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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799/2,000)

〈 1019화 〉 1019.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유리아가 고대 유물의 시련을 통과했다. 기억을 되찾고, 이전보다 훨씬 강해졌다. 내 수준으로는 그녀가 어디까지 강해졌는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힘을 되찾자마자 압도적인 광경을 보여주었다.

수백에 달하는 역병 시체는 그림자에 삼켜졌다가 다시 뱉어졌다. 멀쩡한 놈들은 한 마리도 없었다. 놈들은 다시 움직이지 못했다.

베인트와 베리카, 제그너는 내 명령에 따라 처리되었다. 놈들은 유리아의 움직임을 따라잡지 못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결판이 났다.

제그너는 그 목이 잘려 날라 갔고, 베인트와 베리카는 사지가 잘려 땅바닥에 엎어졌다. 오러 마스터인 제그너는 비록 의식 없이 조종당하는 상태라고는 하나, 유리아의 움직임에 어느 정도 반응은 했었다. 문제는 반응해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른 두 명은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이런… 이런 말도 안 되는…!”

베리카가 얼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크으윽… 누이…!”

베인트는 고통에 몸을 꿈틀거리며 벨라를 바라봤다. 벨라는 나체인 상태로 밧줄에 구속되어 있었다. 그녀는 동생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분노가 아니다. 짜증이었다.

“베인트! 실패했구나?!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어! 날 구하지도 못하고, 임무도 수행 못 해. 정말 무능하구나, 베인트!”

“…죄송합니다….”

베인트가 고개를 처박았다. 평소 둘이 어떤 관계일지 대충 짐작 갔다. 그리고 베인트. 나는 저놈이 고개를 숙이기 전에 벨라의 나체를 조용히 훑어 보는 걸 놓치지 않았다. 이놈은 아마도 제 누이에게 품어선 안 되는 감정을 품었다.

나는 벨라에게 다가가 그녀의 등짝에 손바닥을 휘둘렀다.

짜아아악!

하얀 등에 내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으윽….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야?”

“네 주제를 모르는 것 같아서 말이야.”

벨라의 표정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아직이야. 우리를 잡았다고 해서 일이 끝난 건 아니야. 할망구! 그대로 죽을 거야? 역병은 아직 마을에 남아 있어! 엘프들을 구하고 싶으면 일어나! 이놈들을 죽이거나, 나를 풀어!”

벨라가 베리카를 향해 소리 지른다. 평소와 다르다. 벨라는 고문을 당할 때도 어딘가 여유로운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여유로움은 찾아볼 수도 없다. 그녀는 궁지에 몰린 것이다.

“하아.”

베리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의 나무 지팡이가 허공에 두둥실 떠오르더니 4줄기로 분해되어 베리카의 팔과 다리가 되었다. 베리카는 땀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망구. 포기해. 이미 끝났어. 그러게 줄을 잘 탔어야지.”

내가 베리카를 비웃으며 말했다. 베리카를 죽이지 않은 이유는 다른 엘프들 앞에서 처형하기 위해서다. 벨리아크 마을의 장로가 죽는 것을 직접 본 엘프들은 절망하겠지. 사기와 멘탈을 꺾어 놓으면 좀 더 고분고분하게 부려 먹을 수 있다.

“자네 말대로 이미 끝났네. 그렇지만 말일세…. 끝났다고 해서 전부 포기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이 걸려 있네.”

베리카가 녹색 구슬을 꺼내더니 자신의 가슴팍에 푹 찔러 넣었다. 피가 튀고 가슴 안으로 땅의 보옥이 파고들었다. 베리카의 늙은 몸으로부터 어마어마한 힘의 파동이 느껴졌다.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바람의 최상급 정령이 그녀의 등 뒤에 나타나더니 베리카의 몸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융합하고 있다. 베리카의 몸이 부풀어 오르며 3M에 이르는 거인으로 변한다.

“이 미친년이!”

나는 경악하며 베리카를 노려봤다. 베리카는 자신의 목숨을 완벽히 포기했다. 지금 그녀의 목적은 우리를 죽이고 벨라를 구출하는 것.

“그래. 그렇게라도 해야지.”

벨라가 만족스럽게 웃는다.

콰콰콰콰쾅!

베리카에게 벼락을 떨어뜨렸다. 3개의 벼락이 연속으로 내려꽂혔다. 모두 명중했다. 허나 베리카는 멀쩡했다. 상처하나 입지 않았다. 몸을 움찔 떨지도 않았다.

‘젠장….’

이 감각.

예전에 느껴본 적 있었다. 드래곤을 앞에 두고 압도되는 감각이다.

‘방법은 있어. 찾아야 해. 정면으로 싸우면 이길 것 같지 않고…. 엘레나가 한계 돌파를 사용해야 하나?’

방법을 궁리하고 있을 때였다. 태연하게 내 앞으로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유리아였다.

“주인님.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할 수 있겠어?”

유리아의 실력을 과소평가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느껴지는 기세나 분위기가 유리아보다 베리카 쪽이 더 압도적이었다.

유리아는 내 걱정 섞인 물음에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림자 속에서 단검이 튀어나와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검은색의 오러 블레이드가 단검의 검날을 감싼다. 그리고 유리아가 사라졌다. 나는 당황하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유리아는 베리카의 뒤편에 나타나 있었다.

베리카는 나보다 더 늦게. 아니, 내 반응을 보고 나서야 유리아의 위치를 알아차린 모양이다. 커다란 몸의 베리카가 기겁하며 뒤로 몸을 돌렸다.

서걱.

유리아가 가볍게 단검을 휘둘렀다. 검날은 베리카의 몸에 닿지도 않았다. 허나 베리카의 오른팔이 잘려나갔다.

“네, 네가 정녕 인간이느냐!”

베리카가 경악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약간의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모이고 회전하여 토네이도가 되어 유리아를 노렸다. 유리아의 신형이 미끄러지듯이 뒤로 밀려난다. 토네이도는 계속해서 유리아를 노렸다. 도중에 부딪힌 나무가 손쉽게 갈려 나가고, 커다란 바위가 손쉽게 부서져 모래가 되어 흩날렸다. 유리아의 앞에 그림자가 솟구쳤다. 그림자는 토네이도에 섞여 들어가더니 바람을 하나, 하나 잡아먹었다. 토네이도는 그림자 토네이도가 되어 역으로 베리카에게 다가갔다.

베리카가 입을 한껏 벌리더니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숨결은 강력한 바람이 되어 그림자 토네이도를 단번에 없애버렸다. 그리고 그녀가 하늘을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

‘…이런 미친!’

나는 깜짝 놀랐다. 밤하늘에 떠있는 구름이 회전하고 있었다. 마치 이곳이 태풍의 중심지가 된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살벌하다.

‘저 정도면 숲 전체를 날려버리고도 남을 정도인데…. 베리카가 마을의 엘프들 따윈 신경도 쓰지 않는다고?’

베리카는 유리아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는 이성의 편린도 느껴지지 않는다. 고대 유물인 땅의 보옥과 바람의 최상급 정령과 융합되면서 자아까지 잃어버린 듯한 모습이다.

“…끝났군. 보통의 메이드가 아닌 줄은 알았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군. 만약, 적이 된다고 생각하면… 오싹해지는구나. 왠지 환술도 통할 것 같지 않고.”

엘레나의 감탄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녀의 말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베리카의 목에 실선이 생기더니 그대로 미끄러지며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이어 베리카의 거대한 몸이 부서지고 땅의 보옥이 데구르르 굴러 바닥에 떨어졌다.

“…왜 갑자기 죽은 거야? 유리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잖아.”

“했다. 네가 보지 못했을 뿐이다. 그녀의 그림자가 소리 없이 움직여 저 괴물의 목을 베고, 몸을 무너뜨렸다. 아마 시체를 열어보면 내부도 갈기갈기 찢어져 있겠지. 그림자가 곧 유리아의 무기다.”

베리카는 확실하게 죽었다.

이것으로 끝나면 좋겠지만, 아직 남은 일이 있었다. 벨라와 베인트.

벨라는 얼굴을 일그러뜨렸고, 베인트는 고개를 푹 숙였다.

“벨라. 역병을 퍼뜨린 너는 다시 역병을 거둘 수 있겠지. 이미 넌 끝났어. 역병을 거둬.”

“…아직이야. 베인트! 비트라세 군대는 진격하고 있겠지?!”

베인트가 고개를 들었다. 피곤함이 가득한 눈동자다.

“누이…. 비트라세 군대는 진격하고 있습니다만…. 군대 따위로 저 여자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습니다.”

베인트는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유리아를 바라봤다. 유리아는 그의 반응 따윈 무시하고 바닥에 떨어진 땅의 보옥을 손에 쥐고 내게 다가왔다.

“주인님. 고대 유물입니다. 표면에 금이 가긴 했으나… 사용하는 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알겠어?”

“네. 대충 짐작갑니다. 이렇게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유리아가 땅의 보옥을 쥐고 마나를 움직였다. 그녀의 마나가 땅의 보옥에 빨려 들어간다. 직후, 그녀의 옆에 작은 나무가 피어올랐다. 나무는 빠르게 성장하여 쭉쭉 커졌다. 성목이 되기까지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나무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렸다.

“이건 이 고대 유물의 능력 중 하나입니다. 지형을 바꿀 수도 있긴 하나, 저택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에 사용하는 편이 더 효율적일 듯합니다.”

나는 땅의 보옥을 쳐다봤다. 만져도 보았다. 뭔가 특별한 느낌은 없었다.

“유리아. 네가 알아서 사용해.”

“네. 주인님.”

나는 벨라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팔과 다리가 묶여 있는 벨라의 머리채를 잡아 들어 올렸다. 나와 그녀의 두 눈이 마주쳤다.

“벨라. 끝났어. 좋게좋게 가자. 너도 아픈 꼴은 보고 싶지 않잖아.”

“……네가 원하는 게 대충 뭔지 알아. 벨리아크 마을의 엘프들을 원하는 거지? 그 엘프들은 역병에 걸려 신음하다 죽을 거야. 날 풀어줘. 그럼 엘프들도 역병에 죽을 일은 없을 거야.”

“아직 정신 못 차렸나?”

짜악!

벨라의 싸대기를 때렸다. 벨라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다시 돌리고 독기 어린 눈으로 날 노려본다. 그녀의 입술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넌 나랑 협상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야. 시키는 대로 해. 역병을 없애.”

벨라의 입가가 비죽 올라갔다.

“…싫어.”

그리고 입과 두 눈을 꾹 감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확 범해버릴까. 진심으로 고민된다.

“데미테라.”

“…죄송합니다. 유진 님. 생각했던 것보다 이 여자의 정신력이 강합니다. 치욕을 당해도 꺾이지 않습니다. 베리카와 역병을 믿고 저러는 건가 싶은데…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벨라가 끝까지 믿고 있는 것. 그건 베리카도, 베인트도 아니다.

나는 그녀의 젖을 잡았다. 물컹거리는 촉감이 기분 좋다. 가슴을 위로 올리자, 커다란 젖가슴에 그려져 있던 녹색 마법진이 보였다. 악마 계약의 증표다.

벨라가 믿고 있는 건 하나뿐이다. 그녀가 계약한 최상급 악마, 역병의 악마인 헤플이다.

“유리아. 악마와 벨라를 떼어 놓을 방법이 없을까?”

“이미 계약은 끝났어. 나는 그분에게 모든 걸 바치기로 했고, 그분은 내게 힘을 주실 거야.”

벨라가 묻지도 않았는데 말했다.

유리아는 내 옆으로 다가와서 마법진을 빤히 들여다보고 웃었다.

“있습니다. 악마는 교활한 존재입니다. 악마 계약자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일 따윈 하지 않습니다. 쓸모가 없으면 바로 버려버리지요. 악마와의 계약도 결국 악마에게 지나칠 정도로 유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계약을 없애는 방법은 몇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악마가 직접 계약을 포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악마를 죽이는 겁니다.”

유리아는 손을 뻗어 벨라의 몸에 새겨진 마법진을 매만졌다. 파직, 파지직. 손가락이 마법진에 닿는 순간 스파크가 튀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로군요. 현재 그녀에겐 악마가 없습니다. 악마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벨라가 사용하는 역병의 힘은 결국 악마의 권능이지. 악마를 찾아내 죽이면 역병도 사라지겠군.”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악마가 있는 곳은….”

나는 벨라의 젖가슴을 주무르며 시선을 뒤로 돌렸다. 저 멀리 불타는 숲이 보인다. 비트라세의 군대는 여전히 진격하고 있었다.

“저쪽에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악마는 한 마리만이 아닐 겁니다.”

유리아의 시선이 바닥에 엎어진 베인트에게 향했다. 악마 계약자라 그런 것일까. 딱히 지혈을 해주지도 않았는데도 태연하게 살아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상의를 뜯었다. 남자의 상의를 뜯는 건 기분 나쁜 일이었지만, 확인이 필요했다.

베인트의 오른쪽 어깨에는 갈색의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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