이었기에 나중으로 미뤄뒀다. 그러다가 잊어먹었고 지금에서야 떠올렸다.
그런데 지금 떠올려도 벨리아크 마을에 쳐들어가 모든 엘프를 노예로 삼을 수 없었다. 힘이 부족했다. 군대와 기사단은 한창 북쪽에서 전쟁 중이고, 유리아는 힘을 잃었다.
“좀 자세히 말해봐. 어떤 일이 터진 건데?”
“숲이…! 숲이 불타고 있대요!”
“폴랭프의 숲이? 왜?”
“비트라세 왕국이 벨리아크 마을을 노리고 군대를 보냈대요!”
“왜?”
“그건….”
엘노아가 말끝을 흐렸다. 꼴을 보아하니 그녀도 자세히 모르는 모양이다. 그저 벨리아크 마을이 위험하다는 이유로 내게 달려온 듯했다.
내 고개는 자연스레 멜리사에게 향했다. 멜리사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비트라세 왕국이 지금 상태가 어떤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겠지?”
“멸망 직전인 발트 왕국보다는 조금 나은 상태지.”
“궁지에 몰렸지. 그리고 며칠 전에 궁지에 몰린 비트라세 왕국의 수도에서 한 소문이 돌았다. 폴랭프 숲에서 살아가는 벨리아크 엘프 마을에 강력한 고대 유물이 있다는 소문이지.”
고대 유물.
신비하고 엄청난 힘을 가진 희귀한 물건.
“어디서부터 시작된 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비트라세 왕국의 대부분은 그 소문을 믿고 있다. 근거라고는 소문이 전부인데 말이다.”
멜리사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녀는 노골적으로 비트라세 왕국을 비웃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 근거 없는 소문은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벨리아크 마을에는 고대 유물이 있다. 폴랭프의 숲이 위험한 미로의 숲이 된 것도 바로 그 고대 유물의 힘이다. 다만,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건 벨리아크 마을 내에서도 얼마 없다. 원작에서는 이런 소문이 일어나는 일도 없었다.
“……계속 말해봐.”
“비트라세 국왕은 벨리아크 엘프 마을에 왕명을 내렸다. 고대 유물을 가져와 바치라는 명령이었지.”
폴랭프의 숲은 비트라세 왕국에 속해 있다. 벨리아크 마을이 폴랭프의 숲에 속해 있으니 비트라세 국왕이 왕명을 내리는 것 자체는 이상하지 않다.
“벨리아크 마을은 무시했겠군.”
“맞다. 어떻게 알았지?”
“벨리아크 마을은 비트라세 왕국보다 역사가 더 깊어. 그리고 벨리아크 마을이 정식으로 비트라세 왕국에 속해 있다고 인정한 것도 아니고. 벨리아크 마을의 입장에선 비트라세 왕국의 명령을 듣거나, 대답할 이유가 없지.”
멜리사와 엘노아가 내 말을 듣고 감탄했다.
“…주인님. 미안하다. 내가 그동안 주인님을 너무 무시했던 것 같다…. 반성하지.”
“…….”
멜리사의 말에 발끈할 수 없었다. 사실 내가 말했던 건 원작에 적혀 있던 내용이었으니까.
“커흠. 그래서 비트라세 국왕이 빡쳐서 군대를 보냈다?”
“맞다. 총 1만 2천 명. 기용할 수 있는 병사와 기사는 모두 기용하여 군대를 만들었다. 듣기로는 이 중에 5천 명이 노예병이라 하더군.”
“숲을 불태우는 건 뭐야?”
“폴랭프의 숲은 들어가면 거의 반드시 길을 잃는 이상한 숲이지 않나. 몬스터가 우글거리기로 유명한 숲이기도 하니 병사를 잃지 않으려고 숲의 외곽에서부터 불태우면서 천천히 전진하는 거지.”
“화끈하게 나가는군.”
“그만큼 비트라세 왕국이… 정확하게는 비트라세 왕실이 궁지에 몰려 있다는 거다.”
“근데 일은 쉽게 안 풀리겠지?”
“정령들이 방해한다고 하더군. 그래도 차근차근 전진하고 있다. 벨리아크의 정확한 위치를 모르나, 길어도 2주 내로 결과가 나오겠지.”
벨리아크 마을 입장에서는 좋은 결과가 아닐 것이다. 나는 힐끗 시선을 굴렸다. 어느새 일어난 유리아가 이불로 몸을 가리며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주인님! 벨리아크 마을을 도와주세요! 무슨 일이든 할게요!”
엘노아가 넙죽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미 뭐든지 하고 있잖아.”
“그렇긴 한데… 그래도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할게요! 도와주세요, 주인님! 벨리아크 마을에는 미녀 엘프들이 많아요!”
“…….”
엘노아는 나에 대해 잘 알았다.
나는 벨리아크 마을을 내버려둘 수 없다. 그 마을의 엘프는 모두 내 것이다. 내 것이어야 한다.
‘여기서 폴랭프의 숲의 위치까지는 적어도 마차로 1달 이상을 달려야 해. 서쪽 끝에 있으니까. 전쟁이 한창이라 방해받는 것까지 감안하면 2달은 걸리겠지.’
너무 늦다.
2달이면 이미 군대가 벨리아크 마을을 쓸어버리고 고대 유물을 가진 뒤다.
“폴랭프의 숲으로 이동할 방법을 생각하는 모양이군.”
“맞아. 마차를 타고 가면 너무 늦으니까.”
“방법은 있다. 공간 이동 주문서를 사용하면 된다.”
“…공간 이동 주문서는 미리 좌표를 저장해놔야 해. 가고 싶은 곳으로 이동하는 물건이 아니야.”
“폴랭프의 숲 근처로 설정된 공간 이동 주문서가 있다.”
“……있다고? 왜?”
“폴랭프의 숲 근처뿐만이 아니다. 대륙 각지의 좌표로 저장된 공간 이동 주문서가 있다. 왜냐고 묻지 마라. 내가 한 게 아니라, 기억을 잃기 전의 메이드장이 해놓은 일이니까. 정말이지 철저한 메이드장이다.”
우리의 시선이 유리아에게 향했다. 유리아는 기억에 없어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남쪽으로 이동했을 때도… 유리아가 준비해 놓은 공간 이동 주문서가 있었지.’
기억 잃은 유리아가 또 이렇게 날 도와준다.
나는 옆의 유리아를 끌어안아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유리아는 살짝 당황하다가 조용히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다음은 데려갈 전력이다.
벨리아크 엘프 마을의 엘프들과 1만 2천 명의 군대를 감당할 수 있는 무력이 필요하다.
“주인님. 미리 말하지. 현재 사용할 수 있는 전력은 노예병 3,000명 정도를 제외하곤 없다. 병사와 기사단은 북쪽에서 전쟁을 치르는 중이란 걸 잊지 마라.”
“……AM 부대는.”
“저택은 누가 지키지? 나와 AM부대가 있어야 한다. 주인님이 저택에 없다는 정보가 새어나가자마자 반란이 일어날 건 불 보듯 뻔하다.”
멜리사의 말이 옳다. AM부대가 있어야 저택을 지킨다. AM부대를 반으로 나누는 것도 위험하다. 주로 하는 일은 암살이고, 여러 준비가 되어 있는 저택을 지키는 것과는 다른 일이니까.
‘AM부대는 남겨둬야 해. 리더인 멜리사도. 메이드장 대리인 네피아는 저택 일은 잘하지만… 전투, 전략 부분에서 아직 미숙하니까.’
그럼 데려갈 수 있는 전력은?
주위에 있는 엘노아와 유리아가 전부다. 힘과 기억을 잃기 전의 유리아라면 모를까. 지금의 유리아는 오러 익스퍼트 최상급의 경지에 불과하다. 셋만으로는 불안하다.
‘그 외의 전력은… 없군. 네피아는 저택 일로 한 참 바빠.’
멜리사와 두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더 없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여력이 안 되면 포기하는 것도 방법이다. 엘노아에겐 안 된 일이지만…. 주인님은 스스로의 안위를 가장 먼저 생각하면 된다.”
“아, 안 돼요! 주인님! 제발 도와주세요!”
엘노아가 머리까지 조아렸다. 나는 그녀의 뒤통수를 잠깐 내려다보다가 방법을 떠올렸다.
“전력이 부족하면 전력을 추가하면 되잖아.”
“총이나 폭탄이라도 쓸 생각인가? 시선을 너무 끌면 안 좋다. 여러 가지로.”
“알아. 나한테는 다른 방법도 있어.”
[캐릭터를 소환합니다. 대상: 엘레나 발데르트]
[엘레나 발데르트
출신 세계: 신의 아틀란티스
인연: Lv. 10
소환 유지 시간: 30일.
소환 대기 시간: 현실 90일.
공유 스킬: 심안(心眼) - 천심(天心)과 합성.
한계 초월: 1분
소환자 공유 스킬 : 완전 회복 Lv. Master]
[엘레나 발데르트의 남은 소환 유지 시간: 30일]
[‘신의 아틀란티스’ 유희 세계가 비활성화 됩니다.
포인트가 소모되지 않는 인연 소환이었다.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제국의 환상공(幻想公), 엘레나 발데르트는 침실 중심에서 나타났다. 그녀의 한 손에는 포도주가 담긴 와인잔이 들려 있었다. 포도주와 함께 그녀의 청색 단발이 부드럽게 찰랑였다.
침묵이 감도는 침실 안에서 엘레나의 고개가 천천히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놀라서 멍하니 서 있는 멜리사, 바닥에 무릎 꿇고 고개를 조아린 엘노아, 그저 내 품에 안겨 있는 유리아. 그 모두를 한 차레 둘러본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하. 여기가 이세계인 모양이구나. 이해했다. 유진, 네가 했던 말이 사실이라면, 내 세계는 시간이 흐르지 않겠지. 지금의 나는 공작이 아니니… 어떻게 보면 일종의 휴식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엘레나는 어딘가 홀가분해진 얼굴로 말했다. 그녀는 이어 옆의 의자에 앉아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자, 유진. 이제 말해봐라. 나를 왜 소환한 거지?”
나는 그녀에게 지금 상황을 대충 말했다. 유리아는 유물의 시련으로 기억을 잃은 상태이고, 이 세계는 대륙 전체가 전쟁 중이며, 지금 벨리아크라는 엘프 마을이 위험하고, 그 마을을 구하기 위해 엘레나를 소환했음을.
엘레나는 내 이야기를 들으며 포도주를 계속 먹었다. 그녀의 와인잔에 담긴 포도주는 먹어도 먹어도 줄어들지 않았다.
“도와줘, 엘레나.”
“그러지.”
엘레나가 담백하게 말했다. 의외였다. 거절하거나,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선선히 허락해서 놀랐나 보군.”
“…너라면 못해도 뭔가를 요구할 줄 알았는데.”
“나는 이미 그대에게 소환된 처지다. 소환수로서 당연히 도와야겠지. 그리고 대가는…. 이미 내 쪽이 빚이 너무 많군. 완전 회복…. 이 스킬은 너무 사기다….”
그 발언에 공감한다. 완전 회복은 내 스킬 중에서도 최고다. 그리고 완전 회복은 수명을 대가로 환술을 사용하는 그녀에겐 더 없을 정도로 잘 맞는다. 와인 속의 포도주가 사라지지 않는 것도 그녀의 환상을 현실로 만드는 환접술(幻蝶術)이 그 정체다.
“그런데 말이다.”
탁.
그녀가 테이블에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너희는 언제까지 그렇게 붙어 있을 거지?”
엘레나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나는 고개를 돌려 유리아와 두 눈을 마주했다. 유리아의 푸른색 눈동자는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엘레나의 말을 듣지 못한 척 하는 것 같다. 내게서 떨어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보고 있자니 괜히 짜증 나는구나. 이게 질투인가…?”
“질투네. 너도 내 옆으로 와. 이참에 3P나 하자. 생각만 해도 벌써 자지가 불끈거리네.”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아니, 됐다. 난 이 저택을 한 번 구경 해보고 싶군. 이 세계에 대해서도 궁금하다.”
나는 엘레나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하며, 멜리사에게 엘레나의 안내를 부탁했다. 멜리사는 경계심 섞인 얼굴로 엘레나를 데리고 침실 밖으로 나갔다.
눈물을 글썽이는 엘노아도 일단 내보내고 유리아와 모닝… 아니 런치 섹스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