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0화 〉 1010.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랜들 마을에 들어섰다.
우리는 바로 이변을 알아차렸다. 마을에는 인기척이 하나도 없었다.
마을을 천천히 둘러봤다. 가구는 약 150채. 집은 웬만한 평민들의 집보다 더 좋아 보인다. 엘프 마을과 교류를 해서 그런지 벌이는 제법 많은가 보다.
“전부 도망갔나 보군.”
나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시야를 저 멀리 던지면 검은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이 보인다. 숲이 불타고 있고, 군대가 진격한다. 그 대상이 자신이 아니더라도 군대가 패악질을 부릴 수 있으니 마을 사람들은 두려움에 질려 도망갔을 것이다.
‘이 세계에는 민간인 보호고 나발이고 없지. 민간인이 군대에 약탈당하고 붙잡혀서 노예가 되는 건 흔한 일이지.’
오히려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약탈을 위해 군대에 지원하는 사람도 있다.
따라서 평범한 마을의 경우 근처에 군대가 있다는 말만 듣고 마을을 버리고 도망치는 경우가 허다했다. 크고 안전한 도시로 피난 가거나, 산이나 숲에 틀어박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버티는 것이다.
‘대부분 큰 도시로 피난 가지. 큰 도시라고 해서 전쟁에서 안전한 건 아닌데 말이야.’
나는 엘노아를 바라봤다. 엘노아는 아까부터 마을을 둘러보고 있었다.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린다.
“엘노아. 우리 목적을 잊었어? 우린 벨리아크 마을로 한시라도 빨리 가야 해.”
“주, 주인님. 뭔가 이상해요. 제가 알고 있는 랜들 마을의 주민들은 군대가 온다고 해서 이렇게 터전을 버리고 도망칠 사람들이 아니에요.”
“평소에 강한 척하는 놈도 막상 일이 닥치니 당황해서 아무것도 못 하는 경우가 허다해. 이번 경우도 마찬가지겠지.”
사냥꾼 마을.
보아하니 폴랭프의 숲에서 사냥하는 자들을 말하는 것 같다. 폴랭프의 숲은 기본적으로 10명 중 1명만이 살아나가는 위험한 곳이지만, 벨리아크 마을과 교류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이 마을이라면 이야기가 다를 것이다.
‘엘노아가 저리 높이 평가하는 걸 보니 몬스터를 전문적으로 사냥하는 놈들이군.’
괴물 사냥꾼.
모험가나 용병과는 달리 오직 몬스터만을 사냥하며 살아가는 전문가들.
‘몬스터와 인간은 다르지. 인간 1만 2천 명이 오는데 괴물 사냥꾼이라 해서 뭐 있겠어? 도망칠 수밖에 없지.’
유리아가 다가왔다. 그녀는 바로 옆에 있는 집을 조용히 살피고 왔다.
“여…, 주인님. 집안에 생활품들이 그대로 있어요. 피난을 갔더라면 챙겨갔을 물건들이 남아있어요.”
“피난이 아니라는 거군.”
엘레나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이런 일에 별 관심은 없었다.
“…즉, 전부 버리고 떠났다는 거지? 어지간히도 급했나 보네.”
엘레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 거다. 보면 급하게 움직인 흔적이 없다. 단체로 어딘가로 이동했을 거다. 유리아. 집안을 본 네 의견으로는 며칠 정도 비어 있었던 것 같나?”
유리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집안에 쌓인 먼지를 보자면 나흘 정도… 일까요.”
“나흘이라…. 비트라세 군대의 진격은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다른 이유로 이동했겠군. 벨리아크 마을과 교류하는 마을이라지? 어쩌면 벨리아크 마을에 이 마을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엘노아. 엘레나의 말을 들었지? 벨리아크 마을로 가자. 거기에 가면 이 마을이 왜 이렇게 된 건지도 알 수 있을 거야.”
“네….”
엘노아는 불안한 눈으로 마을을 보고는 숲으로 향했다. 나는 그녀의 뒤를 따르며 잠시 생각했다. 이 마을은 방치되었다. 집안에는 생활품들이 남아 있다고 한다.
‘가서 챙길까?’
전부 공짜다. 욕심이 슬그머니 머리를 치든다. 그리고 귀찮음이 몰려왔다.
‘저딴 것들을 챙겨서 뭐하게. 드워프의 물건도 아니고…. 돈이 되지 않아. 소모되는 내 시간이 더 아까워.’
랜들 마을에 대한 것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우리를 안내하는 엘노아는 걷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그녀는 두 눈을 날카롭게 치뜨고 길쭉한 귀를 쫑긋거렸다.
호기심이 일어난 난 그녀에게 물었다.
“대체 어떤 방식으로 이 숲의 길을 찾는 거야?”
“정령의 힘을 이용하는 거예요. 땅과 나무의 속삭임을 잘 들어보면 길을 찾을 수 있어요.”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정령의 힘부터 막힌다.
‘아카데미의 구원자에선 나도 정령사이긴 한데…. 그건 정령안(S) 때문이고 이 세계의 난 정령의 정자도 몰라.’
옆으로 눈동자를 굴렀다. 엘레나와 눈이 마주쳤다. 엘레나도 엘노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눈치다.
“…대충 감이 잡히는군요. 엘노아, 혹시 저쪽으로 가야 하나요?”
유리아가 왼쪽을 가리켰다. 엘노아가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쪽이에요. 어떻게 알았어요? 혹시 메이드장도 정령의 힘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왠지 저쪽의 마나가 조금 다른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역시 메이드장! 대단해요!”
엘노아가 감탄했다. 물론 나도 감탄했다. 나는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 천안(天眼)까지 사용해 마나를 두 눈으로 봐도 모르겠다.
‘천재만이 알 수 있는 감각적인… 무언가로군.’
천재의 시간을 썼을 때의 감각을 떠올려 본다. 내 영성이 못해도 10배 이상 늘어났던 기분. 그 기분을 태어났을 때부터 타고난 유리아라면 이 숲의 길을 찾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끼이이이이익!”
1M 크기의 박쥐가 굵은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있다가 우리를 보고 소리를 질렀다. 고주파의 소리가 주변에 울린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일반인이라면 저 고음을 듣고 죽거나 졸도할 수 있으나, 우리에겐 기분 나쁜 소음에 불과하다.
“끼이이이이이… 꽥!”
유리아가 날린 단검이 박쥐의 오른쪽 눈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대로 절명했다.
“흐음. 오는군.”
엘레나가 중얼거렸다.
직후, 사방에서 파닥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방금 죽은 박쥐 괴물이 내지른 소리는 동료를 부르기 위해서다.
“최소 30마리 이상이다. 내가 나설까?”
“아니. 내가 해결할게.”
완전 회복이 있다고 해도 엘레나의 힘은 최대한 아끼는 게 좋았다. 숲에 더 깊숙이 들어갈수록 위험한 몬스터가 나올 테니까. 엘레나는 우리의 비장의 패다.
‘몇 번 연습했던 기술이긴 한데… 이건 뇌구(雷球)라 하자. 영천류의 기술로 만들 생각이지만 그건 나중으로.’
파직, 파지직.
손바닥 위로 푸른 뇌전이 모여들었다. 뇌전은 천천히 회전하며 구체를 형성했다. 박쥐가 완전히 달려들기 전에 뇌구를 위로 올렸다. 이번에 뇌전 특성 레벨 10에 오르면서 뇌전을 원격으로 보다 쉽고 정밀하게 제어할 수 있게 되었다.
‘영어로 하면 라이트닝 볼.’
파지지지직! 파지지지직!
뇌구에서 번개가 뿜어져 나와 달려드는 박쥐를 감전시켜 죽이기 시작했다. 10초도 지나지 않아 상황은 정리되었다. 30마리가 넘는 박쥐들은 전기구이가 되어 바닥을 나뒹굴었다.
‘번개를 하나, 하나 제어하려니 집중력의 소모가 심해. 다른 방법은 없나?’
마땅한 방법은 생각나지 않았다.
“대단하군. 마법을 보는 것 같았다. 저번에 봤을 때보다 능력이 발전했어. …혹시 마법인가?”
“마법은 아니야. 애초에 난 마법을 못 써. 재능도 없고.”
“글쎄. 방금 기교는 마법이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그리고 너는… 마법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고 있군. 분명 마법이 어렵긴 하나, 마법의 종류도 천차만별이다. 어려운 방식 없이 마법을 사용할 수도 있지.”
엘레나의 말에 흥미가 치솟는다.
마법.
검과 다르게 이건 진짜 재능의 영역이다. 현실에서도 재능이 없는 사람은 쳐다도 볼 수 없는 영역. 그랬기에 재능 없는 나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지금 엘레나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흥미가 팍팍 솟네. 어려운 방식 없이 사용하는 마법은 예로 들면 뭐야?”
“대표적으로 각인 마법이 있다. 피부나 옷에 각인하고 마나를 소모해 마법을 발동하는 방식이지. 위력과 활용도가 적은 단점이 있으나, 간편하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 그리고 룬 마법이다. 대성하기는 어려우나 기초는 주입식으로도 쉽게 배울 수 있는 마법이다.”
“룬 마법은 몇 년을 공부해야 하는데?”
“배우지 않아서 모른다. 듣기로는 대충 1~2년이면 기초는 배울 수 있다더군.”
재능이 없는 나는 3년이란 시간을 잡았다.
그 시간 동안 마법 하나 붙잡고 공부해야 한다고?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린다. 그때의 나는 공부를 못했다. 한 번은 부모님의 용돈 작전에 낚여서 각 잡고 공부한 적이 있는데… 성적이 예상만큼 좋게 나오지 않았다. 성적 순위는 뒤에서 세는 게 빠를 정도다.
‘그때 용돈을 달라고 땡깡 부리다가 안 통해서 가출까지 한 뒤에야 용돈을 받을 수 있었지.’
그 돈으로 아빠 명의를 이용해 고급 오나홀을 구입 했다. 당시 잘 나가던 AV 배우의 보지를 재현한 오나홀이었다. 엉덩이, 클리토리스, 소음순, 똥구멍까지 재현된 최고급 오나홀이었는데… 정작 난 사용하지도 못했다.
‘아빠한테 걸려서 뒤지게 혼났지. 오나홀은… 아빠가 가져간 뒤로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고…. 버린 건 아닌 것 같은데…. 시발. 생각해보니 빡치네. 아빠한테 오나홀 NTR 당한 거잖아?!’
뿌드득. 이가 갈렸다.
‘NTR은 NTR로 대응해주는게 상책! 이지만…. 아빠를 NTR하려면 엄마를 따먹어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친엄마로는 자지가 안 서.’
그러니 NTR 대응은 포기다.
‘아빠 용돈 3달 압수.’
NTR의 복수를 이 정도로 끝내다니. 나는 정말 효자인 것 같다.
“그래서 마법을 배우기로 했나?”
엘레나의 말이 들렸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됐어. 그 시간에 검을 사용하는 게 이득이야. 마법이 필요하면 마법사를 고용하면 돼.”
“네겐 시간은 넘쳐나지 않나…? 뭐, 알아서 해라.”
조용히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유리아가 다가왔다.
“저… 룬 마법이란 게 혹시 이건가요?”
유리아가 허공에서 손가락을 뻗었다. 손가락끝이 파랗게 빛났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자가 허공에 그려졌다.
“…룬 문자로군. 이 세계에도 룬문자가 있었나?”
“유리아. 어디서 익힌 거야?”
“그림자 속에 책이 있어서… 한 번 익혀봤어요.”
“책?”
내가 되묻자, 유리아는 행동으로 보여줬다. 그림자 속에서 그 책을 꺼낸 것이다. 나는 책의 제목을 보고 입을 살짝 벌렸다.
책의 제목은 ‘룬의 기초’. 이름만 들으면 별거 없다. 문제는 저 제목이 이 세계의 문자가 아니었다. [신의 아틀란티스] 세계의 문자다.
‘…예전에 유리아가 신의 아틀란티스 세계에 소환된 적 있지. 그때 그림자 속에 챙기고 역소환된 건가?’
그거 말고는 그녀의 손에 저 책이 들려있는 게 설명되지 않는다.
“……그때 준 보상금으로 저걸 샀었나. 뭐, 독학으로 룬을 읽힌 건 대단…. 잠깐. 몇 달 전에 기억을 잃었다고 하지 않았나?”
엘레나가 놀라며 말했다.
언어 부분은 괜찮았다. 기억을 잃었던 당시에도 유리아는 문자를 읽고 쓸 수 있었다. 하지만 룬문자에 대한 지식은 잃어버렸을 것이다.
“저번에 할 일이 없을 때… 한 번 읽어봤어요.”
“한 번 읽어 봤다고? 공부한 게 아니라?”
“잘 정리되어 있어서 어려운 내용은 아니던데요.”
“……알고는 있었지만, 터무니없는 메이드군.”
엘레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스웠다. 내 눈에는 엘레나도 천재였다. 특히 환술 하나 만큼은 신에 필적한 말한 재능이라고 생각한다. 그 외의 재능은 유리아에 비해 떨어지겠지만.
‘나도 천재의 시간을 사용하면… 됐다. 10초 따리가 뭘 하겠어.’
우리는 대화를 나누며 엘노아의 뒤를 따라 숲 안으로 들어갔다. 몬스터가 튀어나왔다. 대부분 유리아가 먼저 움직여 몬스터의 숨통을 끊었고, 몬스터 무리가 대량으로 나타나면 내가 나섰다.
해가 떨어질 무렵, 우리는 나무에 기대어 있는 시체 한 구를 발견했다. 옷차림과 무기를 보니 사냥꾼처럼 보였다. 핼쑥한 얼굴과 창백한 피부가 보였다. 피부 위로 검은 반점이 드문드문 보였고, 그의 가슴 부분의 옷은 붉은 피가 말라 있었다.
“…왜 시체가 멀쩡한 걸까요?”
유리아가 시체를 보며 내뱉은 말이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되물으려다가 이곳이 어딘지 깨달았다. 여긴 폴랭프의 숲. 몬스터와 맹수가 우글거린다. 시체는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몬스터의 뱃속에 들어가야 정상이다.
“…옛날 생각이 나는군. 그래, 이런 일도 있었지. ……골치 아파지겠군.”
엘레나가 탄식했다.
“이게 뭔지 알고 있어?”
“몬스터나 맹수는 본능이 뛰어나다. 본능적으로 아는 거다. 이건 못 먹을 고기라는 걸. 그리고 이 피부에 있는 검은 반점을 보면 감이 오지 않나? 이건 역병이다.”
엘레나는 고개를 위로 올렸다. 두 박자 정도 늦게 다시 그녀가 말했다.
“이 숲에 역병이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