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5화 〉 1015.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끼이이이이이이이.
하늘에서 귀가 찢어질 듯한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렸다. 바람의 비명소리였다.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을 보기 위해 천안(天眼)을 발동했다.
세기도 힘들 정도로 무수히 많은 바람이 보인다. 바람은 복잡한 기계 부품처럼 맞물려 부서지고 만들어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하늘은 지옥이었다. 저기에 들어가는 순간 사람은 온전한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리라.
놀라운 점은 저 바람이 지상으로 내려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늘에 머물러서 일종의 결계를 형성하고 있다. 저 바람이 내려오는 순간 마을에는 말하기도 힘든 끔찍한 광경이 펼쳐지리라.
“깔깔. 과연 아크메이지야. 대단한걸? 근데 언제까지 이걸 유지할 수 있으려나?”
벨라는 더 높은 곳에서 부유하며 말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녀는 느긋했다. 그녀는 바람을 향해 검은 역병을 흩뿌렸다. 투명한 바람과 검은 역병이 섞인다. 덕분에 바람이 육안으로도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분명히 말했노라. 네년의 오만함이 널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이라고!”
베리카의 몸이 분노로 바들바들 떨린다. 벨리아크 마을의 엘프들은 역병에 시달리고 있으며, 수백 명이 죽어 나갔다. 그 원흉이 앞에 있는데 화가 나지 않을 리가 없다.
벨라를 향해 바람이 솟구친다. 바람으로 된 거인이었다. 순간적으로 정령인가 싶었으나, 저건 마법으로 된 바람이었다. 바람의 거인은 다섯으로 증식하더니 믹서기의 칼날처럼 회전하는 손을 벨라에게 뻗는다. 저 손에 닿는 순간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하다.
벨라가 왼팔을 휘둘렀다. 검은 역병의 바람이 불었다. 역병의 바람은 놀랍게도 바람의 거인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만으로 바람의 거인이 무너진다.
‘…마나. 바람의 거인의 형태를 유지하는 마나가 녹아내렸다.’
마나를 녹이는 역병.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벨라가 계약한 악마가 최상급 악마라는 걸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게 최상급 악마의 권능이니까.
“할머니. 괜한 고집 부리지 마. 내가 원하는 건 딱 하나야. 할머니가 가지고 있는 그 물건. 그것만 넘겨주면 역병은 거둬갈게.”
벨라가 무엇을 노리는지 알아차렸다. 베리카가 가지고 있는 고대 유물을 노리는 것이다.
“악마에 홀린 년의 말따윈 믿지 않는다!”
베리카가 지팡이를 찍었다. 허공에 있던 모든 바람이 벨라 하나를 노리며 움직였다. 벨라는 위로 솟구쳤다. 그녀의 치맛자락이 흔들리면서 검은 가루가 아래로 솔솔 떨어진다. 역병이다. 역병에 닿은 바람은 기세를 잃고 사라졌다.
‘젠장. 치마 안쪽이 절묘하게 안 보여. 투시를 사용할까?’
벨라는 내려오지 않았다. 그저 높은 곳에서 역병만을 흩뿌렸다. 여유로운 태도와 달리 베리카를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할머니. 이게 마지막 경고야. 그걸 내게 넘겨. 할머니도 엘프들이 역병으로 죽는 걸 바라지 않잖아. 어린 엘프들이 죽으면 누굴 원망할까?”
베리카의 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역병은 엘프의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어린이와 늙은이가 역병에 가장 취약했다.
“…네년을 원망하겠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할머니는 구할 기회가 있는데도 구하지 않았어. 원망받기에 충분하잖아?”
“…….”
지팡이를 쥔 베리카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베리카는 벨라를 한참 노려보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닥에 쓰러진 엘프들. 그들 모두 감염되어 정신을 잃었다.
“…좋다. 네년이 원하는 걸 내주마. 단, 지금 당장 역병을 거둬라.”
“물건이 먼저야. 할머니가 물건을 주면 역병을 거둬갈게.”
“내가 네년을 어떻게 믿으란 말이냐.”
“나는 할머니를 어떻게 믿고?”
그들의 대화는 평행선을 그리고 있었다.
“싫다면 좋아. 어차피 시간은 내 편이니까.”
벨라가 깔깔깔 웃는다. 그녀는 이곳에서 사라지려는 분위기를 풍겼다. 그녀의 시선이 베리카에서 우리쪽으로 향한다. 정확하게는 유리아에게 향했다.
“정말 오랜만이야. 유리아. 그때보다 더 예뻐졌네. 난 네가 내 메이드가 되어줬으면 좋겠는데… 생각없니?”
“…제 주인님은 오직 한 분뿐입니다.”
유리아가 대답했다. 기억이 없는 유리아는 벨라가 누군지 모른다.
‘내 유리아를 노리다니… 탐해선 안 되는 걸 탐하는군.’
벨라는 나를 무시하고 있다. 벨라에게 있어 내 존재는 딱 거기까지는 거겠지.
나는 엘레나에게 눈짓했다.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인다.
벨라는 엘레나에 대해 모른다. 만약 내가 벨라고, 엘레나의 능력을 알고 있었다면 엘레나를 보자마자 도망쳤을 것이다.
딱.
엘레나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녀의 환접술이 발동되었다.
하늘 높이 날고 있던 벨라는 바로 내 앞에 나타났다.
“어?”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그녀가 멍청한 소리를 냈다.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오랜만이다, 벨라 휴트리스. 그때 저택으로 초대한다고 했었는데… 일이 많아서 여유가 나지 않더군.”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공간 계열 마법이 발동되는 건 느끼지 못했는데….”
“공간 계열 마법이 아니니까 그렇지.”
엘레나의 환접술은 평범한 마법과는 궤를 달리한다. 그건 이미 마법의 영역을 초월했다고 보는 게 맞다.
그녀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아악!”
벨라가 비명을 터트렸다. 악마와 계약했어도 그 신체 능력은 평범한 일반인에 가까웠다.
“아파! 이거 놔!”
벨라가 능력을 사용했다. 어깨를 잡은 손에 시커먼 기운이 스며든다. 역병이다. 피부는 금세 시커멓게 변하고 손이 압축 당하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천심(天心).’
천심을 발동한다. 내 손을 시작으로 몸 전체로 퍼지려던 역병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 어떻게…?”
벨라가 당황했다. 그녀는 나를 향해 계속해서 역병을 보냈으나, 나는 입을 벌려 보란 듯이 역병을 삼키고도 멀쩡했다. 천심이 지속되는 한 역병은 내게 소용없다.
“다 방법이 있지.”
문제는 이 다음이다. 그녀를 속박할 방법을 떠올린다. 단순히 밧줄과 쇠사슬로 몸을 구속하기에는 불안하다. 그녀는 악마 계약자였으니까.
고민이 깊어질 때 베리카가 저 멀리서 헐레벌떡 달려오더니 마법을 사용했다. 바닥에 마법진이 그려지고 빛으로 된 끈이 나타나 벨라를 구속했다. 온몸이 구속된 벨라가 눈살을 찌푸리며 베리카를 노려봤다.
“…할머니. 운이 좋네?”
“그래. 네년은 운이 나쁘구나. 좋게 말할 때 마을 내에 떠돌고 있는 역병을 없애라!”
“날 고문이라도 하려고? 할 테면 해봐.”
벨라가 눈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몸에서 검은 역병이 조금씩 새어 나온다. 베리카의 마법으로도 완벽히 억제하지 못한다.
“너처럼 사악한 여자는 내 인생 처음으로 보는구나.”
“흐응. 그래서?”
“언제까지 그 여유를 부릴 수 있는지 보겠다.”
베리카의 두 눈이 활활 타올랐다. 분노. 그리고 증오심이다. 현명하고 인자한 아크 메이지라고 해서 감정이 없는 건 아니다. 특히나 벨라는 역병의 원인이다. 고문을 하겠지.
‘그건 안 되지.’
벨라는 썅년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외모는 썅년이 아니었다. 뛰어난 미모와 H컵의 커다란 폭유. 내 좆집이 될 조건은 충족했다.
“장로님. 벨라 휴트리스는 저희가 처리하고 싶습니다.”
베리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 마녀를 알고 있는가?”
“휴트리스 가문은 라펠리 왕국의 귀족입니다. 몇 년 전에 그녀를 우연히 만난 적도 있습니다. 아, 착각하지 마십시오. 풀어줄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저희가 나서서 벨라가 역병을 거둬가도록 하겠습니다.”
“이 마녀는 우리 마을의 원수네! 지금 당장 사람들을 모아, 그들의 눈앞에서 찢어 죽여야 마땅하네!”
“압니다. 저도 이 여자를 옹호하거나, 빼낼 생각은 없습니다. 쉽게 죽여서도 안 됩니다. 죽음은 너무 편하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마을에 돌고 있는 역병을 해결해야 하지 않습니까?”
베리카는 감정을 누그러뜨렸다. 분노하는 순간에도 그녀의 이성은 차갑게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렇긴 하지. 자네들에게 방법이 있나?”
“뾰족한 방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벨라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아아악…!”
벨라가 비명을 지른다.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눈으로는 날 죽일 듯이 노려본다.
“전 역병이 통하지 않는 방법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역병이 제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역시 자네도 범상치 않군.”
감탄하던 베리카는 곧 눈살을 찌푸리고 지팡이를 바닥에 찍었다. 벨라를 구속하던 마법이 역병에 녹아 점점 사라지려 했기 때문에 새로운 마법으로 벨라를 구속한 것이다.
“지독하구나, 지독해….”
베리카가 혀를 쯧쯧 찼다.
나는 벨라의 어깨에 더 힘을 주었다. 벨라의 상체가 수그러진다.
“그만…! 하지 마…! 아아악!”
벨라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고통에 대한 내성이 없었다. 악마의 힘을 제외하면 그저 잔인한 성격의 여자일 뿐이었다. 그녀의 기세가 한풀 꺾인 걸 확인하고 뒤로 물러났다. 천심의 효과는 1분. 이제 곧 끝난다.
“…자네에게 맡기도록 하겠네. 단, 마을에 퍼진 역병이 사라질 때까지 저 여자를 풀어줘서는 안 되네. 감옥이 있는데 쓰겠나?”
“이 여자는 24시간 항상 감시할 생각입니다. 저희가 머무는 숙소를 조금 개조할 생각인데 괜찮겠습니까?”
“마음대로 하게. 어차피 역병을 제압하면 버려질 곳이니.”
나는 베리카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벨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데리고 갈까. 엘레나의 힘이면 간단하겠지만, 아까부터 엘레나의 안색이 좋지 않다.
엘레나의 환접술은 기본적으로 생명력을 소모한다. 그리고 복잡한 일일수록 생명력의 소모가 많아지고, 상대의 격이 높을수록 환접술로 할 수 있는 일이 한정된다.
‘벨라와 계약한 역병의 악마 때문인가. 생명력을 많이 소모한 모양이네.’
엘레나의 힘을 아끼기로 했다. 다른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니까.
“유리아. 네 마법으로 옮길 수 있을까?”
“네. 해볼게요.”
그림자가 솟구치며 사람의 형상을 취한다. 그림자 인간 4명은 벨라의 몸을 잡고 들어 올렸다. 그렇게 벨라를 끌고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의 개조는 엘레나와 유리아에게 맡겼다.
그녀들은 순식간에 지하 공간을 만들었다. 엘레나는 역병에도 쉽게 부식하거나, 녹지 않는 감옥과 결계를 만들고, 유리아는 룬 마법을 이용해 감옥 자체를 강화했다. 완벽하진 않더라도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감옥이 완성되었다.
나는 감옥을 지켜보고 있는 엘프를 바라봤다. 감옥 안에 앉아 있는 벨라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다. 베리카가 감시 차원에서 보낸 엘프였다.
‘젠장. 또 감시자가 붙었잖아.’
그나마 다행인 점은 여자 엘프라는 것이다.
‘3P 계획은 또 미뤄야겠군.’
유리아는 신경 쓰지 않겠지만, 엘레나는 다른 이의 시선을 신경 쓰는 편이었다.
“고문…. 심문은 하지 않는 겁니까?”
여자 엘프가 물었다. 예쁜 얼굴에 비해 목소리와 말투가 살벌했다.
“그러고 싶은데 지금으로선 가둬두는 게 고작입니다. 고문을 하려다가 되려 역병에 당할 수 있습니다. 저 마녀의 피부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기운이 보이시죠? 저게 역병입니다.”
“…차라리 죽여버리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요?”
“죽이는 건 쉽습니다만, 마을에 퍼진 역병이 해결되리라고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저 마녀를 죽였는데도 역병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대량의 사망자가 발생할 겁니다. 엘레나의 마법으로 감염자를 구하는 일에 한계가 있으니까요.”
“하아…. 골치 아프군요.”
“그렇지요. 아, 그리고 지금 보시는 광경은 모두 필요한 일입니다.”
나는 유리아를 시켜 벨라의 옷을 벗겼다. 유리아는 그림자 인간으로 벨라의 옷을 벗겼다.
“꺄아아아악!”
벨라가 비명을 질렀다. 두려움보다는 짜증이 담겨 있었다.
여자 엘프의 안색을 살폈다. 혹시 지랄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변명을 미리 준비해뒀다. 그러나 내 우려와 달리 여자 엘프의 두 눈은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고문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