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1화 〉 1011.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이 숲에 역병이 퍼졌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역병.
전염병이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한 현대에서도 한 번 전염병이 제대로 퍼지면 곤욕을 치르는 데 중세 판타지 세계에 전염병이 퍼졌다? 마을 하나가 떼죽음을 당하는 건 기본이고 심하면 도시 몇 개가 작살날 수 있었다.
이 세계에 마법이 존재한다고 해서 만능은 아니니 한 번 역병이 퍼지면 해결까지 시간도 걸릴 것이다.
나는 진지한 눈으로 다시 시체를 바라봤다. 창백한 피부 위에 피어난 검은색 반점, 옷에 묻은 피는 위치로 보아 아마 각혈일 것이다.
‘무슨 병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건장한 사내가 죽어 나자빠졌다는 건… 치사율이 높다는 거겠지.’
한숨을 내쉬었다.
비트라세의 진격과 역병. 원작에서는 없었던 일이 동시에 터졌다.
‘벨리아크 엘프 마을은 지금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머릿속으로 자판기를 두들긴다.
“마, 말도 안 돼. 이 숲에서 역병이라니…! 그, 그럼 마을은…?!”
엘노아가 당황했다. 스스로의 두 손을 붙잡고 어쩔 줄 몰라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나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진정해. 아직 벨리아크 마을이 어떤 상태인지는 몰라. 죽은 이놈은 엘프가 아니라 인간의 시체야. 벨리아크 마을은 무사할 가능성도 있어.”
“유진의 말대로다. 역병 환자를 치료하는 건 마법사에겐 어려운 일이나, 역병의 태동을 대비하는 건 어렵지 않다. 엘프 마을이니 마법사나 정령사가 있겠지. 역병에 대비했을 가능성이 크다.”
엘레나가 침착하게 말했다. 엘노아는 그 말에 대충 진정한 모양이다.
딱!
엘레나가 손가락을 튕겼다. 시체가 불타오른다.
“에, 엘레나 님?!”
갑작스러운 불길에 엘노아가 기겁했다. 불길은 신기하게도 시체만을 불태웠다. 뼈가 잿더미가 될 때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역병의 시체는 태우는 게 최선이다. 괜히 내버려뒀다가 다시 역병이 퍼지는 경우가 꽤 빈번하다.”
나는 그녀들의 안색을 살폈다. 엘노아는 잔뜩 초조해져 있었고, 엘레나는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유리아는 무표정했다. 관심이 없어 보인다.
‘후우. 이거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AM 부대나, 다른 병사들을 데려왔더라면 큰일 날 뻔 했어.’
익스퍼트의 경지에 오른 기사면 모를까. 평범한 병사에게 역병이라도 퍼졌다간 끔찍한 일이 될뻔 했다.
‘엘노아는 상급 정령사고, 나와 유리아는 익스퍼트 최상급. 엘레나는 뛰어난 마법사에다가 완전 회복도 있으니 걱정할 필요 자체가 없지.’
엘레나는 유리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유리아. 룬을 사용할 수 있다면 정화의 룬도 사용할 수 있나?”
“혹시 모를 역병의 균을 없애려는 거군요. 정화의 룬을 사용할 수 있긴 한데… 왜 제게 시키시는 거죠? 엘레나 님이라면 쉽게 정화할 수 있지 않나요?”
“실은 룬 마법을 이미 시도했다가 실패했다. 그 원인은 아마 여기가 내 세계가 아니라 그런 거겠지. 룬 마법을 며칠 연습해보면 될 것 같긴 한데… 그러긴 귀찮다. 그리고 네가 쓰는 룬 마법을 한 번 더 보고 싶다.”
“그렇지 않아도 정화는 필요한 일인 것 같으니 할게요.”
유리아가 허공에 손가락을 콕 찌르더니 유려하게 움직였다. 총 3개의 파란색 룬 문자가 그려졌다. 룬 문자는 환하게 은은하게 빛나다가 터졌다. 빛의 입자가 허공에 스며들 듯이 사라진다.
주위 온도가 살짝 내려가고 공기가 확 맑아진 기분이었다. 기분이 상쾌해진다.
“…룬 문자 3개를 조합했나. 이미 전문가 수준이잖나.”
“혹시 모르니 안전에 주의를 기울였어요.”
“몇 번 해봤나?”
“이번이 처음 시도해보는 건데 성공했어요.”
엘레나는 복잡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유리아의 주인님으로서 뿌듯하게 웃었다.
‘유리아의 재능은 미친 재능이지!’
다시 숲 속을 걸었다. 우리의 발걸음이 멈춘 것은 해가 완전히 저물고 몇 시간 지나서였다. 한 치 앞도 보기 힘들 정도로 숲은 어두웠고, 몬스터와 싸우다 보니 알게 모르게 피로가 쌓인다.
“졸려서 안 되겠어. 해가 뜰 때까지 쉬다 가자. 앞으로 3~4시간이면 해가 뜨겠지.”
내 의견에 적극적으로 찬성한 건 엘노아였다. 그녀는 초조함을 느낄지언정 멍청하지는 않았다. 우리 중에서 가장 지쳐있는 건 그녀였고, 휴식의 필요성을 알고 있었다. 우리를 안내하는 건 그녀였기에 컨디션 유지가 필수다.
적당한 곳에 소환한 텐트를 설치했다. 4명이 이용하기에 충분한 크기의 텐트였다.
“불침번을 정하자.”
“유진, 그럴 필요 없다. 마법을 쓰면 된다. 유리아. 은신의 룬과 장막의 룬을 이 근처에 새겨다오.”
“…죄송해요. 은신과 장막의 룬은 제 역량 밖이에요.”
“그런가. 알겠다. 결계는 내가 치지.”
엘레나가 움직였다. 그녀는 환술로 만든 지팡이를 손에 들고 텐트 근처 바닥에 마법진을 그렸다. 근데 영 쉽지 않은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지팡이를 내던졌다.
“엘레나! 왜 갑자기 신경질적이야?”
“…이 숲이 이상해서 마법이 생각했던 것만큼 잘되지 않는다. 차라리 물리적으로 대비하는 편이 더 낫겠군.”
엘레나가 환술을 사용했다. 텐트 주위로 단단한 벽과 천장이 생겨났다. 재질은 금속으로 보였고 그 두께가 30cm가 넘는다. 한쪽에 문이 있고 벽 중간중간 밖을 살펴볼 수 있는 작은 구멍이 있다.
나는 주먹으로 벽을 두들겨보았다.
‘무슨 재질인지 모르겠지만, 평범한 강철이 아닌 건 확실하군. 이걸로 죽을 일은 없겠어.’
아예 텐트를 치워버리고 바닥에 요를 깔았다. 우리를 벨리아크로 이끌던 엘노아가 가장 먼저 바닥에 누워 곯아떨어졌다.
나도 베개를 들고 바닥에 누웠다. 엘레나와 유리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 옆을 차지했다. 그녀들의 체향이 훅 들어온다. 자지에 찌릿하고 반응이 갔다.
“…….”
양팔이 각각 그녀들에게 움직였다. 오른손은 엘레나의 허벅지를, 왼손은 유리아의 풍만한 가슴에 닿는다.
“자라.”
엘레나의 짜증 섞인 말이 들려왔다. 오른손은 그녀의 허벅지 위에서 행동을 멈추었다. 엘레나는 남들 앞에서 섹스하는 걸 싫어했다. 성희롱도 마찬가지다.
‘둘이 있을 때는 천박한 말도 서슴지 않고 하면서….’
나는 왼손을 움직였다. 유리아의 젖가슴을 주무른다. 손과 그녀의 옷이 닿아서 미세한 소음이 울렸다.
“자라고 했다.”
엘레나의 목소리에 약간의 짜증이 서렸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엘레나는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유리아의 가슴 위에 손을 올린 채로 멈췄다. 엘레나가 잠들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10분 정도 지나자 엘레나의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여보.”
유리아가 내 귓가에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날 불렀다. 나는 몸을 살짝 떨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감미로웠고 숨결은 달콤했다.
“절 마음대로 하셔도 돼요. 원하시는 대로 절 만져주세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유리아의 푸른 눈을 마주했다. 뺨이 살짝 달아올랐다. 그녀의 얼굴이 점점 다가온다. 무엇을 원하는지는 뻔했다.
꽉.
오른쪽에서 나온 부드러운 손에 뺨이 붙잡혀 강제로 돌려졌다. 엘레나였다. 그녀는 나를 보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나 참. 자라고 했을 텐데.”
변명하기도 전에 그녀의 입이 내 입을 덮쳤다. 쪼옥, 쪽. 기왕 하는 거 제대로 하겠다는 듯이 격렬하다. 엘레나의 혀가 내 입안으로 침입해 종횡무진 날뛰었다.
“…….”
유리아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녀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능숙한 손길로 내 바지를 벗기고는 발기한 자지를 손으로 잡았다. 자지를 훑는 유리아의 손길에 기분이 점점 고조된다. 그러다 엘레나의 손이 불쑥 나타나 내 불알을 주물렀다. 유리아는 내 목에 고개를 박고 쪽쪽 키스를 했다.
그녀들은 나를 두고 서로 경쟁하는 듯했다. 잠깐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결론은 빠르게 났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
그리고 나는 4시간 동안 그녀들의 애무를 받았다. 섹스 없이 말이다.
뒤늦게 잠에서 깬 엘노아는 두 뺨을 붉게 물들였다. 상황을 어느 정도 눈치챈 모양이다.
‘정액 비린내가 벽 안에 진동하는데 모르면 더 이상하지.’
유리아와 엘레나를 바라봤다. 그녀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갈 채비를 했다. 두 사람 모두 그토록 나를 희롱하던 여인들이라고 믿지 못할 정도로 깔끔했다.
“주인님. 도와드릴게요.”
유리아가 다가와서 내 옷을 가다듬었다.
“머리카락이 붕 떴구나. 칠칠치 못하게 뭐냐.”
엘레나는 내 머리카락을 다듬었다.
“…….”
엘노아는 조용히 눈치만 살폈다.
우리는 대충 아침 식사까지 간단히 해결한 뒤에 벨리아크 마을로 향했다.
덤벼드는 몬스터를 죽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죽은 인간과 엘프의 시체를 여럿 발견했다. 몬스터에게 당해 죽은 게 아니라 역병에 걸려 죽은 것이다.
엘노아는 조급해졌다. 그녀의 발걸음은 알게 모르게 빨라졌다. 나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벨리아크 엘프 마을에도 역병이 퍼졌다면 한시라도 빨리 도착하는 편이 내게도 이득이다.
“밤이 깊었군. 여기서 쉬고 갈까?”
“주인님!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아침 쯤이면 벨리아크 마을에 도착할 거예요!”
엘노아가 다급히 말했다. 쉬지 않고 움직이고 싶은 모양이다. 휴식이 필요할 정도로 지친 사람은 없었기에 엘노아가 원하는 대로 휴식을 생략하고 벨리아크 마을로 향했다.
그리고 우리는 3일째 아침이 되는 날에 벨리아크 엘프 마을에 도착했다.
폴랭프의 숲에 꼭꼭 숨겨져 있던 벨리아크 마을은 컸다. 이곳에서 살아가는 엘프의 숫자만 해도 6,000 명이 넘으니 당연했다. 그러나 마을이 큰 것치곤 활기가 없었다. 여기저기 죽음이 가득한 분위기를 풍겼다.
“누구냐.”
마을에 들어서는 데 저 멀리서 무장한 엘프들이 튀어나왔다. 12명이었는데 그중 2명이 여자였다. 엘프답게 남자고 여자할 것 없이 아름다운 외모를 갖췄다. 그들은 모두 피로에 젖은 얼굴이었다.
“제그너 씨!”
저들의 정면에 있는 백금발의 엘프 남자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그너. 원작에서 나오는 인물이었다. 벨리아크의 수호대장인 그는 오러 마스터 중급의 실력자다.
“엘노아?! 네가 돌아올 줄이야. 마을이 위험하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모양이군. 그런데 복장이 그게 뭐지? 꼭 하녀의 옷 같군. 뒤에 있는 인간들은 또 누구고?”
제그너는 엘노아의 귀향에도 기뻐하지 않았다.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우리를 노려본다. 나는 앞으로 나섰다. 그의 시선이 내게 집중된다. 오러 마스터의 기세에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본능적으로 위축되는군.’
미세한 떨림은 내가 인식하자마자 사라졌다.
내 뒤에는 엘레나가 있다. 전투가 벌어져도 문제없다.
“나는 유진 프루커스. 엘노아의 주인이다.”
“…엘노아의 주인? 네놈, 엘노아를 노예로 부리는 거냐!”
제그너가 고함치며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주위에 있던 엘프들도 일제히 검을 뽑는다.
이건 어디까지나 경계일 뿐이다. 제그너는 검을 뽑았으나 함부로 휘두르지 않았다. 엘노아를 단순히 노예라고 치부하기에는 분위기가 이상했기 때문이겠지.
“나는 라펠리 왕국의 유진 프루커스 남작이다. 엘노아는 내 아래에서 일하는 메이드고, 그녀의 부탁을 받아 너희를 돕기 위해 찾아왔다.”
“…라펠리 왕국의 귀족이 왜 엘노아를 돕는 거지? 무슨 꿍꿍이냐.”
“엘노아는 내가 아끼는 메이드다. 그녀가 간절히 부탁하니 들어줬을 뿐이다.”
엘노아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엘노아는 갑작스러운 스킨십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제그너 씨! 주인님의 말이 맞아요! 제가 주인님께 도와달라고 부탁했어요! 주인님이 오셨으니 방법이 있어요! 장로님을 만나게 해주세요!”
“……내가 판단을 내릴만한 일은 아니군. 따라와라, 장로님께 안내해주지.”
제그너와 엘프들이 검을 거뒀다. 그렇다고 경계가 사라진 게 아니다. 두 눈을 번쩍 뜨며 시종일관 우리를 경계한다.
“경고해두지. 수상한 짓은 하지 마라. 엘노아, 너도 마찬가지다.”
“…네. 제그너 씨.”
엘노아는 제그너를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