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9화 〉 1009.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멜리사는 성유진의 명령대로 엘레나를 안내했다.
“여긴 주인님이 이용하시는 식당입니다.”
멜리사가 존댓말을 사용했다. 성유진이나 저택 내의 메이드들에겐 편하게 반말을 하다못해 하대하는 그녀지만, 자신의 본분을 잊은 건 아니었다.
“편하게 말해도 좋다.”
엘레나가 말했다. 그녀는 멜리사가 성유진에게 거리낌 없이 말하던 것을 방금 보았다. 자신을 경계하는 멜리사와 다르게 엘레나는 멜리사를 경계하거나 싫어하지 않았다. 메이드복을 입고 있으나 그 몸에 배어 있는 것은 귀족의 버릇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고위 귀족 가문 출신이라고 단번에 짐작했다.
“아뇨. 주인님의 손님에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손님이라…. 그렇군.”
엘레나는 식당을 둘러봤다. 벽의 장식, 천장의 형광등, 식탁에 음각된 조각. 전체를 봤을 땐 고급스러웠다. 여기가 왕실의 식당이라 해도 믿을 정도다. 가까이에서 봤을 때는 곳곳에 들어오는 디테일에 감탄하게 된다. 몇몇 장식품과 조각품은 예술관에 넣어 두는 게 더 어울릴 정도로.
‘인간의 솜씨… 일수도 있으나 높은 확률로 드워프의 솜씨겠지.’
엘레나의 세계에서 명작 예술품 대부분은 드워프의 손을 탄 물건들이라 자연스레 그리 생각하게 되었다.
식당 안쪽에는 주방이 붙어 있었다. 그곳에는 위생 모자와 마스크를 쓴 키친 메이드 7명이 일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능숙하다. 한 명, 한 명이 모두 뛰어난 요리사다.
“이 주방은 오직 주인님을 위한 주방입니다. 온갖 식재료들이 있고, 이곳의 메이드들은 저택 내의 최고의 요리사들입니다. 손님. 한 번 맛보십시오.”
멜리사가 한 접시를 가져왔다. 새우가 올려져 있었다. 먹기 쉽게 손질된 새우에서는 희미한 마늘과 고소한 버터 냄새가 났다. 엘레나는 거절하려다가 냄새에 이끌려 포크로 새우를 찍어 입안에 넣었다.
탱글한 새우살이 이빨에 부서지며 그 맛과 풍미가 입안 전체로 퍼져나갔다. 엘레나는 자신의 저택에 있는 요리사들을 모조리 해고하고 다시 뽑기로 정했다.
“…포도주가 당기는군.”
“바로 가져오겠습니다.”
“아니, 괜찮다.”
엘레나의 손에는 어느새 와인잔이 들려 있었다. 와인잔에 입을 대고 포도주를 꿀꺽꿀꺽 삼킨 그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식당 밖으로 나섰다.
“손님. 실례인 건 압니다만, 손님에 대해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나에 대해? 궁금한가?”
“네. 갑자기 나타난 손님에 관해서 궁금합니다. 이렇게 손님에게 저택을 안내하는 경우는 처음이라 호기심이 자꾸 일어나는군요.”
“나는 엘레나 발데르트다. 귀족이지만, 이 세계에선 아니니 편히 대해도 된다.”
“…이 세계에선?”
“무얼. 너도 어느 정도 알고 있지 않나. 너의 주인님, 유진의 능력에 대해서 말이다. 그가 가진 지식, 물건, 식재료. 이 세계에 없는 것이 많을 거다.”
“…역시 그랬군요. 손님은 다른 세계에서 오셨습니까. 거참…. 놀라운 일이로군요. 혹시 주인님의 이겁니까?”
멜리사가 새끼손가락을 까딱였다. 갑자기 변한 그녀의 태도에도 엘레나는 기분 나쁘지 않았다. 자신은 이 세계의 귀족이 아니다. 발데르트 가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이 무엇을 하든 발데르트 가문의 명성이 흠집날 일은 없다. 발데르트 가문의 주인으로서의 의무감이 지금 그녀에겐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다. 라고 말하기에는 걸리는 게 좀 많군.”
멜리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깊이 물으려다가 관뒀다. 멜리사는 자신이 맡은 임무를 다했다. 엘레나는 저택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발데르트 가문의 본가보다 호화롭고 편리했기 때문이다.
“……이 저택에서 일하는 하인은 전부 여자, 메이드 뿐이로군.”
“아, 그건.”
“말하지 않아도 된다. 이미 이유는 짐작하고 있다. 저택의 주인인 유진 때문이겠지. 여자를 밝힌다고 생각했으나, 이 정도였나.”
멜리사는 엘레나의 얼굴을 살폈다. 엘레나는 담담했다. 보통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가 여자를 많이 밝힌다고 한다면 짜증을 내야 정상이 아닌가?
‘주인님의 품에 안긴 메이드장을 보고 짜증을 냈던 건 연기였나? 아무리 봐도 연기가 아니었었는데?’
뚝.
엘레나가 걸음을 멈췄다. 자연히 멜리사의 걸음도 멈췄다. 엘레나는 창문 밖의 정원을 보고 있었다. 엘프 메이드들이 관리하는 정원은 오늘도 완벽했다.
“내 반응이 의아한가 보군.”
“네. 손님은 자존심이 세 보이는데도 주인님을 별로 지적하지 않으시는군요. 참고로 이 저택의 메이드들은 모두 주인님에게 안긴 적이 있습니다. 저도 일주일에 2~3번은 안기고 있지요.”
“그래서?”
“화가 나지 않으십니까?”
“난다. 그러나 동시에 이해하고 있다. 유진에겐 그럴 자격이 있다.”
“…네?”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멜리사가 눈을 치떴다. 엘레나는 딱 봐도 자존심이 강한 귀족이다. 대화를 나눈 것만으로도 그녀의 높은 지위를 짐작할 수 있다. 거기다가 그녀가 보여주는 마법같은 능력은 그녀가 무력으로도 보통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솔직히 말해서 멜리사는 엘레나를 감당할 자신이 없을 정도다.
그 정도 되는 인물이 성유진을 이해한다고? 흔히 말하는 사랑의 콩깍지가 짙게 씌워져 있는 건가?
“이 세계의 중심은 유진이다. 내 세계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 없지. 유진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신은 그 자체로 부정된다. 유쾌한 일이지. 그 수많은 신들이 이 진실을 알게 된다면…. 후후.”
“…….”
멜리사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엘레나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녀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엘레나는 성유진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신 어쩌고 하는 걸 보면 성유진을 신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걸지도 모른다.
“저택 구경은 이쯤이면 됐다. 저택의 분위기는 충분히 알았다.”
“아직 지하 목욕탕을 둘러보지 않으셨습니다.”
“보나 마나지. 넓은 목욕탕에 여자들이 잔뜩 들어있겠지. 나는 누군가와 함께 목욕을 즐기는 성격이 아니다. 집무실로 가고 싶군.”
“주인님의 집무실 말입니까?”
“일은 확실하게 하는 게 내 주의다. 비트라세 왕국, 벨리아크 엘프 마을, 폴랭프의 숲. 그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알고 싶군. 정리된 서류가 있나?”
“그런 목적이라면 집무실이 아니라 행정부에 가시는 편이 좋습니다.”
“행정부라면 3층의 그곳 말이군. 저택 내의 일만 처리하는 게 아니었나?”
“행정부에서 거의 모든 일을 처리합니다. 집무실에 올라가는 안건은 최종적으로 주인님의 확인과 결재가 필요한 일들뿐입니다.”
엘레나는 입을 살짝 벌렸다. 성유진이 대부분의 일을 아랫사람에게 떠넘긴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아마 집무실에는 그럴싸한 서류도 몇 없을 것이다. 발데르트 가문의 모든 일에 손을 뻗는 그녀와는 정반대였다.
‘일은 편하겠지만, 한 명이라도 배신하면 치명적일 수 있을 텐데? 그만큼 메이드들을 믿는 건가?’
그게 아니면 체계가 완벽하게 잡혀 있다거나, 배신을 해도 상관없다거나.
엘레나는 행정부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녀는 서류를 살펴봤다. 양식이 정해져 있는지 서류를 보기에 편했다.
따닥, 타타타타타탁.
키보드 소리가 울린다. 행정부에서 일하는 메이드들은 모두 컴퓨터로 업무를 보고 있었다. 엘레나는 입맛을 다셨다.
‘발데르트 가문의 가신들이 저 메이드들의 절반만 일해도 내가 좀 더 편해질 텐데! 아마도 유리아, 그 메이드가 토대와 체계를 마련하고 몇 년 전부터 준비했겠지.’
쉽게 따라 할 수 없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그녀에겐 시간과 인재가 없다. 이 정도까지 오려면 못해도 5년은 봐야 할 일이다.
엘레나는 포도주를 홀짝이며 서류로 시선을 떨궜다. 한참 서류를 살펴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바네사.”
“네. 엘레나 님.”
대답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황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메이드였다. 멜리사는 일이 있어 사라졌고, 그 대신에 바네사라는 메이드가 엘레나의 전담 메이드가 되었다.
“이 서류에 나와 있는 놈 말이다. 암살로 죽이는 것보다 이용하는 편이 더 좋지 않나? 내가 환술을 걸어주지. 평생 꼭두각시로 이용할 수 있을 거다.”
“어… 그거 기밀 서류 아닌가요?”
“유진의 허락은 이미 받았다.”
“그렇군요. 그런데 죄송해요. 제 담당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가. 그럼 담당자에게 내 말을 전해주고, 전쟁과 관련된 서류를 가져오도록.”
“네. 알겠습니다. …근데 엘레나 님은 저택의 손님이 아니셨나요? 굳이 일하실 필요는 없을 텐데요….”
뚝.
엘레나의 행동이 멈췄다.
바네사의 말대로 자신은 손님이다. 굳이 일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도 정신을 차려보니 일을 하고 있었다.
“…일하게 해줘라. 이런 환경에서 일하는 건 꽤 즐겁구나. 배울 점도 있고. 그리고 유진에게서 점수를 따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런 뜻이 있으셨군요. 전 엘레나 님이 일 중독자인 줄 알았어요.”
“…….”
엘레나는 바네사의 말을 반박하지 못했다.
???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유리아, 엘노아, 엘레나. 나를 포함한 총 4명은 모든 준비를 끝내고 공간 이동 주문서를 찢었다.
우리는 대륙의 서쪽, 폴랭프의 숲 근처로 공간 이동했다. 근처에 호수가 있는 곳이었다.
“바이톤 호수네요.”
엘노아가 호수를 보며 말했다. 그녀의 표정은 딱딱했다. 고향이 공격받고, 동족들의 목숨이 위험하니 당연했다.
나는 호수로 시선을 던졌다. 3km는 가볍게 넘을 듯한 크기의 호수다. 특이한 점은 호수가 무척 검다는 것이다. 뭍 가 근처도 호수 내부는 보이지 않고, 호수의 중심에는 마치 심연이라도 있는 것처럼 어둡다.
나는 손에 물을 펐다. 물 자체는 투명했다. 물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신기한 호수군. 호수 중심에 구멍이라도 있나?”
“바이톤 물고기 때문이에요. 바이톤 물고기는 빛을 흡수해서 호수 내부에는 빛이 없어요.”
“몬스터야?”
“아뇨. 조금 특이한 물고기일 뿐이에요. 옛날에 몇 마리 잡아 구워 먹어봤는데… 맛은 엄청 없었어요.”
엘노아는 차분히 설명하면서도 폴랭프의 숲을 힐끗거렸다. 저 멀리. 하늘 위로 치솟는 검은 연기가 보인다. 숲이 불타고 있었다. 비트라세의 군대가 고대 유물을 노리며 진격하는 것이리라.
“유진. 지금 내 힘으로 저 군대를 단번에 없애버리는 건 불가능하다. 한계 돌파를 사용한다면 가능하겠지만…. 그걸 원하나?”
“내 대답도 알고 있으면서 뭘 진지하게 말하는 거야. 우리 목적은 비트라세 군대를 없애는 게 아니야. 벨리아크 마을의 엘프들을 데리고 돌아가는 거지. 비트라세 군대와는 맞닥뜨리지 않는 게 최선이야.”
“최악의 경우, 그런 방법이 있다는 것도 알려준 거다.”
우리는 엘노아를 바라봤다.
“엘노아. 벨리아크 마을로 안내해. 근데 멀리 있는 건 아니지?”
“…그게… 벨리아크 마을은 숲에서도 꽤 깊은 곳에 있어요. 숲의 정면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서… 3일 이상 걸릴지도 몰라요.”
“중요한 건 비트라세 군대보다 빨리 도착하는 거지. 그 외의 문제는 상관없어.”
“비트라세 군대의 지금 위치를 보면… 일주일은 여유 있을 거예요.”
엘노아의 얼굴색이 약간 밝아졌다. 그녀는 우리를 이끌고 폴랭프의 숲 쪽으로 향했다.
마을이 나왔다.
벨리아크 엘프 마을은 당연히 아니다. 우리는 아직 폴랭프의 숲으로 들어가지도 않았다.
“랜들 마을. 저희와 교류하는 사냥꾼 마을이에요. 저희는 인간인 척하고 랜들 마을의 사람들과 교류했어요.”
“몰래 교류했다는 거네.”
“네. 너무 고립되어 있으면 세상에 맞춰가지 못하게 되니까요. 엘프 중에는 저처럼 세상 밖으로 나가길 원하는 엘프도 있고요. 전 마을을 떠나기 전, 사냥꾼 마을을 통해 인간 세상에 대한 상식을 배웠어요.”
랜들 마을에 들어섰다.
우리는 바로 이변을 알아차렸다. 마을에는 인기척이 하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