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2화 〉 1012.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제그너의 뒤를 따라 마을의 중심으로 향했다.
엘프 마을이라고 하면 막연히 나무로 된 집이 모여 있는 신비로운 마을을 상상하기 마련인데, 실제로는 그런 거 없었다. 주택 양식은 인간의 것과 비슷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집집마다 근처에 커다란 나무가 있다는 것이다. 아마 하늘에서 보자면 마을이 아니라 그저 숲으로 보일 것이다.
거리는 조용했다. 그 흔한 어린아이조차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엘프가 없는 건 아니다. 주위의 주택에서 시선이 느껴진다. 아마 역병 때문에 집에 콕 박혀 있는 것이리라.
‘의외로 분위기가 나쁘지 않은데?’
비트라세의 군대가 진격 중이고, 폴랭프의 숲에는 역병까지 창궐했다. 그런데도 패닉에 빠지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하고 있다.
제그너는 어느 주택 앞에서 멈춰 섰다. 평범한 주택이었다. 근처에 있는 다른 건물들보다 작다.
“장로님께 먼저 상황을 보고하겠다. 너희는 여기서 기다려라. 엘노아. 너는 나와 함께 장로님을 뵈러 간다.”
“그게….”
엘노아가 나를 바라봤다. 나는 허락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 장면을 본 제그너가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엘노아. 마을을 나간지 고작 몇 년 만에 엘프로서의 긍지를 잃은 것이냐?”
“제그너 씨. 엘프니 인간이니 상관없어요. 전 지금 제 삶에 만족하고 있어요.”
“…마을로 돌아올 생각은 없나?”
“전 마을을 돕기 위해 찾아왔을 뿐이에요. 제 삶은 벨리아크가 아닌 주인님의 저택에 있어요.”
“변했구나. 고작 몇 년 만에 많이 변했어.”
“제그너 씨는 전혀 변하지 않은 것 같네요.”
그 둘이 장로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정문에서 그들이 나타났다. 그들의 중심에는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노파가 있었다.
늙은 엘프였다. 귀는 뾰족하고 등은 굽었으며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하다. 머리카락은 생기 없는 백발이었다.
‘…성지곤이 옆에 있었다면 예쁘다고 호들갑을 떨었겠지.’
이 세계의 엘프는 늙는다. 수명이 인간보다 4배 많은 200년이긴 하나, 결국은 죽는다. 유년기, 소년기는 인간과 비슷하고 청년기가 무척 길다. 그리고 노년기는 인간과 비슷하다. 여러모로 축복받은 종족이 엘프였다.
“벨리아크 마을에 온 것을 환영하네, 라펠리 왕국의 이방인들이여. 우리는 자네들을 손님으로 맞이하기로 했네. 나는 벨리아크 마을의 장로인 베리카 무네스라고 하네.”
겉모습만 보자면 추레한 노파였으나, 두 눈에는 현기가 가득하다.
베리카 무네스.
그녀는 아크메이지 상급의 대마법사이자, 최상급 정령과 계약을 맺은 대정령사.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펠리 왕국의 유진 프루커스 남작입니다.”
“라펠리 왕국의 젊은 영웅을 보게 되어 영광이로군.”
“저를 아십니까?”
“숲속에 있다고 해서 눈과 귀가 닫혀 있는 건 아니라네. 헌데 자네는 북쪽에 있어야 하지 않나?”
북쪽에 내 군대가 있다. 그리고 나는 공간 이동 주문서를 사용해 북쪽에 몇 번 모습을 드러냈었다. 명성과 공로를 얻는 데 필요한 일이었다.
“죄송합니다만, 북쪽과 관련된 것들은 모두 기밀입니다. 말씀해드릴 수 없습니다.”
“전쟁 중이니 당연하겠지. 내가 실례를 저질렀구먼. …음. 우리를 돕기 위해 찾아온 손님을 밖에만 세워둘 수는 없지. 안으로 들어오게. 차를 대접해주겠네.”
베리카의 집으로 들어갔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약재의 냄새가 났다. 우리는 의자에 앉아서 그녀에게서 차를 대접받았다.
“엘노아에게서 들었네. 우리를 안전한 곳으로 보내주겠다지?”
“예. 그곳에는 비트라세 군대의 위협은 없을 겁니다.”
“이동시킬 방법은 있고?”
“있습니다. 몇 시간이면 끝납니다. 벨리아크 마을의 엘프들이 거처할 곳은 라펠리 왕국의 도시입니다만, 이곳에서 지냈던 만큼 안전하게 지낼 수 있을 것입니다. 제 이름을 걸고 약속드립니다.”
“폴랭프의 숲이 불타는 이상 어딜 가나 똑같다고 보네. 나는 자네가 아무 호의 없이 우리를 도와준다고 생각하지 않네. 대가 없는 호의는 무섭지.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뭔가?”
대화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베리카는 벨리아크 마을을 버리고 떠날 용의가 있다는 것이다.
“조건은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제 영지민이 되는 것.”
“…영지민으로서 의무를 다하라는 말이군.”
“물론 여러분들에게 아무 기반이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특권을 드리겠습니다. 무상으로 주택을 지원해드리고 앞으로 1년간 세금을 받지 않겠습니다.”
“……우리 마을에는 뛰어난 정령사들이 많네. 그들 모두를 차별 없이 정당하게 대우해줄 수 있겠는가?”
“저는 능력에 따라 대우합니다.”
나는 그녀의 옆으로 시선을 살짝 돌렸다. 제그너가 앉아 있는 곳이다. 제그너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서 좋지 못했다.
“그런데 다른 이들과 상의 없이 홀로 결정하셔도 됩니까?”
“다른 이들은 내가 잘 설득하겠네. 솔직히 말해서 벨리아크 마을은 이미 가망이 없네. 지난 50년…. 내가 장로로 지내는 동안 멈춰 있었네. 발전이 없었지. 이대로 조금 더 많은 시간이 흐르면… 벨리아크는 세상에서 도태되겠지. 그건 우리가 바라는 일이 아닐세. 우리도 밖으로 나갈 때가 온 거야.”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제그너가 입을 열었다.
“…장로님. 인간은 추악합니다. 우리 엘프들이 지옥을 겪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제그너. 요 몇 년 동안 마을을 떠난 엘프들의 숫자가 천 명이 넘네. 마을의 인구수는 늘어나기는커녕 줄어들고 있지. 마을은 쇠퇴하고 있다네.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없다네. 밖에는 비트라세의 군대가 진격해오고, 안으로는 역병이 퍼지고 있네. 제그너, 바깥세상을 너무 두려워하지 말게.”
“전 여전히 장로님의 의견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대로 있으면 죽는다는 건 동의합니다. 일단 장로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고맙네.”
일이 잘 풀리고 있다.
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본색을 드러내는 건 벨리아크의 엘프들을 모두 내 영지로 데려간 뒤에 해도 늦지 않다.
‘함정을 만들자. 멜리사에게 미리 알려서 함정을 만들게 명령해야겠어. 그리고 엘프 중에서 쓸만한 놈들을 선별하고… 나머지는 노예로 부리자.’
내게 봉사하는 미녀 엘프 메이드들…. 상상만으로도 뿌듯해진다.
“이야기는 좋게 흘러가는군. 허나 중대한 문제가 있다. 가장 해결이 시급한 문제지. 역병이지. 장로, 현재 마을 상태는 어떻지?”
엘레나가 팔짱을 끼며 날카롭게 물었다.
“…1,725명이 역병에 시름 하고 있네. 마을 안쪽에 따로 격리된 상태지. 사망자는… 오늘까지 합해 총 373명.”
“생각보다 더 심각하군. 유진, 철저한 대책이 필요하다. 함부로 움직였다간 대륙 전체에 역병의 바람이 불 거다. 역병은 여기서 끝내야 한다.”
엘레나의 말이 맞았다. 함부로 데려갔다가 역병이 퍼지기라도 하면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이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었다.
내가 생각한 방법은 아무도 없는 섬에 엘프들을 격리하는 것이다. 역병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엘프들의 불만이 있겠지만, 군대에 당해 죽는 것보다는 낫다.
“한 달. 우리는 한 달까지 비트라세 군대를 버틸 수 있네. 군대가 더 가까이 오면 준비해두었던 함정들을 발동하겠네. 마을의 역병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려주게.”
엘레나는 대답하지 않고 나를 바라봤다. 내가 가진 결정권에 침범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마음 같아서는 섬에 처박아 버리고 싶다. 그러나 여기선 배려를 보일 필요가 있다. 엘프들은 아직 내 손아귀에 완전히 들어온 게 아니니까.
“장로님의 의견에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일이 틀어지게 된다면… 제 계획에 따라주십시오.”
“어떤 계획인가?”
“무인도가 있습니다. 그 섬에서 역병을 바로잡아 주십시오.”
“나쁘지 않은 방법이군. 지금 당장 그 계획에 따르고 싶으나…. 정리해야 할게 있네.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야 하지. 마을 사람들이 쉽게 마음을 열도록 자네들도 도와주지 않겠나? 어려운 시기에 도와주는 이들이 진정한 친구라는 말이 있다네.”
“돕겠습니다.”
나중에 땅에 처박을 호감도라도 일단 쌓아두면 도움이 되겠지.
우리는 세부적인 이야기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 그런데 자네는 평범한 신분으로 아닌 거로 보이네만…. 정체가 뭔가?”
베리카가 흥미를 보인 상대는 엘레나였다.
엘레나는 씨익 웃으며 내 왼팔에 팔짱을 꼈다.
베리카가 납득하려는 찰나, 유리아가 말했다.
“저택에 잠시 머물고 계신 손님이에요.”
“…지금은 손님이다만, 나중에도 그러라는 법은 없다. 어쩌면 내가 네 두 번째 주인이 될지도 모르지.”
“과연 엘레나 님. 환술의 전문가 다운 농담 실력이시네요.”
“농담이 아니다만?”
베라카는 엘레나와 유리아를 번갈아 보다가 허허 웃었다.
“청춘이구먼.”
나도 생각했다.
‘조만간 3P를 해서 누가 갑인지 알려줘야겠어.’
???
우리는 역병의 정보를 베리카에게 물었다. 역병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게 몇 가지 있다.
역병이 일어난 시기는 비트라세 군대가 폴랭프의 숲에 당도하기 사흘 전이었다. 그 시작은 역병에 걸린 멧돼지를 잡아먹은 것으로 시작된다. 처음은 8명에서 시작되어 점점 퍼져나갔다. 역병이란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100명 이상이 감염되었다. 조치를 취했을 때는 늦었다.
감염자들을 격리하고 약초를 제작하긴 했으나 역병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이미 공기 중에 역병이 퍼진 걸로 판단된다.
우리는 랜들 마을에 대해서도 베리카에게 물었다. 베리카는 도리어 의문 어린 눈으로 우리에게 물었다. 랜들 마을에 무슨 일이 생겼냐고. 랜들 마을의 주민들은 벨리아크 마을에 오지 않았다.
“시도해볼 것이 있다. 목숨이 위급한 환자를 만나고 싶다.”
“…생체 실험 같은 건 허락할 수 없네.”
“마법이다. 역병을 없앨 수 있는 마법이지. 물론 억지로 할 생각은 없다. 환자에게 제안해볼 생각이다.”
역병으로 인해 당장 오늘, 내일 하는 환자는 거부하지 않았다. 당장 끊어질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게 사람 심리였다. 엘프라고 해서 살고 싶은 욕망은 똑같이 존재한다.
“콜록…. 부탁… 드립니다…. 살려주십시오…! 죽어도 원망하지 않을 테니…! 제게 그 마법을… 콜록!”
초췌한 안색의 환자가 피를 토하며 말했다.
엘레나의 손바닥에서 파란색 나비가 나타났다. 나비는 살랑살랑 날아서 환자의 머리에 안착했다. 나비가 사라지고 환자의 안색이 확 좋아졌다. 피부에 올랐던 검은색 반점이 사라졌다. 역병이 치료된 것이다.
“와아아아아아!”
우리를 감시하기 위해 왔던 엘프들이 환호성이 내질렀다. 역병이 사라졌다. 이제 역병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등의 말을 지껄이며 앞다투어 엘레나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엘레나는 벨리아크의 구세주가 되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은인! 이름을 말씀해주십시오! 평생 기억하겠습니다!”
“엘레나 발데르트다. 나는 유진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네가 정녕 은을 느낀다면… 내가 아니라 유진에게 느껴야 할 것이다.”
“감사합니다, 유진 님!”
엘레나가 내게 공을 넘겨뒀다. 나는 씨익 웃었다.
기뻐하는 엘프 중에 유일하게 경악하는 엘프가 있었다. 베리카였다.
“그 마법은…. 으음… 혹시 드래곤이셨습니까?”
“인간이다.”
엘레나가 딱 잘라 말했으나, 베리카는 믿지 않는지 의심스러운 눈으로 엘레나를 바라봤다.
‘엘레나가 환술로 역병을 치료했군. 정확하게는 치료가 아니라 역병에 걸린 사실을 환술로 치부해 없앴어.’
엘레나의 환접술(幻蝶術). 환상을 현실로 만들고, 현실을 환상으로 만들어버리는 무시무시한 환술.
“엘레나 하루에 몇 명까지 가능하겠어?”
“…30명. 완전 회복을 사용하면 그 두 배가 가능하겠지.”
“완전 회복은 쓰지 마. 만일을 위해서야.”
“그러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다.”
“석연치 않은 표정인데. 뭔가 알아낸 게 있어?”
“……평범한 역병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유리아. 정화의 눈을 곳곳에 설치해줄 수 있나? 병균으로부터 엘프들을 완벽히 격리해야 한다. 그래야 역병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설치라면… 마석이 대량으로 필요해요.”
“내가 지원해주겠네. 우리 마을을 위해서인데 그것도 못 하겠나. 필요한 게 있으면 기탄 없이 말하게.”
베리카의 지원 아래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환자는 점차 줄어들었다. 그에 비례하듯 우리의 인기는 올라갔다.
그리고 나흘 뒤. 진정되어가던 역병이 다시 활개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